〈 278화 〉 27장 - 분열하고, 갈라져라
페르디난트 엘세는 자신의 왕, 율리아의 명령을 아주 착실하게 따랐다.
철저하게 준비하여 공성전을 치르되 과도한 공격을 위해 아군을 몰아넣어 서로에게 치명적인 피해를 주고받는 것은 지양하고 있었다.
기다려라, 어차피 적들은 안에서부터 알아서 무너질 것이다.
내가 뒤로 돌아가 적들을 휘젓는 동안 그대들은 적당한 실전 경험을 병사들에게 주면서도 큰 피해를 입을 수 있는 일은 되도록 피해라.
기회가 있다면 물어뜯어라, 그러나 상처투성이의 영광은 얻으려 들지 마라.
그 부분을 상기하며 페르디난트는 바로 앞에 놓인 요새를 바라보았다.
“부관. 저 요새를 두드린 지 얼마나 되었지?”
“이전 요새를 함락시키고서 오늘로 닷새째입니다.”
“아군 피해는. 혹 감당하지 못 할 정도로 심각한 수준인가?”
“전투가 계속되다 보니 당연히 부상자들이 생겨날 수밖에 없습니다. 또한 공성전이다 보니 퇴각 중에 챙기지 못 하면 결국 구해낼 수가 없으니까요. 그래도 걱정하실 정도는 아닌 것 같습니다. 얼마 전에 동부 측에서 보급과 함께 원병이 도착하지 않았습니까.”
후방을 책임지고 있는 데스테는 율리아의 곁을 처음부터 지키고 있던 충성파의 일원.
능력도 무난하고 제 할 일에 철저하며 무엇보다 전쟁을 잘 아는 마족이기에 보급이 얼마나 중요한지 확실하게 인지하고 있었다.
해서 적절한 시기에 계속해서 보급을 넣어주며 혹 군대의 사기가 떨어지지 않도록 했다.
하지만, 그런 부관의 말에도 페르디난트는 그리 즐거운 표정이 아니었다.
물적 자원이 소모되는 건 그래도 어느 정도 넘어갈 수 있다.
전쟁은 끊임없이 소모하기만 하는 일이고, 군대는 생산적인 부분 없이 소모만 하는 집단.
그런 부분의 소모야 유쾌하지 않아도 신경을 써봤자 좋은 게 하나도 없다.
허나 인적 자원은 물자마냥 속도를 내서 채울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돈으로 대신할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대륙 전쟁이 끝난 지 수십 년도 아니고 이제 겨우 수년이 지났을 뿐이다.
그 때는 서로가 몇 만은 우습게 동원했던 것 같은데, 이제는 정말 싹싹 긁어모아야 겨우 수만이 나올까 말까인 상황이다.
그만큼 서부와 동부의 인적 자원 소모가 너무나도 극심했다.
아마 이대로 간다면 정말 한 세대 전체가 그대로 증발할 수도 있음이었다.
‘전하께서는 대륙을 통일하고 싶다고 하셨다. 허면 그 넓은 땅에 무엇이 필요할까. 당연히 그 땅을 개간하고 경작하며 모든 것을 이룰 자들이 필요하다. 그게 마족이든 인간이든, 요정이든 수인이든 전부 다 필요해. 그 땅을 관리하는 이가 없으면 버려진 땅이 되고, 그리 된다면 대륙을 통일했다고 한들 결국 실질적으로는 반의반도 통치하지 못 하게 된다.’
이런 식이라면 결국 이쪽에서 취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은 둘이다.
하나는 압도적인 힘의 차이를 보여줘서 더는 저항할 의지를 잃게 만들고.
또 하나는 스스로 분열하게 만들어서 저들이 비교적 멀쩡한 상태로 율리아의 앞에 무릎을 꿇고 항복하게 하는 것이다.
지금의 상황이라면 둘 중 하나는 아마 제대로 해낼 수 있지 않을까.
후방에서 왕이 직접 위엄을 보이고 있고, 앞에서는 기약 없는 전투만 벌어지고 있다면.
결국 적이 먼저 지쳐서 나가떨어지든 아니면 살 길을 찾아 헤매든 하게 될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면서 저 요새를 또 어떻게 해야 효과적으로 두들기고 압박을 하면서도 되도록 피해를 줄일 수 있을까 고민하던 페르디난트의 앞으로 누군가가 도착했다.
“페르디난트님. 방금 정찰병으로부터 급보가 들어왔습니다.”
“급보?”
“예. 이곳에서 멀리 떨어지지 않은 또 다른 요새에서 불길이 확인되었다고 합니다.”
“불길? 불길이라. 단순한 화재인가? 아니면….”
“정확한 건 알 수 없지만 내부에서 벌어진 화재가 꽤나 심한 것 같답니다. 아무래도 자연 발화가 아니라 방화인 것 같은데, 혼란도 무척이나 극심하다고 하고요.”
