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59화 〉 24장 - 일렁이는 불길
“다시 한 번 말하겠다.”
대륙 아카데미에서 반나절 떨어진 왕국 소속의 도시.
지극히 평범한 곳이며 가끔 가다가 아카데미의 생도들이나 교수들이 머리를 식히러 나오는 곳이기도 했다.
그곳에 비밀리에 모여든 인원들이 한 사람의 말에 집중하고 있는 중이었다.
“아까 전 소식이 전해졌다. 마왕이 제대로 된 호위도 없이, 클라우스 그 배신자와 함께 이곳까지 온다고 했다. 좋은 기회다. 이번에 마왕을 우리 손으로 잡고 동부의 혼란을 다시 한 번 야기한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은 이번 일을 사주한 자에게 던져주면 된다.”
“….”
“….”
“명예이니 뭐니 하는 것들은 이 자리에서 전부 잊어라. 우리들은 오직 왕국을 위해서 여기까지 왔고 더러운 짓을 할지언정 조국을 지키겠다고 맹세한 자들이다.”
그 말에 자리에 모인 모든 자들이 맞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 않아도 감히 마왕이 다시금 아카데미로 돌아왔다는 사실이 무척 거슬렸다.
대륙 전쟁을 일으켜 서부를, 왕국을 쑥대밭으로 만들고 거기에서 더 나아가 전쟁 영웅까지 홀려서는 자신의 개로 부리고 있지 않은가.
악마보다 더 한 여자다, 당장 처리하지 않는다면 큰일이 일어날 것이다.
내부 숙청이 무엇을 의미하겠는가. 바로 힘을 외부로 분출할 준비를 하는 거다.
힘을 외부로 분출한다는 게 무엇을 의미하겠는가, 또 다른 전쟁이다.
당장 서부 연합에서 동부의 상황을 한 번 보기 위해 일을 벌이고서 그 반응을 보았는데.
결코 호의적이지 않은 기운이 돌아왔다고 했다.
이 모든 것은 분명 전쟁을 의미하는 것이다.
여태껏 서부에 보인 호의 가득한 행동들이나 말은 그걸 숨기기 위한 연막이다.
거기까지 생각이 닿자 서부 연합은 은밀하게 이들을 움직여서 배치했다.
아카데미를 공격하는 한이 있어도 최악의 위험이 될 수 있는 두 인물을 제거해라.
하나는 마왕 율리아이고, 다른 하나는 서부의 상황을 너무나 잘 알고 있는 클라우스였다.
헌데 그 두 인물이 때마침 접근조차 하기 어려운 아카데미를 떠나 이곳으로 와준단다.
주말을 이용한 외출은 가끔 가다가 있는 일이었기에 의심을 할 것도 없었다.
당장 이들은 준비를 끝마쳤고 도시로 그 둘이 들어오는 즉시 은밀히 뒤를 따르다가 한 번에 정리할 생각을 품고 있었다.
“혹시나 해서 하는 말이지만 허튼 생각이나 행동은 절대 하지 마라. 미모로 클라우스를 홀려낸 마족이다. 괜히 시간을 끌다가 현혹될 가능성이 높으니까 무조건 주의해.”
“설마 역겨운 마족 따위에게 홀리는 놈이 있겠습니까.”
“그 잘난 전쟁 영웅은 홀라당 넘어가지 않았는가.”
“그건 평민 머저리들이나 가능한 일이죠. 마족이라 하면 무조건 죽이는 것이 답입니다.”
마족에 대한 극악의 적개심과 그를 뒷받침하는 실력자들로 이루어진 집단이다.
서부 연합이 몰래 키워둔 전력으로 오늘과 같은 일에 안성맞춤이라고 할 수 있었다.
희생이 얼마나 나든 목표만 달성할 수 있다면 말 그대로 남는 장사이다.
비록 동부의 왕을 해하는, 그 어떤 것으로도 지워낼 수 없는 명분을 주는 꼴이지만.
정작 동부에서 그 왕이 죽든 말든 신경을 쓰지 않는다면 문제될 것은 단 하나도 없었다.
