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54화 〉 24장 - 일렁이는 불길
“오랜만에 뵙습니다, 클라우스님.”
“오랜만에 보네, 안젤리카. 아니, 붉은 독거미 단장님이라고 불러드려야 하나? 이제는 아주 긴밀한 협력 관계이니까 예의를 지키는 선에서 말이야.”
“농담으로도 그런 말씀 마세요. 생명의 은인께 그러고 싶은 생각도 없고 마왕 전하께서 지금 이 상황을 아신다면 아마 저를 찢어 죽이시려고 할 걸요.”
“그 정도는 아닐 걸. 뭐, 조금은 혼내려고 하겠지만.”
붉은 독거미가 단순히 서부의 정보만 취득하고 있는 건 아니다.
언제 어떻게 상황이 변할지 모르니 모든 곳의 정보를 손에 쥐고 있어야만 한다.
그렇기에 저들이 동부와 마왕성, 그리고 그 안의 이들에 대해 알고 있는 부분을 클라우스가 웃으면서 넘어갈 수 있었다.
“생각보다도 훨씬 더 많이 알아낸 모양이네.”
“그리 많지는 않아요. 다만 마왕 전하께서 클라우스님을 끔찍이 아끼신다는 건 알죠.”
“너희들의 살 길을 막고 싶은 생각은 없어. 하지만 선을 넘는 순간 마왕 전하가 아니라 내 분노부터 먼저 받아낼 생각을 해야 할 거야. 내 말 이해했지?”
“그 선을 넘지 않도록 조심해야겠네요.”
긴장한 얼굴을 한 채 그렇게 중얼거리는 안젤리카였다.
율리아가 평소에는 부드럽다고 해도 정말 화가 나면 어찌 변하는지 들어서 알고 있으니까.
“자, 나를 보자고 한 이유가 무엇인지 한 번 들어나 볼까.”
“알려드릴 정보가 있어요.”
“말을 하는 모양새를 보아하니 무척 대단한 것 같네.”
“저희 쪽 식구들이 갖은 노력을 해서 알아낸 것들이에요. 절대 실망하시지 않을 걸요.”
처음 알았을 때나 실망하지 않았었다.
안타깝게도 지금은 이미 안젤리카의 입에서 어떤 말이 나올지 다 알고 있어서 그냥 대단하다는 연기를 해야 한다는 게 전부이지만 말이다.
“요즘 들어서 자꾸 수상하게 움직이는 것들의 이유를 알아냈어요.”
“내 예상대로, 그리고 네 예상대로인가?”
“아무래도 그런 것 같아요. 그렇지 않고서야 지금처럼 평범한 바로 이때에 각종 물자들을 한 곳으로 집중한다거나 은밀하게 각 영지에서 병력들을 차출할 리가 없잖아요?”
“확실한 거겠지? 단순히 심증만으로 그렇게 말해서는 곤란해, 안젤리카.”
“다른 분도 아니고 클라우스님 앞에서 심증만으로 이렇게 말을 할까요. 아니, 다른 사람 앞이라고 했어도 물증을 쥐기 전까지는 이리 말하지 않아요. 음지에 있을수록 정확성과 신뢰가 더더욱 가장 중요한 법이니까요.”
안젤리카의 말대로, 붉은 독거미 측에서도 두 번 세 번 확인을 하고 또 했을 것이다.
이제 완전히 동부에게로, 그리고 마왕에게로 귀의하기로 했는데 그 결정적인 순간에 이상한 정보를 줘서 헛다리를 짚게 만든다면 그거야말로 대형 사고다.
클라우스가 알기로는 이 정보를 알아내고 또 확인을 하기 위해 붉은 독거미 측에서도 다수의 희생자가 나온 것으로 알고 있다.
누구는 미행을 하다가 경계병들의 손에 걸려서 모진 고문 끝에 살해당하고.
또 다른 누구는 귀족들의 애첩으로 위장하여 정보를 캐내다가 정체가 발각되어서 죽었다거나 아니면 그 귀족의 부인에게 독살당하거나, 별의별 방식으로 목숨을 잃었다.
그 와중에도 그녀들은 끝끝내 자신들의 정체에 대해서 발설하지 않았다.
자신들의 희생으로 본인들과 비슷한 처지에 있는 동료들이 조금은 행복해지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그들은 그렇게 제 한 몸을 불사른 것이다.
바보 같은 희생, 의미 없는 죽음은 클라우스가 가장 싫어하는 것이다.
회귀를 거치면서 효율을 내는 것을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클라우스였다.
하지만 그 희생이, 죽음이 의미가 있는 것이라면 또한 그에 합당한 보상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부류기도 했다.
덜그럭-.
클라우스가 안젤리카의 앞으로 뭔가를 내민다.
