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65화 〉 25장 - 서막이 오르다
“…클라우스, 솔직히 말해 봐요. 혹시 이 루트로 동부를 공격하려던 거 아니었나요?”
“설마요. 당장 이 반대편에 뭐가 있을 줄 알고요. 그리고 마왕 전하? 여기서는 평소 하던 대로 하시면 안 될 텐데요?”
“아, 미안해요. 아니, 내 실수네. 아무튼, 클라우스? 대단하네. 누가 봐도 길이라고는 보이지 않던 곳이었는데 이렇게 진입로를 계속 찾아내고 말이야.”
율리아의 말에 뒤따라오던 카엘라나 세실리가 그 말이 맞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숲의 입구에서 봤을 때만 해도 기병들이 오고 다닐 공간은커녕 사람 하나도 다니기 힘든.
한 번 들어가면 다시는 나올 수 없는 그런 삼림으로 보였다.
말 한 마리가 기수를 돌리는 것조차 쉽지 않은 그런 곳으로 들어가자고 했을 때.
솔직히 말해서 모두가 고개를 갸웃거릴 수밖에 없을 정도였다.
하지만 이후 하루가 지나고, 이틀이 지나고, 그렇게 시간이 흐름에도 진격 속도가 전혀 늦춰지지 않자 모두가 알아차릴 수 있었다.
바로 앞에서 군을 안내하고 있는 저 남자가 이곳 지리를 죄다 꿰차고 있다는 것을.
“별 것 아닙니다, 마왕 전하. 서부에서 있을 때 이곳이 주 근무지였던 왕국 측 병사들이나 중간급 지휘관. 그리고 요정 측 레인저들에게 정보를 얻어둔 게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정보를 모으는 것 하고 이렇게 직접 안내를 하는 것은 전혀 다를 텐데?”
“어려울 것 없습니다. 군 생활 하면서 정보와 지도만으로도 그곳 지리를 파악하는 건 많이 늘었거든요. 그 정신없는 상황에서 사전답사는 어림도 없으니까 말입니다.”
조금은 말도 안 되는 이유였지만, 잠시 고개를 갸웃거리던 이들도 결국 고개를 끄덕인다.
1차 대륙 전쟁 당시에 클라우스가 쌓은 말도 안 되는 업적이 하도 많다 보니 그러려니 하고 넘어가는 모양이었다.
실제로 클라우스가 왕국 곳곳의 정보들을 수집한 적도 있으니, 카엘라 역시 그랬나? 하고 고개를 갸웃거리면서도 수긍하는 듯 했다.
실제로 많은 정보들을 모으고 또 규합하여 그런 것이기도 하지만.
클라우스 입장에서는 지금의 이 행보가 이미 수차례나 했던 일들이다,
정보를 모아 스스로 만든 지도를 확인하면서 왔다면 이 정도 속도는 내지 못 했을 것이다.
방향 감각과 행로 스킬을 사용하면서 동시에 시간이 될 때마다 위협까지 가하여 몬스터들을 요정 레인저들이 정찰을 돌고 있는 지역으로 팍팍 밀어 넣었다.
아무리 은밀하게 이동한다고 해도 한창 정찰에 집중하고 있는 요정들을 다 속이는 건 어렵다.
이전에도, 그리고 그 전에도 반복해서 이 루트를 이용한 결과 가장 큰 문제가 숲 곳곳을 돌아다니는 레인저들이었다.
해서 처음에는 자신이 나서서 레인저들을 기습하기도 했었다.
그런 식으로 레인저들을 줄여나가니 확실히 아군이 발견될 확률이 낮아지기는 했다.
문제는 팀이 그렇게 하나둘씩 사라지니 레인저들도 급히 철수해서는 숲의 출입구 경계를 더욱 강화하고 인간 측과 공조를 한다는 것이었다.
그런 이유로 기습은 1순위의 해결 방안이라고 할 수 없었다.
레인저들이 다른 곳에 신경을 쓰지 못 하게 만들 수 있는 다른 방법.
그것으로 클라우스는 몬스터들을 유인하고 또는 위협하여 그들에게로 밀어 넣었다.
물론 아군에게로 되돌아오면 큰일이니 이것도 스킬을 이용해서 해냈다.
덕분에 요정 측의 전력 손실을 강요할 수 있게 되었다.
동시에 그들이 본연의 임무인 정찰보다는 몬스터와의 교전에 집중하게 만들었다.
고작 몬스터 때문에 겁을 먹는 초짜들은 절대 아니지만 혼선 정도는 줄 수 있다.
몬스터들이 왜 이런 반응을 보이는지, 평소였다면 궁금해 했을 지도 모르는 일이 하필 전쟁이 터졌다는 급박한 상황에서 그냥 자신들이 정찰 인원과 횟수를 늘리니 거기에 따른 반작용이라고 여기게 되었다.
그런 부분들이 겹치고 겹쳐서 결국 지금의 상황까지 이끌어내게 되었다.
부상자들을 이끌고 돌아가던 요정들을 율리아 측이 먼저 차단하여 격멸.
