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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왕가 비선실세-269화 (269/341)

〈 269화 〉 26장 - 들불

클라우스와 율리아의 군단이 후방을 휘젓자 왕국은 말 그대로 난장판이 되었다.

가는 곳마다 적병들을 깨트리고 보급대를 철저하게 유린하는 동부의 군세.

혹시 후방에 위치한 유력한 귀족들을 노리는 것일까.

그게 아니라면 왕성을 공격하여 국왕과 왕족들을 인질로 잡으려는 것일까.

갖가지 상황들이 논의되면서 후방에 어느 정도 배치되어 있던 왕국의 병력들은 어디로 가야 할지, 어떻게 대응해야 할지 전혀 갈피를 잡지 못 하고 있었다.

원래라면 유력한 귀족들의 영지나 성을 쳐서 그들을 포로로 붙잡을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라면 사람들이 많이 살고 있으며 약탈할 물자도 풍족한 도시를 노릴 것 같았는데.

동부의 군세는 도저히 종잡을 수 없는 움직임을 보이며 사방을 찌르고 다녔다.

“이건 함정입니다. 클라우스는 평민입니다. 그가 노리는 건 오직 하나에요. 왕국에 전제적으로 불안감을 증폭시켜서 더는 전쟁 수행을 할 수 없도록 만들려는 겁니다!”

“맞는 말입니다. 지금 즉시 모든 병력을 끌어 모아 그들을 추격해야 합니다. 전투를 치르지는 않는다고 해도 최소한 그들이 보급선을 공격하지 못 하도록 해야 한단 말입니다!”

그래도 전황을 제법 볼 줄 아는 이들이 열심히 자신들의 주장을 펼쳤다.

대부분이 어느 정도의 세력을 구축한 중간 귀족들로 대륙 전쟁에서 소소하게나마 전공을 세웠다거나 패전이라고 해도 최소한 전투 경험을 지닌 자들이었다.

하지만 그들의 주장은 거의 대부분이 수용되지 않았다.

위급한 순간에 꼭 등장하는, 서열과 계급, 그리고 권위를 지키라는 멍청한 것들의 요구.

당장 그들 대부분이 대귀족 가문들이다 보니 더더욱 문제가 컸다.

거기에 더해서 ‘왕성을 보호하고 국왕을 지켜야 한다. 병사들을 빼내는 것이 클라우스, 그 배신자가 노리는 진정한 것이면 어쩌려고 하느냐.’ 라는 부분이 발목을 붙잡았다.

“클라우스는 영약한 놈이다. 국왕을 잡으면 전쟁이고 뭐고 끝난다는 걸 알고 있어. 이렇게 중구난방 식으로 공격을 감행하여 우리 병사들을 사방으로 흐트러트리고 그 사이에 왕성을 치려는 거다. 속아 넘어가면 안 돼! 굳건히 지키고 있어야 한다!”

“어리석은 생각입니다! 이렇게 우리끼리 시간을 낭비하는 이 순간에도 곳곳에서 보급대가 공격당할 것이고 왕국의 백성들은 우리들의 무능을 지켜보게 될 거란 말입니다!”

“곧 요정 측 원군과 수인 측 전사들이 왕국으로 들어온다. 그 때까지만 버티라고 하지. 아무런 희생도 치르지 않는 전쟁이 어디 있단 말인가!”

그 말에 제정신이 박혀있는 귀족들은 속이 터질 것 같아 가슴을 두드려야만 했다.

아무런 희생도 치르지 않는 전쟁이야 당연히 없다, 문제는 너희가 그 희생을 치르지 않을 뿐.

왕만 철저하게 지킨다고 해서 정말로 전쟁 수행 능력이 올라가기를 하나?

왕국이 이름만 왕국이지 사실상 귀족들이 좌지우지 하는 판국에 왜 이제 와서 왕을?

전쟁을 하는 것은 이 나라 전체가 해야만 하는 일이다.

이런 식으로 평민들이 왕국에 대한 모든 기대를 버린다면 더는 저항이 불가능하다.

지금도 전방에서 요새를 지키고 있는 병사들이 누구인가, 전부 평민들이다.

귀족들이 지휘를 하고 있다지만 그 평민들이 없으면 병사 없는 지휘관에 불과하다.

자신들의 집이 불타고 가족들이 위험하다는데 그들이 당장 눈앞의 싸움에 집중이나 할까?

눈만 감으면 집 걱정에 가족 걱정에 밤을 새다가 뜬눈으로 아침을 맞이할 것이다.

‘설마 이런 식으로 후방을 모조리 공격당할 줄은 예상치 못 했다.’

왕국의 후방은 곧 제국이고, 바로 위로는 요정과 수인이 자리하고 있다.

전운이 감돌자 두 종족은 바로 지원군을 보내겠다고 했고 동부의 마족들이 쳐들어오자 바로 그들 역시 군을 준비시켜서 진군시켰다는 소식이 날아왔었다.

