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71화 〉 26장 - 들불
“….”
자신의 앞에 무릎을 꿇은 채 고개를 조아리고 있는 인간 귀족, 다넬 키엔마이어.
그냥 조그마한 땅을 지닌 이도 아니고 방대한 영지를 다스리고 있는 인간 측 후작이다.
때문에 율리아가 말 위에 앉아서 그저 바라만 보고 있자 몇몇 병사들은 왕국 측 대귀족의 항복에 기분이 좋은 듯 어깨를 으쓱였고 또 다른 몇몇은 그래도 왕을 제외하면 그 다음 가는 귀족이라는데 너무 무시해서 자칫 반감을 지닐까 걱정하는 눈치였다.
이후로도 율리아는 몇 분을 그렇게 침묵한 채 키엔마이어 후작을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다넬 키엔마이어 역시, 그런 제 왕의 말을 기다리면서 여전히 무릎을 꿇고 고개를 조아린 채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혹시 일이 이상하게 돌아가고 있는 건 아닐까, 그런 걱정들이 들려는 순간.
마침내 율리아가 고삐를 놓더니 곧 안장 위에서 뛰어내렸다.
털썩-.
자신 앞으로 다가오는 마왕의 발걸음 소리를 가만히 듣고 있는 키엔마이어 후작.
조금도 당황하거나 궁금해 하는 느낌을 주지 않은 채 무릎을 꿇은 모습 그대로 자신의 왕이 어떤 말을 할지 기다리는 모습이었다.
“왕국 측에 머저리들만 있는 건 아니었던 모양이야.”
율리아는 손수 키엔마이어 후작의 어깨를 붙잡고는 자리에서 일으켜 세웠다.
키엔마이어 후작이 조금 얼떨떨한 얼굴을 하고 있으니 그녀는 고생했다는 듯 그의 어깨를 두어 번 두드려준 후 말을 이었다.
“너무 오랫동안 두었다면 사과하지, 다넬 키엔마이어.”
“말씀 거두어 주시길. 신하의 예를 표한 것이니 그 어떤 서운한 마음도 없습니다.”
“클라우스의 벗이라고 했던가? 확실히 비슷하면서도 또 다른 부분이 느껴져. 왜 클라우스가 자네를 친우라고 부르는지 알 것 같군.”
그리 말한 후 마왕은 손짓으로 이제 알아서들 관두라는 표시를 해보였다.
그러자 카엘라나 세릴리 모두 경계심을 거두고 뒤의 병사들 역시 들고 있던 무기들을 내리면서 살벌하기 그지없던 분위기를 환기시키기 시작했다.
“듣자하니 키엔마이어, 그대를 얻으면 왕국의 반은 얻은 것이라고 하던데.”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저는 그저 약간 넓은 땅을 지닌 귀족 중 하나에 불과합니다.”
“허면 그대가 생각하는 왕국의 반은 무엇이지?”
“…역시 왕국민들의 마음을 호의적인 부분으로 돌리는 게 먼저 아닐까 싶습니다.”
키엔마이어 후작의 말에 율리아는 그렇겠지,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나마 클라우스를 대동하여서 이 정도지 만일 자신과 휘하 병사들만 왔다면 조직적인 저항을 마주했을 지도 모르는 일이다.
당장 눈앞에 있는 이 다넬 키엔마이어라는 귀족도 제 영지 내부에서 있었을 불안감이나 적의를 잠재우느라 무척 많은 고생을 했을 것이다.
1차 대륙 전쟁에서 동부보다도 더 큰 피해를 입은 곳이 이곳 서부, 그 중에서도 왕국이다.
제 가족, 친척, 그리고 친구들이 마족의 손에 의해 죽었다고 한다면.
쉽사리 그들을 받아들이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라고 볼 수 있었다.
“맞아. 그대의 말대로 역시 왕국민들의 마음을 일부나마 돌리는 게 중요하겠지.”
“….”
“그래서 키엔마이어, 그대의 도움이 필요하다. 그대 또한 내 옆의 클라우스와 마찬가지로 전쟁에서 활약한 인물이자 귀족들에게 갖은 견제를 당하던 인물이지 않은가. 많은 왕국민들이 동정을 하고 있겠지. 거기에 그대에게 나름 좋은 생각을 지니고 있으니 그대의 투항은 내게 있어 정말로 왕국의 반이 들어온 것이나 마찬가지야.”
처음으로 정식 항복 요청을 한 인물, 심지어 어중이떠중이도 아닌 대물 급이다.
키엔마이어 후작이 항복을 한다면 자연스레 이 주변 모두가 돌아서는 것.
심지어 이곳은 왕국의 중심이라 할 수 있는 왕성에서도 그리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이다.
여러 모로 키엔마이어 후작령의 항복은 율리아 입장에서.
