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73화 〉 26장 - 들불
“…괜찮을까요? 인간들이야 지휘관의 무능으로 어떻게 잘 해냈다고 하지만. 요정들이나 수인의 군대는 달라요. 훈련도도 뛰어나고 병사 개개인의 실력도 강하고, 무엇보다 지휘하는 자들의 능력 역시 인간 귀족들 따위와는 비교가 안 될 거예요.”
정말 오랜만에 침대 위에서 피곤했던 몸을 한껏 풀어준 후.
율리아는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새하얀 나신으로 클라우스의 품에 안겨서 속삭였다.
오늘도 결국 그와 몸을 섞는 건 하지 못 했지만 그래도 대신 사랑이 듬뿍 어린 손길을 받았으니 이 정도면 괜찮다고 스스로를 위로하면서.
“나 또한 가장 경계하는 자들이에요. 지휘부의 무능은 인간 측 귀족들에게만 해당되는 부분이니까요. 요정들과 수인들은 어떻게 싸워야 하는지 알고 있는 자들입니다. 당장 너무 빠르지도, 그리고 너무 느리지도 않게 이쪽으로 진군해 오고 있어요. 키엔마이어 후작령을 거점으로 해서 우리가 날뛰는 걸 더는 좌시하지 않겠다는 겁니다.”
“우리로서는 기껏 항복을 받아낸 키엔마이어 후작령을 잃는다면, 적들의 사기를 올려주는 꼴이 될 터이니 물러설 수 없는 싸움이네요.”
“서로가 다 조급할 수밖에 없어요. 우리는 다른 지역들의 붕괴를 위해서, 반대로 저들은 다른 지역들의 이반을 막기 위해서. 전투를 피하고 싶지만, 피할 수가 없는 거죠.”
제 품에 안겨있는 율리아의 배를 조심스레 쓰다듬는 클라우스.
아직까지는 그리 큰 변화가 보이지 않지만 분명하게 느껴진다.
이 안에 조그마한 생명이 자리하고 있음을, 그리고 벌써부터 충만한 마력을 품고 있음을.
“다음 전투에서는 무리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율리아.”
“내 대답, 잘 알고 있잖아요?”
“아이한테 좋지 않다니까요. 조금이라도 잘못된다면….”
“아뇨. 나도 내 아이도, 이 정도에 놀라서 떨어질 정도로 약하지 않아요. 이 녀석도 알아야죠. 네 어머니와 아버지가 어떤 싸움을 하고, 어떤 고생을 하며 여기까지 왔는지. 그리고 언젠가는 너 또한 그래야만 하니 똑똑히 느끼라고 말이에요.”
낳지도 않은 아주 조그마한 생명한테 벌써부터 조기교육이라니.
일러도 너무 이른 감이 없잖아 있지만 클라우스는 더는 그녀를 말리지 않았다.
사실 이 정도만 해도 임신을 하지 않은 율리아와 비교한다면 정말 많이 몸을 사리고 있는 수준이다.
원래는 이렇게 왕국 후방으로 뛰어든 후, 매번 선두는 율리아의 것이었다.
항상 앞에 서서 적들을 말 그대로 도륙을 하곤 했는데 전투가 끝날 때마다 피를 잔뜩 뒤집어쓴 터라 피에 굶주린 미친 악귀라는 이명 값을 톡톡히 하곤 했다.
적들은 물론 제 병사들에게조차 어으, 하는 말이 절로 나올 정도로 두려움의 대상이었달까.
그런 모습이 적들에게는 긍정적인 영향을 끼칠 수 있겠지만 아군들에게는 좋지 않다.
또한 그런 이미지는 후일 대륙 통일을 달성한 후 정복자가 아니라 다시금 통치자로 돌아갔을 때 분명 크게 한 번 발목을 잡을 수도 있는 것이다.
적당한 공포감, 그러나 과하지 않은 두려움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시점이었다.
해서 클라우스는 임신 공격으로 그녀의 발목을 단단히 붙잡았다.
