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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왕가 비선실세-251화 (251/341)

〈 251화 〉 24장 - 일렁이는 불길

아카데미 생활이 재개된 지 세 달이 조금 안 되는 시점이 되었다.

원래는 지금쯤 학기가 거의 끝나고 마무리 작업에 들어가야 함이 옳다.

하지만 학기 자체가 워낙 늦게 시작한 터라 양해를 구하고서 시간을 늘린 결과였고.

어떻게든 아카데미를 계속 이어나가고자 하는 루스칼 총장의 노력 덕분이었다.

그 시간 동안 클라우스는 붉은 독거미 측과 리르로부터 계속 정보를 받고 있었다.

그리고 한 달 전부터 서부 연합 측에서 은밀히 뭔가를 준비하고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리르는 물론이고 붉은 독거미 단장인 안젤리카 역시 아직 확실한 건 없다고 말했다.

하지만 클라우스는 그들이 하고 있다는 그 준비가 다음 아닌 전쟁임을 알고 있었다.

갑작스럽다면 갑작스럽다고 할 수도 있지만, 아예 바보 같은 생각은 아니다.

일단 동부는 내전으로 인해 원래 가지고 있던 병력이 절반 가까이 날아간 상황이다, 라고 서부 측은 알고 있는 중이다.

물론 실제적으로 더는 전투가 불가능한 자들이 그 정도로 많지는 않았다.

율리아가 일부러 그런 정보를 흘리도록 유도한 것이고, 서부는 그걸 좋다고 물어가서는 동부 병력의 절반이 운용 불가 상태라고 말한 것이었다.

아무튼 동부의 힘은 반으로 감소했고 서부는 비록 내부 분위기가 뒤숭숭하지만 딱히 병력 손실이 일어난 것은 아니다.

그런 와중에 동부가 갑자기 교역 재개를 요청해왔다.

그것도 자존심을 접고 무척 저자세로 요청한 것이었기에 서부 연합 측에서는 동부가 내부의 어려움을 교역으로 타개하려 한다는 생각을 품게 되었다.

교역을 핑계로 슬그머니 동부의 상황을 파악해보니 마왕에게 항복했다는 귀족들도 딱히 반응이 충성을 맹세한다거나 왕가를 찬송하는 분위기도 없다고 했다.

하지만 곧 그 모든 부족한 부분들은 모두 채워지게 될 것이다.

소금 광산이 본격적으로 가동되면 동부는 소금이라는 절대적인 물자를 확보할 것이고 이미 교역으로 인해 서부의 은을 엄청나게 빼내가는 상황이기도 하다.

손실을 입은 전력은 시간이 지나면 회복될 게 분명하다.

그리고 그들 곁에는 서부의 거의 모든 군 체제를 알고 있는 클라우스가 있다.

대륙 전쟁 시절 보여주었던 그 압도적인 군대가 뛰어난 지휘관까지 얻는다?

악몽도 그런 악몽이 없을 것이었다.

‘해서 지금 무척 다급하겠지. 만약 동부가 갑자기 다른 마음을 품는다면 그 날이야말로 진정한 서부 멸망의 날이 될 테니까.’

불안함은 판단력을 흐리고, 흐려진 판단력은 확실한 이유도 없는 자신감을 키우고.

그 자신감은 근거 없는 강경한 이들에게 힘을 실어주게 된다.

마지막으로 그 근거 없는 강경론은 마치 독약처럼 사람들에게 퍼져나가게 된다.

두려움과 공포, 그리고 이전의 경험이라는 바람을 타고서 말이다.

분위기가 이상해요. 이런 적이 없었는데, 다들 마치 뭔가에 홀리기라도 한 것처럼 자꾸 이상한 방향으로 길을 잡고 있는 것 같아요. -

정확한 상황을 알아보고자 붉은 독거미의 안젤리카를 다시금 만난 날.

그녀는 무척이나 오랜만에 보는 은인임에도 안부를 묻는 것보다 먼저 자신이 품고 있던 우려에 대해서 상세하게 설명했다.

그나마 강경파가 득세하는 것을 막아주던 자들이 전부 입을 다물고 제어하는 이가 없으니 점점 더 막장으로 치닫고 있다고 그녀는 중얼거렸다.

귀족 회의 분위기도 비슷한데 키엔마이어 후작이 계속 불참하는 게 크다고도 했다.

- 안젤리카. 이쯤에서 슬슬 깊숙이 들여놓았던 아이들을 빼내. -

- 네? -

- 위험하다. 시기가 다가오고 분위기가 날카로워지면 가장 먼저 해를 당하는 건 약자들이지. 그리고 여인들은 표적이 되기 쉬워. 네 수하들이 다칠 수도 있으니까…. -

- 걱정해주시는 거면 감사해요. 하지만 그럴 수는 없어요. 이미 우리들은 마왕 전하께 충성을 다 하기로 했어요. 위험하다고 해서 뒤로 내빼서는 우리의 가치를 인정받을 수 없어요. 그리고 우리 힘으로, 우리 노력으로 쟁취를 해야만 나중에 목소리를 낼 수 있는 거예요. -

힘들다는 것, 위험하다는 것, 전부 잘 알고 있다. 밑의 식구들도 다 인지하고 있다.

