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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왕가 비선실세-260화 (260/341)

〈 260화 〉 25장 - 서막이 오르다

더는 자신을 위협하는 세력도 없고, 오히려 반란을 진압한 직후라 왕의 자리를 절대 비워서는 안 되는 상황에도 불구하고 율리아가 아카데미로 돌아간 이유.

자신을 미끼삼아 서부의 시선을 자신에게로 고정시키고 동부로 향하는 눈길을 줄이려고 한 것이었으며 또 내부에서 허튼 짓을 하려는 자들을 살살 꼬드기기 위한 것이기도 했다.

실제로 율리아가 자리를 비우고 나서 얼마 후.

레블랑 가문으로 몇몇 가문의 이들이 은밀하게 찾아와서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이대로 가면 귀족이라는 이름은 아무 짝에도 쓸모없는 허울만 지닐 것이라고.

무슨 수를 써서 왕가의 독주를 막아야 하지 않겠느냐고 말이다.

그들이 세실리 레블랑을 찾은 이유는 그녀가 거짓으로 고개를 숙였다고 생각하기 때문이었다.

당장 마왕에게 충성을 맹세하며 자신의 아버지와도 부딪친 그녀이지만.

율리아 역시 전대 레블랑 가주를 죽이는 게 아니라 감금 선에서 끝냈다.

이게 무엇을 의미할까, 그건 레블랑 가문까지 쳐내지는 않겠다는 소리였다.

오히려 같이 손을 잡고 서로의 지지자가 되었으면 한다는 표시이기도 했다.

유력한 귀족 가문을 다 박살낸 이 상황에서 레블랑까지 지워내기는 마왕 입장에서도 상당히 부담이 클 수밖에 없을 것이다.

해서 레블랑 가문과 서로를 지지해주는 사이로 남기 위해서 자비를 베푼 모양인데.

그것이 그들의 마지막 자존심을 건드렸다고, 동부의 마족 귀족들은 생각했다.

해서 세실리의 밀서가 날아왔을 때 처음에는 의심을 하다가도 곧 그걸 지워내고 말았다.

뭔가를 해보자는 게 아니라 그냥 우리끼리 연합해서 필요한 순간에 저항이라도 하자.

반란 같은 건 이제 꿈에도 꾸지 못 하는 일이니 그냥 우리의 권리를 위해서 싸우자.

그런 식으로 속삭여 오니 생각이 있던 귀족들 입장에서는 무시할 수가 없었다.

“…한심한 것들.”

페르디난트 엘세는 그렇게 달콤한 유혹에 넘어간 귀족들을 바라보며 혀를 찼다.

기껏 여기까지 따라왔다면 두 눈 꾹 감고 왕에게 충성할 것이지.

무슨 말도 안 되는 귀족들의 권리를 지키겠다면서 모여들었단 말인가.

“억울합니다! 억울합니다!! 우리는 반역을 도모한 적이 없습니다!”

“맞습니다, 그냥 향후 정세에 관해서, 그리고 어떻게 살아남아야 하느냐, 오직 그것만을 고민했을 뿐입니다! 레블랑 가주님! 뭐라고 말씀 좀 해주십쇼!”

한 자리에 모여 모조리 포박당한 귀족들이 애타게 세실리를 찾는다.

자신들을 여기까지 이끌어낸 장본인은 따로 있는데, 정작 그녀는 자신들과 함께 묶여있는 게 아니라 저 앞에서 무신경한 눈빛으로 자신들을 바라보고 있는 중이었다.

“닥쳐. 이 한심한 것들아. 전하께서 기회를 줬건만 이렇게 차버려? 그냥 알아서 바닥에 납작 엎드리면 뭐라도 하나 던져주겠다는데 그 상황에서 고개를 드냐고, 이 한심한 것들아.”

페르디난트와 같이 완전 무장을 갖춘 에슐리는 한심하다는 듯 귀족들의 뒤통수를 한 번씩 후려치면서 그렇게 으르릉거렸다.

귀족들 중에는 페르디난트와 함께 합류한 중립파 출신도 있었고 에슐리와 함께 항복한 자들도 끼어있었다.

이전의 마왕들과 율리아가 다르다는 것을, 단순히 동부에서의 지배력을 공고히 하는 데에만 끝낼 인물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을 텐데.

그놈의 그 잘난 귀족 자리를 포기하기 못 해서 스스로 무덤을 파고 누운 꼴이 되었다.

“어찌 할까요, 전사장.”

에슐리의 물음에 옆에 서있던 카엘라는 당연한 거 아니냐며 입술을 떼었다.

“마왕 전하께서는 향후 전쟁에서 가장 중요한 게 후방의 안정이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한꺼번에 일망타진할 준비를 하셨군요.”

자신이 자리를 비우는 것으로 양측 모두의 방심을 유도한다.

그리고 적절한 순간에 덮쳐서 빠져나갈 구멍 하나 없이 모두 잡는다.

