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74화 〉 26장 - 들불
왕국의 국경 지역에서 산발적인 전투가 벌어지고 있는 사이.
전쟁과는 거리가 멀게만 느껴지던 왕국 중심부에 양측이 합쳐 4만에 달하는 거대한 군대가 서로를 마주 보고 서게 되었다.
서로의 군대 양상이 조금 특이했는데, 한쪽은 그렇게 유쾌하지 않은 사이인 요정과 수인 측 연합군이었고 다른 한쪽은 당장 잡아먹어도 모자랄 인간 측과 마족들의 연합군이었다.
이런 장면을 어느 누구도 예상치 못 했기에 서로가 서로를 바라보며 어이가 없다는 표정들.
하지만 지금 상황에서는 서로의 등을 봐주고 앞에 서줄 전우들이었기에 그걸 대놓고 드러내지 않고들 있었다.
“마왕 전하, 병력 배치를 마무리했습니다.”
지휘 막사로 들어온 카엘라가 간단하게 군례를 올린 후 상황을 전달했다.
며칠 전 클라우스가 말한 대로, 율리아는 키엔마이어 후작령의 보병들을 중앙에 배치하고 자신들의 기병들을 양 날개의 끝에 배치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될 보병 진형의 우익과 좌익은, 현재 율리아가 아닌 클라우스의 앞에서 아주 간단한 연설을 듣고 있는 중이었다.
“다들 참 오랜만에 보는군.”
“사령관님.”
어떤 이는 남부, 또 어떤 이는 중앙 지역, 사는 곳도 근무하는 곳도 다 달랐던 이들.
하지만 오늘은 한 자리에 모여서 몇 년 전 전투를 치르던 그 때와 마찬가지로 도열해 있었다.
모두가 1차 대륙 전쟁 당시 클라우스 휘하에서 마족들과 싸웠던 병사들이다.
그런 그들이 이제는 참 웃기게도 마족들과 함께 수인, 그리고 요정들과 싸우게 되었다.
이런 식이라면 당연히 반발하거나 실망할 이가 있을 법 한데도 이 자리에 모인 어느 누구도 그런 감정을 드러내지 않았다.
“일단 그대들에게 미안하다는 말을 하고 싶다. 끝까지 왕국을 지키는 방패가 되겠다 했지만 결국 그러지 못 했다. 오히려 이곳에 창을 들이밀게 되었으니 어찌 서글프지 않겠는가.”
“그런 말씀 마십쇼. 방패도 누가 막겠다고 써먹어줘야 방패 역할을 하는 거 아닙니까. 당장 사령관님처럼 그 방패를 깨트려 부수겠다는 놈들이 사방에 널려있는데 미련하게 그러라고 한다면, 어느 누가 가만히 있겠습니까.”
“왕국을 위해 싸웠지만, 그 왕국은 우리들을 헌신짝처럼 버렸습니다. 이제 우리에게 남은 건 옛 과거의 영광, 함께 싸운 전우들. 그리고 사령관님이 전부입니다.”
옛 병사들의 대답에 클라우스는 미소를 지으면서 그들을 바라보았다.
그러다가 슬쩍 마족 측 기병들 쪽으로 고개를 돌리고는 입을 열었다.
“옛 적들과 손을 잡고, 옛 우방들과 싸우는 길이다. 이겨도 여전히 힘들 것이고 혹 진다면 죽을 때까지. 아니, 죽어서도 배신자로 낙인찍힐 것이다. 가족들도 모두가 배신자로 몰려 노예가 되거나 심할 경우 목숨을 잃을 수도 있다.”
“어차피 이전 전쟁에서 사령관님이 아니었다면 전부 죽을 목숨이었습니다.”
“그 때 저당 잡힌 이 목숨, 지금 찾아간다고 생각하십쇼. 우리도 그러겠습니다.”
대륙 전쟁이 끝난 지 수년이 흘렀고 이제는 다들 일상으로 돌아간 지 오래다.
그럼에도 여전히 그들은 훌륭한 전사들이었고 숙련된 고참병들이었다.
그리고 여전히 클라우스를 자신들의 사령관으로 모시고 있는 중이었다.
“이번 전쟁이 끝나고 나면 마왕 전하가 이 땅을 다스리실 거다.”
“마왕님이든 누구든 다 좋으니 제발 그 빌어먹을 귀족들만 좀 잡아 족쳤으면 좋겠습니다.”
“옆집 딸내미가 겨우 15살인데 귀족 가문에 끌려가서 그대로 겁탈 당했답니다. 사령관님, 이게 사는 겁니까? 우리가 고작 그딴 놈들 지키겠다고 그 지랄을 떨었던 거라면 관두겠습니다. 차라리 배신자가 되어서 그 망나니 놈들 모가지를 잘라버리겠습니다.”
일개 병사들과 사령관의 대화라곤 무척 과격하고 또 위계질서도 느껴지지 않았다.
하지만 바로 이 부분이 클라우스가 병사들의 절대적인 지지를 받아낸 이유였다.
귀족들처럼 권위를 챙기지 않고 그들을 자신과 함께 싸워주는 전우로 대해주었다.
