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72화 〉 26장 - 들불
클라우스와 율리아가 대삼림을 돌파하여 후방을 유린하던 와중이었다.
이미 그전부터 전운을 감지하여 많은 수의 왕국민들이 징집을 당해 전방으로 끌려갔다.
대륙 전쟁이 벌어지고 그 끔찍한 전쟁이 끝난 지 10년도 지나지 않았는데.
다시 한 번 그 악몽과도 같은 전쟁이 또 한 번 벌어지고야 만 것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흉흉한 민심은 클라우스가 마족 병사들과 함께 왕국 후방에 나타났다는 소문을 타면서 걷잡을 수 없이 불타오르기 시작했다.
누군가는 클라우스를 욕하고 저주하며 배신자라고 소리쳤지만.
또 누군가는 대륙 전쟁 시기부터 일개 병사로 참전하여 사령관 자리에까지 오르고서도 그 어떤 사적인 욕심도 없이 오직 왕국과 왕국민들을 위해 싸우던 클라우스라고 그를 두둔했다.
전쟁 와중에도, 그리고 전쟁 당시에도 클라우스를 견제하고 괴롭히며 거의 벼랑 끝까지 밀고 갔던 자들이 바로 그 빌어먹을 귀족들 아니냐는 주장은 덤이었다.
물론 그들끼리의 불만들이었고, 귀족들 앞에서는 당연히 함부로 말을 할 수 없었다.
중앙 지역은 귀족들이 아주 꽉 잡고 있고 남부는 거의 사병화 되다시피 한 왕국의 정예병들과 그들을 거느린 귀족들이 있으니까 말이다.
하지만 이곳, 왕국 북부는 사정이 조금 달랐다.
그리고 그곳에는 귀족임에도 뭔가 귀족답지 않은 생각을 지닌 누군가가 있었다.
“여러분, 이렇게 서로 헐뜯고 비난하며 싸울 것이 아닙니다. 클라우스를 배신자라고 욕할 것이 아니라 그의 행동을 주목해야 합니다. 평민 여러분 스스로 여러분의 권리를 찾아야 하는 겁니다. 그 역시 자신의 잃어버린 시간과 그에 대한 보상을 받기 위해 온 것입니다!”
로머스 차가르, 왕국 북부에 자리잡고 있는 차가르 가문의 자제.
원래 귀족 선민사상에 빠져 있던 남자가 갑자기 어쩐 이유로 평민들의 손을 잡고서 함께 싸우고자 하는 투사가 되었는가.
클라우스가 말 몇 마디로 그의 생각에 커다란 파문을 만들었고, 원래부터 뭔가 묘한 사상을 지니고 있던 로머스가 이상한 방향으로 생각을 튼 것이었다.
귀족은 특별하다, 하지만 그 특별함은 평민들을 짓밟는 것에서 나오는 게 아니다.
평민들을 인정하고 손을 내밀며 함께 올라가는 것, 거기에서 나오는 귀족의 진짜 정신이 진정한 명예라고 여기는 것이었다.
“기회입니다. 싸워야 합니다! 우리 땅을 침범한 마족들은 물론이고! 이번 기회에 그나마 먹고 살 만해졌던 여러분들을 또 잡아먹을 궁리만 하고 있을 귀족과도! 내가 귀족이어서 잘 압니다. 이 전쟁이 끝나면 여러분은 다시 지옥으로 빠질 겁니다! 나는 그걸 좌시할 수 없습니다. 그리 할 수 없지요! 진정한 귀족이라면 그런 불행한 자들을 안전한 뭍으로 이끌어 내는 것입니다. 나는 여러분들을 짓밟고 뭍으로 오를 게 아니라 차라리 여러분들과 함께 가라앉을지언정 그들과 같은 쓰레기들이 되지는 않겠습니다!!”
왕국 북부는 예전부터 중앙 지역이나 남부에 비해 가난한 곳으로 꼽혔다.
지형도 험준하고 농작물을 기를 땅도 적으며 척박하고, 몬스터의 등장도 많은 곳이다.
당연히 나오는 것은 없는데 그곳의 귀족들은 딴에 자신들 역시 다른 귀족들처럼 권세를 누리고 싶어서 영지민들의 고혈을 짜냈다.
하루가 멀다 하고 평민들은 죽어나가는데 귀족들은 점점 더 살이 올라간다.
피둥피둥해져서 움직이기도 버거워하는 주제에 평민들에게는 게을러서 일을 안 하는 것이라고 망언까지 쏟아내곤 했다.
그 중에는 차가르 가문의 가주도 있었는데, 그 가주가 어느 날 목 없는 시체가 되었다.
그리고 차가르 가주의 목을 벤 자는 다름 아닌 그의 아들, 로머스였다.
“나는 나의 혈통을 거부하겠다! 이런 것이 귀족이라면 나 스스로 평민이 되어 저들과 함께 하겠다! 이런 구역질 나는 것들은 귀족이 아니라 좀벌레다! 평민들이여, 일어서라!!”
