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53화 〉 24장 - 일렁이는 불길
“오랜만이야, 세실리. 아니, 레블랑 가주라고 해야 하나?”
아카데미의 학기가 시작되었지만 세실리는 꽤 오랜 시간동안 돌아오지 못 했다.
율리아와 클라우스의 명령에 따라 본인이 벌레들을 꼬이게 만들었다.
겉으로는 마왕에게 충성하지만 속으로는 다른 짓을 꾸미고 있는 자들.
동부가 모든 것을 한꺼번에 쏟아 단숨에 모든 것을 끝내야 하는 순간에 방해가 될 놈들.
그런 자들을 한꺼번에 모아서 쓸어 담을 수 있는 준비였다.
“아닙니다, 마왕 전하. 여기서는 그냥 이름으로 불러주세요.”
“그럴까? 대신 그러면 너도 마왕 전하 말고 이름으로 부르도록 해.”
율리아의 말에 세실리가 화들짝 놀라서는 열심히 고개를 젓는다.
자신이야 눈앞의 마왕 덕분에 가주 자리에 오른 것이니 그런 말을 한 것이지만.
앞에 앉아있는 저 여자는 다르다, 결국 모든 걸 이뤄낸 왕이다.
마땅히 죽었어야 할 자신의 아버지조차 결국 살려준 인물이다.
그렇기에 세실리는 율리아에게 정말 진심을 다해 충성을 다하고자 했다.
해서 절대 그럴 수는 없다고 분명하게 의지를 표명했지만.
오히려 율리아는 두 눈을 가늘게 뜨고는 ‘명령이야.’ 라고 못 박았다.
덕분에 무척 난처해진 세실 리가 어쩔 줄 모르니 가만히 옆에 앉아서 차를 마시고 있던 나타샤가 쿡쿡 미소를 흘리며 입술을 뗀다.
“너무 짓궂어요, 마왕 전하. 그런 말을 그렇게 갑작스럽게 하시면 당황스럽다고요.”
“그렇게 말하는 나타샤, 너도 이런 자리에서는 편하게 말해도 된다고 했을 텐데.”
“위아래는 확실해야 하는 법이죠. 한 배를 타기로 한 이상 이건 반드시 지킬 거랍니다.”
“…요정들 고집은 알아줘야 한다니까.”
투덜거리기는 했지만 그게 진심이라던가 진지한 분위기에서 하는 말은 아니었다.
누가 들어도 장난이라는 느낌이 강했기에 말하는 율리아도, 듣는 나타샤도 모두 웃는 낯이었다.
“슬슬 펼쳤던 그물을 끌어올릴 때가 되었지, 세실리?”
“네. 이 정도면 꼬여들 이들은 다 꼬였다고 보면 될 것 같아요.”
“어떤 놈들이 내 뒤통수를 치려고 준비 중이었는지 한 번 들어보실까?”
“그전에….”
세실리가 슬쩍 나타샤를 바라보면서 입술을 떼기를 망설인다.
나타샤라는 요정 자체는 딱히 싫지 않지만 어찌 되었든 저 여자는 서부의 존재다.
그리고 지금부터 할 이야기들은 동부의 현 약점이자 얼른 처리해야 하는 안건이니 외부인에게 들어가서 좋을 게 단 하나도 없음이 그 이유였다.
율리아는 세실리가 왜 그런 반응을 보이고 있는지 확실히 이해했다.
동부의 중요한 정보인데 듣는 이가 적은 게 좋다고 판단한 거겠지.
나쁘지 않다, 오히려 아주 바람직한 자세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이미 모두가 한 배를 탔고 자신에게 고개를 숙였는데 굳이 서부와 동부라고 해서 차별할 이유는 이제 더 없었다.
“괜찮으니까 다 말해도 좋아. 세실리, 너처럼 나타샤도 나를 적대시하면 손해만 보거든.”
“믿어도 돼요, 세실리. 나는 동부와 서부가 다시 전쟁에 들어간다면 바로 동부 편을 들 거니까요. 내가 미쳤다고 클라우스님을 적으로 두려고 하겠어요?”
클라우스의 이야기가 나오자 세실리는 아아, 하고 바로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다른 여인들의 입에서 그 남자의 이름이 나오니 조금은 불편한 율리아였지만.
어쩔 수 없이 그 남자가 다 준비한 조력자들이니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자신은 그냥 그의 반려로서 자비로움을 보여주는 편이 차라리 나을 것이다.
그러는 사이 세실리는 동부에서 수상한 짓들을 꾸미고 있는 자들을 알려주었다.
중립파 소속이었다가 전투 전에 합류한 자도 있었고, 팔라티나트가 항복할 때 거기에 휩쓸려서 같이 고개를 조아린 귀족들도 있었다.