그 말에 페르디난트는 턱을 쓰다듬다가 제대로 한 번 살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정찰 보고가 그저 사고로 불이 난 것이라면 그 혼란을 이용하면 될 터이고.
반대로 누군가가 의도적으로 불을 낸 것이라면 이것이야말로 그렇게나 원하고 또 기다리던 분열의 조짐이라고 보는 게 맞았다.
그리고 그의 예측은 정확하게 들어맞았다.
페르디난트와 그의 군대 중 일부가 요새 쪽을 접근하자 한창 소란스럽던 요새 안에서 일대 소란이 일더니 여태껏 굳게 닫혀있던 문이 열리기 시작한 것이었다.
심지어 성문보다도 더 중요하다고 여겨지는 도개교가 내려왔다.
진입하는 각을 본다면 이보다 더 최고의 때가 없을 지경이었다.
혹시 함정이 아닐까 걱정하는 부관들이었다.
그들은 바로 들어가기보다는 일단 상황을 한 번 살피고자 주장을 했다.
하지만 페르디난트는 고개를 젓고서 바로 돌입할 것이니 준비들을 하라고 일렀다.
부관들의 말대로 함정일 가능성을 아예 배제할 수는 없는 일이다.
그러나 저게 함정이 아니라 당장 촌각을 다투는 혼란의 일부라면.
자신들이 망설이는 그 틈에 저 혼란이 잠재워지고 기껏 다가온 기회를 놓치는 것이었다.
‘나는 내 판단을 믿는다. 여기서 내가 틀렸다면 나라는 놈의 가치가 여기까지인 것이니 죽음으로서 속죄하면 될 것이고, 내 판단이 맞는 것이라고 하면 더할 나위 없는 이득이다.’
어차피 다수의 병력을 이끌고 들어가는 것은 불가능하다.
해서 수백 정도의 정예병들을 가려내어 몇몇 부관과 함께 바로 요새로 진입했다.
어둡고, 또 갑작스러운 화재에 혼란까지 번지니 성벽 위에서 경계를 서고 있던 이들까지 제 의무를 망각한 채 우왕좌왕하고 있는 중이었다.
그 틈을 타서 어렵지 않게 안으로 진입한 페르디난트는 자신이 틀리지 않았음을 알아챘다.
챙챙! 화륵! 콰왕!!-
당장 사방에서 창칼이 어우러지는 소리가 사람들의 고함을 완전히 가리고.
거대한 불길들은 온갖 건물들을 가리지고 집어삼켜 그것들을 전부 무너트리고 있었다.
곳곳에서 전투가 벌어지고 있었는데, 서로가 비슷한 복장을 한 상태였고 여기저기 시체들이 즐비한 것이 함정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상황이 급박해보였다.
“페르디난트님. 이런 상태면 도대체 어떻게 해야….”
전장에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피아 구별’ 이다.
지금과 같이 저녁 시간에, 옆에는 불길이 피어올라 그 강렬한 빛 때문에 역으로 주변이 잘 보이지도 않으며, 비슷한 복장을 한 자들이 서로에게 창칼을 휘두르고 있다면.
동부의 마족들로서는 도대체 어느 쪽을 도와 이 요새를 취해야 하는지 가늠할 수가 없었다.
그 부분은 페르디난트조차 뭐 어떻게 처리하기가 너무 모호했다.
명령을 한다고 따를 이들도 아니고, 제대로 들릴지도 과연 의문이다.
이 난장판에서 도대체 뭘 어찌 해야 피아 구별을 해낼 수 있을까 하던 그는.
“…클라우스의 옛 부하들은 지금 즉시 진을 형성해라!”
갑작스레 진을 형성하라는, 상황에 전혀 맞지 않는 말을 내뱉었다.
이 난리판에, 숙련된 병사들마저 막 펼치고 짜는 것이 극히 어렵다는 게 바로 진형이다.
그걸 이렇게 난장판 그 자체인 곳에서 펼치라고 하는 것은 무리수가 분명한데.
척! 척!!-
사방에서 난전을 펼치던 병사들 중 몇몇이 적게는 셋, 많게는 십여 명이 모여서 서로 등을 맞대며 자리를 잡거나 아예 새로운 진형을 짜기 시작했다.
방패를 들고 있는 이가 앞에 서고 창을 들고 있는 이가 맨 뒤에 서며, 그 중앙에 적당한 길이의 검을 지니고 있는 병사가 서는 형태로서 말이다.
사령관 밑에서 어떤 훈련과 어떤 전투를 치렀는지 여실히 알 수 있는 대목.
“우리들은 저렇게 진을 형성한 자들과 싸우는 놈들부터 정리한다.”
“그, 그래도 되겠습니까?”