하지만 물러서는 이도, 자신을 빼달라는 이도 없을 것이다, 안젤리카는 그렇게 말했다.

내가 스스로 당당해지기 위해서는 나 스스로 노력을 해야 하는 것이다.

나를 차별하지 말아달라고 억지를 부리는 게 아니라 타당한 이유를 가지고 있으면 된다.

그걸 위해서 위험을 무릅쓰고 마왕을 위해 힘을 다 하고 있는 것이라고.

붉은 독거미 단장 안젤리카는 그렇게 분명하게 선을 그었다.

물론 그 말을 하고서 혹 클라우스가 불쾌함을 느꼈을까 바로 사과를 하기는 했다.

그녀에게 있어 클라우스는 살아있어야 할 이유를 내준 은인이다.

그 은인이 자신과 제 식구들을 걱정하는데 그런 답을 했으니 내심 미안했을 수도 있다.

하지만 클라우스는 오히려 웃으면서 네 마음대로 하라고 답했다.

그의 입장에서는 안젤리카가 저렇게 나올 것임을 진작 알고 있었기에.

더해서 그녀의 말대로 의무를 행해야만 권리가 돌아오는 것이 마땅한 순리이기에.

나중에 저들이 율리아에게 인정을 받고 양지로 나오기 위해서라도 위험을 감수하는 것은 선택이 아닌 필수적이라고 할 수 있었다.

- 좋아. 네 판단을 믿겠다, 안젤리카. 해서 조언을 하나 해주자면 사람과 물자의 흐름에 집중하되 거짓 정보와 진짜 정보를 잘 구별토록 해. 서부가 아무리 꼴통들이라고 해도 기본 전략 정도는 다들 알고 있으니까. 거짓 정보를 전달하면 마왕 전하의 신뢰가 깎일 수밖에 없으니 주의하는 편이 좋을 거야. -

안젤리카는 클라우스의 조언에 그리 하겠다고, 주의하겠다고 대답했다.

여전히 율리아 입장에서는 상당히 신뢰가 가지 않는 집단이겠지만.

이미 이 집단과 수십 차례 일해 본 경험이 있는 클라우스는 이들이 꽤나 유능한 집단임을 다 파악하고 있었다.

버리면 아쉬운 자들이다, 때로는 음지의 존재들도 필요한 법이다.

정치란 진흙탕에서 연꽃을 피워내는 일이라고 했다.

율리아는 아직 거부감을 지니고 있는 모양이지만 곧 받아들일 것이다.

어쩔 수 없는 게 아니라, 그리할 수밖에 없는 일도 있다는 걸.

달칵!-

“오래 기다렸나요, 클라우스?”

방문을 열고 율리아가 안으로 들어온다.

강의가 조금 늦게 끝난 모양인지 헐레벌떡 뛰어온 느낌이 강했다.

아마도 클라우스가 할 말이 있다고 한 부분에 꽤나 급했던 모양이다.

“미안해요. 강의가 조금 늦게 끝나서. 강의 시간이 다 끝나 가는데 질문들이 끊이지를 않더라고요. 평소에는 딱히 아무 생각도 없었는데 왜 자꾸 시간을 끄는 건지….”

율리아의 투덜거림에 클라우스는 저도 모르게 미소를 지었다.

이제는 희미한 원래의 세상에서도, 너무나 선명한 이곳의 세상에서도.

이상하게 꼭 끝날 타이밍에 질문을 해서 다른 수강생들을 곤란하게 하는 이들이 있었다.

“괜찮습니다, 율리아. 오래 기다리지 않았어요. 나도 조금 전에 들어왔답니다.”

“다행이네요. 그러면 갑자기 왜 당신의 왕을 부른 것인지 이유를 한 번 들어볼까요?”

슬그머니 다리를 꼬면서 여인의 매력을 한껏 발산하는 율리아.

아마도 클라우스가 자신을 찾아온 이유가 또 다시 자신을 안기 위해서라고 생각하는 모양.

마왕님이 저렇게 대놓고 안아달라고 조른다면 클라우스 입장에서는 거절할 명분도 없고 그러고 싶은 마음 또한 당연히 없다.

하지만 아쉽게도 지금은 그럴 때가 아니었다.

“마왕 전하.”

클라우스의 입에서 오직 그에게만 허락한 왕의 이름이 아닌.

마왕 전하라는 호칭이 나오는 순간 율리아의 눈빛이 순식간에 바뀌었다.

사랑에 빠져있던 여인에서 동부를 지배하는 마왕의 것으로.