너무 무리하면 기껏 얻은 후계자를 잃을 수도 있다고, 조기 교육은 좋지만 아이가 다치지 않는 선에서 적당히 하는 게 좋을 거라고 말이다.
‘덕분에 율리아 대신 카엘라와 세실리, 그리고 내가 적당하게 돌아가면서 날뛰었지.’
여전히 인간 귀족들 입장에서는 왕임에도 불구하고 잊을 만하면 전장에 나타나서 제 병사들과 기사들을 쓸어버리는 율리아를 악귀라고 여길 것이다.
하지만 그게 전 방위에 넓게 퍼진 공포만 아니면 되었기에 그 정도는 넘어갈 수 있었다.
어차피 전쟁에서 두려움은 적들의 저항 의지를 꺾는 가장 좋은 무기가 되기도 하니까.
“이번 전투는 어떻게 생각하고 있나요?”
“우리끼리 만으로는 힘들 겁니다. 우리도, 적들도 한 번의 전투로 큰 피해를 입혀야만 하는데 숫자에서는 큰 차이가 나고 병사들 개개인의 질에서는 적들이 떨어지는 게 아니에요. 거기에 지휘관들 역시 무능하지 않으니 우리끼리 전투를 치르는 건 불가능에 가깝습니다.”
“그렇다면… 키엔마이어 측 지원을 받아내야겠군요.”
“지원이라고 할 수도 없지요. 왕을 돕는 일인데 당연히 해야 할 일인 겁니다.”
“키엔마이어 후작은 믿지만 그 휘하들까지는 아직 전원 믿을 수가 없군요. 중요한 전투를 치러야 하는데 그들이 허튼 마음을 품는다면 어떻게 되는 거죠?”
“그 부분이 걱정일 수도 있겠지만 키엔마이어가 제 사람들 관리를 못 한 것도 아니고, 무엇보다 얼마 전에 항복한 자들이 또 다시 돌아선다면 그건 제 살 깎아먹기 밖에 되지 않습니다. 무엇보다 속이 더럽게도 좁은 귀족들이 후일 자신들을 어떻게 처리할지 생각해본다면, 이곳 병사들은 오히려 율리아 당신의 승리를 바라고 있을 걸요.”
1차 대륙 전쟁에서 귀족들이 보여준 삽질이 많아도 너무 많아서 나열하기조차 불가하다.
그 중에 상황이 최악으로 치달아 잠시 항복을 했다가 다시 뛰쳐나온 병사들이 많이 있었는데, 귀족들은 그들을 실컷 이용해 먹고서는 막판에 한 번 배신자는 영원한 배신자라면서 목을 매달았다.
저들 딴에는 질서를 확립하겠다고 저지른 일이겠지만 당연히 최악의 한 수였다.
때로는 이해와 자비심을 보이는 게 최고일 때가 있는데 그것들은 그런 두 마음을 지닐 생각이 전혀 없었다.
“그렇다면 키엔마이어 측이 든든하게 서있어 준다고 하고, 다음은요? 아. 배 계속 만져줘요. 방금 전처럼 아주 부드럽게.”
율리아의 요구에 클라우스는 미소를 지으면서 알겠다고 그녀의 귓가에 속삭였다.
이전과 비교해서 여전히 거의 차이가 없는 여인의 배를 살살 쓰다듬어준다.
그럴 때마다 율리아는 무척이나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으면서 두 눈을 감고 제 남자의 품 안으로 폭 파고 들었다.
“요즘도 단 음식이 별로인가요?”
“음… 네. 예전에는 달달한 게 좋았는데 어느 순간 잘 못 먹겠어요. 건량도 일단 억지로 먹고 있기는 한데… 조금 힘드네요. 아무래도 우리 아가는 단 것도 싫고 건량도 싫은가 봐요.”
“제 어머니를 고생시키다니 참 나쁜 아이네요.”
