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62화 〉 25장 - 서막이 오르다
1차 대륙 전쟁에서 왕국이 말 그대로 완벽하게 휩쓸린 이유는 간단하다.
전혀 대비가 되어 있지 않은 상태에서 방심하기도 했고 또 거기에 중요한 요충지마자 충분한 방어 병력이 대기하고 있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서류상으로는 분명 충분한 병력이 존재하는데 막상 그곳에 가보니 병력은 개뿔.
대부분이 창칼도 제대로 쥐지 못 하는 노인이나 어린아이들뿐이다.
이게 도대체 무슨 일인가 싶어 알아보니 멀쩡한 이들은 근처의 귀족들이 지극히 개인적인 용무로 부려먹기 일쑤였다.
덕분에 기껏 존재하던 방어 요새는 하루 만에 와르르 무너져 내렸다.
이후 겨우겨우 병력을 채워 넣었지만 귀족들이 실컷 부려먹던 이들이 싸울 힘이 있을 리도 없고 심지어 귀족들이 제 사병들까지 데리고 도망치는 경우도 발생했다.
그야말로 총체적 난국, 당장 왕국 전체가 폭삭 망해도 모자람이 없었다.
왕국이 무너졌다면 겨우 간판만 유지하고 있던 제국도 따라서 무너졌을 것이다.
뒤를 이어서 거기에서 나오는 자원과 인력을 이용하여 동부는 요정과 수인들을 두드렸을 테고 결국 서부가 무너지는 건 피할 수 없는 길이었으리라.
“그 타이밍에 클라우스, 당신이 등장한 거지. 왕국의 식량 창고라고 할 수 있는 남부를 떡하니 막고서. 덕분에 동부의 계획이 완전히 어그러졌어. 남부를 뚫지 못 하니 결국 중앙만이 답인데 왕국과 제국, 거기에 요정과 수인들도 죽자 살자 막아대니 뚫기는 힘들고. 그 와중에 남부에서는 계속 패전이 전해지니 추가 병력을 안 보낼 수도 없고.”
수도 없이 행한 일이지만 원래 자신이 떠올리는 것보다 남에게 듣는 것이 더 재미난 법이다.
율리아의 말을 들으면서 클라우스는 그 때 그랬지, 하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남부를 틀어막으니 동부는 허우적거리다가 결국 자멸하는 단계까지 들어서고 말았다.
장기전을 바라보지 않은 건 아니지만 비교적 허술한 왕국을 재빠르게 집어삼키고 거기서 나오는 자원을 쓰겠다는 것도 분명 계획에 있었는데.
그 계획이 시작도 해보기 전에 완전히 허물어지고, 어그러지고, 쓰레기통에 처박혔다.
해서 마족들이 클라우스를 그렇게도 싫어하면서 또 그렇게 경외하는 것이었다.
동부라는 거대한 집단을 그냥 혼자서 막은 것이나 다름없었으니까.
“대륙 전쟁이 끝난 이후 왕국도 아주 머저리들은 아니었기에 기본 준비는 들어갔습니다.”
율리아의 말을 받은 건 옆에서 나란히 말에 올라있던 카엘라.
전사장의 위치에 서서 한동안 마왕성에만 있다가 간신히 클라우스 옆에 있는 게 무척이나 기분이 좋은지 연신 꼬리를 살랑거리고 있는 중이었다.
그 모습이 무척 신기한지 세실리는 헤에에, 하고 두 눈을 반짝이고 있었고 말이다.
“가장 취약하던 중부에 요새를 증축하고 남부에도 병력을 배치했죠. 확실히 대륙 전쟁 전의 때와 비교해본다면 나름 방비를 해둔 상태라고 볼 수 있을 겁니다.”
“그래봤자 뭐해. 아무리 좋은 무기를 들려줘도 정작 그걸 휘두르는 자가 영 쓸모가 없는 놈이라면 있으나 마나한 거잖아? 그렇지 않나, 카엘라?”
“마왕 전하의 말씀이 옳습니다. 제가 왕국에 있던 시절 남부 쪽을 몇 번 시찰했는데 보기에는 멀쩡해보여도 사실 문제가 많았습니다. 군대의 질은 올라갔는데 그게 왕국의 소유가 아니라 그 지역을 맡는 귀족들의 사병화가 되어가는 것이 문제였습니다.”
귀족들에 의해 왕권이 산산조각이 난 후, 현재의 국왕은 거의 모든 부분에서 손을 놓았다.
왕명으로 요새들을 증축하고 병사들을 훈련시켰지만 결국 그 정예병들을 만드는 데에 사람과 돈을 투자한 자들은 그 지방의 귀족들이었다.
그들 입장에서는 환영할 만한 것이 합법적으로 사병을 키울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심지어 사회적 명분까지 쥐고 있으니 더더욱 크게 투자를 했다.
왕국을 위한 정예병, 대륙 전쟁과 같은 참사를 막기 위한 단단한 방패.
