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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왕가 비선실세-270화 (270/341)

〈 270화 〉 26장 - 들불

가는 길에 왕국군이 몇 번 길을 가로막기는 했지만 카엘라 선에서 모두 정리가 되었다.

거의 대부분의 정예 부대는 전방으로 빠져있고 그나마 싸움에 능숙한 자들은 귀족 가문의 영지와 성을 지키느라 움직이지 못 하고 있는 상황.

때문에 나머지 이들로서는 가리고 가려 뽑아낸 동부 측 기병들에게 상대가 될 수가 없었다.

어렵지 않게 키엔마이어 후작령 인근까지 다다른 클라우스는 속도를 줄이자 제안했다.

적이 또 언제 뒤에 붙을지 모르는 상황에서 속도를 높이는 게 아니라 줄이자고 하니 병사들이나 중간급 지휘관들은 난감하다는 기색을 보였다.

세실리와 카엘라도 적의 추격을 우려하는 듯 했지만 율리아는 알겠다고 하면서 여기서부터는 말들도 쉴 겸 달리지 말라고 명령을 내렸다.

3천이 넘어가는 기병들이 내달리지 않고 그저 천천히 말을 움직이는 모습은, 마치 귀족 회의에서 기사들을 다 끌어 모아 행진을 하곤 했던 그런 분위기를 냈다.

바로 조금 전까지는 닿으면 베일 것 같은 느낌이 났다면, 지금은 그게 많이 가라앉았다.

“만약 그 남자가 항복을 하지 않는다면?”

조용히 이동하는 와중에 율리아가 슬쩍 다가와서 그렇게 물었다.

여태까지는 요새화된 도시나 거대한 성들을 되도록 피해 다닌 자신들이다.

마땅한 공성 장비 없이 성을 두드리는 건 어불성설이고 지금 자신들의 목적은 성을 떨어트리는 게 아니라 저들의 사기와 싸울 의지를 떨어트리는 것이다.

때문에 이제껏 성이나 도시들 근처로는 향하지도 않았지만 이번에는 다르다.

키엔마이어 후작이 항복을 하지 않는다면 급히 후작령을 벗어나거나.

그게 아니라면 한 번 두드려야 하는 일이 발생할 수도 있다.

사실 여태껏 왕국 후방의 곳곳을 헤집으며 아주 난리를 친 병사들이지만.

결국 그들도 피와 살로 이루어진 존재들이고 말도 역시 그러하니 휴식이란 게 필요하다.

언제까지 안장 위에서 꾸벅꾸벅 졸수도 없고 대충 건량으로 끼니를 때우는 것도 한계가 있다.

“슬슬 휴식이 필요한 때야. 계속되는 전투로 아닌 척들 하지만 다들 지쳤어.”

진입할 때는 4천에 가깝던 군단이었지만 계속 전투를 거치면서 숫자가 조금씩 줄었다.

부상자들도 있고 말들의 상태도 계속 살펴주어야 하니 중간 거점은 반드시 필요하다.

클라우스의 설명에 따르면 그 키엔마이어 후작령이 그런 역할을 한다는데.

그게 혹여 없던 일이 된다면 바로 차선책을 고려해야 할 수도 있음이다.

“걱정 마세요, 마왕 전하. 그 친구는 아마 고민을 끝냈을 겁니다.”

“그렇게 확신하는 이유라도 있나?”

“다른 자들과는 달리 멍청하거나 미련하지도 않고, 거기에 귀족이라고 해서 으스대는 걸 좋아하는 것도 아니며 무엇보다 제가 마왕 전하께 귀의한 이후 귀족들에게 알게 모르게 견제까지 당했으니까요. 제 친우였다는 이유로 말입니다.”

“…그러면 오히려 그대에게 악감정이라도 품을 수 있는 건 아닌가?”

“물론 그럴 수도 있겠지만 그렇다고 하기에는 그 친구가 여태 보아온 것들이 너무 많습니다. 말로만 영웅이지 실상 제가 왕국의 귀족들에게서 받던 대접을. 장담하건데 이번 전쟁이 서부 연합의 승리로 끝나면 귀족들은 무조건 저와 관련된 모든 것들을 박살내려고 할 겁니다.”

다넬 키엔마이어는 왕국의 귀족이다. 당연히 왕국을 위하는 마음이 크다.

하지만 그 결말이 얼마나 비참한지, 왕국에 충성을 바친 누군가가 어떻게 이용당하고 또 버려지는지 아주 제대로 두 눈에 담았다.

누구를 통해서? 바로 옆에 아주 좋은 예시가 있지 않았던가. 클라우스라는 예시가.

그런 이유로, 그래서 귀족들의 갖은 공격에도 끝끝내 버틴 클라우스였다.

자신이 얼마나 괴롭힘을 당하고 견제를 당하며 괴로워하는지 똑똑히 보여주었다.