알 수 없는 것들이 가득 들어있는 주머니였는데 덕분에 안젤리카는 이게 뭐냐는 듯 클라우스를 쳐다보아야만 했다.
“그 정보를 알아내면서 희생당한 이들.”
“네?”
“그녀들도 누구는 가족이 있었을 테고, 또 돌봐야 할 자들이 있었겠지. 그들에게 전해줬으면 한다. 만약 가족도 없는 고아 출신이었다면 술 한 잔 값으로 대신해주고.”
“아니, 아닙니다. 클라우스님. 이미 제가 그 아이들에게 합당한 보상을 약속했어요. 클라우스님께서 신경 쓰시지 않아도….”
“제 목숨 바쳐가는 일에 합당한 보상은 없어. 주고 또 줘도 그저 모자랄 뿐이지.”
그러니까 잔말 말고 얼른 이거나 받아서 챙기라고.
클라우스는 주머니를 밀어서 안젤리카 바로 앞까지 내놓았다.
잠시 그걸 바라보던 안젤리카는 조심스레 그걸 받아서 안의 내용물을 확인했다.
그리고 그녀는 다시 한 번 침음을 흘려야만 했다.
“저, 저기. 클라우스님. 이건 그래도 너무 과하신 것 같습니다. 이 정도는….”
“나만이 아니라 마왕 전하께서도 마음을 같이 하여 준비한 거다. 그 분을 위해서 노력하는 자들인데 그 정도는 넣어야 자존심이 서지 않겠냐고 하시더군.”
왕의 자존심까지 운운하면서, 그러니까 잔말 말고 받으라는 소리다.
결국 안젤리카도 고개를 끄덕이고는 감사하다는 말을 몇 번이나 하면서 클라우스가 내민 주머니를 수령했다.
“지금처럼 하되 여전히 조심해라. 서부만을 조심하라는 게 아니랴.”
“알고 있습니다. 모든 일이 끝나고 나면 으레 내부 정리가 시작되기 마련이죠. 그리고 몇몇 이들은 항상 저희와 같은 음지의 동맹 세력들을 제거하고 그 빈자리를 자신들이 차지하기를 원하고요. 많이 겪었던 일들입니다.”
“마왕께서는 너와 네 식구들을 버릴 생각이 없으시다. 하지만 의심 받을 짓을 하고 그로 인해 말들이 쌓이면 권력자라는 게 그렇듯 움직일 수밖에 없어. 조심해라, 안젤리카. 공을 세우고 떳떳해지고 싶다는 건 이해하지만 때로는 약간 부족한 게 더 좋을 때가 있다.”
경험에서 우러나오는 걱정이었다.
실제로 붉은 독거미가 너무 과하게 욕심을 부려서 정보를 수집하자 거기에 경계심을 느낀 충성파와 율리아에 의해서 전쟁 이후 순식간에 사라진 적도 있었다.
물론 그때는 이런 충고를 해주지 않았기에 안젤리카가 조급하게 굴었던 것이 있었다.
해서 이후로 혹 그런 일이 없도록 조심하고 또 조심하게 만들기로 했다.
“명심하겠습니다.”
아무 것도 아닌 여인의 몸으로 이 커다란 조직을 만들고 규합한 자다.
천하를 뒤엎을만한 심계는 부족해도 제 것을 유지하고 조금씩 키워나가는 눈치 정도는 있으니 이 정도 조언이면 충분할 것이다.
조언도 했겠다, 그리고 보상에 대한 논의도 했겠다.
안젤리카를 찾아온 이유 부분은 얼추 마무리되었다.
이제 한 가지 부분만 끝내면 될 것이다.
“아, 그리고.”
“말씀하세요.”
“레몬을 좀 구해다줬으면 하는데.”
“…레몬이요?”
갑작스럽고 뜬금없기까지 한 부탁이다.
안젤리카는 무례임을 알면서도 지금 자신이 제대로 들었나, 하는 표정을 지은 채 두 눈만 깜빡이며 클라우스를 쳐다볼 정도였다.
당장 전쟁이 임박했다고 할 수 있을 정도로 상황이 급박하게 돌아가는 이 와중에.
그 전쟁의 중심에 설 인물이 전쟁 물자라던가, 아니면 정보를 요청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 레몬을, 그러니까 과일을 청하고 있다고?
“어…. 뭐, 원하신다면 바로 제가 아는 선을 통해서….”
“정확히는 유지엘 지역의 레몬으로 부탁하고 싶군.”
유지엘이라면 왕국 서쪽에 위치한 지역 중 하나이다.
그곳에서 나는 레몬은 다른 곳에서 나는 것보다 신맛의 강도가 더 강하기로 유명했다.
얼마나 신맛이 강한지 신 것을 먹지 못 하는 자는 먹다가 기절할 수도 있다는 농담도 공공연히 돌 정도라고 할 수 있었다.