그들이 귀족들에게 실망하고 또 실망하여 종국에는 왕국이라는 집단에조차 거부감을 드러낼 때 말 한 마디로, 존재감 하나로 그들을 끌어올 수 있도록 말이다.
아무리 키엔마이어 후작령의 병사들이 그 수가 많고 훈련도 나름 잘 되었다고 하지만.
자신이 가려 뽑은 동부의 기병들이 요정들 기병들을 상회하는 실력을 갖추었다고 하지만.
여전히 적들의 중심을 맡을 수인 전사들에 비해 턱없이 부족한 건 사실이다.
요정들도 수인들에 가려져서 그렇지 활만 잘 쏘는 것이 아니라 근접전에서도 강력한 모습을 보인다.
그들의 돌파력은 무시무시한 것이라 조금만 일이 꼬여도 금방 진형이 무너질 것이다.
기병끼리의 싸움은 한 번의 돌격으로 끝나는 것이 절대 아니다.
한 번 부딪치고, 승기를 잡고, 그렇게 해서 적들이 다시는 재집결해 아군의 뒤를 노리지 못 하도록 완전히 패주시켜서 전장에 복귀하지 못 하도록 만들어야 한다.
이후에 아군 기병이 돌아오는 부분까지 생각한다면 그동안 진형을 유지하는 게 무엇보다 중요하다.
“사지에서 살아남은 그대들에게, 나는 또 다시 싸워달라고 부탁하려고 한다. 이번에는 왕국을 위해서도 아니고 그대들의 가족들을 위해서도 아니다. 그저 내가 필요해서, 내가 원해서 싸워달라고 하는 것이다. 그대들의 목숨을 내어달라고 요구하는 것이다.”
“….”
“그럼에도 날 따라줄 수 있겠나?”
클라우스의 질문이 날아드는 순간, 그의 병사들은 말로서 대답하지 않았다.
다만 들고 있던 방패와 창, 칼 등을 부딪치면서 일대 거대한 쇠의 울음을 토해내고.
발을 구르며 예전 전쟁에서 보이곤 했던 자신들만의 전투 의지를 표명할 뿐이었다.
그들의 대답에 클라우스는 미소를 지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약속 하나 하마. 세상을 뒤집어엎으면, 일단 그곳에 그 빌어먹을 귀족들은 없을 거다.”
“….”
“그리고 너희들을 잊은 세상 따위는 없을 거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힘껏 싸웠던 자들을 우대하기는커녕 잡아먹지 못 해서.
대우하고 싶지 않아서 안달이 난 세상과는 다시는 조우하고 싶지 않았다.
“그대들은 진형의 좌익과 우익을 맡는다. 그리고 때를 노리면서 적들이 과하게 중심으로 힘을 집중하면, 측면에서부터 적들을 거세게 몰아붙여라. 놈들이 더욱 밀착하여 창칼을 휘두를 공간조차 없도록. 오직 중앙 외에는 갈 수 있는 길이 없도록. 할 수 있겠나?”
“예! 사령관님!”
“너희들만 믿는다. 그대들의 창칼이 우리들을 구원하는 열쇠가 될 거다.”
클라우스의 말이 끝나고 그들이 각각 좌익과 우익으로 나뉘어 배치되었다.
이제 율리아 쪽은 중앙에는 항복한 키엔마이어 후작령의 보병들.
그 옆에는 여기까지 기어코 달려와서 합류한 클라우스의 옛 병사들.
마지막으로 보병 진형의 날개가 되어주는 기병은 마족들이 맡게 되었다.
그리고 저 멀리서 다가오는 수인과 요정 연합 역시 비슷한 진형을 펼쳐두고 있었다.
양 날개 끝에는 요정 측의 기병들이 자리했고, 중심부를 뚫어낼 요량으로 가장 강력한 수인 측 전사들이 중앙 부분에 집중 배치되었다.
그리고 그 측면에는 남은 요정 병사들이 채웠는데 그 수가 2만을 훨씬 넘어가는 대군이었다.
“….”
“….”
마침내 멀지 않은 곳에 두 군대가 완전히 포진하고 서로를 노려보는 형태가 되었다.
숨 막히는 침묵 끝에 가장 먼저 움직인 것은 카엘라가 이끄는 마족 기병들이었다.
함성을 지르면서 그들이 돌격을 하니 곧 요정 측 기병들도 거기에 맞서 돌격을 감행했고, 뒤를 이어서 거대한 진형을 짜고 있던 두 군대 역시 천천히 진군하기 시작했다.
조금씩, 조금씩 더 가까워진 두 진형은 마침내 평원 한가운데에서 전투를 지르기 시작했다.
가장 앞에 선 클라우스가 속도를 내니 자연스레 그 뒤를 따르던 키엔마이어 후작과 그 휘하 병사들 역시 속도를 높였는데, 덕분에 클라우스의 옛 병사들은 비교적 더 늦게 전투에 임하면서 체력을 아낄 수 있는 시간을 얻게 되었다.
“으와아아악!!”
