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52화 〉 24장 - 일렁이는 불길
교역을 맡고 있는 자들이 갑작스레 서부 연합에 체포되었다는 소식이 전해진 이후 아카데미 안에 한 무리의 사람들이 찾아왔다.
한 눈에 봐도 보통 이들이 아님을 알 수 있었는데, 모두가 번쩍이는 장신구와 값비싼 원단으로 만든 옷을 걸치고 있는 게 그 이유였다.
심지어 왕국인들만이 아니라 요정, 수인, 그리고 제국의 인사까지 껴있었다.
루스칼 총장의 허락까지 받은 듯 그들은 거침이 없었다.
이게 갑자기 무슨 일인가 싶은 아카데미 생도들을 무시한 채 그들이 발걸음을 옮기는 곳은 정원에 앉아서 한창 클라우스와 티타임을 즐기고 있는 율리아 앞이었다.
“동부의 마왕 전하를 뵙습니다.”
그들 중 대표로 보이는 인사가 가슴에 손을 얹고 대충 허리를 숙여 보인다.
심히 건방지기 짝이 없는 행태였으나 이곳은 동부의 마왕성이 아닌 서부의 대륙 아카데미.
화를 낼 명분이 아예 없었기에 클라우스도 그리고 율리아도 딱히 뭐라 하지 않았다.
하지만 저들이 먼저 마왕 전하라고 칭하며 인사까지 한 주제에.
정작 마왕에 맞는 합당한 예의를 보이지 않고 있다.
해서 그저 인사를 받는 둥 마는 둥 하면서 조금은 불쾌한 심정을 드러낼 뿐이다.
“갑자기 서부 연합의 분들이 무슨 일들일까. 심지어 이곳 대륙 아카데미까지 찾아와서는 나를 찾고 말이지.”
“이번에 서부와 동부의 화합을 깨트릴 수 있는 아주 중대한 일이 발생해서 그렇습니다.”
“중대한 일이라. 혹시 누가 병력을 끌어 모아서 기습 공격이라도 했나?”
“…그건 아닙니다.”
“허면 내게는 그 어떤 일도 중대한 일이 아닌데. 어디 한 번 들어나 보지.”
이미 다 알고 있음에도 율리아는 클라우스가 손수 타준 커피를 홀짝이면서.
서부 연합의 이들에게 어서 말해보라는 제스쳐를 취해보였다.
그 모습이 상당히 고혹적이면서도 뭔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위압감이 피어오른다.
여태껏 마왕이라고 하면 그냥 무척 아름다운 여인이라고만 알고 있던 자들로서는.
그 중에서도 그냥 여인이라서 그 아름다움으로 신하들을 홀렸다고 여기던 이들은.
움찔 몸을 떨고서 율리아의 시선을 피하고 말았다.
“클라우스. 나 커피 한 잔만 더.”
“알겠습니다.”
심지어 그 전쟁 영웅을, 마족들이 악마라 부르며 두려워하던 클라우스를 무슨 메이드 다루듯 커피를 따르라 명령을 내리고 있다.
클라우스가 서부를 뒤로 하고 동부로 갔다는 소식이야 이제 모르는 이가 없다.
많은 이들이 마왕의 아름다움에 혹해서 넘어갔다고 믿고 있었는데, 이렇게 보고 있자니 원래부터 그냥 마왕의 충실한 수족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자, 어서들 이야기를 다 해보지.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건가 궁금하거든.”
“이번에 동부에서 서부로 넘어온 교역단이 있었지 않았습니까? 그들의 짐을 불시점검해보니 세공품 외에 절대로 함부로 들여서는 안 되는 물건이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그게 뭐지?”
“동부에서 생산된 소금이었습니다.”
말을 하면서 서부 연합의 인사들은 슬그머니 율리아의 눈치를 살폈다.
소금은 동부에서도, 서부에서도 무척이나 귀중한 자원으로서 양측 모두 외부에 함부로 유출되는 것도, 그리고 안으로 함부로 들여오는 것도 엄하게 금지하는 품목이었다.
같은 무게의 은과 바꿀 수도 있다고 할 정도로 소금은 무척 중요한 것이다.
단순한 조미료 따위가 아니다, 모든 이들이 살아갈 수 있는 원동력이 되는 필수적인 자원이다.
다만 이게 딱히 별 문제가 없었던 이유가 동부는 동부대로, 서부는 서부대로 자체 생산한 소금을 썼고 동부만이 모자라는 소금을 서부에서 들여오고 있는 중이었다.
헌데 역으로 동부에서 소금이 들어오고, 그렇게 해서 서부 내부의 소금 값이 떨어지거나 혹은 내부의 소금 교역이 타격을 입기라도 한다면 상상을 초월하는 피해가 돌아오게 된다.
