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66화 〉 26장 - 들불
클라우스와 율리아, 그리고 그 휘하 이들이 북쪽의 대삼림을 돌파하던 그 순간.
먼저 국경을 넘어선 동부의 본대는 두 갈래로 나뉘어 빠르게 진격했다.
중앙을 맡은 이는 공격적인 면모가 강한 에슐리 팔라티나트가.
남부 지역을 맡은 이는 1차 대륙 전쟁에서 무난한 활약을 한 페르디난트 엘세가 맡았다.
특히 페르디난트 엘세는 이전 전쟁에서 서부 연합 측에 꽤나 강렬한 인상을 남긴 마족이었기에 그가 남부로 온다는 소식이 들리자 지역 방어가 더욱 중요해졌다.
1차 대륙 전쟁에서 왕국이 점령당하지 않고 끝끝내 버틴 이유는 남부의 생존 덕분이었다.
남부에서 올라오는 자원, 특히 식량이 큰 힘이 되었고 마족들은 왕국 남부의 풍부한 자원을 단 하나도 제대로 사용하지 못 하게 되었다.
거기에 남부를 무시하고 진격하자니 후방이 위태롭게 되어서 보급로도 흔들렸다.
마족들은 일단 남부를 두고 다른 곳부터 어떻게 무너트리고자 했다.
클라우스라는 강대한 벽을 넘지 못 해서 ‘우회’를 택한 것인데.
그 우회가 절대 해서는 안 될 가장 치명적인 행동이었던 것이다.
“남부는 무조건 막아야 합니다.”
“모든 정병들을 그곳으로 배치해서 아예 차단하세요. 그래야만 합니다.”
과거의 기억이 아직 남아있기에, 어떻게 이겼는지 확실히 알고 있기에.
왕국 지휘부는, 그리고 서부 연합은 가장 먼저 왕국 남부를 틀어막고자 했다.
중앙 역시 중요한 곳이지만 그곳은 워낙 평야가 넓고 길도 많아서 한 번에 막는 것이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곳이다.
그에 비해서 남부는 중요한 길목이 정해져있고 그곳만 막는다면 어렵지 않게 버틸 수 있으니 먼저 남부 방어를 공고히 해놓고 중앙으로 밀고 들어오는 동부의 돌출부를 하나씩 깎아내면 될 것이었다.
이런 동향은 곧 동부 측에도 전달되었다.
그리고 남부를 맡게 된 페르디난트 엘세는 그럴 줄 알았다는 반응을 보였다.
“페르디난트님. 적이 각 요충지마다 방어 준비에 들어갔다고 합니다.”
“과거의 성공 기록이 있으니 거기서 벗어나고 싶어 하지 않겠지.”
남부만 방어하면 된다, 왜 과거를 버리지 못 하고 계속 거기에 얽매여 있느냐.
그게 과거 성공한 적이, 그것도 아주 대성공을 한 전적이 있으니까.
성공한 자는 변화의 바람을 무서워한다, 그게 실패로 이어지는 길이라고 생각한다.
잘못된 것이 아니다 오히려 지극히 바람직한 자세라고 할 수 있다.
다만 그때와 달라진 부분이 있다면 당시의 지휘관이었던 클라우스가 없다는 것.
그리고 동부 역시 머저리들은 아니라 남부의 방어가 가장 단단할 수밖에 없음을 잘 알고 있다는 것이었다.
“속도를 올리지 않고 이대로 계속 움직인다.”
“페르디난트님. 아직 최전방의 요새들은 준비가 덜 되어 있을 수도 있습니다. 남부로의 진입로를 확보하기 위해 일단 빠르게 이동해서 요새 하나 정도는 손에 넣는 게 좋지 않겠습니까?”
“그것도 좋은 의견이지. 하지만 우리들의 목적은 남부 돌파가 아니다. 적들의 시선을 최대한 이곳에 붙잡아두는 거지.”
“허면 더더욱 요새들을 계속 함락하는 것이 좋은 방법 아닐까 싶습니다만.”
부관들의 말에 페르디난트는 그게 맞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서부 연합 전체의 시선을 이곳에 붙잡아두기 위해서는 그들의 말대로 차라리 요새들을 여러 개 떨어트리고 그 다음 공격에서 시간이 끌리는 모습을 보이는 게 나았다.
사실 페르디난트도 그 부분을 가장 먼저 고려했었다.
해서 율리아의 전략을 듣자 여기 있는 부관들처럼 차라리 폭풍처럼 몰아쳐서 요새 두 세 개를 떨어트리고서 시선을 끄는 게 낫지 않겠냐고 의견을 내놓기도 했다.
- 내 말대로 해라, 페르디난트 엘세. 그대가 할 일은 남부로 들어가는 우리 군의 전력을 최대한 보존하는 거야. 공을 세우고 싶다면 미안하지만 조금 참아주길 바라지. -
공에 대한 욕심이 없는 것은 아니다, 당장 자신도 무장이 아닌가.