그것들을 육성하기 위해서 자신들이 희생하고 있다고 말이다.
“솔직히 말해봐, 카엘라 전사장. 현재 왕국군의 수준은 어떻지?”
“대륙 전쟁 전과 비교하자면 분명 뛰어납니다. 당장 클라우스님과 함께 대륙 전쟁에서 활약한 자들이 교관들로서 여기저기에 퍼져 자신들의 경험과 노하우를 전수했습니다.”
“…그래, 경험은 절대 무시 못 할 무기이지. 그게 골고루 퍼졌다면 더더욱 문제고.”
“해서 그 지역을 맡고 있는 군대는 강력하지만 여전히 한 곳에 모아 싸우는 건 어려울 겁니다. 왕국의 귀족들은 파벌이 서로 갈려있어 화합하는 게 어색하니까 말이죠.”
“그래도 시기가 절체절명의 때라면 예외의 상황이 나올 수도 있지.”
“제 생각으로는 그래도 동부가 더 유리할 것 같습니다. 계속 두들긴다면 그 때는….”
카엘라의 말에 율리아는 잠시 생각하다가 고개를 내저었다.
분명 전쟁 경험으로만 본다면 카엘라가 압도적으로 우세에 있는데.
율리아는 이후 너무나도 정확한 부분을 찌르면서 카엘라를 침묵시켰다.
“훈련이 제대로 안 된 군대들에게 괜히 자질구레한 전투로 경험을 줘서는 안 돼. 그리고 이길 수 있다는 자신감도 줘서는 안 되고. 어중이떠중이가 아니라고 했잖아? 분명 훈련은 잘 된 자들이라고 했잖아? 그러니까 흐트러트려서 한 번에 잡아먹어야 해.”
그렇게 말한 후 율리아가 옆에서 따라오던 클라우스를 바라본다.
자신의 의견이 어떠냐는 그 뜻에 클라우스는 미소를 지으면서 자신 역시 그렇게 생각한다고 답을 했다.
실제로 실전 경험이 없는 군대에게 그 경험을 주는 것만큼 멍청한 짓은 없다.
아무리 함정이라고 해도, 때로는 군의 기세가 그 함정마저 돌파할 때가 있다.
율리아가 말한 그대로 그 병력들에게 경험 자체를 주어서는 안 된다.
산발적으로 두들겨서 혼란에 빠트리는 게 아니라 묵직하게 한 방에 내려쳐서 아예 산산조각을 내고 남은 것들은 흔적도 없이 으깨부숴야만 한다.
대륙 전쟁 이전의 그 약골들이 아니다, 제 수하들이 나름 열심히 준비시킨 자들이다.
수하들은 여전히 클라우스 본인에게 충성심을 가지고 있을 테지만.
그 병사들은 자신에게 무기와 갑옷을 쥐어주고 돈을 주는 귀족들에게 충성할 뿐이다.
그 부분을 무너트리기 위해서는 저들의 모든 것을 깨부숴야만 한다.
귀족들에게 가지는 일말의 기대도, 이길 수 있다는 희망도 전부 다 말이다.
“마왕 전하, 곧 숲으로 진입할 겁니다.”
선두에서 나아가던 정찰병들이 와서는 자신의 왕에게 보고를 해왔다.
그 말에 율리아는 멀지 않은 곳에 펼쳐진 거대한 숲을 바라보았다.
일반 보병들도 들어가기 엄두가 안 나는 곳인데, 저기를 수 천이 훨씬 넘는 기병들을 이끌고 들어간다 생각하니 벌써부터 숨이 턱 막히는 기분이다.
“괜찮을까요…?”
“왜 그런 말을 하는 거지, 세실리 레블랑 가주.”
“제가 알기로 기병이라 하는 존재는 돌진력을 잃었을 시 가장 손쉬운 먹잇감이라고 들었습니다. 특히나 말도, 말을 다루는 기수도 워낙 중요한 자원이라 하나 잃는 게 너무나 큰 손실이라고요. 그런데 저 좁은 곳에서 혹 기습이라도 받는다면….”
“말이라는 동물이 강아지만한 것도 아니고, 저 좁은 곳에서 서로 엉켜서 말머리를 돌리기는커녕 그냥 몸을 돌리는 것조차 힘들겠지. 더해서 말이란 동물은 원래 겁이 많기에 주변의 혼란에도 쉽게 놀라기 마련이야. 군마라서 보통의 종마보다는 괜찮겠지만 그렇다고 아예 평정을 유지하는 것도 아니겠지. 즉 저곳으로 들어갔다가 공격이라도 받는 순간 정말 끔찍한 상황이 펼쳐질 것이다, 이런 말을 하고 싶은 건가, 세실리 레블랑?”
“그렇습니다, 마왕 전하.”
세실리가 고개를 끄덕이자 율리아는 만족스럽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원래는 마법에 대해서만 유능하고 다른 부분은 많이 아쉽던 여인이었다.