가장 중요한 싸움을 앞두고 뒤가 소란스러우면 신경이 쓰일 수밖에 없으니 아예 이번 기회에 본보기로 삼겠다는 것이었다.

물론 이들은 정말로 그냥 자신들의 이득을 지키기 위해서 대책만 강구하고 있었을 뿐이다.

저들에게서 찾은 증거로는 가장 큰 죄인 ‘반역’ 의 뜻을 찾아내기가 매우 힘들었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진짜 의미의 증거에서 그런 것이고.

이쪽은 원하면 얼마든지 그런 증거 정도는 만들어서라도 가져다 댈 수 있었다.

“그대들의 이름이 적힌 이런 서신이 서부로 날아갔다고 하던데. 보아하니 서부 측에 마왕 전하의 신변을 내주고 너희들은 그 틈을 타서 동부를 접수하겠다… 뭐 이런 건가?”

“무,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입니다! 그게 가능할 리가 없잖습니까!”

“마왕가의 유일한 마왕 전하입니다! 그 분이 사라지면 동부는 단순히 소란스러워지는 정도가 아니라 그냥 붕괴입니다! 우리도 그 정도는 알고 있습니다! 우리가 왜 그런 미친 짓을….”

“논리적으로 보면 그렇겠지. 하지만 때로는 욕심이란 게 논리도, 이성도 다 가리지 않나.”

페르디난트의 말에 귀족들은 멍하니 그를 바라보았다.

자신들 중 몇몇은 저 남자와 함께 했던 일종의 동지이기도 하다.

그만큼 그가 자신들에 대해서 잘 알 터인데, 아무리 상황이 불리해도 해서는 안 될 짓과 할 수 있는 행동을 구별한다는 건 뻔히 알고 있을 텐데.

거기까지 생각이 닿자 머리가 돌아가는 자들은 재빠르게 취해야 할 자세를 알아차렸다.

여기서 뭘 부지하려고 하면 안 된다, 거래 따위는 애당초 성립이 불가하다.

오직 살려달라고 머리를 조아리고 고개를 숙이는 것만이 유일한 길이다.

설령 그게 자신들의 모든 것을 내놓는 것이라고 해도, 어차피 죽음으로서 빼앗길 것 살면서 내주는 편이 옳다는 게 그들의 생각이었다.

“우, 우리가 감히 잘못된 생각을 품고 있었던 것은 맞습니다! 하지만 반역은 절대 아니었습니다! 마왕 전하께 한 번, 단 한 번만이라도 설명할 기회를 주시길 간청 드립니다!”

“여태까지 지니고 있던 영지, 사병들, 전부 포기하겠습니다. 이게 우리들의 간절함입니다. 마왕 전하를 뵙고 설사 죽음으로 끝날지언정 말씀이라도 드리고 싶습니다. 그러니 제발….”

“재미있네요. 당신들이 저를 찾아와서 지키고자 했던 게 그것들 아니었나요?”

순간 앞으로 나서서 귀족들에게 그리 말하는 세실리.

너희가 목숨보다도 더 소중히 하던 권위, 명예, 힘, 그 모든 것을 내려놓을 수 있냐고.

그걸 다 내어주면서 기회를 얻어도 죽을 확률이 더 높은데 그럴 수 있겠냐고.

그러자 잡혀있던 자들의 거의 대부분이 동시에 고개를 끄덕였다.

율리아의 손에 의해 몇 개의 가문이 박살났는지, 한 명의 식솔조차 아주 깔끔하게 죽여 없애는 그 무자비함을 똑똑히 보지 않았는가.

자신들은 억울하다, 반역을 도모한 적이 없다, 그저 살 길만 강구했을 뿐이다.

그 억울함을 토로하고 어떻게든 용서만 받을 수 있다면 여태까지 누리던 모든 것들을 다 내어줄 수도 있겠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죽어서 창대에 목이 꿰인 반역자들의 말로를 지켜본 그들로서는.

웅장하던 성들을 모조리 때려 부수고 그 자리에 소금까지 뿌려 말 그대로 완전히 박살을 내놓던 그 장면을 본 이들로서는 이럴 수밖에 없었다.

그 간절함에 세실리가 슬그머니 미소를 짓는다.

율리아가 원하던 대로, 그리고 클라우스가 원하던 대로 일이 흘러가게 되었다.

혹 이들이 그런 말을 하지 않는다면 그냥 싹 다 죽여 없애는 길도 있었다.

하지만 피의 숙청이 너무 많고 흔해지면 공포로 지배하게 될 수밖에 없다.

어떤 순간에는 겁만 잔뜩 주고 빼앗을 걸 다 빼앗은 다음 갑자기 자비를 베풀고 또 상을 내리기도 한다면 적절하게 이용해먹을 수 있을 것이다.

“아무래도 이들의 처리는 마왕 전하께서 오시면 결정해야 할 듯 싶네요.”