동시에 그대로 밀고 들어가서 아무 것도 모르고 있던 북쪽 경계의 요새들 공격.
그리고 그 사이에 클라우스와 플랑슈는 레인저 측 지휘관 암살까지.
제대로 된 공성 병기조차 없었지만 그 부분은 문제가 되지 않았다.
은근히 요정 레인저들을 믿고 있던 인간 측으로서는, 갑자기 숲에서 뛰쳐나온 한 무리의 기병들이 순식간에 쇄도하여 문을 돌파하는 그 순간을 막을 수가 없었다.
“이곳 요새들을 책임지고 있는 자라고 합니다.”
탈출은 고사하고 자결할 기회조차 잃은 채 율리아 앞에 처박히는 한 남자.
잠시 그를 바라보던 율리아는 어떻게 할까, 하는 뜻으로 클라우스를 쳐다보았다.
자신으로서는 처음 보는 인간 귀족, 값어치를 전혀 모르고 있지만 그라면 아주 조금은 알고 있지 않을까 싶어 바라보는 듯 했다.
그리고 그런 율리아의 예상이 맞았던 것인지.
클라우스의 입가에 아주 조그마한 미소가 언뜻 걸치는 듯 하다가 사라졌다.
“오랜만이네.”
“크, 클라우스!”
“전보다 훨씬 더 보기 좋아 보여.”
여기까지만 본다면 상당히 유한 분위기라고 할 수 있었을 것이다.
클라우스의 입에서 다음으로 흘러나온 차가운 한 마디를 제외한다면.
“지휘관이라는 놈이 아주 피둥피둥 살이 올랐군.”
그 말대로 율리아의 손에 붙잡힌 남자는 뚱뚱하다는 말이 절로 나올 수준으로 비대했다.
어쩌면 이곳에서 도망치지 못 한 것이 단순히 기습 공격 때문만이 아니라 몸이 너무 느려서 피하지 못 한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말이다.
“오면서 병사들을 보아하니 피골이 상접한 자들도 보이던데 싸울 자는 굶고 명령만 내리는 놈은 그 꼴이라니. 너희들 딴에는 뭐 준비를 했다는데 내가 보기에는 형편없어.”
“배신자 놈이 할 말이냐! 역시 평민 따위에게 영웅이라는 칭호는 과분한 것이었다! 그 때 네놈과 네 추종자들을 반역죄로 몰아서라도 모조리 죽여야 했는데!”
“네 능력 부족인 걸 어쩌겠어. 제거할 생각이었다면 네 모든 걸 걸어서라도 제거했어야지. 거칠게 몰아붙이다가 아닌 것 같으니 슬그머니 꼬랑지 말고 도망간 놈이 이제 와서.”
클라우스는 키득거리면서 자신을 향해 욕설을 내뱉고 있는 귀족에게로 다가갔다.
몇 번 보기는 했지만 딱히 이름까지 기억해야 하는 그런 부류는 아니다.
그저 귀족 우월주의에 아주 푹 빠져서 대륙 전쟁 시기부터 자신을 참 무던히도 괴롭히던 귀족파 중의 하나라는 것만 알고 있었다.
더해서 남의 전공을 무척이나 질투해서 누구나 다 할 수 있는 거 아니냐고 떠들다가도.
막상 자신에게 그런 비슷한 기회가 오면 지레 겁을 먹고 최대한 안전한 곳으로 내빼려고 하는, 그런 추악한 모습까지 지닌 놈이기도 했다.
“안 봐도 뻔하군. 전쟁이 발발할 것 같으니 고르고 고른 게 여기냐? 이곳으로는 적들이 오지 않을 거라고. 설사 중앙과 남부 방어선이 뚫려도 이곳으로는 얻을 게 하나도 없으니 비교적 안전할 거라고 생각한 모양이지?”
“아니다! 아니야! 나를 너 같은 겁쟁이와 똑같은 부류로….”
짜악!!-
순간 귀족의 얼굴이 옆으로 홱 돌아갔다.
클라우스의 두 손은 아무런 짓도 하지 않았다.
옆에서 듣고 있던 율리아가 말을 재촉할 때 쓰는 채찍으로 귀족의 볼을 후려친 것이었다.
“그어억….”
순식간에 살이 찢어지고 상처 부위에서 피가 흐르기 시작했다.
심지가 굳건한 이라면 이 상황에서도 욕설을 퍼붓든, 그게 아니더라도 사나운 기세만큼은 거두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클라우스 앞에 있는 이 귀족은 그냥 허울만 귀족인 인간이었다.
당장 자신에게 폭력이 한 번 가해지자 두려움에 바들바들 떠는 모습이라니.
자기들 딴에는 준비랍시고 열심히 했겠지만 지휘부의 무능은 여전히 큰 문제였다.
왜 2차 대륙 전쟁에서 서부 연합이 또 다시 대패를 당했는가.
준비를 철저하게 하면 뭐하느냔 말이다. 그걸 운용해야 하는 대가리들이 안 따라주는데.
병사들이 아무리 용맹하고 잘 싸운다고 해도, 그게 아니더라도 최소한 1차 대륙 전쟁의 생존자들에게서 노하우를 전수 받았다고 해도.