즉 이제 일주일 안으로 왕국 안에 요정 측 원군과 수인 측 전사들이 들어오게 된다.

거기 하나에 희망을 걸고 있는 자들은 괜히 나섰다가 패하지 말고 그냥 얌전히 자리를 지키면서 그들이 클라우스와 마왕을 잡아주기를 기대하자고 했다.

그 말들을 들으면서 제정신이 박혀있는 자들은 땅을 치고 통곡해야만 했다.

이 땅은 요정이나 수인들의 영토가 아니라 왕국의 영토요, 왕국의 땅이다.

본인들이 가장 먼저 나아가서 패배하든 죽든 일단 나서는 모습을 보여야만 하는데.

그렇게 해서 대륙 전쟁 당시의 악몽에 몸을 떨고 있을 왕국 사람들을 안정시켜야 하는데.

하나는 알고 둘은 모르는 짓을 하고 있으니 속이 터질 것만 같았다.

병력을 움직이고 싶어도 너무 소수, 심지어 함부로 움직이면 전시이기에 반역.

뭐 하나 되는 것이 없는 상황에서 왕국은 철저하게 분열하고 또 분열되는 중이었다.

* * * * * * * * * *

“참 멍청한 자들이죠.”

잠시 쉬면서 말들을 돌볼 시간을 내어주는 클라우스.

미리 알아둔 은밀한 장소에 기병들을 숨겨두고 적의 정탐을 피해가면서 정확하게 보급로를 차단하고 전방으로 가려는 보급대를 요격하는 중이었다.

“전쟁에서는 내일 최선의 결정보다 오늘 차선의 결정이 더 중요한데 말입니다.”

“…그 말, 굉장히 마음에 와 닿네요.”

다른 병사들과 수하들은 전부 뒤로 물린 채 율리아는 클라우스와 단 둘 만이 있었다.

해서 다시금 평소의 말투로 돌아와서는 그리 중얼거리면서 그의 말을 깊이 새겨두었다.

내일 최선의 결정을 내리는 것보다, 오늘 차선의 결정을 내리는 게 더 중요하다고.

“이제 우리도 슬슬 전략을 바꿔야 합니다.”

“보급대는 아직도 많이 남았을 텐데요?”

“이제 슬슬 요정 측 원군과 수인 측 전사들이 올 시기가 되었어요.”

이미 모든 부분을 꿰고 있는 자신이지만, 그럼에도 요정 측 원군과 수인 측 전사들은 조커라고 불러도 모자람이 없을 정도로 강력한 수준을 자랑했다.

괜히 승리에 취해서 깝죽거리다가 거하게 한 번 털렸던 전적도 있을 정도.

왕국과 제국은 큰 문제가 되지 않지만 요정과 수인이 골치 아픈 부분이었다.

위기라고 하기에는 조금 모호하지만, 어찌 되었든 굳이 말하자면 위기라고 할 수 있을 거다.

“그들이 전투 준비를 마치고 제국을 지나 왕국까지 오는 그 기간을 노려서 큰 피해를 주었지만 어찌 되었든 우리 군단은 정규전이나 대규모 회전과는 맞지 않아요.”

“그렇죠. 회전에서는 진형이 무엇보다 중요한데 그게 불가능하니까요.”

율리아의 말대로 현재 자신과 클라우스가 이끄는 이 군단은 대규모 회전을 펼치기에는 무리가 있다고 볼 수밖에 없었다.

극한의 기동성을 위해서 거의 전원이 기병들로 이루어져 있는 상황.

당연히 단단한 진형을 갖춰줄 보병들이 거의 없는 것이 당연했다.

“하지만 이 정도로 끝내기에는 조금, 아니 아주 많이 아쉬운데.”

“그렇죠. 해서 이 다음부터는 우리들만의 힘이 아니라 다른 이들을 이용해야 합니다.”

“…또 준비해둔 수가 있다는 말인가요?”

율리아의 질문에 클라우스는 미소를 지으면서 두 곳을 가리켰다.

한 곳은 왕국 북쪽 근처에 있는 땅, 그리고 다른 한 곳은 왕성과 그리 멀지 않은 영지였다.

“일단 얼마 뒤에 차가르라 하는 인간 왕국 측 영지에서 대규모 반란이 일어날 겁니다.”

“반란이요?”

“네. 주동자는 로머스 차가르로 얼마 전부터 ‘귀족들은 선민 사상이나 우월함을 버리고 왕국의 다른 평민들과 함께 노력하고 증진해야 한다.’ 라고 주장하던 자였죠.”

“…잠깐만요. 방금 이름을 들어보니 평민이 아니라 귀족 같은데….”

“맞습니다. 차가르 가문의 자제이죠. 그쪽에서는 나름 부러울 것 없이 자란 도련님입니다.”

“그런 자가 왜 갑자기 반란을? 심지어 귀족들과 평민들의 평등을 외치면서요?”

인간 왕국의 귀족들이 보이는 멍청함을 익히 알고 있는 율리아로서는 당연히 황당할 수밖에.