“레블랑 가주님의 뜻이 그러시다면 그렇게 하죠. 마왕 전하의 뜻에 따라 이들을 낚아 올린 것도 가주님이니 지금 상황에서는 그 결정을 따르는 게 옳을 것 같습니다.”

전사장의 위치에 있으면서 마왕의 수족 역할을 하는 카엘라가 그리 말하니 결론이 났다.

이대로 이들의 모든 권리를 박탈하고 영지를 몰수하며 사병들은 모두 마왕가에 흡수되어 향후 어떻게 처분될지 그걸 기다려야만 한다.

앞에 무릎을 꿇고 있는 자들의 입장에서는 이제 다시는 일어설 수 없도록 두 다리의 힘줄을 끊은 셈이지만 최소한 명줄은 끊어지지 않았으니 다행으로 여겨야 했다.

“이제 남은 건마왕 전하께서 돌아오시는 일만 남았군요.”

한 자리에 모인 후, 페르디난트가 먼저 입을 열었다.

요 몇 달 동안 비밀리에 병력을 끌어 모으고 준비를 하느라 여간 고생이 많은 게 아니었다.

무엇보다 서부의 눈에 들어가지 않도록 은밀하게 움직이는 게 가장 어려웠다.

수백 명이 움직이는 것도 조금만 관심을 기울이면 다 보이는 수준인데 수천 명이 움직이는 수준이라면 그냥 지나가는 사람들의 입소문만으로도 전부 노출이 될 수 있다.

“일단 왕국 남부로 진격할 병력은 준비가 되었습니다. 실전 경험이 가장 풍부하고 또 사기도 충만한 이들로 가려 넣었으니 이전과 같은 패배는 없을 거라고 생각됩니다.”

에슐리의 말에 카엘라는 당연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대륙 전쟁 당시 마족의 군세는 분명 강력하기 짝이 없었다.

수인 측 전사였던 자신이 인정하는 부분이다, 그들만큼 열정적으로 전투에 임하는 자들은 보기 힘들다고 할 수 있었다.

다만 왕국 남부에는 클라우스가 있었기에, 그에게 휘말려서 마족들이 말 그대로 갈려나갔기에 남부 전선이 고착화되고 더는 뚫어낼 수 없는 것이었다.

이번에는 그 클라우스가 역으로 서부를 뚫는 창이 될 것이니 걱정할 건 전혀 없었다.

“그런데 도대체 왜 북쪽 국경에 1개 군단을 준비하라는 명령을 내리신 걸까요.”

페르디난트, 에슐리, 그리고 카엘라와 다르게 전쟁 경험이 없는 세실리는 도통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듯 그렇게 입술을 떼었다.

대륙 전쟁 시기에 동부가 항상 왕국을 통해서, 그것도 중앙과 남쪽에 치우쳐서 공격을 감행했던 이유는 그 위의 지형들이 병력을 움직이는 데에 최악이기 때문이었다.

소규모의 산발적인 기습이나 약탈도 아니고 대규모 병력이 움직이기 위해서는 반드시 잘 정돈된 길이 필요했다.

그 길이 왕국 기준 북쪽으로는 전무하다고 봐도 무방했는데 그곳으로 병력을 끌고 갔다가는 당장 행로가 과하게 길어질 확률이 높았고 그 상태에서 기습이라도 받는다면 길고 좁은 길목에서 완전히 와해될 게 뻔했다.

그런 곳이 바로 북쪽인데 율리아는 1개 군단을 그쪽으로 차출하라는 명을 내렸다.

심지어 보통의 군단과도 전혀 다른 체제를 주문하면서까지 말이다.

“이상하긴 하죠. 원래 보병과 기병 비율이 8:2를 유지하는 게 정상적인데 북쪽으로 향하는 군단은 기병 비율이 압도적으로 높지 않습니까.”

“애당초 그 일대가 전부 숲이라 기병들이 기동하기가 불가능한 지역일 텐데요.”

페르디난트도, 에슐리도 고개를 갸우뚱거릴 수밖에 없었다.

기병이 무척이나 강력한 전력이라고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말이 제대로 움직일 때가 통용되는 것이다.

말이 제 능력을 발휘하지 못 한다면, 위력적인 돌격을 선보이는 게 아니라 좁은 곳에서 서로 뒤엉켜 발목이나 붙잡는다면 그건 없느니만 못 한 전력이라고 할 수 있었다.

“뭐, 마왕 전하께서 다 뜻이 있으셔서 그렇지 않겠습니까.”

“….”

“우리들은 여태 그런 것처럼, 앞으로도 마왕 전하의 뜻을 따르면 됩니다. 의심하지 말고 따르세요. 마왕 전하께서 대단히 뛰어나신 분이고, 그 옆에 어느 분이 수행하고 있는지 이미 다들 알고 있지 않습니까.”

카엘라의 말에 자리에 모인 핵심 인원들이 전부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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