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75화 〉 26장 - 들불
수인 전사들과의 거리가 너무 가까워졌다, 이제는 창을 휘두를 공간조차 없다.
그 정도로 밀리자 클라우스는 바로 창을 버리고 검을 뽑아들었다.
그리고는 자신에게 달려들던 수인 전사 하나를 그대로 반 토막 내면서 스킬, ‘전장 파악’을 발동하여 현재 돌아가는 상황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아군 중앙 진형은 뒤로 밀려서 당장이라도 결단나기 직전. 카엘라와 휘하 기병들은 격전 끝에 적들을 몰아내고 있으며 가장 중요한 보병 진형의 좌익과 우익은….’
적들이 중심부를 돌파하기 위해 힘을 집중시키면서 상대적으로 측면은 노출이 덜 되었다.
덕분에 가장 중요한 핵심 전력이라고 할 수 있는 제 고참병들이 아직 본격적으로 전투에 참여하지 않은 것을 확인한 클라우스는 안도의 한숨을 내뱉었다.
지금 적을 이끌고 있는 이들은 왕국의 멍청한 귀족들과는 본질부터 다른 자들이다.
요정 군대의 지휘관과 수인 전사들을 이끄는 대장, 모두가 극히 경계할 만한 인물들.
조금이라도 일이 꼬이면 언제 어떻게 일이 꼬일지는 아무도 모른다.
자신은 서부 연합이나 동부 마족들이 말하는 것처럼 무패의 전설, 전쟁 영웅이 절대 아니다.
진짜 전쟁 영웅들은 자신의 능력으로 무패의 신화를 쓴 것이지만 자신은 그동안 수 없이 많은 패배를 겪으면서 그 경험들이 쌓이고 쌓인 것이다.
거기에 지금과 같이 스킬이라는 것까지 최대한 활용하여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는 중이다.
“클라우스!!”
잠시 딴 생각을 하는 사이 또 다른 수인이 그의 뒤를 잡았다.
살짝 고개를 틀어 그 수인 전사의 공격을 피해낸 후 몸을 돌려서 검을 휘두른다.
그러자 붉은 피가 사방으로 터지면서 두 동강이 난 수인의 몸이 힘없이 스러진다.
“버텨라! 제자리에서 절대 이탈하지 마라! 무조건 버텨내야 한다!!”
키엔마이어 후작 역시 지극히 위험한 전선임에도 불구하고 사방팔방으로 뛰어다니면서 제 병사들을 독려하고 있는 중이었다.
덕분에 그의 병사들은 제 영주의 독려, 그리고 바로 앞에서 같이 날뛰고 있는 클라우스의 무력에 어느 정도 용기를 얻어 조금씩 밀리고 있기는 하지만 끝내 진형을 뚫리지 않을 수 있었다.
그리고 이런 장기전은, 단숨에 중앙을 돌파하여 바로 마왕에게로 쇄도해 들어가겠다는 수인 및 요정 연합군 지휘부의 불안감을 증폭시켰다.
“적들이 단단합니다. 뚫릴 듯 하다가도 결국 버텨내고 있습니다!”
“한 번 더 몰아친다. 놈들의 벽도 약해졌을 거야. 여기서 포기하면 우리는 이대로 돌격력을 잃게 된다. 반드시 뚫어내야 해!”
“대장! 요정 측 지휘관이 너무 깊게 들어가고 있다고 전령을 보내왔습니다!”
“측면이나 잘 맡아달라고 전해! 이 이상 들어와서 전사들을 빼는 게 가능할 것 같나? 여기서 몸을 돌리면 우리가 전멸이다. 이렇게 된 거 무조건 적들을 뚫어낸다!”
무척 단순한 전략 같지만, 실은 가장 효과적인 전력이기도 하다.
아무리 잘 짜인 진형도 두 동강이 나는 순간 전투력이 급감한다.
하나의 큰 얼음보다 두 개의 중간 크기의 얼음이 더 잘 녹듯이, 일단 한 번 갈라내기만 하면 그 다음은 수적 우위로 완전히 압도해버릴 수 있었다.
그 부분을 수인 측 대장만이 아니라 요정 쪽 지휘관도 잘 알고 있기에.
요정들은 수인들의 재차 돌격 명령에 큰 거부감을 드러내지 못 했다.
어차피 중심 부분의 공격 재량권은 수인들에게 있고, 자신들은 측면과 후방, 그리고 기병들에 대한 재량권을 지니고 있는 중이었다.
“너무 들어가고 있어. 우리 측면의 요정들이 속도를 전혀 맞추지 못 하고 있단 말이다.”
“어쩌겠습니까. 저들이 일단 한 번 전투를 시작하면 뒤는 돌아보지 않는다는 걸 알고 있지 않으십니까. 우리들은 지금과 같이 측면을 막으면서 함께 들어가면 될 것입니다.”
자칫 아군이 좁은 공간에 몰리지 않도록 최대한 측면을 신경 쓰면서.
요정들은 어떻게든 수인 전사들의 공격 속도에 맞춰주려고 애를 썼다.
