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58화 〉 24장 - 일렁이는 불길
“외출 말인가?”
“그렇습니다, 총장님.”
아카데미에서 맞이하는 또 한 번의 주말.
루스칼 총장은 평소와 같이 업무를 보다말고 자신을 찾아온 클라우스를 바라보았다.
아카데미에 교수로 들어온 후 개인적인 용무로 나간 적이 거의 없었던 그다.
아주 가끔 바깥으로 나서기는 했지만 바로 돌아온 적이 대부분이었다.
물론 그건 루스칼 몰래 클라우스가 나가서는 순식간에 일을 마치고 돌아왔기에.
그걸 어느 누구도 알 수 없도록 조치를 취해두었기에 그런 것이지만.
그 부분까지 알 수가 없는 루스칼 총장으로서는 꽤나 오랜만에 클라우스가 외출 허락을 구하고 있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혼자 나가려는 건가?”
“아닙니다. 실은 율리아 생도가 여태껏 한 번도 서부 나들이를 다닌 적이 없어서요.”
“다른 생도들은 주말이 되면 다들 나가는 것 같던데 그동안 아카데미에만 있었던 건가?”
“처음에는 감히 왕을 해하려는 자들 때문에, 그 이후로는 딱히 나갈 필요성을 느끼지 못 했기에. 이 정도가 이유라고 했습니다. 다만 이번에 여유가 생겨서 직접 두 눈으로 보고 싶다고 했습니다. 해서 제가 동행하려고 합니다.”
그러자 루스칼 총장은 클라우스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세간에 돌고 있는 소문 정도는 자신도 아주 확실하게 알고 있다.
대륙 전쟁의 영웅이 마왕의 미인계에 넘어가서 헤벌쭉해서는 정신을 차리지 못 하고 있다고.
자신도 눈이라는 게 있고 생각이라는 것을 하는 인간이다.
총장 자리에 앉고 여태껏 수없이 많은 이들을 보면서 통찰이라는 걸 약간은 지니게 되었다.
그런 자신이 보기에, 지금 클라우스가 정말로 미인에 푹 빠진 남자 같은가?
‘…저게 푹 빠진 자의 모습이면 다른 귀족 놈들은 어떻게 설명하려고.’
연기를 하는 것일 수도 있다,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을 하는 걸 수도 있다.
허나 그걸 감안해도 클라우스가 내보이는 기세나 분위기는 뭔가에 홀딱 빠진 게 아니었다.
오히려 눈동자 속에서 아주 미약하게나마 뭔가가 번뜩이는 것이, 정말로 지금 이 외출이 그저 바람을 쐬기 위한 것인지 아니면 다른 뭔가를 노리는 건지 걱정이 들 정도.
해서 루스칼 총장은 은근한 어조로 클라우스에게 질문을 던졌다.
“정말로 그냥 단순한 의미의 외출인 건가?”
“그렇습니다. 율리아 생도에게 서부의 풍경을 보여줄 생각입니다만.”
“그 외에 다른 건. 혹 뭐 다른 볼일이 있을 수도 있는 거 아닌가.”
“다른 자들이 먼저 자극하거나 도발하지 않는다면 조용히 돌아올 겁니다.”
율리아가 마왕인지 아닌지 모른다고 해도 그 외모는 어디를 가도 확 눈에 띨 것이다.
아카데미에서 아름다움 그 하나로만 보면 요정들도 함부로 내세우지 못 할 정도였다.
거기에 마족 특유의 불그스름한 눈동자를 하고 있으니 시비에 휘말릴 확률이 높다.
클라우스가 옆에 있다고는 하지만 그의 얼굴을 아는 자가 또 은근히 없는 터라 무조건 적으로 아무런 일도 없을 거라 단정 지을 수는 없었다.
더해서 이 남자의 성격이 막 과하게 흉포하지는 않아도 선을 넘는 순간 자비 없이 분노를 터트린다는 걸 알고 있기에 걱정이 컸다.
아무 일도 없기를 바래야 할 터인데, 그렇지 않아도 요즘 무척이나 시끄러운데.
단순히 왕국의 귀족들만이 아니라 제국, 요정, 수인들까지 요동치는 상황.
이런 때에 조그마한 불길도 언제 어떻게 번져서 세차게 타오를지 모르는 일이었다.
“최대한 조용히 다녀오게. 또 사고가 일어나면 참으로 피곤해.”
“저는 사고를 칠 생각이 추호도 없습니다. 그저 다른 놈들이 벌인 일에 휘말려서 어쩔 수 없이 거기에서 벗어나고자 발버둥을 칠뿐이지요.”
“그게 발버둥인가? 내가 보기에는 칼부림 같은데?”
“어찌 되었든 가만히 있는 사람 건들지만 않으면 저도 아주 순하답니다.”
저런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하는 클라우스가 참으로 기가 막힌 루스칼 총장이었다.