그렇기에 서부 연합이 이리 민감하게 반응할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단, 정말로 동부가 교역품이 아닌 것을 몰래 끼워 넣고 다른 일을 도모했다면 말이다.
“이상하군. 서부로 보내는 교역단은 내가 직접 관리하는 자들에 의해 이루어지는데.”
“마음만 먹는다면 신과 하늘조차 속일 수 있다고 했습니다. 마왕 전하.”
“내가 내 밑의 신하들을 제대로 관리조차 하지 못 하여 그런 실수를 했다. 헌데 그런 것을 서부의 일반 병사들이 찾아냈다, 이건가. 흐음, 서부의 이들이 참으로 우수한 모양이군.”
그냥 지나가는 말투로 중얼거리는 율리아였지만.
마왕의 말을 들은 서부 연합 인사들의 표정이 일순간 잘게 흔들렸다.
그게 율리아에게 보였을까? 그녀의 표정을 보면 보지 못 한 것 같기도 하다.
클라우스가 그 타이밍에 맞춰서 잔을 내밀었고 그녀는 잔을 받아들고 있었으니까.
서부 연합의 인사들은 잠시 자리에 서서 율리아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사건을 조금 더 자세하게 조사해야 하는 게 아니냐는 말.
그게 아니면 나는 믿을 수 없다 하는 그런 말 등을 생각했는데.
눈앞의 이 마왕은 예상 외로 너무나 여유로웠다.
마치 당신들이 이렇게 득달같이 찾아올 줄 알고 있었다는 듯이.
순간 몇몇 이들 머릿속에 ‘설마?’ 하는 생각이 스치듯 지나간다.
반응이 저러니 이미 서부가 무슨 짓을 할 건지 다 알고 있던 건 아닐까.
당장 붙잡혀 있는 제 사람들이 고초를 겪고 있을 지도 모르는데 너무 태평하지 않은가.
혹 제 밑의 사람들에게 무관심한 게 아닐까 생각도 하지만 그런 왕이 어찌 두 달 만에 대규모 반란을 진압하고 클라우스와 같은 남자를 저리 다룰 수 있겠는가.
“그 단원들에 대한 처분을 놓고 의견이 분분합니다.”
“의견이 분분하다?”
“네. 서부에 들어왔으니 서부의 법대로 처리해야 한다는 주장과 그래도 동부의 마족들이니 마왕의 지엄한 심판 아래에 두어야 한다고 외치는 주장들이 대립하고 있습니다.”
“무슨 결론을 택하든 정말로 그들이 죄를 지었다고 기정사실화 하는 건 똑같군.”
“…그들은 서부로 절대 들여서는 안 될 물건을 들여왔습니다.”
“그게 정말로 그들이 챙겨온 것인지, 아니면 갑자기 어디서 생겨난 것인지 모르지 않는가.”
여전히 나긋한 목소리로 그렇게 중얼거리는 율리아.
하지만 그 말이 ‘너희 서부가 꾸민 자작극은 아니고?’ 라는 뜻을 가지고 있음을.
당장 율리아 앞에 몰려든 서부 연합의 인사들이 모를 리가 없었다.
“무례가 과하십니다.”
역시나 가장 먼저 적의를 드러내는 쪽은 요정이었다.
아무리 잘 쳐줘도 그냥 가문의 일원이 전부일 텐데.
동부의 모든 것을 지배하는 왕의 앞에서 너무 빳빳하다.
클라우스는 저 요정의 무릎을 부서트리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이건 모두 한 편의 연극이니 애써 참기로 했다.
어차피 조금만 더 시간이 지나면, 이 연극이 무르익게 되면.
자신을 그렇게도 괴롭혔던 모든 것들을 일거에 쓸어버릴 수 있게 된다.
“내가 더 알아보고 싶은데. 혹 조사 자료라던가 심문한 거에 대한 보고서라도 가져왔나?”
“죄송합니다만 저희도 급하게 찾아온 것이기에 아쉽게도 그런 건 없습니다.”
“그렇단 말이지.”
고개를 끄덕이면서 율리아는 슬그머니 관자놀이 부근을 꾹꾹 눌렀다.
클라우스의 말대로, 지금 저들은 자신과 동부를 자극해서 먼저 명분을 쥐려 하고 있다.
동부가 교역법을 어기고 물건을 들인 주제에 큰소리를 치면서 무례를 범하고 또 다시 절대 벌여서는 안 될 일을 벌이려고 한다.
우리들이 당한 것이 있으니 이번에는 절대 호락호락해서는 안 된다.
아마 자신의 입에서 험한 말이 나가는 순간 그런 이야기들이 사방으로 퍼져 나갈 것이다.
자,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할까.
지금 저들은 양자택일을 하도록 강요하고 있다.