하지만 요정들은 자신들이 상대하고 있는 자들이 얼마 남지 않은 키엔마이어 후작형의 중장보병과 대다수의 경보병들인 것을.
그리고 그들 뒤로 최고의 시기만을 노리면서 두 눈을 번뜩이고 있는 1차 대륙 전쟁의 고참병들이 도사리고 있음을 전혀 알아차리지 못 했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고, 결국 클라우스와 중앙 진형의 분투 덕분에 수인 전사들은 중앙을 돌파하지 못 하고 그대로 멈춰 서게 되었다.
덕분에 그들에 맞춰 속도를 높이던 엘프들 역시 발걸음이 늦어지며 조금씩, 조금씩 중앙 부분으로 몰리게 되었고 밀도가 너무 높아져서 무기를 휘두르는 것조차 어렵게 되었다.
“…지금!”
“지금이다!!”
바로 그 순간, 지휘부에 있던 율리아와 전방에서 싸우고 있던 클라우스가 동시에 외쳤다.
좌익과 우익의 공격 신호를 알리는 깃발이 올라가고, 마침내 전투에서 한 발자국 떨어진 채로 있던 클라우스의 고참병들이 본격적으로 전투에 뛰어들었다.
“죽여어어!!”
“공격!!”
여태껏 밀려나기만 하던 인간 병사들과는 전혀 다른 병사들의 등장.
덕분에 측면의 요정들은 순간적으로 기세를 잃고 뒤로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나 하나가 죽어도 뒤의 다른 전우들이 빈자리를 채울 것이라고 외치듯.
여기서 죽더라도 이 전투만큼은 반드시 승리로 이끌겠다는 듯 클라우스의 고참병들은 무시무시한 기세로 요정들이 맡고 있는 측면을 두드리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그저 같은 인간 병사들이라고 요정 측이 크게 신경을 쓰지 않았다.
하지만 막상 부딪쳐보니 뭔가 잘못되었다는 걸 알 수 있었는데, 공격을 하는 실력이나 그 기세가 바로 조금 전의 인간들과는 달라도 너무 다른 것이었다.
“밀어붙여! 죽여!”
“사령관님을 위해!”
단 한 명의 병사도 소극적인 태도를 보이지 않았다.
죽음마저 불사하겠다는 자세로 쉴 틈 없이 밀어붙이는 그들은 수인 전사들을 방불케 했는데 덕분에 요정 측은 자꾸만 점점 더 뒤로 밀리게 되었다.
그렇지 않아도 중심 부분에 힘을 쏟기 위해 병력을 집중시켰던 연합군이다.
하지만 끝내 중심을 뚫지 못 했고 역으로 중앙 부분에 병력이 너무 모여서 진형에서 가장 필수적인 ‘공간’ 이 전혀 나오지 못 하고 있는 중이었다.
헌데 그 타이밍에 요정들이 밀려나면서 측면까지 좁아지고, 그들이 중앙 부분으로 들어오니 순식간에 발 디딜 틈도 없고 몸을 움직일 공간도 없어지게 되었다.
“공간! 공간 확보!! 밀지 마라, 이것들아!”
“측면부터 뚫는다! 측면부터!”
“무슨! 측면의 공세가 강력하다. 차라리 버티는 것도 힘들어 보이는 중앙 부분부터 뚫어!”
상황이 묘하게 돌아가자 원래부터 지휘권이 분리되어 있던 요정과 수인들이 저들끼리 행동하기에 이르렀다.
요정들은 측면을 두드렸고 수인들은 중앙을 돌파하려고 애를 쓴다.
하지만 측면의 고참병들은 클라우스 밑에서 수도 없이 전투를 거치면서 전투에 단련된 살육 기계들이고, 정면은 비록 그들에 비해서 약한 키엔마이어 후작령의 병사들이라고는 하나 의지만큼은 충만하고 또 클라우스와 키엔마이어 후작이 직접 독려 중이기도 했다.
돌파를 위해 공격을 감행하지만 결국 뚫어내지는 못 한다.
그리고 그렇게 공격이 한 번, 한 번 무위로 돌아갈 때마다 요정과 수인의 연합군들은 계속 좁은 곳으로 몰리면서 그 어떤 공간도 확보하지 못 하게 되었다.
아무리 요정과 수인 측의 전투력이 뛰어나다고 하지만, 일단 몸을 쓸 수 있는 공간은 필수적으로 있어야만 한다.
적의 창칼을 피하기는커녕 내가 무기를 휘두를 공간조차 없다면 이건 물에 빠져서 허우적거리는 것과 별반 다를 게 없는 상황이었다.
분명 수적으로 우위에 섰던 연합군임에도 결국 후방을 제외한 모든 부분이 막혀버렸다.
이렇게 된 이상 소모전으로 가서 자신들보다 병력 수가 훨씬 적은 적들에게 대량의 출혈을 강요하는 편이 낫겠다.
요정 측 지휘관과 수인들의 대장이 그리 생각하며 다시금 공세로 나서려던 참이었다.
부우우우!!-
후방에서 날카로운 나팔 소리가 들리면서 지평선 너머로 한 무리의 기병들이 나타났다.