당장 여기까지 전투를 하면서 정말 귀족다운 귀족은 손에 꼽을 정도로 적었다.

그나마 죽으면서까지 클라우스를 해하려고 하던 크렘이라는 귀족 가문 출신 기사나.

다른 몇몇 이들이 귀족의 이름에 먹칠을 하지 않은 수준이라고 할 수 있었다.

“조금 이상한 사상을 지니고 있는 귀족 자제입니다. 아카데미에서도 저런 이상한 사상으로 나를 가르치려고 했었죠. 어이가 없긴 했지만 아예 쓸모가 없는 건 아니라 약간의 가르침만 주고 그대로 돌려보냈습니다. 저런 녀석들이 나중에 아군이라고 보기는 모호해도 적을 괴롭히는 벌레 역할은 또 기가 막히게 하거든요.”

실제로 로머스 차가르는 꽤나 거하게 일을 벌인다.

딱 요정 측과 수인 측 원군이 들어올 시점에 자신의 동지들과 자신을 지지하는 평민들을 데리고서 썩어빠진 왕국을 갈아엎고 평민들을 위한 세상을 만들자나 뭐라나.

당연히 반역자로 간주되어 수인과 요정, 두 종족 연합에게 깨끗하게 갈려나간다.

적을 분쇄하기 위해 전문적으로 훈련된 군이 그냥 여기저기서 모인 자들을 상대로 질 수가 없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포부만 거창했지 뭐 하나 제대로 한 게 없는 놈이라고 볼 수도 있었지만… 웃기게도 놈의 죽음과 실패가 내가 붙인 불길에 기름을 붓는 꼴이 되었거든.’

매번 탄압만 당하던 평민을 위해 왕국 북쪽의 귀족이 일어섰는데, 그 귀족을 또 다른 귀족들의 사주를 받은 요정과 수인이 죽였다.

이렇게 살다가는 정말 자신들도 더는 살아갈 수가 없을 것이다.

도와준다고 와서는 왕국의 사람들을 해치는 요정과 수인, 그리고 자신들이 무슨 피해를 입든 전혀 관심이 없는 귀족이라는 머저리들.

그들을 믿느니 차라리 다른 자에게 기대는 것이 좋을 수도 있다.

한계를 직시하고 때마침 왕국 안으로 들어와 온갖 난리를 치고 있는 동부의 왕에게.

그리고 그 왕을 따르고 있는 과거 대륙 전쟁의 영웅에게 말이다.

“아무튼 로머스 차가르는 알아서 일어섰다가 알아서 무너질 겁니다. 그게 또 도움이 되니 좋고요. 그리고 남은 하나는….”

클라우스가 가리킨 곳은 왕국의 중심에서 조금 떨어진 곳.

꽤나 방대한 넓이를 지닌 영지이며 나름 평민들이 잘 살고 있는 유일한 안식처이기도 했다.

“이곳, 키엔마이어 후작령이 될 겁니다.”

“키엔마이어 후작령이라면…. 저번 대륙 전쟁에서 나름 활약한 인간 귀족 아닌가요?”

“맞습니다. 대귀족들 중에서는 유일하게 승전을 여러 번 이끈 인물이기도 하죠.”

“기억나네요. 이전에 전략 회의를 하면서 왕국 측에서 주의해야 할 인물 중 하나라고 보고가 들어왔던 적이 있었죠. 그런데 그 키엔마이어 후작령이 또 하나의 중요한 부분이라고요?”

율리아의 질문에 클라우스는 미소를 지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사방에서 말 그대로 난리가 벌어지고 있는데 여전히 다넬 키엔마이어는 침묵하고 있다.

병력 중 절반 이상을 전방으로 돌렸다고는 하지만 여전히 거느린 사병이 있다.

멍청하기 짝이 없는 여타 귀족들과는 다르게 전황을 보는 눈도 있으니 단순히 제 성과 영지를 지키는 게 아니라 적절한 곳에 방어선을 치고 보급선을 유지하려고 하는 게 정상이었다.

하지만 그는 제 영지에서 움직이지 않고 있다.

설마 그 남자도 다른 귀족들처럼 그저 요정과 수인들이 알아서 정리해주기를.

자신의 영지를 피해 없이 지키고 싶어서 그러는 것일까?

‘아니, 천만에. 그 친구도 이제 깨우친 거지. 가라앉는 배에 제 사람들을 두는 걸 고집하다가는 전부 물고기 밥이 될 거라는 사실을 말이야.’

전쟁 준비를 바라보면서 희망을 가졌던가? 포기해라. 아무리 용맹한 병사라고 해도 그걸 지휘하는 자가 겁쟁이라면 결국 겁 많은 군대가 될 뿐이다.

그걸 깨우친 다넬 키엔마이어 후작은, 더는 왕국의 일원으로서 살아가는 것이 제 사람들을 위한 것이 아님을 깨달은 그 남자는.

새로운 군주를 향해 무릎을 꿇고 충성을 맹세할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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