여기서 적의를 보이면 서부 또한 적의를 보일 거고, 반대로 저자세를 취하면 자신들 역시 저자세를 취할 테지만 그렇게 되면 그들의 죄를 인정하는 꼴이 된다.
무엇이 되었든 유쾌하지 않은 결말 천지였기에 율리아는 일단 그들을 물렸다.
“…어찌 할까요, 클라우스.”
주변에 아무도 없음을 확인했다는 표시로 클라우스가 맞은편에 앉는다.
그에 율리아는 잔을 내려놓고는 그에게 의견을 물었다.
여전히 전쟁이라는 거대하고 끔찍한 규모의 싸움은 클라우스가 자신보다 위에 있다.
전문가에게 의견을 구하는 것만큼 괜찮은 일은 없다는 걸 이제는 그녀도 알고 있다.
“어차피 어느 쪽을 선택하든 결과는 비슷할 겁니다. 동부에는 전혀 득이 되는 게 없겠죠.”
“…어떻게 처음부터 끝까지 이런 자들일 수가 있는지.”
한숨을 내뱉은 율리아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는 제 방으로 걸음을 옮기니 클라우스 역시 그녀의 뒤를 따랐다.
안으로 들어선 그녀는 테이블 앞에 앉고서는 고개를 끄덕였다.
마음의 정리를 마쳤으니 이제 슬슬 시작해도 된다는 뜻으로.
촤악-.
율리아의 몸짓에 클라우스는 어딘가에 숨겨두었던 지도를 꺼내 와서는 그 앞에 펼쳤다.
서부의 모든 것이 그려져 있는 지도, 전략적 요충지와 병력이 이동할 수 있는 가도, 협곡, 평지 같은 전투에 있어 무척 중요하게 여겨지는 것들이 아주 상세하게 적혀있는 것이었다.
이런 지도는 마왕성에도 없는 것이다, 정확해도 너무 정확하다.
당연하게도 이 지도를 만든 이는 서부에서 활동하던 클라우스가 해낸 것이었다.
“율리아, 당신도 알다시피 동부와 가장 가까운 곳은 왕국입니다. 그 중에서도 중부와 남부가 엎어지면 바로 코앞에 있을 정도죠. 이중 남부는 왕국의 가장 비옥한 땅으로 많은 식량이 그곳에서 생산됩니다. 그리고 중부는 왕국 곳곳은 물론이고 그 너머에 있는 제국까지 닿을 수 있는 가도가 건설되어 있고요.”
“허면 중점은 바로 중부와 남부를 점령하는 게 되는 건가요?”
“대륙 전쟁 당시에 마족들이 썼던 전략입니다. 그래서 내가 남부를 틀어막으니 모든 전략이 틀어져서 고생을 했던 거고요. 아마 이번에도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을 겁니다. 첫 공격부터 막아낸다면 기세를 꺾을 수 있을 거라고.”
클라우스는 그렇게 말한 후 지도의 끄트머리, 그러니까 국경을 가리켰다.
그는 국경 인근의 두 곳에 각각 기물을 놓고서는 저 두 곳이 공격의 시작이 될 거라 말했다.
하나는 중부고, 다른 하나는 북부로 이어지는 것이었다.
“북부는 길도 험하고 지형도 좋지 않아서 기습을 당하기 딱 좋을 텐데요.”
“그 기습을 하라고 그리로 가주는 겁니다. 해서 우리 병력이 그곳에서 시간을 질질 끌려 나아가지 못 하는 것처럼 위장할 계획입니다.”
“그렇다면 주공은 역시 중부로 나아가는….”
클라우스는 이번에도 고개를 내저었다.
왕국이 동부와 가장 가깝고, 또 점령할시 많은 이점을 가지고 있기에.
대륙 전쟁도 그러했고 이전들의 싸움도 그러했고 항상 왕국과 첫 전투를 일으키기 마련이다.
그런데 클라우스가 가리킨 곳은 왕국과는 전혀 동떨어진 곳이었다.
“…진심이에요?”
“그렇습니다.”
“그 근처는 방대한 숲이에요. 그 넓이만 해도 감히 헤아릴 수 없는 정도라고요. 거기로 군을 끌고서 진격하겠다고요? 거기에 레인져 수백만 있어도 만 명은 우습게 학살할 것 같은 그 장소로?”
율리아의 말에도 클라우스는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율리아는 미소를 짓고는 마음대로 해보라고 말했다.
저 남자가 저리도 당당하다면 응당 그럴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을 것이다.
누가 봐도 결코 군대를 끌고 가서는 안 되는 지형.
그럼에도 저 남자가 그리 하겠다고 한다면 자신은 크게 막고 싶은 생각이 들지 않았다.
“시기는요?”
“저들이 움직이는 동시에. 그 때로 잡고 있습니다.”
그렇게 말하면서 클라우스는 미소를 지었다.
저들의 마지막이, 이제 정말로 얼마 남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