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55화 〉 24장 - 일렁이는 불길
때로는 지옥과도 같이 뜨거웠고 또 때로는 천국과도 같이 부드러웠다.
율리아는 그런 여인이었다, 클라우스조차 확신할 수 없는 존재.
워낙 변화무쌍하고 어디로 튈지 모르고, 거기에 또 어찌나 강력한 여인인지.
어떻게든 그 마음부터 잡아놓아서 한 곳에 콱 박아두지 않으면 불안해 견딜 수가 없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점차 그녀를 대하는 것이 익숙해졌을 때.
자연스레 그 다음의 일들을, 남녀의 미래를 보는 경우도 생겼다.
그 중에서는 잘못 쌓아올린 것이 눈덩이가 되어 굴러와 토사구팽 당한 적도 있고.
때로는 다사다난하기는 했지만 나름 괜찮은 해후를 맞이하는 순간도 있었다.
‘지금처럼, 딱 지금처럼 무척이나 벅찬 순간이었나.’
율리아의 저 말은 언제 들어더 항상 가슴이 두근거리는 말이었다.
내 여인이 한 아이의 어머니가 된다, 저 안에 내 아이가 자라고 있다.
그 생각을 하면 싸늘하게 굳었던 심장이 일순간 녹아내리는 느낌이었다.
“…내가 마왕의 반려로서 다행히 일을 성공적으로 했나 보네요.”
다만 그 기쁨을 다 드러낼 수는 없기에, 그리고 감정을 내보이는 건 여전히 낯설기에.
클라우스는 꿈틀거리는 입술을 애써 진정시키며 애둘러 말해보았다.
하지만 남자 최대의 적은 여인이라고 했던가. 아무리 클라우스라고 해도 몸을 섞고 마음을 주고받은 여인 앞에서 모든 걸 숨길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아무리 대단한 회귀자라고 해도, 모든 걸 구성한 창조주라고 해도.
마음을 내어준 여인 앞에서는 어쩔 수 없이 연인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당신, 이미 좋아서 죽으려고 하는데.”
“아뇨. 그런 적 없어요.”
“입꼬리가 올라가서는 바르르 떨리고 있어요, 클라우스.”
“….”
“정말 그게 끝이에요? 내가, 당신의 여자가. 당신의 아이를, 우리의 아이를 가졌다는데.”
진정하자, 진정하자. 이것도 나름 적응이 되었을 정도로 많이 본 상황이 아닌가.
속으로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데, 스스로에게 그리 중얼거리고 있는데.
이미 몸은 저도 모르게 그 자리에 무릎을 꿇고는 율리아의 배를 조심스레 쓰다듬고 있는 중이었다.
“….”
어쩌면, 참으로 많이도 외로웠는지도 모르겠다.
돌아갈 수 없는 세상, 빠져나갈 수 없는 미로, 거기에 완전히 갇혀버린 자신.
아무리 살고 싶어도 멍청한 것들은 끝끝내 제 손으로 제 목을 졸랐다.
그 속에서 자신 역시 참으로 많은 상처를 입고 더 많은 괴로움을 얻어갔다.
저들을 구하려면 할수록 본인은 지옥의 바닥까지 떨어지는 느낌이었다.
결국 저들을 포기하고 여태껏 악이라고 생각했던 자들에게로 시선을 돌리는 순간.
비로소 구원이라는 것이 자신의 눈앞에 펼쳐지는 느낌을 받았다.
이렇게 살 수도 있구나, 굳이 그리도 멍청하고 비참하게 살 필요가 없구나.
해서 클라우스는 새로이 정한 삶에 집중했고 또 집중했다.
‘미치고 싶지 않았으니까, 살고 싶었으니까. 나도 사람이니까.’
그런 상황에서율리아와 동부는 자신에게 있어 가장 든든한 둥지와도 같았다.
아이러니하게도 그 동부에 가장 크나큰 위협이 되어야만 그 인정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이 조금 우스웠으나 이왕 이기적으로 변할 거 더더욱 이기적이 되자고 생각했다.
해서 율리아를 품에 안았고 더 많은 이득을 취하기 위해 다른 여인들을 취했다.
살자, 살아남자, 그리고 이왕 살아남을 거 어느 누구에게도 꿀리지 않는 존재가 되자.
그러다가 크게 데인 적이 생긴 이후 과하게 자신을 드러내는 건 또 손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해서 생각해낸 것이 마왕의 반려로 살아가되 되도록 본인은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것.
대륙의 중요 인물들을 마음대로 주무르면서 정작 본인은 뒷방 늙은이처럼 지내는 것.
그런 것도 나쁘지 않겠다고 생각했고 실제로 꽤나 잘 먹혀들었다.
해서 그 사이에서 오는 이런 기쁨들이 무척이나 소중했다.
원초적인 감정, 어떤 때에는 참 바보 같은 짓이라고 생각하다가도.