처음에는 실루엣만 보여서 정확히 어느 곳의 기병인지 알 수가 없었지만.
곧 그 기병들의 선두에 서서 미친 듯이 말을 달리고 있는 카엘라를 확인할 수 있었다.
두두두두!!-
격전 끝에 연합군의 요정 기병들을 패퇴시키고, 재집결하여 아군을 구원조차 하지 못 하도록 아주 멀리 쫓아내고 오는 길이었다.
워낙 전투가 처절했기에 그 강하던 마족 기병들도 2할이 죽거나 다치는 큰 피해를 입었지만 대신 남은 이들은 다시 전장으로 복귀할 수 있었다.
“공격!!!”
카엘라가 송곳니를 드러낸 채 명령을 내리자 휘하 기병들이 같이 속도를 높였다.
잘 짜여 있는 보병 진형으로 달려드는 것은 기병들 입장에서도 무척 위험한 일.
하지만 지금과 같이 훤히 후방이 노출된 채 좁은 곳에 몰려 전투를 치르고 있는 거대한 병사 무리는 그냥 잘라내기 쉬운 고기 뭉텅이에 불과했다.
“저, 적 기병이다! 뒤로 몰려온다!”
“후방! 후방에 진형을! 이러다가 완전히 포위됩니다!”
“아군이다! 아군 기병들이 돌아왔다!!”
“더 거세게 몰아붙여라! 놈들이 후방으로 벽을 쌓지 못 하도록 해!!”
클라우스의 고참병들, 1차 대륙 전쟁의 생존자들은 아주 민첩하게 반응했다.
기병들이 돌아와서 후방으로 난입하자 적들이 그쪽으로 신경조차 쓰지 못 하도록 방어는 포기한 채 오로지 공격으로 전환한 것이었다.
자신들 역시 피해를 감수해야겠지만 이런 식이면 적들은 점점 더 한 곳으로 몰리게 된다.
유기적으로 움직이는 진형이 아니라 그냥 잘라내고 깎아내는 대로 뭉텅뭉텅 잘려나가는 흙덩이가 될 뿐이었다.
“대장! 대장!! 후방, 후방이 포위당하고 있습니다!”
아군 기병이 패주하고 적 기병들이 돌아왔다는 소식은 중앙에도 전해졌다.
분명 수적 우위를 지니고 있음에도 포위를 당한 것은 자신들이 된 셈.
수인 측 대장은 이를 악물고서는 여전히 뚫지 못 한 중앙 부분을 노려보았다.
“이렇게 된 이상 죽자 살자 중앙을 꿰뚫는다. 살아남아서 돌아갈 길은 그뿐이야! 옆은 보지 마라! 무조건 앞만 보고 움직이는 거다. 요정들에게는 우리가 활로를 뚫을 테니 알아서 뒤따라오라고 해!”
중앙에 모든 힘이 집중되어 있으니 중앙을 뚫는 게 맞기는 하다.
이제 와서 측면이나 후방으로 방향을 돌려도 공간이 좁아진 이 상황에서는 내부의 극심하 혼란만 야기할 뿐이다.
해서 수인들의 대장을 필두로 아직도 수천이 넘게 남아있는 수인 전사들이 다시 한 번 거친 파도가 되어서 인간 보병들을 두드리기 시작했다.
여태껏 힘겹게 버티던 보병들로서는 죽음을 각오하고 달려드는 수인들의 공세에 다시 한 번 위태로워질 수밖에 없었다.
측면에서 공격이 계속되고 있다고, 곧 후방부터 적들이 무너진다고 키엔마이어 후작이 열심히 독려를 하지만 당장 앞에서부터 천천히 균열을 일으키고 있는 진형은 아슬아슬하기 짝이 없었다.
“털북숭이.”
하지만 수인 측으로서는 하나 간과한 사실이 있었다.
저들이 버텨내고 있는 부분은 단순히 그들의 방어력이나 지휘관들의 독려만 도움을 주고 있다는 게 아님을.
피로 시뻘겋게 물든 검을 쥔 채 또 다시 전장에 모습을 드러낸 클라우스.
그는 자신들을 향해 쏟아지는 파도의 가장 가까운 곳.
쏘아지는 화살의 촉 부분에 자리하고서는 미친 듯이 검을 휘두르기 시작했다.
동시에 사방팔방으로 마력을 쏘아 보내며 속도를 내던 적들을 그대로 자리에 묶어놓기도 했다.
마족의 정예병들조차 건드리기를 포기했던 인간이다.
제아무리 수인 측 전사들이라고 해도 이건 도저히 버텨낼 수가 없는 부분.
그 와중에 클라우스는 기어코 선두에 섰던 수인 측 대장을 찾아내 그 자리에서 참살해냈다.
괴성을 지르는 모습 그대로 잘려나간 그 목을 흔들어주니 그나마 돌파력을 지니고 적들의 공격이 순식간에 확 죽어 버렸다.
마지막 저항마저 무위로 돌아간 자들에게 남은 것은, 사방에서 쏟아지는 공격들.
그리고 전투가 아닌 살육의 장이 펼쳐지는 것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