쾅! 쾅쾅!-
사방에서 방패가 부딪치고 창칼이 번뜩이며 고함과 괴성이 난무했다.
한 차례 부딪치고 수인 전사들이 득달 같이 달려들어 키엔마이어 후작령 측의 진형을 흐트러트리려고 안간힘을 썼다.
그들의 폭발적인 돌격에 클라우스의 뒤를 따라 용감하게 돌격했던 키엔마이어 후작령의 병사들이 속절없이 뒤로 밀려나기 시작했다.
같은 인간 병사들도 아니고 완력에서 훨씬 더 앞서는 수인 전사들이다.
그들이 한 곳에 뭉쳐 제대로 밀어붙일 때마다 방패고 진형이고 당장이라도 무너질 듯 아슬아슬하기 짝이 없었다.
당장 그 위태로움이 지휘부에 남은 율리아의 눈에까지 고스란히 보일 수준이었다.
“….”
움찔, 하고 손이 떨렸지만 율리아는 함부로 움직이지 않았다.
이번만큼은 자신을 믿고 지휘부에서 대기하라는 클라우스의 말이 떠올랐다.
자신이 반드시 중앙을 지켜낼 것이고, 기병들은 적 기병들을 최대한 멀리 쫓아낸 후 다시 전장으로 복귀할 것이며 제 병사들은 생각하는 것 그 이상의 전투력을 보일 것이라고.
확신에 가득 찬 그 말에 율리아는 일말의 의심까지 전부 거두고서 전황을 지켜보았다.
와아아아!!-
쾅쾅!! 쿵! 챙! 채앵!!-
사방에서 전투의 온갖 소름이 귓전을 때린다.
그 속에서 클라우스는 증폭 마법을 사용하여 최대한 주변 병사들을 지휘했다.
동시에 창 한 자루를 들고서 전장을 뛰어다니며 위급한 곳을 구원하고, 또 반대로 적의 약한 곳을 일격에 무너트리면서 아군이 한숨 돌릴 틈을 내주기까지 했다.
“진격! 진격!!”
“이 배신자들을 처단해야 한다! 서부 연합의 수치인 자들이다!!”
“하아아악!!”
클라우스의 방해로 인해 공격이 더뎌지자 수인 전사들의 대장은 더욱 독이 올랐다.
은연중에 중장에 자리잡고 있는 인간 측 보병들을 깔보고 있었는데.
금방 돌파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고 더욱 강하게 밀어붙였는데.
클라우스라는 놈이 그곳에 떡하니 박히고 서서는 전사들을 박살내고 있었다.
그 인간 하나 때문에 온 전사들이 막혀서는 낑낑대고 있다 생각하니 분통이 터지고, 또 혹여나 요정들이 자신들을 깔볼까 걱정도 되었던 것이다.
“밀어! 밀어내라! 중앙을 뚫고 마왕이 있는 지휘부까지 가는 거다! 힘을 내라!”
“뚫어! 뚫어!!!”
그렇지 않아도 거대한 파도와 같은 수인 전사들이 한 곳에 뭉쳐 키엔마이어 후작령의 병사들을 세차게 두드렸다.
그나마 클라우스가 계속 그들을 흐트러트리면서 동시에 방어에만 집중하라고 명령을 내리고 있기에 어떻게든 버티고 있는 중이었다.
“마왕 전하. 이러다가 중앙이 돌파당하는 건 아닐까요?”
이렇게 대규모로 군사들이 뒤엉키는 전장에서는 마법을 함부로 쓸 수가 없다.
해서 잠시 후방으로 물러선 세실리가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그렇게 질문을 해왔다.
“…클라우스가 말했고, 내가 말했지. 이 전투, 반드시 이긴다고.”
속으로는 아주 조금이나마 불안감이 일렁이고 있다고 해도.
왕으로서 그 모습을 절대 보여주지 않는 것 또한 때로는 반드시 필요한 일이었다.
해낼 수 있을 것이다, 버틸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길 수 있을 거다.
그렇게 생각하면서 율리아는 조금씩, 조금씩 점점 더 뒤로 밀리고 있는 아군 진형을 바라보았다.
조금만 더 밀려나면 결국 진형이 뚫리고 양단되어 각개격파를 당할 것이고, 적들은 그 어떤 방어벽도 없이 순식간에 이곳 지휘부까지 들이닥칠 것이다.
수인 전사들에게 죽어줄 생각 따위야 조금도 없다지만 이런 회전에서 진형이 두 동강 나면 그 상태에서 전투는 패배한 것이나 다름없다.
절대 패해서는 안 된다지만, 만에 하나 패한다면 하다못해 클라우스만이라도 안전하게 퇴각을 할 수 있다면 좋지 않을까 생각하는 순간이었다.
“…!”
전황을 살피던 율리아의 눈매가 순간 매서워졌다.
여태까지 최대한 싸움을 피하면서 체력을 아끼고 상황을 살피던 좌익과 우익이.
1차 대륙 전쟁에서 마족 병사들을 상대로도 밀리지 않으며 남부 전선의 전설을 써내려갔던 클라우스의 고참병들이 마침내 움직이기 시작한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