그들을 이끌고 전장을 나서야 할 고위급 지휘관들이 이리 엉망이니 오히려 사방에서 무너지는 것이 당연한 일이었다.
왕족으로, 귀족으로, 평민으로 아무리 고르고 골라봐도.
예언자가 되어도, 뛰어난 정치가가 되어도, 지금과 같은 무패의 지휘관이 되어도.
이 빌어먹을 것들은 전혀 바뀌지 않는, 숙명과도 같은 존재들이었다.
클라우스 자신이 어떤 지랄을 떨어도 이들의 이 덜떨어진 행동과 생각은 바뀌지 않는다.
“마왕 전하.”
“말하지 않아도 대충 알겠어. 쓸 곳도 없는 떨거지. 병사들이 열심히 싸우는 와중에도 지휘관이라는 놈이 코빼기도 비치지 않은 이유가 다 있었군.”
제 앞의 클라우스를 바라보면서 율리아는 두 눈을 가늘게 떴다.
어차피 이런 쓰레기, 굳이 당신의 손으로 직접 처리해야겠냐는 뜻.
그에 클라우스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반드시 제 손으로 정리하겠다고 밝혔다.
무던히도 자신을 괴롭히고 깎아내리던 놈들, 이제는 그 값을 받을 때가 왔다.
“후우.”
한숨을 흘린 율리아는 그대가 알아서 하라, 라는 말을 남기고 몸을 돌렸다.
그 뒤를 카엘라와 세실리가 뒤따르고, 남은 건 얌전히 대기 중이던 플랑슈 하나였다.
슥-.
클라우스가 손짓을 하니 곁에서 대기 중이던 병사들이 귀족을 붙잡았다.
팔과 다리를 단단히 붙잡은 채 머리를 잡아당겨 목을 길게 뻗게 한다.
지금 이 상황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비로소 눈치를 챈 귀족은 다급히 입을 열었다.
“자, 잠시만! 잠시만, 클라우스. 하, 항복했잖아. 항복했으니….”
“항복을 하는 건 네 자유고, 그걸 받아들이는 건 이쪽의 자유지. 그런 의미에서 네 항복은 진짜 항복으로 받아들여지지 않은 모양이야. 그리고 너 같은 식충이를 왜 받아주겠어.”
스릉-.
병사 하나가 살짝 검을 뽑아서는 클라우스에게 내밀었다.
잠시 그 칼을 바라보던 클라우스는 곧 천천히 고개를 내저었다.
당장 이 귀족 놈이 자신을 얼마나 성가시게 만들었는데.
목을 잘라내는 그런 간단한 죽음으로 끝낼 리가 없잖은가.
몸을 돌린 후 플랑슈가 품에 가지고 있던 단검을 빼어든다.
그리고는 망설임 없이 그 단검을 휘둘러서 단단히 붙잡혀 있던 귀족의 목을 그대로 그었다.
주륵! 주르륵!-
심장이 한 번 거세게 고동칠 때마다, 힘차게 몸 곳곳으로 붉은 연료를 보낼 때마다.
쩍 갈라진 귀족의 목에서 검붉은 피가 울컥 울컥 토해져 나왔다.
“끄륵! 끅! 끄륵!”
즉사하지 않을 정도로,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자연스레 죽을 수밖에 없도록.
자신이 어떤 상처를 입었고 또 어떻게 죽어 가는지 확실히 볼 수 있게.
단검에 묻어있던 피를 대충 훑어낸 클라우스는 그걸 다시 플랑슈에게 내밀었다.
그러자 이럴 줄 알고 있었다는 듯 미리 손수건 위에 그걸 받아든 메이드는 제 무기에 묻은 피와 기름을 닦아내고서 조신하게 칼집 안에 그걸 꽂아 넣었다.
“꺼륵!! 꺼헉!”
이제는 붙잡을 필요도 없다고 판단된 것인지 병사들도 귀족을 내팽겨 치고 뒤로 물러섰다.
그들에게 이제 그만 물러나도 좋다고 하니 마족들마저 전부 물러가고, 이제 남은 건 그 자리에 엎어져서 연신 피를 쏟아내면서 천천히 죽어가고 있는 귀족 하나가 전부였다.
“이게 무슨 난리인가 싶겠지.”
“…끄륵, 끅….”
“망할 배신자라는 생각을 여전히 하고 있을 거야. 뭐, 크게 보자면 배신이 맞으니 그렇게 자위하다가 죽는 것도 나쁘지는 않겠지. 네가 죽기 전에 한 마디 굳이 해주자면.”
클라우스는 굳이 몸을 숙여서 남자의 귓가에 악마마냥 속삭여주었다.
“네 가족들도 머지않아 다 뒤따라갈 테니 걱정은 하지 마라는 거야. 네 아들은 목 없는 귀신으로, 네 딸은 간살, 그리고 남은 식솔들은 밧줄에 목이 대롱대롱 매달린 채로.”
“꺼륵! 끅!!”
“다 기억하고 있다. 너희가 내게 한 말 하나, 행동 하나. 그대로 다 돌려준다. 기대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