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63화 〉 25장 - 서막이 오르다
서부와 동부 사이에 전운이 감돌기 시작한 바로 그 때.
무척이나 은밀한 만남이 왕국 어느 도시의 허름한 건물 안에서 진행되는 중이었다.
누구는 여관 점원의 복장, 다른 누군가는 사창가의 여인들이 입을 법한 천 쪼가리.
또 누군가는 지극히 평범한 주부들이 입고 다니는 옷을 입고 있었다.
자리에 모인 모두가 그저 왕국의 아주 조그마한 부분을 이루는 이들로 보이지만.
실상은 암흑가에서 모든 세력들을 몰아내고 그 빈자리를 모조리 차지한 세력.
한 때는 잘 나간다던 세력들을 밑의 식구로 부릴 정도로 거대해진 뒷골목의 실세.
이곳에 모인 모두가 ‘붉은 독거미’ 의 간부들이자 핵심 세력들이었다.
“당신이 바로 클라우스님의 명령을 직접 받는다는 분인 모양이네요.”
그들 중 가장 상석에 앉은, 무척이나 고혹적이고 또 퇴폐적인 관능미를 지닌 여인.
언뜻 보면 인간인 것 같지만 조금만 더 자세히 들여다보면 어느 쪽으로 살펴도 결코 인간이 아님을 깨닫게 되는 이가 그렇게 운을 떼었다.
그러자 그 여인 앞에 혼자서 조용히 서있던 또 다른 여인이 조심스레 그녀를 바라보았다.
선홍색의 눈동자가 반짝이는 것을 보아, 그 여인 역시 인간은 절대 아니었다.
한때는 마왕의 숙부였던 아우펜의 밑에 있던 그림자로 활동하기도 했고.
이후 한 남자의 손에 붙잡혀 협박과 쾌락에 버무려져 완전히 변해버린 마족 여인.
이제는 마왕과 그 남자의 충실한 수족으로 자리매김한 리르는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붉은 독거미 단장, 안젤리카인가요?”
리르의 입에서 자리에 앉아있는 여인의 이름이 흘러나오자 주변에 서있던 이들의 눈동자에 차가운 빛이 감돈다.
그림자로 활동하면서 상대방의 기척을 읽는 거야 기본 중의 기본이 되었다.
때문에 리르가 가볍게 몸을 떨면서 주변을 경계하니 안젤리카가 바로 손을 들었다.
그리고는 날이 잔뜩 선 목소리로 마치 맹수가 으르렁거리듯 말했다.
“다들 적당히 해. 클라우스님 휘하에 있는 손님이야. 한 번만 더 무례하게 굴면 가만 안 둬.”
안젤리카의 싸늘한 경고에 주변에 있던 여인들이 다급히 고개를 숙인다.
은연 중에 외부인이라고 경계하던 자들에게 따끔한 한 마디를 날린 후.
안젤리카는 다시금 나른한 목소리로 리르에게 중얼거렸다.
“네. 맞아요. 내가 바로 붉은 독거미의 안젤리카에요. 다만 이름으로 불리는 건 모두의 입장에서 유쾌하지 않으니 그냥 단장이라고만 불러주면 좋겠네요.”
“알겠습니다, 단장님. 혹시 제가 실수했다면 용서를….”
“그 정도는 아니에요. 무엇보다 우리 붉은 독거미는 마왕 전하를 따르는 일개 집단이고, 당신은 그 마왕 전하께 직접 명령을 받은 분이니 너무 저자세로 나올 필요는 없어요.”
참으로 아이러니한 부분이라고 할 수 있었다.
자신은 과거 마왕을 해하려고 하다가 붙잡혀서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돌아섰는데.
그 덕분에 이렇게 마왕의 수하로 인정을 받아 존중받게 되었다니.
만약 지금의 마왕 율리아가 자신으로 인해 해를 입었다면.
자신은 이보다 더 좋은 대접을 받고 있었을까 생각이 닿자 고개를 내젓는 리르였다.
장담하건데 그렇게 자신을 이용해놓고 비밀을 지키기 위해서 관련자들을 전부 처리했을 거다.
“저는 괜찮아요. 저도, 단장님도 모두 마왕 전하를 위해 노력하는 자들이잖아요. 괜히 이런 부분에서 상하 관계를 만들고 싶지는 않습니다.”
“그렇게 말해주니 고맙네요.”
안젤리카는 그렇게 답하고는 옆에 있던 제 수하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러자 그녀의 손 위로 뭔가가 담긴 봉투들이 순차적으로 올라왔고, 그걸 받아든 안젤리카는 자리에서 일어나서는 리르의 앞으로 다가갔다.
“이전에 요청한 현재 왕국 북쪽 마을들의 위치, 그리고 1차 대륙 전쟁 당시 남부군 소속으로 활동하던 중견 지휘관들의 근무지에 대한 정보에요. 더해서 저희가 개인적으로 알아본 것도 있답니다. 아마도 마왕 전하께 큰 도움이 될 거예요.”