“클라우스 밑에서 있던 자들이 이번 일의 주동자들일 거다. 그게 아니더라도 그들과 어느 정도 연관이 있겠지. 허면 그들과 싸우는 자들이 곧 우리들을 반기지 않는 적들이야.”
여전히 아리송한 말임에도 부관들은 알겠다고 고개를 숙였다.
이후 마족 병사들은 대로를 따라 돌진하면서 완전히 붕괴되어 허우적거리고 있는 기사들이나 몇 안 되는 저항하는 병사들을 처리하기 시작했다.
그 사이에 페르디난트는 한쪽으로 물러나서 상황을 지켜보고 있는 이들에게로 다가갔다.
그러자 그들은 자신들을 향해 다가오는 마족 지휘관에게도 바로 적의를 내비쳤다.
창끝을 겨누는 것이 보통 날카로운 기세가 아니다.
때문에 페르디난트를 호위하고 있던 마족들 역시 바로 전투 의지를 표명했다.
하지만 그런 제 부하들을 전부 말리고서, 적당한 거리에 멈춰 선 그는 입을 열었다.
“그대들에게 약속하겠다. 그 어떤 해도 없이, 또한 어딘가로 데려가지도 않겠다. 그대들이 원하는 대로 하되 적대적인 행동만 하지 말아주길 바란다.”
“….”
“이건 클라우스에게서 직접 받은 부탁이다. 이미 그가 우리 동부에 있다는 걸 그대들도 잘 알고 있겠지. 그와 한때 적으로서 싸웠던 나의 명예를 걸고 말한다. 우리들에 대한 경계심을 다 버릴 수는 없어도 적의는 거두어주길 바라마.”
저들이 참다 참다 못 해 일어난 이유는 명백하다, 그 어떤 희망도 없으니까.
앞에는 동부의 병사들이 몰려왔는데 뒤에는 자신들의 옛 상관이 날뛰고 있는 중이란다.
심지어 마왕과 함께, 자신들을 도우러 왔다는 연합군을 몰살시켰다는 소문을 일으키면서.
이미 클라우스라는 존재와 대적해야 한다는 부분에서 큰 반감을 느끼고 있을 자들이다.
그나마 마족과 싸운다는 부분이 여태껏 자리를 지키게 해주는 원동력이었는데.
이제 제 옛 지휘관이 전열을 가다듬고 자신들의 뒤에서부터 다가오기 시작한다면.
과연 자신들은 그 남자에게도 마족들에게 하는 것처럼 창칼을 내던지면서 저항할 수 있을까.
앞에서부터 클라우스가 마족들과 함께 천천히 다가왔다면 반감을 느낄 시간이라도 있었을 테지만 그는 현재 뒤에서부터 맹렬하게 다가오고 있다.
보이지 않는 이 순간에도, 자신의 안방이나 다름없던 남부로.
자신들의 뒤가 차례차례 무너진다면 과연 자신들은 얼마나 버틸 수 있겠는가.
뒤가 끊겼음에도 앞만 보며 싸울 수 있는 자들은 많지 않다.
그건 정말로 정예 중의 정에나 가능한 일이다,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더는 피할 곳이 없다면 자연스레 살 길을 찾는 것이 당연한 일이다.
“…우리보고 다른 요새들을 공격하는 데에 앞장서라고 하지 않을 겁니까?”
“그럴 생각은 없다. 어차피 그 요새들은 하나씩, 하나씩 무너질 거다. 내가 아니라 저 뒤에서부터 다가오고 있을 나의 왕과, 그대들의 지휘관이 무너트리겠지.”
“….”
“원하는 대로 해라. 다만 적의를 계속 보인다면 우리 또한 너희들을 조력자가 아닌 포로로 대할 수밖에 없어. 그 부분을 유념하길 바란다.”
그렇게 말을 남긴 페르디난트는 요새를 점령하는 데에 주력했다.
그리 큰 요새는 아니지만 남부의 외곽을 맡고 있는 곳 중 하나이다.
이런 곳이 자신들의 손에 떨어졌다는 사실이, 심지어 그게 단순히 성문이 뚫린 게 아니라 안에서부터 결국 분열을 일으켜 무너진 것이라면.
자연스레 주변의 요새들에서도 분열의 조짐이 느껴질 수밖에 없다.
귀족들과 기사들은 평민 병사들을 의심하며 믿을 수 없다는 눈초리를 보내고.
반대로 평민 병사들은 그래도 여태껏 버텨주었더니 돌아오는 건 의심이라며 분노를 감추지 못 할 것이다.
처음부터 완전히 틀어진 관계가 전쟁이라는 극악의 상황 때문에 겨우 유지되고 있었다.
하지만 그 부분을 기어코 사방에서 몰려오는 압박이 부러트리고 말았다.
이제 남은 건, 서로에 대한 불신으로 쪼개지고 또 쪼개지는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