“그러지 말아요. 이 정도면 무난한 거라고 하던데. 듣기로는 아무 것도 먹지도, 마시지도 못 하고 심지어 냄새도 못 맡을 정도로 심하게 하는 여인도 있다고 했어요.”
“그런가요? 그러면 우리 아가가 벌써부터 효도를 하고 있는 셈이네요.”
클라우스는 그렇게 말한 후 이전에 미리 준비했던 유지엘 지방의 레몬을 가득 넣은 음료를 율리아에게 내밀었다.
“신기해요. 신 음식은 여태껏 입에 한 번도 대지 않았는데. 갑자기 왜 이렇게 생각이 날까.”
“아무래도 아가 취향이 조금 이상한 것 같죠?”
“그러게요. 아무래도 아빠를 닮아서 이상한 것 같네요.”
하? 이 마왕님이 빈틈을 놓치지 않고 이렇게 장난을 치네?
이 타이밍에 그런 말은 반칙 아니냐는 듯 눈을 흘기니 율리아는 킥킥, 웃음을 흘리면서 클라우스의 얼굴을 부드럽게 잡아끌곤 그의 입술에 한 차례 진한 키스를 해주었다.
“얼른 왕국을 정리하고 잠시 한숨 돌린 후 남은 곳을 정리하고 싶네요.”
“그 때가 되면 거동하는 것도 조심해야 할 수도 있을 텐데.”
“보고요. 정말로 움직이는 걸 조심해야 할 듯 싶으면 나머지는 밑의 녀석들에게 맡기고, 나는 뒤에서 그들이 어떻게 일을 풀어 가는지 지켜봐야죠.”
“공을 세울 기회를 좀 나눠줘요. 지금도 버티고만 있는 페르디난트 엘세나 한껏 들어와 놓고 숨만 고르고 있을 에슐리 팔라티나트까지. 그 외에 다른 많은 마족들에게도.”
클라우스의 말에 율리아는 생각해 보겠다고 대답했다.
그러면서 얼른 다음 부분들을 말해달라고 보챈다.
“일단 다음 전투는 여태까지의 전투와는 다르게, 대회전을 치를 겁니다.”
“…가능하겠어요? 조금 전에 올라온 첩보에 의하면 요정과 수인 측 연합군이 2만은 가뿐하게 넘는다는데? 그 정도면 인간 병사로 따져서 4만에 다다라는 거대한 군대에요.”
“그렇죠.”
“그에 반해서 우리는 그 반이 간신히 될까 말까에요. 당장 우리가 끌고 온 기병이 3천 정도에, 키엔마이어 후작가가 동원할 수 있는 전력이 기사 50여명, 그리고 기병들 백. 그 외에 중장보병들이 3천이고 경 보병들이 5백 명이죠. 솔직히 중장보병을 3천까지 어떻게든 숨기고 있었다는 게 놀라울 지경이죠. 이전까지는 우리들이 이점을 지니고 있었다지만 이번에는 다르잖아요? 당장 요정과 수인 측 군대는 클라우스 당신조차 경계하고 있다 할 정도니까.”
수인 전사 하나는 완전무장한 인간 병사 두셋과 비견될 수 있는 전력이다.
그리고 말까지 잘 타는 요정들은 인간 기사들만큼의 전투 효율까지 내곤 한다.
인간 측처럼 어중이떠중이들을 모아온 것도 아니고 언젠가 벌어질 전투를 대비해서 그동안 착실하게 훈련시킨 병사들을 데리고 온 것이다.
그들이 이전과는 다르게 빠른 시간 내에 강력한 군대를 조직하여 왕국으로 온 이유.
주된 전장은 어디까지나 왕국이 되어야 한다는 전략이기도 하며.
동시에 자신들의 압도적인 강함을 마족들에게는 물론이고 인간들에게까지 보여주어서 앞으로의 위치에서 자신들의 우위를 공고하게 만들 셈이었다.
“아군이 불리한 건 사실입니다. 하지만 반대로 보자면, 그만큼 이번 전투를 승리한다면 왕국 곳곳이 무너져 내릴 것이고 요정들과 수인들도 그냥 인간들을 포기하고 물러날 테죠.”