이전에 왕국의 귀족 회의에서 나온 뜻을 지니고 온 기사의 혀를 잘라낸 게 바로 클라우스다.
덕분에 자신이 얼마나 많은 고생을 했는지 그는 전혀 모를 것이다.
클라우스가 총장실을 나서고 루스칼 총장은 문득 불안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상하게 저 남자가 뭐만 하려고 하면 무슨 일이 생기는 것 같던데.
그러고 보니 요즘 들어서 계속 자신을 찾아와 클라우스의 일거수일투족을 알려달라고 귀찮게 하던 자들도 어느 순간 발길이 뚝 끊어졌고 말이다.
‘…아니길 바래야 하는 건가. 이거 정말이지 답답해 미칠 노릇이군.’
루스칼 총장이 애써 아무 일도 없기를 바라면서 다시 업무에 집중할 무렵.
총장실을 나선 클라우스는 먼저 기다리고 있던 율리아에게로 다가갔다.
지금과 같은 때에 마족이 함부로 막 돌아다니면 딱히 좋을 게 없겠지만 그래도 굳이 그녀를 데리고 가는 이유는 타오를 준비가 되어 있는 장작더미에 불씨를 던지기 위함이었다.
다만 율리아가 아이를 가졌다는 것이 무척 염려스러운 부분이지만.
해서 이 계획을 정말로 실행에 옮겨도 되나 무던히도 고민을 하고 또 했지만.
자신이 아는 율리아라면 망설이지 말고 그렇게 하라고 할 것이다.
오히려 제 아이에게 일찍부터 세상의 혹독함을 알려줄 수 있다고 좋아할 거다.
“갈까요, 마왕 전하?”
“네, 가죠. 클라우스.”
두 남녀가 마차에 오르고 얼마 후, 번뜩이는 두 눈이 잠시 머물다가 사라졌다.
그 뒤에 전서구 한 마리가 아카데미에서 날아올라 어딘가로 향하기 시작했다.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클라우스는 율리아와 웃고 떠들기에 바빴다.
서부의 여러 이야기들에 대해서, 그리고 지금 향하는 도시들에 대해서.
그곳에서 무슨 일이 있었고 또 어떤 방식으로 붉은 독거미를 찾았는지 전부 다.
여태껏 단 한 번도 해준 적이 없었던 이야기들이었기에.
율리아는 두 눈을 반짝이며 클라우스의 말을 경청했다.
특히나 이상한 귀족놈이 클라우스를 몰라보고 무례를 저지르고.
한 발 더 나아가 경비대장이라는 작자는 더 큰 무례를 범하고.
마침내 원래 그를 알고 있던 더 거대한 귀족에게 탈탈 털리는 부분을 이야기할 때 보는 이가 다 기분이 좋을 정도로 아주 크게 웃어댔다.
“아하하하!! 대단하네요. 정말 대단해. 그 귀족 애송이들은 역사라는 걸 배우지 않나요?”
“배우죠. 본인들 딴에는 아주 열심히 배우고 있어요.”
“그런데도 그런 무례를 저질렀다고요? 당신에게? 대단하네요, 정말로.”
“뭐 자기 말로는 몰랐다느니 이런 핑계를 붙였으니 더 뭐라고 할 수는 없었어요.”
“몰랐다고 하면 사람을 죽여도 아무런 처벌도 받지 않는다는 것 같네요. 다른 사람도 아니고 감히 대륙 전쟁의 영웅이자 서부의 구세주에게 그딴 애송이가.”
장담하건데 그 둘이, 리어만이라는 청년과 에그마라는 귀족이 바로 앞에 있었다면.
율리아는 웃으면서 그 둘의 입을 찢어버렸을 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부부는 닮아간다고 했던가, 그녀 역시 자신의 것이라는 부분에 아주 민감하게 반응했다.
다른 누군가가 클라우스를 모욕하고 창피를 주었다. 그것만으로도 죽을 이유는 충분했다.
심지어 거기서 더 나아가 채찍질 50회라는, 그냥 죽여 버리겠다는 결정까지 내렸으니 더더룩 율리아가 분노할 것은 자명한 사실.
이미 지나간 일이기에 클라우스는 웃으면서 상관없다고 답했다.
어차피 프리몬트 백작이 알아서 싹 다 조졌는데 여기서 말해 무엇할까.
‘그러고 보니 프리몬트 백작은 잘 지내나 모르겠군.’
키엔마이어 후작이야 원래부터 강대한 세력을 지니고 있으니 걱정이 없다.
하지만 프리몬트 백작은 귀족파와 평민파 사이에 껴서 어중간한 위치에 있었다.
평민들 편을 들자니 귀족들 눈치가 보이고 귀족들 편을 들자니 당장 영지가 인접한 키엔마이어 후작이 걱정되는 그런 곳 말이다.
원래 프리몬트 백작은 의심할 여지없는 귀족파의 일원.