실제로 왕국에서도 유지엘 산 레몬은 먹거나 즙을 내는 용도라기보다는 향을 지우는 용도로 더 많이 사용하는 중이었다.
이건 맨 정신으로는 도저히 먹을 게 못 된다는 말까지 있었는데 유지엘 지역의 사람들조차도 설탕에 절여서 신맛을 중화시킨 다음 먹는다고 했었다.
어디 괴소문으로는 그 레몬으로 고문도 한다는데, 그건 진짜인지 아닌지 모르겠다.
“…저, 클라우스님. 유지엘 쪽 레몬이 얼마나 신맛으로 유명한지 알고 계시는 거죠?”
“나도 왕국 사람이었어. 그 정도는 다 알아. 장난 아니게 시다고 했었지.”
“사람이 못 먹을 정도라고 했어요. 굶어죽기 직전에도 눈에 안 들어올 정도로.”
“맞아. 그 정도로 시큼한 놈들을 구해달라는 거야. 그것도 아주 조용히, 비밀리에.”
그러니까 도대체 왜 레몬 따위를, 그것도 다른 곳도 아닌 유지엘 지역의 것을.
심지어 아주 몰래, 조용히, 비밀리에 구해달라는 것인지.
안젤리카는 궁금해서 과장 조금 보태고 미쳐버릴 지경이었다.
“그리고 내게 전달할 때는 너무 화려할 필요는 없지만, 그래도 적당하게 잘 포장해서 전달 받았으면 하는군. 그에 대한 대금은 확실하게 치를 터이니 걱정하지 말고.”
“…대금은 걱정하지 않습니다. 다만 도대체 왜 유지엘의 레몬인지, 그게 궁금할 뿐이죠.”
그렇게 말한 후 안젤리카는 바로 사람을 시켜 유지엘의 최고급 레몬들을 준비하겠다고 클라우스에게 말했다.
안젤리카의 말에 고맙다는 듯 고개를 끄덕인 클라우스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우리 마왕님이 입덧을 참 희한하게 하셨거든.’
그 대단한 마왕님이 입맛은 또 어찌 그리 아이 같았는지.
지금도 커피를 타주고서 꿀이나 설탕을 듬뿍 넣어주지 않으면 쓰다고 못 먹고.
신 것은 냄새도 맡기 싫다고 하며 달콤한 음식을 때때로 찾곤 할 정도였다.
그런데 한 생명을 품에 잉태한 후 시작된다는 변화에서.
그 아이 같던 입맛이 갑작스레 확 바뀌게 된다.
매일 써서 못 먹겠다고 하며 설탕 범벅, 혹은 꿀물이라고 봐도 무방할 정도였던 커피는 갑자기 그 향이나 맛이 무척 느껴보고 싶다면서 거의 원액 그대로를 요청하기 시작했고.
어느 날은 갑자기 시큼한 것이 먹고 싶다고 하면서 레몬을 찾기도 했다.
덕분에 처음 마왕의 입덧을 맞이했던 클라우스로서는 심히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안젤리카와의 만남을 마치고 아카데미로 돌아와서는 방문을 연다.
안으로 들어서니 자신의 자리에 누군가가 앉아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이미 문고리를 잡기 전부터 무척이나 익숙한 기운이 느껴졌기에 놀랄 것도 없었다.
“오늘은 여인들끼리 대화를 나눈다고 들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
“그게 아니었나요? 율리아?”
“아뇨. 맞았어요. 조금 전까지 나타샤랑 세실리랑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죠. 확실히 여인들끼리 대화를 나누니 재미는 있었어요. 그리고 무척이나 놀라운 소식도 들었고.”
“놀라운 소식이요?”
클라우스가 짐짓 아무 것도 모르는 투로 반문한다.
그러자 율리아는 그런 제 남자를 물끄러미 쳐다보다가 손짓으로 그를 가까이 불렀다.
여인의 그 몸짓에 클라우스는 별 다른 말없이 그 곁으로 다가갔다.
“클라우스.”
마침내 바로 앞까지 클라우스가 다가오니 율리아는 가볍게 그의 얼굴을 끌어당겼다.
서로의 숨결까지 다 닿을, 서로의 눈동자에 서로의 모습이 비칠 정도였다.
“말해 봐요.”
“무엇을 말입니까?”
“이름이요.”
“이름이라니요?”
여전히 모르는 척 그렇게 반문해본다.
그러자 율리아는 킥킥 미소를 흘리고서 클라우스의 볼에 가볍게 입술을 맞춘다.
“혹 생각하지 않았다면 지금부터 천천히 생각해둬요. 남자 아이면 무슨 이름이 좋을지, 여자 아이면 무슨 이름이 좋을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