‘얼마 전에 비밀리에 들어온 한 통의 서신이 결정적이었지.’
동부에서 대규모 반란이 일어났다는 것, 그리고 율리아가 그걸 진압하는 데에 성공했다는 것.
그리고 그 과정에서 반란의 수뇌부가 모조리 죽음을 당했다는 건 다 알려져 있는 사실이다.
그 중 유일하게 살아남은 자가 레블랑 가문의 가주라고 했는데, 아무래도 율리아는 그 레블랑 가문을 자신의 수족으로 부리기 위해서 반감을 줄이고 자신의 명령을 따르는 레블랑의 혈족을 그 자리에 앉히려고 했던 모양이었다.
다만 그 혈족이 겉으로는 충성을 바친다고 해놓고 뒤에서는 다른 꿍꿍이를 품은 모양이지만.
- 마왕을 제거해주면 동부의 나머지는 우리가 정리하겠다. 대신 서부가 원하는 건 무엇이든 들어주지. 세공품의 값을 반으로 줄일 수도 있고 영토를 떼어줄 수도 있다. -
처음에는 당연히 믿지 않았다, 그걸 믿을 수가 없었다.
서신을 보낸 이는 현 레블랑 가주라는 세실리 레블랑이란 마족.
정보에 의하면 마왕에 의해 가주 자리에 앉은 자라고 했는데 서열권에서 가장 뒤에 있는 막내가 그 자리를 차지한 것이니 마왕에게 딱히 악의가 없을 거라는 게 그 이유였다.
하지만 그 세실리가 자신과 뜻을 함께 하는 자들이라고 하며 다른 마족 귀족들의 이름들을 밝히고 그 자들이 이번 거사에 따르겠다는 증거까지 보여주면서.
서부 연합에서도 지금이 잘만 하면 최고의 기회가 될 것 같다고 판단하게 되었다.
숙청 작업을 거치고 반란을 토벌하면서 어느 때보다도 강력한 왕권을 구축한 것 같지만.
피로서 올린 권력은 결국 피로서 무너지는 법이었다.
당장 저렇게 반감을 가진 귀족들을 억누르려고만 하니 반발이 생겨날 수밖에 없다.
그렇게 생각하면서 서부 연합은 은밀하게 그 제안을 수락했다.
“대장, 방금 전 아카데미의 마차가 도시로 진입하는 걸 확인했습니다.”
“좋아. 최대한 은밀하게 뒤를 따르면서 거사를 치르기 좋은 장소를 물색한다.”
“최대한 사람이 없는 곳으로 정하겠지만 그게 용의치 않는다면….”
“그냥 일을 벌이고 목격자들을 전부 죽여도 무방하다. 평민 따위는 몇이나 죽어도 개의치 않겠다는 결정이 나왔어. 그리고 어차피 이번 일은 동부의 반란자들이 사주한 일이고 우리 서부는 모르는 일이라고 잡아떼면 그만이다.”
이후 거의 서른에 가까운 인원들이 사방으로 퍼지기 시작했다.
모두가 꽤나 고강한 실력을 지닌 기사들로서 실전 경험도 많이 지닌 자들이다.
마왕과 클라우스의 무력을 고려한다고 해도 이 정도면 충분할 것이다.
심지어 그들 사이에는 마법을 무력화시켜줄 마법사들도 대기 중이었다.
그렇게 서로 신호를 주고받으면서 율리아와 클라우스를 미행하던 자들은 그들이 어느 정도 외진 느낌을 주는 골목으로 들어서자 지금이 최적기임을 직감했다.
다음 대로로 나아가기 전에 잠시 위치하고 있는 그 골목.
장사를 하는 평민도 거의 없고 마침 오고가는 이들도 별로 없는 때였다.
이 순간만을 노렸다는 듯 웅크리고 있던 자들이 일제히 그곳으로 뛰어들었다.
언제까지고 혼란스러울 줄 알았던 동부가 서부보다 먼저 중흥기에 들어서려고 한다!
그 중심이 되는 마왕을 죽이고 저들의 분열을 초래해야만 한다.