하지만 그 욕심에 눈이 멀어 왕의 명령을 어길 정도로 미련하지는 않다.
율리아는 그 클라우스가 제 왕으로 인정하고 뒤에서 물심양면으로 돕고 있는 분이다.
그의 선택에는 합당한 이유가 있을 터이니 믿고 따르는 게 맞았다.
“모두가 계획의 일환이다. 부관들은 그렇게 알고 준비하도록.”
“알겠습니다.”
“예비대를 두고 있다가 축차 투입하면서 전방 요새들이 최대한 지치게 만들어라. 포위되었다는, 더는 지원도 없을 거라는, 버려졌다는 생각이 들도록.”
그렇게 말한 페르디난트와 휘하 부관들이 남부로 막 진입했을 그 시점.
왕국의 중앙 지역으로 난입한 에슐리 팔라티나트는 페르디난트와는 다르게 맹렬하게 왕국군들을 몰아붙이는 중이었다.
첫 전투는 소규모 병력끼리의 교전이었는데 처음에는 각 부대의 정찰대들끼리 싸우던 것이 곳 선발 부대들이 도착하면서 전투의 규모가 꽤 커진 것이었다.
“몰아붙여! 한 놈도 달아나게 둬서는 안 된다!”
“산개하라! 벗어나! 전장을 벗어나라!!”
시간이 지나자 승패는 명확하게 갈렸다.
이미 위력 정찰을 목적으로 하고 있던 동부 마족들에게 왕국군이 쫓기기 시작한 것이다.
원래 전투에서 가장 치명적인 피해는 전투에서 패하여 퇴각할 때 생긴다.
해서 비록 전투에서 져도 병사들을 잘 제어하여 안전하게 뒤로 데리고 온다면 뛰어난 지휘관이라고 부를 수 있을 정도.
그런 부분에서 볼 때 현재 왕국군을 지휘하는 지휘관은 영 형편이 없다고 해야만 했다.
우르르 산개하여 사방팔방으로 도망가는 왕국군들.
훈련은 잘 받았다는 것이 느껴진다, 당장 개개인이나 소수가 모여서 항전하는 장면을 보고 있으면 아무 것도 모르는 자들을 징집하여 쓰는 건 아님을 알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전투는 병사 개개인, 혹은 그들 몇 명이 모여 만든 소규모 집단으로 하는 게 아니다.
최소한 몇 백, 몇 천이 모여서 그와 비슷한 숫자의 적을 상대로 싸우는 일.
당연히 전장을 넓게 보면서 시시각각 변하는 상황에 맞춰 명령을 내릴 이가 필요하다.
안타깝게도 인간 측 지휘관인 귀족 남자는 그러지 못 했다.
그리고 반대로, 동부 마족의 에슐리는 그런 부분에서 월등히 뛰어났다.
“산개하여 도망치는 놈들을 일부러 쫒지는 마. 놔두고 저기 도망치는 지휘부부터 무조건 추적해서 본대와 합류하기 전에 다 잡아들인다.”
“예! 추격! 추격하라!”
부관들에게 명령을 내리면서 에슐리는 진격하기 전 율리아와 나누었던 말을 떠올렸다.
- 전장에서는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르니 그곳으로 나아가는 지휘관들에게 뭔가를 미리 말하는 것은 의미가 없는 짓들이 대부분이지. 하지만 그럼에도, 한 가지는 분명히 말해두고자 한다. 가능하다면 서부 연합의 병사들을 과하게 살생하지는 마라. 대신 적의 지휘부는 가능하다면 반드시 붙잡아서 그들의 실체를 적들에게 낱낱이 공개하는 데 쓰도록. -
처음에는 그게 무슨 이유에서 나온 명령인가 싶었다.
적병들이 전투에서 한 번 살려준다고 감격하여 돌아서는 자들도 아니고.
살려준다면 후일 다시 적 병력의 하나가 되어서 돌아오거나 그게 아니더라도 후방을 교란하는 게릴라들로 활동할 가능성도 무척 높다.
원래라면 그런 명령을 내리는 이유, 그리고 따를 수 없는 경우에는 어떻게 하냐는.
그런 질문을 했을 것이라고 에슐리는 생각했다.
하지만 이번 전쟁의 목적을 율리아가 한 번 언급한 적이 있었다.
‘이건 단순히 이득을 좆는 투쟁이나, 복수심에 사무친 싸움이 아닌, 대륙을 통일하기 위핸 가장 거대한 전쟁이 될 것이라고 하셨지.’
정말로 가능할지는 모르겠지만, 여전히 자신은 그 가능성이 낮다고 생각하지만.
만에 하나 정말로 대륙을 통일하게 된다면 가장 중요한 것은 서부의 민심 안정이다.