네가 아무리 모든 걸 바쳐도 그 빌어먹을 귀족들은 끝내 너를 버릴 것이다.

오히려 너를 제물로 삼아 또 자신들의 도피처를 마련할 게 뻔하다.

네가 충성을 바쳐야 하는 왕국만 생각하지 말고 너를 바라보면서 뒤에 서있는 네 가족들과 사람들을 생각해라, 다넬 키엔마이어 후작.

어차피 그 귀족 머저리들은 조금도 이 왕국을 사랑하지 않아.

그저 진정 왕국을 위하는 자들을 잡아먹고 짓뭉개며 그 위에 서려고 할 뿐이지.

클라우스의 그 속내를 키엔마이어 후작은 확실하게 인지했을 것이다.

실제로 그는 클라우스가 여태 회차를 진행하는 내내 단 한 번도 항복을 거부한 적이 없었다.

어차피 그의 입장에서는 이제 길이 없다고 보는 게 맞다.

클라우스가 마왕과 함께 서부로 들어와 왕국을 박살내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만에 하나 서부 연합이 기적 같이 동부의 마족들을 상대로 승리한다면.

그 분노의 화살은 자신과 같은 클라우스의 지인들에게 향할 것이 분명했다.

“작게는 자신과 가족의 살길부터, 크게는 그 거대한 영지에서 지내고 있는 자들의 안전을 위해서라도 옳은 결정을 내릴 겁니다. 그 친구가 저에 대해서 잘 아니 서부 연합이 저라는 인간에게 어떤 방식으로 어떻게 박살날지 잘 알기도 할 테고요.”

“…그대가 확신을 하는 일에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고, 결국 그렇게 진행되었지.”

“일이 그렇게 흐를 수밖에 없도록 상황을 조성하고 이용했으니까요.”

그 말에 율리아는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여태까지 클라우스는 그런 방식으로 마치 미래를 보듯, 예언을 하듯 일을 진행시켰고 모든 것을 자신이 원하는 것에 들어맞게 이끌어냈다.

키엔마이어 후작 역시 그럴 것이라고 클라우스가 강하게 확신하고 있다니 더는 왈가왈부 할 필요성도 느껴지지 않았다.

이후 한 시간 정도 더 이동하니 저 앞에 꽤나 거대한 성의 모습이 드러났다.

과하게 호화스럽지 않으면서도 또 너무 수수하지도 않은, 적당하게 자신의 권위를 드러내고 있는 모습이 인상적인 곳이었다.

원래 이 정도 규모의 적들이 다가온다고 하면 당장 전투 준비로 소란스러워야 정상이다.

설사 상대방이 공성 능력이 전무한 집단이라고 해도 일단 성벽 위는 경계심이 가득한 병사들로 가득 차야만 하는 것이 당연하다.

그런데 성 가까이로 다가갈 동안은 물론이고 성벽 위가 명백히 보일 수준에 이르렀음에도 딱히 이쪽을 향해 살기나 경계심을 겨누고 있는 자들은 보이지가 않았다.

“전하. 혹시 함정일 가능성은….”

세실리가 슬그머니 율리아 옆으로 붙어 보호 마법을 전개할 준비를 한다.

클라우스를 먼저 챙기려고 움찔거리기는 했지만 그래도 클라우스가 눈치를 주기 전에 재빠르게 율리아에게로 관심을 돌린 덕분에 그런 불상사는 겪지 않을 수 있었다.

“키엔마이어 후작이 그렇게 유치한 수나 비겁한 짓을 벌일 자는 아닙니다.”

제 주인의 명에 따라 귀족들 사이에서 어느 정도 시간을 보냈던 카엘라가 그렇게 말했다.

귀족들 하나, 하나가 정말 세상에 다시는 존재하지 않아야 할 쓰레기라고 느끼던 그녀다.

그런 와중에 키엔마이어 후작은 그런 카엘라에게 인정을 받은 몇 안 되는 귀족이었다.

“카엘라 전사장, 그대가 그렇게 말할 정도면 괜찮겠지.”

“무엇보다 여기에 클라우스님이 끼어 있다는 건 이제 왕국 모두가 알고 있을 겁니다. 그 분의 친우인 키엔마이어 후작으로서는 생각을 잘 해야 할 겁니다.”

그나마 클라우스의 벗이라는 부분을 이용하여 동부 쪽에서 내민 손을 잡던가.

아니면 이전의 클라우스 마냥 이용당하고 버려질 각오를 하고서 저항을 한다던가.

솔직하게 말해서 무슨 선택을 할지는 예상이 가지만 그래도 만약이라는 게 있으니 조심한다고 해서 나쁠 것은 없었다.

율리아와 휘하 병사들이 조금 더 성으로 접근하자 갑자기 쿠궁! 하는 굉음이 들려왔다.

혹시나 해서 카엘라와 세실리가 전투 준비를 하려고 하는데 율리아가 그런 여인들을 손짓으로 말리고는 저쪽을 보라는 듯 손으로 한 곳을 가리켰다.