“감사합니다, 단장님.”
하나, 하나가 무척이나 중요한 정보들이다. 당장 이것들이 어떻게 쓰일지 예상이 간다.
하지만 안젤리카도 리르도 함부로 그 부분에 대해서 언급조차 하지 않았다.
자신들은 그저 시키는 일을 행하고 완수하면 된다, 그것만 완벽하게 하면 될 뿐이다.
그것들을 모으고 걸러서 가장 날카로운 무기로 만들어내는 것은 자신들의 일이 아니다.
거기에까지 신경을 쓰는 것은 과한 욕심이고 자칫 선을 넘는 행위로 보일 수 있다.
비록 율리아에게 충성을 맹세했지만 여전히 과거의 죄가 남아있는 리르.
역시나 마왕가에 무조건 협력하기로 했지만 그 시작이 음지에서 온갖 더러운 일을 하던 집단인 붉은 독거미, 그리고 안젤리카.
그들 입장에서는 괜한 언행이나 잘못된 발걸음이 바로 지옥으로 떨어질 수도 있는 것이었다.
이러다보니 둘은 서로 은근히 비슷한 상황이라는 것을 자연스레 깨달았다.
덕분에 업무 이외의 조우에는 사사로이 만나는 게 아닌데도 묘하게 동질감을 지니게 되었다.
거기에 더해서, 둘 모두 어찌 되었든 클라우스에게 목숨을 구명 받았다는 공통점도 있었다.
물론 리르와 안젤리카가 정말 똑같은 경우라고 볼 수는 없지만, 결과만 보자면 그 덕분에 이렇게 목숨을 부지하고 또 나름 괜찮은 삶을 살아가고 있다고 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이제부터는 더욱 조심하세요. 전쟁이 임박하면서 조금이라도 수상한 자는 모조리 잡아다가 취조실로 끌고 가는 모양새에요.”
“충고 감사해요. 그렇지 않아도 요즘 분위기가 심상치 않아서 이전과는 다르게 철저하게 비밀리에 움직이고 있어요. 덕분에 붉은 독거미 측에 의지를 더 많이 하고 있고요. 마왕 전하를 위해서 일하고 있지만 점점 제가 할 수 있는 일이 없어지는 것 같아 마음이 쓰이네요.”
율리아가 미처 신경을 쓰지 못 한 동부 출신 마족들이 있었다.
대륙 전쟁이 끝나기 직전 서부에 항복하고 자리를 잡은 이들이었는데, 그 전부터도 많은 차별과 의심을 받던 이들이었지만 이미 동부를 떠난 자신들이라 침묵하고 살아갈 뿐이었다.
헌데 이번에 2차 대륙 전쟁이 발발하기 직전에 몰리면서 그들이 많은 피해를 보았다.
귀족들은 그들을 첩자라고 공공연히 떠들고 다녔고 평민들조차 그들을 공격했다.
길을 가다가 살해당하거나 여인이라면 겁탈 당하고 잔혹하게 죽음을 맞이하기도 했다.
서부의 마족 사회에 숨어들어서 정보 활동을 하고 있던 리르로서는 날벼락과 같은 일.
해서 움직이기가 어려운 상황이니 붉은 독거미 측이 전달해주는 정보는 반드시 필요했다.
“서로 살기 위해서 하는 일인데요, 뭐. 저희도 그쪽이 아니었다면 직접 정보를 추려서 마왕 전하께 올려야 했을 텐데 그 사이에서 더 많은 시간이 지체되고 그렇게 되면 기껏 힘들게 구한 정보가 변할 수도 있으니 서로에게 좋은 일이에요.”
그렇게 말한 안젤리카가 가볍게 손짓을 하니 주변에 있던 수하들이 일거에 사라졌다.
아무래도 곧 자리가 파할 것을 암시하니 서로가 약속한 곳으로 흩어져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 주변을 경계할 것이다.
그리고 그런 일이 발생하지 않을 경우 항상 그래왔던 것처럼 평민들의 모습으로 돌아가서 사방으로 흩어질 거다.
안젤리카가 내어준 정보들을 확인한 리르 역시 자리를 뜨려고 하는 순간.
갑자기 날아든 붉은 독거미 측 단장의 말에 리르가 움찔, 몸을 떨었다.
“그런데, 생각해보니까 말이요. 저와 당신, 공통점이 하나 더 있는 것 같지 않나요? 마왕 전하, 마왕 전하 하지만 그러면서도 뒤로는 또 다른 이유 하나를 숨기고 있는 거요.”
“…방금 뭐라고 하셨죠?”
“뒷조사를 하려는 건 아니었어요. 다만 우리가 힘들게 모은 정보가 누구의 손을 거쳐 마왕성으로 향하는지, 그에 대한 조사가 필요했죠. 그리고 당신에 대해서 알게 되었어요. 보니까 얼마 전까지만 해도 반역자 아우펜 휘하의 그림자로 활동했던데. 어느 계기로 돌아선건지는 모르겠지만 확실한 건 클라우스님 곁에 아주 가까이 머물고 있더군요.”