살 길을 찾아서 율리아에게 충성을 맹세하기는 했지만 점점 거대해지며 종국에는 어찌 해볼 수도 없이 강력해지는 왕실을 견제하기 위해서.
그들은 반역은 아니어도 최소한 왕실을 견제할 귀족들의 구심점을 찾고 있었다.
그리고 세실리는 바로 그 구심점 역할로 보이도록 연기를 했었다.
“…이상 귀족들과 그 가문들이 제가 알아낸 자들이에요.”
“그게 다야? 다행이네. 더 많을 줄 알았는데.”
“혹시나 해서 조금 더 연기를 해봤는데 더는 관심을 보이는 자가 없어요. 거기서 더 했다가는 자칫 충성파들 귀에까지 들어가서 더 큰 문제가 되었을 거예요.”
“잘 했어, 세실리. 절대 그래서는 안 되지. 그리 했다가는 죄다 도망쳐버릴 테니까. 한꺼번에 일망타진하려면 은신처에서 끌어내어서 모조리 잡아야 해.”
이것들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까.
평시라고 해도 가산을 모두 몰수하고 평민으로 격하시킬 수준이다.
하지만 곧 전쟁이 몰려올 것이라면 그보다 더 빠르게 쳐낼 수도 있다.
피로 가득 한 숙청을 다시 한 번 진행하는 것이다.
“어쩌실 건가요?”
“걸리적거리면 치워야지. 걸을 때도 위험한 돌부리인데 지금은 조만간 전력질주를 해야 해. 그 때 그 돌부리에 걸려서 넘어지면 단순히 무릎 좀 까지고 말지는 않을 거야.”
“저는 가산과 직위만 빼앗으면 된다고 여겼는데 그게 아닌 모양이군요.”
“너도 확실하게 알아둬, 세실리. 위에 있는 자는 피를 보는 일을 두려워해서는 안 돼. 그걸 즐기면 폭군이지만 그걸 두려워하면 암군이야. 이건 단순히 왕에게만 국한되는 게 아니야. 나타샤, 너도 마찬가지야. 마땅히 누군가의 위에 있고자 하는 사람들은 다 각오해야 하는 거지.”
클라우스와 만난 이후 초고속으로 성장한 율리아다.
단순히 실력만 늘은 것이 아니라 심계는 깊어졌고 잔혹하다 싶을 정도로 냉철해지기도 했다.
이 여자가 정말로 반 년 전의 그 무너지기 일보 직전이었던 마왕이 맞을까.
나타샤는 문득 그런 생각을 하다가 세차게 고개를 내저어야만 했다.
“명심하겠습니다, 마왕 전하.”
“페르디난트 엘세와 에슐리 팔라티나트는 굳건한 게 다행이네. 둘 모두 군사적 경험이 꽤 있어서 혹 거기에 가담했다면 피곤할 뻔 했는데.”
“둘 모두 그런 인물은 아닙니다. 마왕 전하의 위엄을 알고 있고 거기에 더해서 클라우스님과도 좋은 관계를 맺고 있기에 더더욱 충성을 다하려고 할 거예요.”
세실리의 말에 율리아는 미소를 짓고는 그 말이 맞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그 둘을 끌어들인 것도 결국 자신이 아닌 클라우스니까.
그는 본인의 이름을 팔아서 율리아의 값어치를 올렸고 거기에 넘어간 두 남녀는 그 마왕인 율리아에게 충성을 다 하기로 맹세했다.
“카엘라는 잘 준비하고 있겠지?”
“제가 출발하기 전에 미리 알려주고 왔어요. 다만 그 다음 일은 잘 모르겠네요.”
“잘 하고 있을 거야. 그 이후로도 내게 들어온 정보가 있으니까. 클라우스와 그 밑의 리르라는 여자가 심혈을 기울이고 있으니 확실한 거겠지.”
나타샤나 카엘라, 세실리까지. 그래도 받아들일 수 있는 여인들이다.
하지만 리르라는 마족은 여전히 율리아 입장에서는 살짝 불편한 부분이 없잖아 있었다.
자신을 인간 귀족들에게 던져준 여인인데 용서를 할 수가 있겠는가?
지금도 그녀 역시 선택권이 없었다는 것을 이해만 하고 있는 것이다.
그 여자의 몸에서 연하게나마 클라우스의 냄새가 날 때마다 심히 짜증이 났다.
하지만 정말로 클라우스가 그녀를 안고서 여인으로 대해주고 있다면, 단순히 클라우스만이 아니라 자신을 위해서라도 함부로 대하는 것은 지양해야만 했다.
질투라는 감정을 버릴 수는 없을 거다, 그리고 안 할 생각도 없다.
그 감정을 보여야 클라우스도 영원히 자신 곁에서 벗어나지 못 할 테니까.
다만 그 감정에 완전히 파묻혀 정작 중요한 것을 잊을 생각 또한 없었다.
