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67화 〉 26장 - 들불
“보고 드립니다! 동부 마족들의 군세가 현재 왕국 국경을 돌파하여 계속 진격 중입니다!”
“중앙 지역에서 소규모 교전이 있었던 듯 합니다. 정찰을 나섰던 부대와 연락이 닿지 않고 있으며 전령을 보내 봐도 답이 없습니다.”
“방금 들어온 소식입니다. 남부로 들어온 마족들이 공성전에 돌입! 현재 격전 중이랍니다!”
1차 대륙 전쟁과 별반 다를 것이 없는 진행이었다.
중앙과 남부를 공략하여 길을 내고 중간 거점을 마련하여 전쟁을 속행한다.
이후 간판만 제국인 땅덩이마저 모두 먹어치우고 요정들의 숲을 지나 수인들 영토까지.
단숨에 쳐들어가서 아무 것도 하지 못 하게끔 만드는 것.
마족들의 전술이 이와 같았기에 서부 연합 측은 그에 맞는 전력들을 내놓았다.
“대규모 회전은 피한다. 현재 적이 어떻게 나설지, 그리고 누가 포함되어 있는지도 모른다.”
클라우스의 위치가 아직 파악되지 않았다, 그 부분이 서부 연합 측으로는 가장 부담이 되는 문제였다.
중앙과 남부, 두 곳 모두 중요하기에 여태껏 잘 조련된 병사들을 배치해두었다.
문제는 그들 중 다수가 과거 1차 대륙 전쟁에서 활약한 이들.
그게 아니면 그 고참병들의 훈련을 받아 성장한 또 다른 세대들이었던 것이다.
그 병사들 앞에 클라우스가 갑자기 떡, 하고 나타난다면 그보다 난감한 일은 없다.
자신들의 지휘관이자 전우이고 또 은인기도 한 남자가 전투가 바로 벌어지기 직전에 나타난다면 사기 부분에서 큰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다.
수성전이라면 차라리 나을 수도 있으나 군대와 군대가 마주하는 회전에서는 피해야 한다.
조그마한 사기 변화도 어떤 방식으로 변화를 줄지, 그리고 그 변화가 어떤 변수가 되어서 아군을 엉망진창으로 만들지 모르니까 말이다.
“남부는 굳건하게 버티고, 중앙은 과하게 저항하지 않으면서 계속 적들을 유인한다. 조만간 요정 측 원군과 수인 측 지원병들이 도착한다. 그렇게 되면 자신들도 모르는 사이에 형성된 돌출부를 우리가 역으로 포위하여 한 번에 잡아먹는 거다.”
아무리 중앙의 마족들이 돌파하고 또 돌파해서 들어온다고 해도.
남부의 방어선만 무너지지 않으면 반쪽 짜리 공격에 불과한 수준에 그치게 된다.
그리고 남부는 클라우스가 온다고 해도 쉽사리 무너지지 않을 정도로 수준이 높다.
병사들이 기대한 만큼 잘만 싸워준다면 요새를 단 한 개도 내어주지 않고 전쟁을 고착화시켜 마침내는 마족들이 제풀에 주저앉게 만들 수도 있다.
그렇게 남부의 적들은 붙잡아두고 중앙의 적들만 들어오게 한다면.
비어있는 옆구리를 사방에서 후려치며 허리를 완전히 끊어버릴 수도 있다.
일이 그리만 흘러가 준다면 서부 연합은 왕국의 영토를 단 일말이라도 내어줄 필요가 없이 성공적으로 적들을 막아낼 수 있었다.
그리고 그들의 기대대로, 시간이 흘러도 마족의 군세는 남부를 도통 뚫어내지 못 했다.
요새 한 개가 함락되기는 했지만 그게 전부였고 그마저도 천 여명이 간신히 주둔 가능한 작은 곳이었기에 왕국 입장에서는 일주일을 넘게 버틴 것이 용하다고 생각할 정도였다.
“중앙 지역에 대한 보고는?”
“뒤로 계속 조금씩 물러나주니 좋다고 달려들고 있습니다. 이대로 가면 보급로가 너무 길어져서 제 풀에 주저앉을 수밖에 없을 겁니다.”
“저번 전쟁으로 교훈을 좀 얻은 줄 알았더니 역시 마족은 마족이군. 보급로 문제로 결국 패했다는 걸 뻔히 알고 있으면서도 이렇게 깊이 들어오다니.”
“아무래도 진격을 하면서 우리 측 물품들로 조달을 하려고 했던 모양입니다.”
전령의 말에 홈부르크 자작은 좋다는 듯 미소를 지었다.
귀족 회의에서 화려한 언변으로 원래 지닌 작위보다도 더 대단한 위세를 지닌 인물.
요제프 대공이 특히 신뢰하는 귀족으로서 이번 전쟁에 꽤나 높은 지휘관으로 발탁되었다.