“그 분 이름이 왜 나오는지 모르겠군요.”
리르의 말에 안젤리카는 천천히 고개를 내저었다.
그리고 자신은 지금 당신을 협박하거나 다른 악한 이유로 몰아세우는 게 아니라고 했다.
오히려 자신과 비슷한 속내를 가진 이를 만나서 무척 좋다고 말했다.
“나는 클라우스님께 구원 받은 몸입니다. 해서 그 분께서 받들어 모시는 마왕 전하께 충성을 다 하기로 했죠. 마왕 전하께서는 물론 좋은 분이지만, 그래도 나는 그 분과 마왕 전하 둘 중 한 분만 택하라면 아무래도 전자를 택할 것 같아요.”
“그런 말씀 함부로 하시면….”
“솔직히 말해 봐요, 리르. 당신도 나랑 똑같지 않나요?”
“….”
“오해하지 말라고 했어요. 나는 마왕 전하께 반기를 드는 게 아니에요. 다만 마왕 전하께 바치는 충성은 충성이고, 그 분께 입은 은혜는 은혜라는 거죠. 왜 이런 말을 하느냐, 그 은혜를 갚기 위해서라도 나는 최선을 다해 움직일 거라는 말이에요. 나중에 마왕 전하나 클라우스님이 우리 측의 진의를 묻거든 그렇게 답해주시면 될 거예요. 은혜를 갚기 위해 영원히 충성할 거라고. 그러니까 부디 끝까지 믿어달라고.”
안젤리카의 말에 리르는 문득 율리아가 자신에게 내린 명령이 하나 있음을 자각했다.
붉은 독거미는 훌륭한 조력자들이지만 충심까지는 아직 모르겠으니 주의해라.
혹 수상한 기운이 느껴진다면 지체하지 말고 즉각 보고해라, 라고.
아무래도 안젤리카는 마왕의 의심을 살까 그 부분을 걱정하고 있던 모양이었다.
여태껏 음지에서 지낸 자신들이니 더 큰 이득에 생각을 바꾸고 편을 갈아탈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여전히 배제하지 않은 부분에 신경을 쓰는 듯 했다.
“우리는, 아니 나는 최선을 다할 겁니다. 마왕 전하께, 그리고 클라우스님께.”
“….”
“당신은 어떻죠, 리르? 당신 역시 그 분에 의해 구원 받은 것 같은데.”
미소를 지으면서 안젤리카는 리르보다 먼저 몸을 돌려서 그곳에서 사라졌다.
어느 순간 혼자 남게 된 리르는 가만히 붉은 독거미의 수장이 사라진 곳을 쳐다보았다.
언뜻 들으면 클라우스를 위해서 이상한 짓을 꾸미고 있는 것만 같은 말들.
하지만 클라우스가 율리아와 절대 반복할 사이가 아니라는 건 그녀도 알고 있을 거다.
조금 날이 서있기는 했지만, 아주 조금은 위험한 발언들이기는 했지만.
자신은 결코 다른 마음을 품을 생각이 없으니 그 부분을 꼭 전해달라는 뜻.
리르 자신이 단순히 심부름꾼이나 첩자가 아니라 동시에 마왕의 눈과 귀라는 부분을 안젤리카는 용케 알아차린 모양이었다.
“그런 말 함부로 하시는 거 아니라니까….”
혼잣말을 중얼거린 리르는 품속에 그들이 전해준 정보를 소중히 갈무리하고 발걸음을 떼었다.
그러다가 문득 자신을 어루만져주던 남자의 손길이 떠오르니 심장이 미친 듯이 쿵쾅거린다.
그의 손이 자신의 얼굴을, 어깨를, 그리고 점점 내려가 가슴과 허리, 배를 지나쳐.
마침내 여인으로서 가장 은밀한 곳까지 남김없이 넘어가던 바로 그 때가 뭉클거린다.
“아아….”
처음에는 그냥 무섭다고만 생각했다, 괴물과도 같은 인간이라고 여겼다.
그 괴물에게 산 채로 잡아먹히는 건 아닐까 그런 걱정을 했던 자신이다.
그런데 왜 가면 갈수록 제 몸도 마음도 그 괴물을 잊지 못 하는 건지.
잠시 제 허벅지를 비비면서 애써 불길을 잠재우던 리르는 곧 결심했다.
이번에도 꼭 제대로 일을 마무리하고 그에게 가서 상을 받자고.
그가 어떻게 대하든, 설사 험하게 대한다고 쳐도 이제는 다 좋았다.
그 남자의 손에 죽을 수만 있다면 죽는다고 해도 나름 나쁘지 않을 것 같은데.
리르는 그렇게 생각하면서 그림자 속으로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