하지만 클라우스에게서 이런저런 교육을 받은 이후, 그리고 레블랑 가문을 맡게 된 이후.
세실리는 예전이 그녀와 비교한다면 몰라보게 성장한 후였다.
당장 이런 제 의견을 어필하는 것부터 달라진 부분이라고 할 수 있다.
거기에 더해서 아직 많이 부족하지만 전장을 바라보는 시야도 길렀으니 성장 가능성은 얼마든지 더 있다고 할 수 있었다.
“레블랑 가주님의 걱정이 틀린 건 아닙니다.”
여태껏 침묵하던 카엘라가 은근슬쩍 세실리의 의견에 동조한다.
클라우스를 믿고 있는 그녀이지만 그래도 최소한 이런 부분에 대해서 자신의 의견 정도는 피력하는 게 좋다고 여기기도 하는 무장이기도 했다.
“대륙 전쟁 시기에 마족의 군세가 굳이 왕국 중앙과 남부를 노린 건 다 이유가 있습니다. 이보다 더 위로는 대규모 병력이 이동하기에 너무 제약이 심하고, 소규모 병력을 순차적으로 보내다가는 수인 측의 전사들이나 요정 측 레인저들에게 몰살당할 테니까요.”
“그렇겠지.”
“그 중간 지역이 바로 이 숲인데 워낙 방대한 넓이에 식생이 빼곡하게 들어차서 서넛이 겨우 오고 갈 수 있는 정도입니다. 말을 끌고 들어간다면 한 줄로 진입하게 될 터인데….”
“기습이라도 받는다면 최악이겠지. 마치 대륙 전쟁 시절 클라우스가 있던 남부의 요새로 진격하던 마족 병사들처럼 말이야.”
율리아의 말에 카엘라와 세실리가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자신들의 왕을 믿지 못 하는 것은 아니다, 그저 어떤 대비책이 있는지.
어떤 생각으로 저곳을 돌파하겠다는 것인지 알고 싶다는 게 전부였다.
그런 제 수하들의 생각을 알아차린 것인지.
잠시 그녀들을 바라보던 율리아는 천천히 입술을 떼었다.
“그게 이유다.”
“예?”
“적들도 그렇게 생각할 거다.”
“….”
“….”
“이 숲을 돌파하는 건 미친 짓이라고, 우리 입장에서는 괜한 모험을 할 필요가 없다고. 그냥 숲 입구 쪽에 병력 약간만 배치해둬도 싸그리 잡아 죽일 수 있다고 말이다. 서부의 것들은 분명 그렇게 여길 것이다. 그래서 이렇게 결정했을 것이다. 여기로는, 오지 않는다고.”
사실 클라우스가 이 숲을 지목했을 때부터 율리아도 어렴풋이 눈치를 채긴 했다.
그래서 허락한 것이고, 그래서 자신이 이렇게 따라온 것이다.
불가능하지 않을까 싶었던 작전을 어떻게 성공시키는지, 그걸 눈에 담기 위해서.
왕국의 방패라는 남자가 과연 어떤 창으로 그 왕국을 찌르는지 보고 싶어서.
“마왕 전하의 말씀이 옳다. 현재 적들은 어느 때보다도 남부와 중앙 방비에 집중할 거다. 내가 그곳 지리를, 그 중에서도 특히 남부를 잘 알고 있으니 뚫릴 가능성이 가장 높다고 여기면서 과하다 싶을 정도로 단단하게. 거기에 부딪쳐줄 생각은 없다. 적이 앞에 집중한다면 나는 돌아가서 그 등판을 후려칠 생각이다.”
“클라우스님. 그렇다면….”
“어떻게 돌파할지는 걱정마라. 그건 이 작전을 제안한 내가 고민할 부분이야. 너희들은 그저 마왕 전하를 곁에서 잘 보필하고 또 불안해 할 수도 있는 병사들을 챙기는 거야.”
많은 수가 클라우스라는 인간에게 경외심을 지니고 있지만.
또 그 반대로 많은 마족 병사들은 인간 남자에 불과한 클라우스에 대해서 조금은 불안하게 여기고 있을 수밖에 없다.
여전히 그들에게 클라우스는 과거 자신들의 아버지, 혹은 형, 또는 동생, 그리고 친구들을 죽인 악마와도 같은 인물이니까.
해서 마왕인 율리아와, 그리고 레블랑 가문을 맡게 된 세실리와.
마지막으로 비록 수인이지만 마왕성에서 지내면서 은근히 마족들과 가까워진 카엘라의 힘이 필요할 수밖에 없었다.
“걱정마라. 숲을 돌파하는 일은, 정말로 어렵지 않을 거야. 너무 쉬워서 하품이 다 나올걸.”
그냥 하는 말이 아니라 정말로 하는 것이었다.
이 숲만 도대체 몇 번을 관통하는 것인지, 클라우스는 슬그머니 스킬을 발동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