그리고 그 부분을 생각하자면 그 근간을 이루는 이들의 마음부터 사는 게 좋았다.
‘…하지만 그렇게 생각해도 필요한 순간, 어쩔 수 없는 때에는 적병들을 모두 쓰러트릴 수밖에 없을 거야. 마왕 전하께서도 그 부분은 이해해주시겠지.’
내 명령을 따르되, 그로 인해 내 병사, 내 백성들이 다친다면 관둬라.
율리아의 그 다음 말을 떠올리면서 에슐리는 반항하지 않는 자는 죽이지 않되 자꾸 반항하면서 시간을 끄는 자들에게는 자비를 베풀지 말라고 했다.
그렇게 에슐리의 중앙군이 왕국의 중앙 쪽으로 파고드는 데에 성공했다.
남부와는 다르게 견고한 요새가 몇 없는 지라 왕국 측에서도, 그리고 서부 연합에서도 어느 정도 예상을 하고 있었을 것이다.
펄럭!-
왕국 영토 내부로 진입하자 에슐리는 바로 페르디난트 쪽으로 소식을 알렸다.
자신들은 준비가 되었고, 이제부터 본격적으로 거대한 망치가 떨어지는 순간까지 굳건하게 버틸 준비가 되었다고 말이다.
“…드디어 시작이군.”
에슐리의 소식을 접한 페르디난트는 앞에 보이는 요새를 바라보며 그렇게 중얼거렸다.
언뜻 보자면 자신과 에슐리의 병력이 이 전쟁의 향방을 가르는 군세처럼 보일지 모르지만.
실상은 그저 저 뒤에서 떨어질 뭔가를 기다리고 있는 모루일 뿐이었다.
- 클라우스. 왜 자네가 남부로 가지 않는 거지? 그곳은 자네의 앞마당과 같은 곳이잖나. -
출전하기 얼마 전, 페르디난트는 그렇게 말했다.
자신도 물론 남부에서 싸운 경험이 있지만 클라우스만큼 그곳의 지리나 요새들의 상황, 그리고 더 나아가 그곳을 지키고 있는 지휘관부터 말단 병사까지 잘 알지는 못 한다.
남부만 빠르게 제압할 수 있다면 전쟁이 전보다 훨씬 더 쉬워질 텐데.
왜 갑자기 자신은 중앙도, 남부로 아닌 다른 곳으로 향하겠다는 것인지.
- 나도 이해를 할 수가 없네. 당신이 앞에 나서야만 왕국이 흔들릴 거야. 그걸 노리고서 여태껏 전쟁을 준비한 게 아니었어? -
에슐리 역시 페르디난트와 똑같은 의견을 제시했었다.
지금 왕국군의 주축을 이루고 있는 자들 중 다수가 클라우스와 같이 싸운 자들, 그게 아니더라도 영향은 많이 받은 자들이다.
그가 앞에 나타나서 항복하라고 제안을 한다면, 받아들일 수도 있을 것이다.
헌데 그 일을 가능하게 할 수 있는 남자가 가장 중요한 곳으로 생각되는 중앙과 남부, 어느 곳 하나도 맡지 않겠다고 한다.
이러니 두 마족 입장에서는 황당할 수도 있었다.
- 페르디난트 엘세, 에슐리 팔라티나트. -
그런 말이 나올 줄 알고 있었다는 듯, 클라우스는 미소를 지으면서 천천히 입술을 열었다.
- 내가 앞에서 항복을 종용하면 확실히 나쁘지는 않겠지. 하지만 그 뒤에 있는 놈들이 죄다 멍청한 놈들은 아니야. 어떤 식으로든 항복을 막으려고 할 테지. 그리고 일단 버티면 지원군이 계속 당도할 테고. 그리 되면 무엇을 어떻게 하든 결국 전쟁은 패배한다. -
클라우스는 그렇게 말한 후 갑자기 왕국 뒤쪽을 가리켰다.
- 반대로, 내가 갑자기 뒤에서 튀어나와 목덜미에 칼을 들이댄 채 인사를 한다면. 앞에는 너희 둘이 이끄는 마족 군대가 있고 뒤로는 한 때 자신들이 따랐던 지휘관이 있다면. 마침내 자신들이 사방으로 포위되었음을 깨닫는다면. 그 때는 어떠려나. -
북쪽 대삼림을 지나 왕국의 후방 지역을 시작으로 이리저리 움직이는 클라우스의 손.
마침내 그 손끝이 주전장이 될 것으로 예상되는 중앙과 남부의 요새들에서 멈췄을 때.
페르디난트와 에슐리는 비로소 그가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지 알게 되었다.
- 이건 단순히 왕국 남부 좀 먹고 끝내는 전투가 아니야. 서부 전체를 집어삼키는 일이지. 4주 안에 왕국을 무너트리고 남은 지역들도 5개월 안으로 끝낸다. 그게 목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