마침내 왕국 북부 차가르 영지를 중심으로 반란이 일어났다.
왕국이 2차 대륙 전쟁으로 혼란스럽던 틈을 타서, 로머스 차가르와 북부 평민들의 반란은 단 며칠 만에 엄청난 기세로 번져갔다.
비록 평민들이라고는 하지만 반 이상이 군 복무 경험이 있는 자들이다.
그 어떤 보상도, 사회적 인정도 받지 못 한 채 다치거나 전우만 잃었던 자들.
그들의 분노가 한 번 풀어지니 이미 클라우스와 율리아가 휩쓸고 간 자리에 그들을 막을 수 있는 그 어떤 세력도, 귀족도 없다고 할 수 있었다.
- 평민들이여, 궐기하라! 이 전쟁에서 이긴다면 마족들보다 더 비참한 미래만이 있다! -
- 우리들의 권리는 우리 손으로 쟁취하라! 전쟁이 끝나기 전에 인정받아야만 한다! 우리들은 귀족들의 개가 아니라 당당한 왕국의 한 일원이라는 것을! -
귀족들 입장에서는 황당하기 짝이 없는 일이었다.
평민들의 반란이야 이전에도 있었던 일이지만 대부분 1년을 채 가지 못 하고 흐지부지였다.
그저 순간의 분노를 참지 못 하고 감독관을 살해해서, 혹은 영주성으로 붙잡혀 가는 것이 무서워서 에라 모르겠다 식으로 반란을 일으키는 것이 전부였는데.
이번에는 시작부터 달랐다, 당장 주모자가 평민이 아닌 귀족 자제였다.
심지어 사생아도 아니고 서자도 아닌, 정식으로 가문의 자제로 인정받는 직계가 말이다.
귀족이 귀족들에게 반발해서 평민들을 이끌고 반란을 일으켰다.
이것은 그들의 통치 사상에 있어서 절대 일어나서는 안 되는 일이었다.
평민은 항상 어리석고 바보 같은 자들이라 귀족들의 말을 들어야 하고 귀족들이 가르치는 대로 따라야만 하는데 그 귀족이 반란을 부추겼으니, 이건 귀족들 입장에서 그 무엇보다도 무서워하고 또 싫어하는 ‘전례’를 만든 격이었다.
당장 토벌을 명해야 했으나 병사 한 명도 구하기 쉽지 않은 상황이다.
중앙과 남부에 파견된 병사들이 태반이요, 나머지는 각 성들을 지키고 있다.
그나마 여유가 되었던 자들은 이전에 왕국 안으로 뛰어든 마족들과 싸우다가 모두 전장의 차디찬 시체가 되어서 땅바닥을 구르고 있다.
침묵해서는 안 되는데, 선택의 여지가 없어 침묵해야만 하는 현실.
그저 얼른 요정과 수인들의 원군이 도착했으면 하는 게 유일한 바람이었다.
“귀족들이 침묵한다! 절호의 기회다! 저 악랄한 것들에게 우리의 분노를 보여주자!”
그렇지 않아도 전쟁으로 완전히 망가져 버린 일상.
거기에 클라우스라는 과거의 영웅마저 최악의 적이 되어 돌아온 상황에.
귀족들은 끝까지 제대로 된 방어조차 하지 못 하고 내부 유린을 보고만 있으니.
곳곳에서 로머스 차가르의 반란에 같이 일어서는 평민들이 늘어났다.
상황이 점점 악화되면서 북쪽에서 일어난 반란의 불길이 중앙 지역까지 옮겨붙는 건 아닐까.
귀족들은 그렇게 겁을 먹고 더더욱 자신들의 영지와 성만 방어를 하기에 바빴다.
오히려 왕성 경비가 소홀해질 정도였는데 그 타이밍에 클라우스는 키엔마이어 후작령으로 향했기에 그나마 왕성은 안전하다고 할 수 있었다.
그렇게 모든 상황이 최악으로 흘러가는 그 때.
비로소 왕국 귀족들이 그렇게도 기다리던 도움의 손길이 당도했다.
“이곳에 이리 빠르게 다시 찾아올 줄은 몰랐군요.”
“어서 가시죠. 듣자하니 국경에서 시작된 전선도 불안하지만 대삼림을 돌파하여 왕국 후방으로 들이닥친 마족 군대가 엄청난 피해를 입혔다고 합니다.”
“분명 우리 레인저들이 물 샐 틈 없는 경계를 펼쳤을 텐데….”
“적들 사이에 그 유명한 전쟁 영웅, 클라우스가 있었다고 합니다.”
그의 이름이 나오자 요정들은 끄응, 하고 침음을 내뱉었다.
천 여 명으로 3만이 넘는 적들을 상대하여 승리도 한 남자다.