하지만 키엔마이어 후작가와 바로 이웃하고 있고, 거기에 내기에서 패배하여 클라우스와 친구를 먹고 얼떨결에 키엔마이어 후작, 그리고 클라우스 사이에 끼게 되었다.
그 틈바구니에서 조금씩, 아주 조금씩 귀족과 평민에 대한 인식이 바뀌게 된다.
그리고 2차 대륙 전쟁이 발발하면서 키엔마이어 후작이 항복할 때 그를 따라서 항복하게 되는데 귀족들 대신 평민들을 감싸는 모습으로 바뀌게 되었다.
프리몬트 백작에 대해서 말하자면,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이지만.
없으면 뭔가 아쉬운. 나중에 인간 측 자치령을 맡는 인재가 조금 아쉽게 된다고 할까.
행정 능력이 있고 경험도 풍부하면서 평민들에게 호의적인 귀족을 찾기가 너무 어려웠기에 프리몬트 백작은 키엔마이어 후작과 함께 받아들이는 편이 좋았다.
클라우스도 그래서 그를 나름 잘 대해준 것이고 말이다.
“그래도 프리몬트 백작? 그 인간은 칭찬해주고 싶네요. 당신에게 잘 대해줬다니.”
덤으로 율리아에게도 좋은 이미지를 심어주는 데에 성공했다.
인간들에 대해서 딱히 좋은 생각을 지니고 있지는 않지만 클라우스가 괜찮다고 여기는 이들에 한해서는 율리아도 나름 좋은 평가를 내리는 중이었다.
“당신 이야기를 들으면서, 그리고 아카데미에서 여러 번 본 것이지만 난 정말이지 인간 귀족들을 이해하려야 할 수가 없어요. 잘 한 게 단 하나도 없으면서 어쩜 그리 당당할 수 있죠?”
“양보하기 싫은 겁니다. 내어주기가 싫은 겁니다. 그들은 조금이라도 뒤로 물러서면 계속 뒤로 물라나고 물러나 결국에는 전부 다 내어주기를 겁내고 있어요.”
“어이가 없네요. 자신들이 그 자리에 대해서 확신이 있다면, 그리고 자신감이 있다면 그런 걱정은 애당초 안 하는 게 정상 아닌가요? 그런 걱정을 한다는 것 자체가 이미 지배층으로서 실격이에요. 자신이 그들을 위해서 무엇을 할 수 있는지 고민해야지, 그들이 자신을 위해서 무엇을 할 수 있는지 생각을 하다니. 머저리 같은 놈들.”
율리아의 날이 잔뜩 선 반응에 클라우스는 슬그머니 이렇게 질문을 해보았다.
만약 그런 놈들이 당신에게 항복하고 영원히 신하가 되겠다고 맹세한다면.
그로 인해 서부를 더 빠르게 취할 수 있다면 과연 어떻게 하겠냐고.
클라우스의 그런 질문에 율리아는 하아? 하고 탄식을 흘리더니 어림도 없다고 외쳤다.
“장담하는데 그 머저리 놈들은 항복을 한다고 해도, 제 땅을 죄다 들어 바치는 한이 있어도 모조리 치워낼 거예요. 그놈들이 항복할 때 할 요구가 뻔히 보이잖아요? 자신들의 자리만 보전하게 해줘라. 계속해서 다른 자들의 위에는 있게 해달라. 그리 부탁할 거예요.”
“아마도 그렇겠죠.”
“헛소리 하지 말라고 해요. 내가 다스릴 이 다음 시대에 그런 멍청이들은 필요 없어. 자신의 분수를 알고 자신의 능력을 최대한 활용하여 왕의 빈자리를 채울 수 있는 자들만이 남을 뿐이에요.”
“그렇다면….”
“깔끔하게 다 잡아 치워버려야죠. 다시는 이 세상에 나타나지 않도록 뿌리까지 싸그리.”
율리아의 말을 들으면서 클라우스는 속으로 웃음을 흘렸다.
처음에는 그녀를 범하려고 했고, 그 다음으로는 다른 이들에게 무례를 범했으며.
최종적으로는 그 어떤 이득도 되지 못 하는 것이 확실해졌기에.
귀족들의 운명은 그것으로 결정되었다, 아마 죽어서도 편히 쉬지 못 할 거다.
“동부에서 잘 나간다고 거들먹거리던 귀족들이 어떻게 쓸려나갔는지. 서부의 머저리들에게도 한 번 보여줄 날이 오면 좋겠네요. 그것도 되도록 빨리.”
동감입니다, 마왕님. 나도 그게 너무 보고 싶어요.
클라우스는 그렇게 속삭이면서 마차의 창문 너머를 바라보았다.
아마 지금쯤이면 자신과 마왕이 도시로 향한다는 소식이 전해졌을 것이다.
그리고, 바로 지금이 기회라고 여기고 최악의 멍청한 짓을 저지를 준비가 다 된 놈들이 그곳에 있을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