“지원이 끊어진 인간들로서는 항복하는 게 최선이라고 생각할 테고요.”
율리아의 말에 클라우스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지도를 가리켰다.
그리고 각 진형의 병력들 배치도를 일일이 그리면서 율리아에게 설명을 해주었다.
“키엔마이어 측 보병들은 이렇게 중심에 진을 펼칠 겁니다. 그리고 우리 기병들은 두 무리로 나뉘어서 보병 진형의 각 끝에 위치했다가 전투가 벌어지면 바로 적들 기병들과 전투를 벌여서 재집결조차 하지 못 하도록 박살을 내야만 할 겁니다.”
“…기병 쪽이야 그래도 우리가 우위에 있다고 하지만, 보병 쪽은 정 반대잖아요. 그런데도 이렇게 서로 마주보고 있는 식의 진형을 펼치겠다고요? 적들이 중앙을 돌파하면 끝이에요.”
“버텨줄 겁니다. 아니, 버틸 수밖에 없을 겁니다. 내가 그 중심에 있을 거니까.”
“뭐라고요?”
무척이나 당황한 목소리로 두 눈을 깜빡이는 율리아.
곧 절대 허락할 수 없다면서 클라우스릐 손을 확 잡아챈다.
진형과 진형이 부딪치는 그 한 가운데에 서겠다는 건 정말 위험한 일이다.
당장 어느 곳에서 적들의 창칼이 들어올지도 모르는데 그 앞에 서겠다니?
“위험해요. 아무리 당신이라고 해도….”
“중앙이 버텨내줄 시간이 필요해요. 그러니 반드시 내가 있어야 합니다.”
“차라리 카엘라를 시켜요. 그녀라면….”
“그녀는 적 기병들을 쫓아내고 돌아오는 임무를 수행해야 해요. 그것도 아주 중요하니까.”
“….”
“중앙이 뚫리면 끝이라고 했죠. 네, 맞아요. 그러니까 중앙이 뚫리지 않도록 누군가는 나서야 해요. 그걸 당신이 하겠다고 하지는 말아요. 당신은 지휘부에서 명령을 내려야 하니까.”
클라우스의 말에 율리아는 입술을 꾹, 하고 깨물었다.
결국 이 군대의 총지휘관은 마왕 자신이다, 그런 곳으로 향해서는 전체적인 지휘가 불가하다.
카엘라는 적 기병들을 맡는다고 하고 세실리는 자신과 함께 후방에서 마법 지원을 해야 하니 결국 남는 자는 클라우스, 심지어 그라면 그 혼란의 극치 속에서도 지휘가 가능한 인물이다.
인선 배치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 그저 자신이 여인의 마음으로 자꾸만 이 남자를 붙잡을 뿐.
“…다음은요. 중앙은 키엔마이어 후작령의 보병들이 맡는다지만 아직 보병 진형의 양 측면이 남았잖아요. 거기에는 어떤 자들을 배치할 생각이죠?”
“가장 중요한 곳이니 가장 강하고 믿을 수 있는 자들을 배치해야겠죠. 아직은 다 당도하지 않았다지만, 곧 대부분이 이곳으로 다 찾아올 겁니다.”
왜 이전의 대륙 전쟁에서 숭고한 영웅인 척을 하면서 그렇게도 처절하게 싸웠느냐.
바로 지금과 같은 어려운 순간에, 자신이 마왕을 따르고 있다 뭐다 그런 건 다 뒤로 쳐두고 오직 과거의 사령관을 위해 싸워줄 이들을 만들어두기 위해서였다.
“1차 대륙 전쟁에서 나와 함께 싸운, 그야말로 역전의 용사들이죠.”
귀족들의 감시조차 어렵지 않게 따돌리고 클라우스가 왔다는 키엔마이어 후작령으로 향하고 있을 과거 그의 병사들.
그들에게 가장 중요한 양쪽 측면을 맡길 생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