그런 클라우스에게 대삼림을 돌파하고 아군 레인저들을 해치우는 것쯤이야 크게 어려운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왕국으로 들어온 원군은 당연히 요정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단병접전에서는 마족들에게 절대 밀리지 않는다는 평을 받고 있는 수인 전사들.
그들이 무려 1만이 훨씬 넘는 숫자로 마침내 왕국에 들어온 것이다.
“…클라우스, 뛰어난 전사이지. 우리 수인들도 인정하고 있어. 그런 남자가 적이 되었다니 조금은 아쉽기도 하지만, 동시에 그 자와 싸워볼 수 있다고 생각하니 심장이 두근거리는군.”
“마침 그 클라우스와 마왕이 왕국을 휘젓고 있다고 합니다. 잘만 하면 전장에서 만나서 명예로운 전투를 벌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렇게 요정 측 원군과 수인들 전사들이 왕국 땅을 밟은 순간.
환영의 인사 대신 북부 반란군들의 기습이 그들을 맞이했다.
요정이나 수인들 입장에서는 그야말로 황당하기 짝이 없는 것이었지만.
현재 불길이 오를 대로 오른 반란군들에게는 그런 걸 볼 겨를이 없었다.
오히려 저 요정들과 수인들은 현재 왕국의 체제를 유지하려고 한다고 생각해서.
후일 자신들을 위협할 세력들이 분명하다고 판단해서 공격을 퍼부은 것이었다.
너희들도 결국 그 빌어먹을 귀족들과 한 패가 아니냐고.
그들의 체제를 유지시키기 위해서 마치 정의로운 척 왕국에 나타난 것이 아니냐고 말이다.
“도대체 이것들 뭐야?”
“아무래도 왕국에서 일어났다는 반란군인 것 같습니다.”
“이들 대응에 대해서 왕국 귀족 연합의 반응은.”
“반란이라고 이미 못을 박아두었으나 병력이 없어 처리하지 못 하는 것 같습니다.”
“멍청한 인간들. 이런 자들조차 처리하지 못 하다니. 연합이라는 말 자체가 우습다.”
자신들은 기껏 도우러 왔는데 공격을 당하니 당연히 분노가 하늘을 찌를 수밖에 없다.
해서 요정과 수인 연합군은 순식간에 반란군들을 말 그대로 학살하기 시작했다.
아무리 지형을 잘 알고 저항을 하는 반란군이라지만 상대가 하필이면 야전에서 강한 수인들, 그리고 게릴라에 뛰어난 요정들이었다.
순식간에 대부분이 토벌되었고 엄청난 세력을 자랑하던 반란군은 순식간에 쪼그라들었다.
그리고 그 중심이 되던 로머스 차가르 역시 행방불명이 되었는데, 누군가는 전투의 소용돌이에 한꺼번에 휘말려 죽었다고 하고 또 누구는 비겁하게 도망을 쳤다고 말했다.
어찌 되었든 왕국이 감히 손도 못 대던 반란을 진입하면서 박살 낸 이종족들이었다.
덕분에 숨통이 트였다면서 귀족들은 열광했지만, 그 밑에서 오늘도 고생 중인 평민들은 유일한 희망이나 다름 없던 저항의 불길이 꺼지자 절망하고 말았다.
반란을 핑계로 나중에 또 얼마나 혹독한 대가가 기다리고 있을지 모르는데.
저번처럼 왕국이 전쟁에서 승리한다고 해서 이득이 되려나 싶었다.
그 와중에 키엔마이어 후작이 전격적으로 마왕에게 항복했다는 소문이 퍼졌다.
당연히 귀족들은 일대 혼란에 빠졌고 평민들은 어어? 하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클라우스의 뒤를 이어서 그나마 귀족 중의 귀족이라던 키엔마이어 후작까지.
그들 모두가 왜 다른 이도 아니고 이전에 그렇게나 싸우던 마족들의 군주에게 항복했을까.
의문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고, 막연한 적의와 분노는 어느 순간 이유 모를 호기심으로 조금씩 변해가고 있었다.
이러한 분위기는 귀족들만이 아니라 왕국으로 지원을 나온 요정들과 수인들도 느꼈다.
자신들은 그냥 반란을 진압한 것인데 왕국 곳곳에서 보내는 시선이 곱지가 않다.
이것을 한 번에 뒤집기 위해서는 결정적인 승리 한 번이 필요하다.
그래, 마왕과 왕국의 배신자들을 일거에 모조리 쓸어 담는 그런 대승이 말이다.
“아마 이곳이 대회전을 치르기에는 안성맞춤일 것입니다.”
클라우스조차도 은근히 경계하고 있는, 강력하기 짝이 없는 요정과 수인 연합군.
그들은 속도를 내서 키엔마이어 후작령 바로 앞에 있는 평원까지 들이닥쳤다.
바로 이곳에서 승부를 결정짓겠다는 듯 포진을 하기 시작했고, 곧 머지않아서 율리아의 마족 기병들과 키엔마이어 측에서 자원한 보병들이 그곳 평원으로 모습을 드러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