후우, 한숨을 흘린 율리아는 나타샤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나타샤. 요정 측은 어때. 혹시 뭐 변화가 있어?”
“최근 들어서 묘하게 식량 부분의 왕래가 잦다는 소식을 들었어요. 처음에는 그냥 단순한 동부와의 교역이 목적인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더군요. 어느 한 지점으로 모이는 것 같아요.”
“아무런 이유 없이 한 곳에 뭉쳐놓는 게 위험한 것을 모을 리는 없겠지.”
“얼마 전에는 레인저들을 불러 들였다는 소식도 들었어요. 요정들이 만들어둔 경계를 보호하는 자들인데 그들까지 일부 불렀다는 건 무슨 일이 터진다는 소리죠.”
“아닌 척 하면서 아주 착실하게 준비하고 있군. 정작 선공은 우리가 먼저 하기를 바라면서.”
“이런 걸 여쭙는 게 실례라는 걸 알고 있지만… 정말로 이전의 반란 사건으로 동부의 전력 중 반이 날아갔나요? 서부에서는 그 이야기가 공공연히 나돌고 있어요. 왕의 숙부라는 자가 반란을 일으켰었고 그걸 막아내기는 했지만 동부가 워낙 큰 피해를 입었다고. 그래서 교역을 재개하여 어떻게든 되살아나려고 한다고 말이죠.”
그러자 율리아는 나타샤를 향해 빙긋, 미소를 지어보였다.
어떨 것 같냐는, 당신은 어떻게 생각하고 있냐는 뜻이 담긴 미소.
거기서 확신을 얻은 나타샤는 요정임에도 안도의 한숨을 흘리고는 입을 열었다.
“역시 아니었군요. 그렇죠, 그럴 수밖에 없겠죠. 마왕 전하와 클라우스님이 있는데.”
“당신도 그렇게 생각하는데 다른 이들은 그리 생각을 안 하는 거야?”
“마왕 전하에 대해서는 좋은 평이 거의 없고, 클라우스님에 대한 부분도 그냥 마왕 전하에게 홀려서 따라갔을 뿐이지 하는 것 하나 없이 그냥 지내고 있다는 소문만 돌고 있어요. 괜히 서부의 영웅이 동부의 강력한 적이 되었다는 소식을 전하고 싶지는 않을 테니까요.”
나타샤의 말에 율리아는 다행이라고 중얼거렸다.
자신이 흘린 거짓 정보가 마치 진실인 마냥 사방팔방으로 퍼졌으니까.
그로 인해 저들이 오판을 하고 있다니 자신들에게는 최고의 기회라고 할 수 있었다.
“그래도 너무 방심하지는 마세요. 대륙 전쟁 이후 인간들은 어떠했는지 몰라도 요정들과 수인들은 엄청나게 전력 확충에 매달렸고 그 결과로 대륙 전쟁 전과 거의 비슷한 수준까지 회복하는 데에 성공했어요. 부작용도 그만큼 많았지만, 결코 약한 게 아니에요.”
이미 붉은 독거미 측으로부터 전달 받은 소식들이었다.
인간 측 군대도 꽤나 강하지만 이번에는 요정들과 수인들이 만만치 않을 것이다.
대륙 전쟁 시절에도 강하다고 했지만 마족들을 상대로 패하기도 했었다.
자존심에 상처를 입었으니 이번에는 절대 그런 일이 없도록 할 게 분명했다.
“저, 그런데… 있잖아요, 율리아.”
나타샤가 갑자기 마왕 전하라는 호칭이 아닌 이름으로 불러온다.
여태까지 그렇게 하라고 할 때는 언제고 갑자기 이제 와서 저러는 걸까.
혹시
율리아가 궁금함이 가득한 표정으로 그녀를 돌아보니 나타샤는 고개를 갸웃거리면서 조심스레 제 손을 내밀었다.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팔 좀 이리로 내주시겠어요?”
“팔? 팔은 갑자기 왜?”
“확인해보고 싶은 게 있어서요.”
“확인? 무슨 소리야, 그게 도대체. 확인을 한다고?”
율리아의 반문에 나타샤가 열심히 고개를 끄덕인다.
그 모습이 워낙 다급해보여서 율리아는 저도 모르게 팔을 내밀고 말았다.
그러자 나타샤는 조심스레 율리아의 팔을, 정확히는 손목 부근을 만지더니 곧 손을 올려두고는 뭔가를 확인하는 모양새를 취했다.
어찌나 집중을 하는 모양새인지 율리아도, 세실리도 입을 열지 못 할 정도.
잠시 후, 나타샤는 보다 더 조심스럽게 율리아의 팔을 내려놓았다.
“저, 율리아.”
“왜. 뭔데. 뭔데 그렇게 심각해.”
“저기, 아무래도… 변수가 하나 생긴 것 같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