한 번 맛보면 벗어나기가 너무 어려운 것들이었다.
“여기 나랑 당신, 이렇게 단 둘뿐이에요.”
“…그렇죠.”
“그러니까 조금은 솔직해져도, 조금은 무른 모습 보여도 괜찮아요.”
“….”
“아, 아닌가? 이제는 우리 아기도 있으니까 셋이라고 해야겠죠?”
율리아는 미소를 지으면서 클라우스를 일으켜 세웠다.
그리고 그의 품 안에 가볍게 안겨들면서 자신보다 훨씬 더 많은 삶을 살고 또 살아온 남자의 등을 천천히 토닥이고 또 쓰다듬어주었다.
아무런 말도 하지 않지만, 그게 그 어떤 말보다도 더 따스했다.
고생했다고, 그리고 고맙다고, 내게 이런 기회를 주어서 너무나도 고맙다고.
잠시 침묵하던 클라우스는 곧 자신 역시 율리아를 아주 강하게 끌어안았다.
그래, 바로 이 여자의 이런 모습 때문에 몇 번이고 이 지겨운 삶을 반복했던 게 아닌가.
부족한 부분을 채우기 위해서, 메울 수 없는 부분을 메우기 위해서.
가끔은 힘겹고, 미처 예상치 못 한 난관을 만나고, 그래서 주저앉기도 했지만.
그리고 점점 마모되어가는 자신을 바라보면서 이유 모를 두려움을 느끼기도 했지만.
이런 조그마한 부분들 때문에라도 이렇게 살아가는 것이 무척이나 즐거웠다.
“…조금은 난처하네요.”
“뭐가요?”
“이제 곧 전쟁이 벌어질 텐데 이런 경사가 일어나면 곤란하잖아요.”
그 와중에 또 이 기쁨을 감추기 위해 반사적으로 그런 말이 튀어나간다.
율리아도 그런 제 남자를 못 말리겠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리고는 클라우스가 들으면 아주 기뻐할 말로 그의 말에 답했다.
“오히려 좋잖아요. 우리 아가에게 동부만이 아닌, 이 대륙 전체를 물려줄 수 있으니까.”
“….”
“동부의 마왕, 보다는 대륙의 왕이라는 자리를 물려주고 싶네요. 나라는 엄마는 말이죠.”
정말이지 너무 욕심 많은 엄마고, 너무 대단한 엄마이지 않은가.
클라우스는 그렇게 생각하면서 천천히 그녀의 품에서 벗어났다.
사실 난처하다고 말을 하기는 했지만, 솔직히 말하자면 이마저도 다 계산해둔 것이었다.
전쟁이 벌어지면 율리아는 주위가 말리는데도 자꾸만 1선으로 튀어나가기 일쑤였다.
자신이 노는 만큼 적들이 활개를 치고 그것만큼 자신의 병사들이 상한다고.
그 병사들이 집에 돌아가면 누구는 남편, 누구는 아들, 누구는 아버지, 누구는 형제자매일 텐데 그들 하나, 하나가 너무나도 소중하다고 말하면서.
‘그게 전부는 아니었지, 이 무서운 마왕님.’
제 사람들을 챙기고자 하는 마음은 분명히 있었을 것이다.
거기에 적들을 향한 분노와 잡다한 것들을 쓸어버리는 것에서 오는 쾌감도 한 몫 했다.
괜히 피에 굶주린 미친 악귀라는 이명이 붙었겠는가.
제발 그런 일에 나서지 말라고 클라우스나 카엘라, 그 외에 페르디난트나 에슐리가 나서도 율리아는 1선에서 나가기를 무척이나 싫어했다.
누가 마족 아니랄까봐 그렇게 한 번 불이 붙으면 꺼질 줄 모르는 여인.
심지어 전장에 나서서 그리 학살을 하는데 다치지도 않는다.
이러니 병사들은 율리아를 더욱 신봉하게 되고 사기는 마왕에게 집중되어 폭발하듯 올랐다.
다만 수하들 입장에서는 그러다가 율리아가 부상을 입기라도 하면 사기 부분에서 심각한 영향을 받으니 걱정을 할 수밖에 없었다.
실제로 율리아가 아주 가벼운 부상을 당하자마자 사기가 급락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렇게 조금은 귀여운 족쇄를.
자신의 안에서 사랑의 결실이자 차기 마왕이 자라나고 있음을 채워 넣어주면.
율리아는 1선에서 머물지 않고 원래 왕이 있어야 할 지휘부에서 활동하게 되었다.
참으로 우습게도 아직 태어나지도 않은 아기가, 아니 아기라고 부르기도 모호한 아주 조그마한 존재가 아버지와 어머니께 효도를 하는 셈이었다.
‘복덩이지. 아주 복덩이야. 장성하는 모습을 제대로 본 적이 없어서 조금 아쉽지만.’