물론 그가 군공이 있다던가, 아니면 능력이 있어서 앉은 건 절대 아니다.
전쟁에 대해서는 길을 지나가는 꼬마 수준만큼의 능력만 지니고 있는 홈부르크 자작이다.
그나마 괜한 잘난 척을 부리기 위해 고집을 부린다거나, 부관들의 말을 무시하고 제멋대로 행동하는 그런 돌대가리는 아니었기에 다행이었다.
홈부르크 자작은 무리를 하지 않는 선에서, 그리고 계획을 지키는 안에서 움직였다.
괜한 실수나 욕심은 이득보다는 손해가 더 많음을 알고 있기에.
요제프 대공도 그런 자작의 속내를 알고 있기에 군사적 재능이 없음을 알면서도 이렇게 지휘관을 맡길 수 있었다.
“자작님. 이렇게 된 거 중앙 쪽으로 몰려든 마족 놈들을 한 번 공격하는 게 어떨런지요.”
“나쁘지 않은 의견입니다. 저들도 슬슬 남부의 소식을 전해 들었을 테니 어떻게 발을 맞추기 위해서라도 속도를 늦추려고 할 겁니다. 그걸 방지하기 위해서라도 미끼를 한 번 던지는 것이 좋지 않겠습니까?”
“아니. 괜한 짓 하지 마라. 어중간한 미끼를 던지면 더 의심을 할 거야. 그냥 더는 물러서지 않겠다는 듯 자리만 굳건히 지키고 있어. 어차피 장기전으로 가면 불리한 쪽은 마족 놈들이야. 괜히 어울려줄 필요는 없다.”
요제프 대공이 홈부르크 자작에게 이런 중책을 맡긴 이유.
비록 말은 좀 가벼울지 몰라도 생각까지 가볍지 못 한 이는 아니었다.
진중해야 할 때를 알고 있기에 화술 하나로 요제프 대공의 근처까지 올 수 있었다.
그리고 그 부분은 이런 곳에서도 적절하게 발휘되고 있었다.
“우리는 원래 계획대로 중앙에 적들을 적당한 위치에 붙들어 놓는 데에 열중한다. 그러다가 만에 하나 남부가 위험해지면 바로 구원 병력을 보낸다. 클라우스는 반드시 남부 지역을 노릴 거야. 그곳이 왕국의 목줄이기도 하면서 동시에 본인을 지지하는 세력들이 가장 많으니까. 그 반역자 놈은 자신의 이름을 이용해서 병사들을 동요시킬 게 분명해.”
“정말로 그런다면 문제가 크지 않습니까?”
“해서 일부러 대륙 전쟁 당시의 고참병들은 비교적 후방에 배치했지. 그들에게 훈련을 받았으면서 딱히 클라우스라는 이름에 크게 영향을 받지 않은 자들이 전방에 있고 말이다.”
“…솔직히 말씀 드리자면 걱정이 되기는 합니다. 당장 클라우스, 그 자의 이름만 나와도 눈빛이 돌변하는 자들이 많지 않습니까.”
부관의 말에 홈부르크 자작은 욕설을 내뱉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대륙 전쟁이 끝난 지가 언제인데, 아직도 빌어먹을 평민들은 여전히 클라우스를 존경했다.
그 존경이 어찌나 깊은지 그가 동부로 넘어갔다는 소식에 배신자라고 욕설을 퍼붓는 게 아니라 오히려 그를 쫓아냈다고 귀족들을 향해 고함을 지를 정도였다.
그렇지 않아도 전쟁이 발발하기 직전에 국경 인근에서 또 다시 한 무리의 왕국민들이 동부로 넘어간 부분 때문에 난리가 났었는데, 그 생각을 하니 홈부르크 자작은 분노가 치솟았다.
하필 그들 대부분이 과거 1차 대륙 전쟁의 생환병들, 그 중에서도 대부분이 남부에서 활약했던 병사 출신들이었던 것이다.
급히 추적을 보냈으나 때를 맞춰 동부에서 기병들이 달려나와 그들을 맞이했다.
덕분에 왕국은 결국 그들을 붙잡거나 죽이지도 못 하고 돌아와야만 했다.
단순히 병사들이 넘어간 수준이 아니라 이쪽의 사정을, 그리고 지리와 길 안내가 가능한 자들이 넘어갔다는 것이 너무나 뼈 아픈 손실이었다.
그 일만 떠올리면 절로 이가 갈리는 홈부르크 자작이었다.
“절대 그런 일이 없어야 한다. 그래서 더더욱 굳건히 지키려고 하는 거야. 아무리 클라우스라고 해도 방어 준비가 완성된 요새를 뚫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그의 실패를 목격하면 평민 잡것들도 서서히 생각을 바꿀 것이다.”
“정말로 그러겠습니까?”