성 주변에 파둔 해자를 넘을 수 있는 유일한 통로, 도개교가 천천히 내려앉기 시작한다.

그 직후 굳게 닫혀있던 성문까지 열리면서 성에서 성벽보다도 더욱 중요하게 여겨지는 해자가 그야말로 완벽하게 무력화되었다.

“…전하. 성문 너머로 한 무리의 인간들이 나타났습니다.”

병사 중 하나가 그렇게 말하자 율리아는 옆에 있던 클라우스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뜻대로 하라는 듯 고개를 끄덕거렸다.

“클라우스. 자네가 가봐. 절친한 벗이라고 했으니 내 앞에 데리고 오는 것 정도는 괜찮겠지.”

“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마왕 전하.”

말에서 훌쩍 뛰어내린 클라우스는 혼자서 키엔마이어 후작을 맞이하러 갔다.

카엘라와 세실리, 그리고 플랑슈까지 같이 가고 싶어서 안달이 나있을 테지만.

병사들 앞에서는 철저하게 마왕의 신하로 있어야 한다는 부분을 계속 강조한 터라 그들 역시 혹 자신의 실수로 클라우스가 난처해지지 않도록 조심하고 있는 중이었다.

걸음을 계속 옮기니 키엔마이어 영지의 중심인 후작가 성이 눈에 가득 들어온다.

웅장하고, 고상하고, 무엇보다 귀족으로서 적당하게 품위를 지키고 있는 곳.

그리고 그곳의 주인인 다넬 키엔마이어 후작은 그 자신의 가문이 지닌 역사와 마찬가지로 꽤나 괜찮은 인물이라고 할 수 있었다.

마침내 서로의 얼굴이 다 보일 정도로 가까워지자 키엔마이어 후작은 자신을 따라오던 이들에게 손짓으로 여기서 멈추라는 뜻을 내비쳤다.

모두가 전원 비무장 상태, 거기에 성문이고 도개교고 활짝 열어두었으니 저항하거나 싸울 의사가 없음을 분명히 드러내고 있는 중이다.

당장 눈앞의 동부 마족들이 전원 기병인 것을 고려한다면 무슨 꿍꿍이를 지니고 이런 짓을 하려야 할 수가 없다고 볼 수 있었다.

“다넬 키엔마이어.”

클라우스의 부름에 혼자 앞으로 나선 키엔마이어 후작이 후우, 숨을 내뱉는다.

오늘과 같은 일이 벌어질 줄 알았다는 듯 크게 놀랐다거나 당황한 기색은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생각보다 조금 늦은 것 같은데. 클라우스.’ 라고 여유까지 부리기도 했다.

“아무래도 마음을 먹은 모양이지?”

“먹고 자시고 할 것도 없었다. 내 벗인 그대가 이런 식으로 왕국을 들이친 이상 내게는 선택권이 없었다는 걸 자네도 잘 알고 있지 않나.”

“나처럼 미련하게 왕국에 충성하는 방법도 있었는데.”

“그건 ‘클라우스’ 만 가능한 일이지, 나처럼 모호한 인간에게는 불가능한 일이야. 아무리 왕국이 중요하다고 해도 결국 내게는 내 가족, 내 영지민들, 그리고 나를 바라보는 모든 이들이 더 중요하지. 답은 이미 정해져 있었어. 다만 그 시기를 재고 있었을 뿐이지.”

“반가운 소식이네. 혹 네가 과거의 나처럼 미련한 선택을 할까 걱정했는데.”

“말했잖나. 그건 자네만 가능한 일이라고. 그래서, 우리의 ‘왕’ 께서는 어디 계시지?”

키엔마이어 후작의 질문에 클라우스는 옆으로 살짝 비켜서면서 뒤를 가리켰다.

말 위에 올라서 이쪽을 말없이 주시하고 있는 절세미녀가 시야에 들어온다.

그 눈길을 느낀 것인지 키엔마이어 후작이 후우, 하고 숨을 들이마신다.

아름다움도 아름다움이지만, 몸에서 흘러나오는 기세가 장난이 아니었던 것이다.

“저런 분이 왕이라면 참 좋을 것 같으면서도, 조금은 무섭군.”

“차라리 두려운 이를 따르는 게 나을 거다. 왕 같지도 않은 자를, 군주라는 이름이 부끄러운 것들을 따를 바에는 그게 나아. 너 개인적으로도, 그리고 네 사람들에게도.”

그 말에 키엔마이어 후작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클라우스를 따라 마침내 율리아의 앞에 다다랐을 때.

왕국 측에서 가장 권위 있는 가문 중 하나인 키엔마이어 후작가의 주인은 모든 것을 내려놓고 자신의 새로운 주인에게 정식으로 인사를 올렸다.

“신(臣) 다넬 키엔마이어. 마왕 전하를 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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