동시에 그 혼란을 틈타 서부가 동쪽으로 진격할 수 있다면 지난 대륙 전쟁에서 겪었던 모든 치욕을 갚아줄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면서 모든 이들이 단 한 치의 의심도 없이 자신들의 숭고함을 생각하던 순간이었다.
“죽을 자리인 줄도 모르고 잘도 찾아오는군.”
퍼억!!-
가장 선두에 섰던 동료의 머리통이 그대로 사라졌다.
분명 무기가 없음을, 그리고 딱히 이쪽을 알아차리는 기척이 없음을 확인했는데.
골목으로 들어서자마자 그들이 마주한 것은 아주 여유로운 기색으로 상대방의 머리를 날려버린 클라우스와 그 뒤에서 웃고 있는 율리아였다.
“무기가 없는 걸 확인했는데 어떻게….”
라고 중얼거리던 자들은 곧 클라우스 주변에 돌고 있는 마력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걸 알아차린 순간 자리에 모인 자들은 입술을 짓씹을 수밖에 없었다.
여기까지 미행하는 동안 상대방이 마력을 끌어 모으는 그 어떤 행위도.
그리고 주변에 모여드는 마력의 아주 희미한 기운도 느끼지 못 했다.
헌데 도대체 어느 틈에 마력 응어리를 세 개나 띄울 동안 자신들은 물론이고 대동한 마법사들조차 모를 수가 있었단 말인가!
일이 수틀렸음을 깨달은 자들은 너나 할 것 없이 바로 달려들었다.
골목이라고는 하지만 하나가 열을 막을 수 있을 정도로 좁은 곳은 아니다.
고작 둘 정도는 가뿐하게 포위해서 억지로 빈틈을 만들고 그 찰나를 노려서 심장에 칼을 쑤셔 박을 수 있었다.
심지어 저들은 무기조차 없이 오직 마력으로만 싸워야 한다.
이렇게 되면 마법사까지 끼어있는 자신들이 훨씬 더 유리하다고 할 수 있었다.
그걸 모를 리가 없는데, 불리하다는 사실을 분명 알 터인데.
“율리아. 그냥 가만히 있는 게 어때요.”
클라우스는 오히려 뒤에 서있는 율리아를 걱정하면서 자신에게 맡기라고 할 뿐이었다.
물론 율리아는 절대 싫다는 듯 고개를 내저었지만 말이다.
“싫어요. 우리 아이에게 마침 좋은 경험을 시켜줄 수 있는데 왜요.”
“저번에도 말했지만 혹 아이한테 좋지 않은 영향을 끼칠 수 있다면….”
“시끄럽고 얼른 다 잡아 족치기나 해요. 설마 아이를 밴 임산부보다 느린 건 아니겠죠?”
그 말과 동시에 벽을 타고 튀어 오른 율리아가 가볍게 다리를 한 번 휘둘렀다.
거리가 꽤나 되었기에 도대체 그게 무슨 짓인가 하던 자들은 곧 앞에 선 자들의 몸뚱이에 쩍! 하고 혈선이 그려지는 꼴을 보게 되었다.
단순히 마력을 모아서 공격하는 게 아니라 신체에 둘러 사용하는.
몇 달 전까지만 해도 감히 꿈도 못 꾸던 경지에까지 이른 율리아였다.
정말이지 피에 미친 악귀라는 이명은 누가 붙였을까, 참 잘 지어냈다. 라고 생각하면서.
클라우스는 율리아에게 갈 부담을 최대한 줄이기 위해 손속에 자비를 두지 않기로 했다.
무기? 챙겨오지 못 한 게 아니라 애당초 챙겨올 필요성을 느끼지 못 했다.
여기 모인 놈들의 실력, 객관적으로 보자면 썩 나쁘지 않은 자들은 분명하다.
아마 아카데미에 갓 들어왔던 율리아였다면 5분도 채 버티지 못 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과 그 때는 상황 자체가 아예 다르다.
지금의 율리아는 클라우스도 이제 마음대로 꺾을 수 없을 정도로 성장했다.
무엇보다 이들 전원이 보통 사람도 아니고 왕국의 강경 귀족들로 이루어져 있다.