“당연하지. 인간들은 영웅의 성공담보다 실패하는 모습을 더 즐기는 것들이야. 평민과 같이 추한 것들은 더더욱 그러하지! 내가 장담하는데 그놈들은 클라우스가 끝내 우리들의 방어선을 넘지 못 하는 순간, 바로 돌변해서 배신자라고 떠들면서 창칼을 들 것이야.”
클라우스가 그들의 영웅인 것, 대륙 전쟁 당시 왕국의 수호자였다는 것, 당연히 인정한다.
하지만 동시에 클라우스는 동부로 넘어간 배신자다.
심지어 동부의 마족들은 과거 대륙 전쟁 당시에 왕국의 수많은 병사들을 해친 자들이다.
아무리 클라우스를 좋아한다고 해도 제 부모형제, 친척들과 친구들을 죽인 자들에게 붙어먹고 있다는 소리를 계속 듣는다면 과연 언제까지 그게 지속될까.
정치는 이렇게 하는 것이다, 상대방의 약점을 물어뜯고 놓아주지 않는 거다.
홈부르크 자작이 왜 안정적인 상황을 고집하는가. 바로 그 부분을 위해서다.
이번 전쟁에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클라우스의 영향력을 지워내는 것이다.
여전히 그 남자를 그리워하는 놈들이 있다면, 그들에게 클라우스의 실패하는 모습을 보여주면서 너희가 그리 믿었던 자가 결국 아무 것도 다를 게 없는 똑같은 평민이라고 일러주면 된다.
저 남자가 잘나서 이긴 것이 아니라 너희가 희생해서 이긴 거다!
우리가 다 함께 고생, 고생해서 이겨낸 전쟁을 저 놈이 마치 전부 제 공인 것 마냥 날름 집어삼키고 실컷 이용하더니 급기야 배신을 하고 동부로 도망쳤다!
이렇게 말한다면 아마 열에 아홉은 결국 넘어올 것이다.
클라우스가 패배하는 모습까지 보여 진다면 더할 나위 없는 최고의 그림이다.
홈부르크 자작은 그렇게 생각하면서 왕국 지도를 확인했다.
“지금 정해져 있는 이 선을 무조건 사수한다. 후방에서 병력들이 도착하면 그 때 조금씩 밀어낸다. 무리할 필요 없다. 오히려 우리가 이렇게 무리하는 걸 놈들이 노리고 있을 수도 있어.”
전략이 정해지자 모두가 고개를 끄덕이면서 자리에서 흩어졌다.
혼자 남게 된 홈부르크 자작은 조소를 머금으면서 현 상황을 살폈다.
적들은 대륙 전쟁의 모습을 재현하고 싶을 테지만, 클라우스라는 카드를 어떻게든 이용하고 싶을 테지만 어림도 없는 일이다.
자신들이 병신들도 아니고 그 당시의 악몽을 재현하게 놓아둘까.
한 달, 한 달 동안 승기를 내주지만 않으면 이 전쟁은 반 이상은 서부의 승리다.
저들의 날카로운 공세가 얼마 먹히지 않는다는 걸 확인하면 고개를 갸우뚱거리던 평민들은 결국 자신들을 지지할 것이고, 반대로 마족들은 제 왕을 의심할 것이다.
‘클라우스. 멍청한 놈. 네가 잘났다고 생각하나? 네놈이 다른 평민 잡것들보다야 조금 낫다고는 할 수 있겠지. 하지만 그 잘난 부분을 죄다 빼앗아버리면 그만이야. 남쪽을 뚫을 수 없게 만들고 당시와는 비교도 안 되게 서부 연합의 단결력이 좋다면. 과연 네놈은 어떻게 응할까.’
그렇게 속으로 전쟁 영웅이라는 남자를 비웃으면서 막 자리에서 일어나려던 순간이었다.
갑자기 한 전령이 거의 구르듯 막사 안으로 들이닥치더니 숨조차 제대로 고르지 못 한 채로 입을 열었다.
“자, 자작님! 자작님!! 크, 큰일입니다!”
“뭐야. 설마 남부가 밀리기라도 했나?”
“아닙니다. 남부가, 남부가 문제가 아닙니다! 후방이, 왕성 일대와 왕국 중심의 일대 영지들이 적들의 공격에 속속들이 떨어지고 있다는 소식입니다!”
“…뭐?”
아닌 밤중에 홍두깨라고 했던가.
홈부르크 자작은 전혀 예상치 못 한 상황에 그저 두 눈만 껌뻑였다.
후방이 왜 쑥대밭이 되어 가고 있단 말인가?
중앙의 적들이 비록 돌출부를 마련했다고 하지만 극히 일부이고.
남부는 아직 요새들이 다 멀쩡한 상태로 남아있는데?
“그게 무슨, 똑바로 말을 해! 갑자기 왜 후방이….”
뭔가 잘못 되었다, 이럴 수가 없다. 이럴 수가 없….
“…설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