거의 대부분의 회귀는 2차 대륙 전쟁 이후 내부 정리에 들어가고 그 모든 것이 다 마무리되었을 때 즈음에 이루어졌다.
그쯤이 되면 무엇이 어떻게 잘못되어서 이런 식으로 일이 번지는지 알 수 있었으니까.
그게 긍정적인 게 될 수도 있고 부정적인 게 될 수도 있었다.
지금도 클라우스가 아쉬워하는 것이 자식이라는 가장 소중한 보물이 장성하여 율리아의 자리를 이어받는 걸 제대로 본적이 거의 없다는 것이었다.
당시에는 그냥 자신의 여자들과 뒹굴면서, 그리고 남들은 절대 누릴 수 없는 걸 누리면서.
그렇게 유유자적 사는 것만이 인생의 목표였기에 그런 부분은 생각하지도 않았다.
하지만 그렇게 수없이 살다보니 자신이 가졌어야 할 평범했던 삶의 일부.
그 중에서 사랑하는 이와의 결실이 맺어져 그 결과물을 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게 당신을 옭아매는 족쇄가 될 거예요, 율리아.”
“족쇄요?”
“정말로 당신이 아이를 가졌다면, 이제부터 험한 일 절대 못 하게 할 겁니다.”
클라우스의 말에 율리아가 킥, 하고 미소를 짓는다.
그러더니 누구 맘대로요? 라고 짐짓 무서운 표정을 만들고서는 입을 연다.
“감히 마왕의 앞길을 가로막겠다는 건가요? 아무리 당신이 내 반려라고 하지만 따지고 보면 내 신하이기도 해요. 그런 내게 족쇄를 채우겠다고 말하다니, 대단히 우려스럽네요.”
“그렇게 말하면 율리아도 문제에요. 미래의 마왕에게 해가 될 일을 하겠다고 한다면 말이죠.”
“…헤에. 그리 나오면 조금은 망설여지는데. 더 해봐요.”
“임신 초기에는 무조건 조심해야 해요. 그러다가 자칫 잘못되면 아이는 둘째 치고 당신도 큰일 날 수 있어요. 이 기쁨을 기쁨으로 이어가야지 다른 걸로 바꾸고 싶지는 않아요.”
괜한 걱정이 아니다, 실제로 가장 유산이 되기 쉬운 시기가 바로 지금부터다.
안정기로 접어들 때까지는 절대 안정을 취해야 하며 과도한 스트레스는 절대 금물이다.
때로는 이런 부분이 우려스러워서 대륙 전쟁이 다 끝난 후에야 아이를 가지도록 조절을 한 자신이었지만 반대로 율리아가 날뛰지 못 하게 하는 최후의 보루 역할도 해주었기에 이번에는 그 보루 역할을 맡긴 것이었다.
원래 자식 이기는 부모는 없다고 했고, 새끼를 아끼지 않는 어미는 없다고 했다.
심지어 보통 아이도 아니고 장차 왕가를 이끌어갈 후계자라고 생각한다면.
율리아는 여인만이 아니라 현재의 마왕으로서 제 아이를 생각할 의무가 있었다.
그리고 클라우스는 바로 그 부분을 교묘하게 파고 든 것이고 말이다.
“당신이 그렇게 말하니까 내가 무슨 큰 죄를 저지르는 것 같잖아요.”
율리아는 그리 말하면서 제 배를 만지작거렸다.
도저히 아이를 품은 여인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탄탄하고 매끈한 몸이다.
하지만 초기에는 그 티가 거의 나지 않을 수도 있다는 점을 생각해본다면 무리도 아니었다.
클라우스는 바로 율리아를 안고서 소파로 향했다.
아직 멀쩡히 제 발로 걸을 수 있는데 너무 과한 거 아니냐고 툴툴거리는 율리아.
하지만 그런 여인의 볼에는 붉은 홍조가 피어오른 후였다.
이렇게 제 남자에게 자신과 아이가 함께 보호 받고 사랑 받고 있다는 건 즐거운 일이다.
“그런데 아이를 가졌다는 사실은 어떻게 안 건가요?”
“아, 조금 전에 나타샤가 봐줬어요. 맥을 살피더니 역시 예상이 맞았다고 하던데 본인 말로는 이상하게 내게서 다른 기운이 느껴졌다나.”
“아마 카엘라가 옆에 있었다면 냄새로 알아차렸을 지도 몰라요.”
“에이, 설마 그런… 표정이 왜 그래요? 진짜로요? 진짜로 냄새로 파악한다고?”
율리아의 얼굴에 평소보다도 더 진한 웃음이 서렸다.
클라우스의 저 기뻐하는 모습이 좋기도 했지만, 그보다 다른 여인들 앞에서 그의 아이를 배었다는 사실을 알렸다는 게 무엇보다 좋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