그리고 동부 입장에서 중앙 방어선이나 남부를 돌파한 것과 비슷한 수준이었다.
이미 율리아 휘하의 병사들을 모두 받아들일 준비를 마쳤던 모양.
안으로 마족들이 들어서자 미리 대기하고 있던 병사들과 영지민들이 그들의 말을 받아서는 임시 마구간으로 조심스레 끌고 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또 다른 인원들은 어정쩡하게 서있는 마족 병사들을 임시 거처로 안내했다.
혹여 괜한 오해를 사고 갈등의 불씨를 일으킬까 모두가 조심하는 모습들이다.
마족들은 갑자기 자신들이 찾아온 것에 대해서 왕국 측 인간들이 놀라지는 않을까.
이제까지 자신들을 적의로만 대하던 자들이 왜 이러는 걸까 당황한 눈치이고.
왕국 측 사람들은 이제는 무장도 못 한 자신들 앞에 여전히 병장기를 들고 있는 마족들이 혹 악한 마음을 품을까 걱정을 하고 있었다.
클라우스는 그런 모습을 바라보면서 잠시 생각하다가 곧 고개를 내저었다.
‘처음에는 이렇게 서로 어색하고, 다가가기 싫을 거다. 하지만 모두가 겪어야 할 진통이다. 이런 것까지 내가 없애버리면 오히려 독이야. 필요한 고통, 감내해야 할 가시밭길이다.’
그리 생각하며 율리아와 카엘라, 세실리, 그리고 플랑슈까지 대동해서.
원래는 다넬 키엔마이어와 그 휘하들이 쓰곤 했던 회의실로 향한다.
마침내 모든 인원들이 안에 도착하자 율리아는 자연스레 가장 상석에 앉았다.
그리고 그 옆을 손수 다넬 키엔마이어에게 권하니 자연스레 마왕이 인간 측 귀족을 대우하는 그림이 되었다.
“….”
클라우스를 제쳐두고, 카엘라와 세실리까지 전부 두고서 자신을 바로 옆에 앉히는 율리아다.
당연히 다넬 키엔마이어로서는 조금이나마 궁금한 마음이 생길 수밖에 없었다.
“무슨 이유로, 어째서 항복을 했는지 묻지 않으십니까?”
“이미 다 말하지 않았나. 그리고 말할 필요도 없었다. 이미 모든 부분이 저 남자로 인해 예상이 가니까 말이야.”
테이블에서 멀찍이 떨어져 서있는 클라우스를 가리키는 율리아.
그에 다넬 키엔마이어는 아아, 하고 대충 이해가 간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살기 위해서, 여태껏 해온 일들에 아주 조금이나마 인정을 받고 싶어서.
그런 부분들은 다넬 키엔마이어로서도 원하는 부분이 아닐 수 없었다.
“하지만 그게 다가 아닐 테지. 내게 분명 원하는 게 있을 거야. 다넬 키엔마이어 후작.”
“….”
“그렇지 않고서야 왕국의 가장 중요한 기둥 중 하나인 그대가 이렇게 쉽게 들어올까. 살 길을 찾은 것이라고 하지만 사사로운 이득을 위해서 대의를 저버릴 이도 아닌데. 그렇다면 과연 이유가 무엇일까, 무엇이기에 마왕에게 무릎까지 꿇은 것일까.”
율리아는 잠시 말을 멈추고 다넬 키엔마이어를 바라본다.
당신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이미 나는 다 알고 있다는 듯.
내 입으로 말할까, 아니면 당신이 직접 말할래, 라고 질문하는 것 같기도 했다.
그래도 여전히 키엔마이어가 침묵을 유지하자 마왕은 웃으면서 입을 열었다.
“저항하면 철저한 파괴와 약탈의 대상이지만, 협력하면 거기에서 제외되니까. 네 동족들, 인간들이 고통과 두려움에서 몸서리치는 것보다 자네 하나가 배신자 소리를 들으면서 든든한 울타리가 되고자 하는 것이겠지.”
“…!”
“이곳을 자치 구역으로 유지하고 싶은 것 아닌가? 단순히 그대의 권력을 위해서가 아니라, 아직까지 나와 동부의 내 동족들을 믿지 못 하는 자들을 위해서. 이곳에서 잠시 바라보면서 마족들이 소문대로 그저 악하고 잔인하기만 한 자들이 아니라는 것을 알리기 위해서 말이야. 그래서 믿어볼 수 있는 자세가 된다면 그곳을 벗어나 내 밑으로 오고, 이후 모든 불안한 것들이 사라지면 그대 역시 자치 구역이라는 것을 치워버리고 정식으로 나의 지배하에 들어오겠지.”
다넬 키엔마이어는 그 말에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자치 구역을 원하는 건 단순히 자신의 이득을 위해서가 아니다.
마왕 율리아가 마침내 왕국을 정복하고 더 나아가 제국까지 손아귀에 쥔다면.