클라우스 앞에서 귀족들이 이상한 헛짓거리를 벌이고 있다?
심지어 그 귀족들이 한때 자신을 무척이나 성가시게 하던 놈들과 관련이 있다?
그의 입장에서는 마음껏 때려죽여도 아무런 문제가 없는 일이었다.
“꺽!”
“커억!”
처음에는 자신들이 사냥을 하는 중이라고 생각했던 자들.
하지만 단 5분도 지나지 않아서 뭔가가 잘못 돌아가고 있음을 깨달았다.
사냥을 하는 게 아니라 당하고 있음을 깨달은 그들은 얼른 자리를 이탈하려고 했으나 한 번 먹잇감을 문 맹수는 절대 그 먹이를 쉽게 놓아줄 생각이 없었다.
“멍청한 것들. 제 가문들이 자신들을 이용만 해먹고 버리는 줄도 모르고.”
허공을 디디며 껑충 뛰어 올라 역으로 그들의 퇴로를 차단한다.
자신을 그저 전쟁에서 운 좋게 공 좀 세운 놈이라고 알고 있는.
아니, 그렇게 믿고 싶은 귀족 떨거지들을 웃는 낯으로 노려본다.
“커억!”
“그래도 너희들은 이렇게 싸우다가 죽으니 운은 좋은 편이야. 저항도 못 해보고 사로잡혀서 산 채로 창대에 꿰이는 것보다는 나을 테지.”
클라우스는 일부러 놈들의 숨통을 끊어주지 않았다.
팔다리 모두를 박살내고 함부로 소리를 내지 못 하도록 입을 찢어놓기도 했으며 고통 속에서 천천히 죽어가도록 가슴에 조그마한 구멍을 뚫어주기도 했다.
죽기는 할 것이다, 하지만 편안하게 죽지는 못 할 거다.
죽는 그 순간까지 선명하게 고통이란 것을 알아가면서, 그렇게 뒈져버려.
“꺼윽! 꺽!”
“끄륵, 끄르륵….”
10분도 지나기 전에 스물이 넘는 인원들을 전부 처리한 클라우스는 뒤를 돌아보았다.
거기에는 마찬가지로 아주 여유로우면서도 상쾌한 표정을 짓고 있는 율리아가 있었는데, 손에는 축 늘어진 습격자들의 시체를 쥐고 있는 상태였다.
“설마 이게 끝은 아니죠, 클라우스?”
“당연히 아니죠. 이것들은 끄나풀에 불과합니다.”
“당신 말대로 이런 놈들이 나를 노리고 있었군요. 어쩜, 황송해라. 이런 떨거지들로는 마왕성의 메이드도 못 잡을 것 같은데.”
그 메이드가 혹 플랑슈를 말하는 거면 수십이 아니라 수백이 와도 못 잡을 걸.
클라우스는 속으로 그렇게 중얼거리면서 일부러 숨을 붙여둔 한 놈의 머리통을 붙잡았다.
진작 팔다리는 모두 작살이 난 채 인형마냥 질질 끌려오는 남자.
그래도 주제에 귀족이라고 뭐 어떻게 버텨보려는 심산인 듯 하지만….
꾸욱-.
“끄윽! 끄으으윽!!”
원래 고통이란 사람의 예상을 뛰어넘어도 한참 뛰어넘는 것이다.
손수 상대방의 눈 한쪽을 파내주니 놈의 몸이 경련하기 시작한다.
곧 굳게 다물고 있던 입에서 살려달라는 말이 나오자 클라우스는 미소를 지었다.
동부의 꺼지지 않은 분란의 불꽃이 있다고 믿었을 것이다.
자신들은 거기에 기름 좀 붓고서 모르쇠로 일관하다가 어부지리를 노리려고 했겠지만.
역으로 서부의 모든 것을 불태울 준비는 끝이 났다.
“클라우스.”
“네, 마왕 전하.”
“선전 포고하고, 집결지에서 대기 중인 병력들을 움직일 준비 하세요.”
이제 남은 것은 동부에서 일어난 성난 불길이 서쪽으로 향하도록 이끄는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