누군가는 마왕의 지배를 받아들인다고 해도 또 누군가는 불안해하면서 어떻게 해야 하나 갈피를 잡지 못 할 수도 있다.
해서 자신이 직접 나서 잠깐 동안의 울타리 역할을 하려는 것이다.
이 안에서 비교적 안전하게 있으면서 한 번 지켜보라고.
자신이, 그리고 클라우스가 왜 동부를 택했는지, 마왕의 신하가 되었는지 보라고 말이다.
“…이미 다 알고 계시다니, 편하게 말씀드리겠습니다. 인간들은 여전히 마족들을 겁내하고 있습니다. 누구는 받아들일 수 있다고 해도 또 누군가는 아닐 겁니다. 그 부분에 대해서 제가 임시적으로 그들을 보살피면서 마왕 전하의 지배에 적의를 품지 않았으면 합니다.”
“딱히 그럴 것도 없어. 자꾸 거슬리면 정복자 입장에서는 싹 다 치워버리는 게 간단하거든.”
그러자 다넬 키엔마이어와 다른 인간들의 표정이 굳어간다.
치워버린다는 말이 무엇이겠는가, 괜한 분란의 조짐은 모조리 죽여 없애겠다는 거다.
단순히 전쟁에서 적들을 죽이는 게 아니라 모든 것이 끝난 이후에도 학살을 감행하겠다는 소리와 다를 것이 없는 것이었다.
설마 정말로 그러실 거냐고 묻듯이 다넬 키엔마이어가 율리아를 바라본다.
그러자 율리아는 무척이나 차가운 표정으로 그를 쳐다보다가 곧 피식, 미소를 지었다.
“농담도 못 하겠군. 그렇게 쳐다보니까 말이야.”
“마, 마왕 전하.”
“나는 이곳을 단순히 약탈하기 위해서 찾아온 미친년이 아니야. 이 땅을 영원토록 내 후계자들에게 내어주기 위해서 노력하는 왕이지. 이 땅의 백성들이 모두 나의 백성들이 될 터인데 그들이 조금 불안해한다고 해서 왜 죽이겠어. 나를 해하려고 한다면 또 모를까.”
“…정말로 놀랐습니다. 갑자기 그런 말씀을 하셔서….”
“내가 약속하지, 다넬 키엔마이어. 비록 과정이 폭력의 결정체인 전쟁이기는 했지만, 그로 인해 영원토록 두 세상이 단절되는 건 원하지 않아. 나는 언젠가는 인간과 마족, 그리고 요정과 수인들이 그냥 생김새만 다른 이들이라고 여기면서 살아가는 걸 원한다. 그게 내 세상이길 바라면서 지금처럼 악귀가 되는 것이고.”
사실 율리아의 말은 헛된 꿈, 망상에 가까운 말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서부의 종족들과 동부의 마족들이 사이가 안 좋은 거야 당연하고.
요정과 수인, 인간들도 여전히 서로가 껄끄러운 상태다.
그럼에도 율리아는 참으로 당당하게 그 모든 종족들이 서로 갈등을 일으키거나 대립하지 않고 한 명의 왕 아래에서 지내는 것을 희망한다고 했다.
‘지금으로서는 무척이나 허무맹랑한 소리다. 전쟁으로 점철된 관계가 회복된다니, 어불성설이지. 하지만 미래는 아무도 모르지 않은가. 분열되지 않은 세상에서 점점 더 가까워진다면 정말로 그런 일이 이루어질 수도 있는 것 아닌가.’
다넬 키엔마이어는 그렇게 생각하다 말고 클라우스와 눈이 마주쳤다.
그러자 클라우스는 아주 미미하게 미소를 짓더니 마치 어떠냐는 듯 어깨를 으쓱해보였다.
내가 택한 왕이, 그리고 이제 네가 택하고 모실 왕이 가진 포부가 어떠냐는 질문.
“….”
그에 다넬 키엔마이어는 잠시 생각하다가 곧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다른 건 모르겠고, 일단 친구 녀석이 왕 하나는 참 잘 고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넬 키엔마이어.”
“네, 마왕 전하.”
“그대가 원하는 대로 해도 좋다. 단 어디까지나 나를 위해서, 그리고 내 백성들을 위해서 허락하는 것이니 그 어떤 부분도 두 경우에 위반하는 것을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명심하겠습니다.”
“허면 그대는 계속해서 그 키엔마이어라는 그대의 성과 땅을 지녀도 좋아. 기쁘구나, 왕국에서 클라우스를 이어서 또 다른 훌륭한 이를 거두다니.”
율리아는 그렇게 말한 후 최소한 하루 정도는 푹 쉬라고 말해두었다.
어차피 오래 쉬고 싶어도 얼마 가지 않아서 또 움직여야 할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