“…무슨 일이 있군요.”

“네. 바로 조금 전 들어온 소식인데, 이번에 교역을 위해 동부를 떠나 국경을 지나서 왕국에 들어간 마차들이 갑자기 모두 압수 조치에 쳐해졌다고 합니다.”

“압수?”

“예. 들리는 소식에 의하면 물건들은 전부 빼앗겼고 마차를 호위하던 병사들부터 마부에 이르기까지 전원이 붙잡혀서 감옥으로 끌려갔다고 하고요.”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더 정확하게 파악이 안 된 건가요, 클라우스?”

“아주 상세한 부분까지는 아직 알아내지 못 했습니다. 하지만 이거 하나는 확실하게 알아냈습니다. 왕국 측에서 우리 동부의 교역 마차들을 검문하고 또 압수한 이유가 그들이 금지된 품목을 몰래 들여와 이득을 취하려고 했다고 합니다.”

클라우스의 말에 율리아는 ‘하?’ 하고 기가 막히다는 반응을 보였다.

이전의 교역들과는 달리 이제 동부의 모든 교역은 왕실이 쥐고 있다.

장인들은 모두 마왕가의 관리 하에 세공품을 만들며 딱 정해진 수량만 작업한다.

최고의 품질을 위해서 휴식 시간까지 왕명으로 정해두고 지키게 할 정도다.

그만큼 교역에 왕실이 깊숙이 개입하고 있는 상황에 그 교역단원들이 몰래 물품을 끼워 넣었다?

아무리 이득에 눈이 멀 수 있다고 해도 당장 들키면 목이 달아나도 이상하지 않을 일이다.

더해서 혹 이런 일이 일어날까 관리와 검사도 철저히 했건만 그들이 대체 무슨 수로?

“말해 봐요, 클라우스. 내 눈이 틀렸을 확률.”

“….”

“내가 가리고 또 추려내서 뽑은 자들이 나 몰래 이득을 취하려고 했을 확률. 나조차 속인 그 자들이 그러다가 고작 서부의 인간들에게 걸려서 고초를 당할 확률.”

“…마왕 전하도 이미 제 답을 아실 거라 생각됩니다.”

“역시….”

으득, 이를 악물더니 깊은 한숨을 흘리는 율리아.

그래도 서로 잘 지내는가 싶었는데 역시나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다.

아무래도 슬쩍 한 번 찔러보는 것 같은데, 그래서 동부의 반응을 한 번 살피려고 하는 것 같은데 그 짓이 얼마나 멍청한 것인지 알려줄 때가 가까워졌다.

“서부 동향은요.”

“우리와 마찬가지로 은밀하게 병력을 점검하고 있습니다.”

“그래도 머리가 아예 없는 모양은 아니네요. 최소한 싸울 준비는 하고서 찌르기 한 번 해보는 걸 보니까.”

“아마 마왕 전하가 흘리신 허위 정보가 효과를 발휘했겠죠.”

“동부의 전력이 반 이상 날아간 거요? 그렇게 믿을 수밖에 없겠죠. 단순히 숫자만 보면 단기간에 끝날 싸움이 아닌데 그게 빠르게 끝났다는 건 엄청난 격전이 있었을 거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을 테니까.”

톡톡-.

율리아는 테이블을 두드리면서 생각에 잠겼다.

기껏 요 몇 달 보여주었던 평화적 제스처가 몽땅 헛것이 되게 생겼다.

이전이라면 바로 사람을 파견해서 상황을 알아보려고 했을 거다.

하지만 이번에는 그놈들이 과연 어디까지 생각하고 있는지 알아보고 싶었다.

“어떻게 생각해요. 그냥 단순한 찌르기? 아니면 조금 무게 있는 도발? 그도 아니면….”

“전쟁 전 명분을 찾기 위한 작업일 수도 있겠죠.”

“정말로 그들이 전쟁을 생각하고 있을까요? 비록 동부가 큰 피해를 입었다고 여기고 있지만 그래도 동부인데. 그리고 내가 과연 누구를 앞장세울지 뻔히 아는데?”

“오히려 그걸 노리고 있을 수도 있습니다. 자신들이 먼저 공격을 할 때 제가 앞을 막으면 상당히 동요하게 될 테죠. 하지만 반대로 제가 공격자의 선두에 서면 그 당황감도 적의로 대신할 수 있다는 생각을 하고 있을 겁니다.”

“멍청하기는. 그 치들은 그게 가능할 거라고 믿나요? 마족들조차 경외하는 당신을?”

“원래 두려운 적은 과대평가하거나, 반대로 과소평가하기 마련이니까요. 그리고 그걸 모르지는 않을 겁니다. 분명 어떻게 해서든 저를 다른 전선으로 돌리려고 할 테죠.”

“흐음….”

율리아는 잠시 클라우스를 바라보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우리 상황은요.”

“얼마 전 보고에 의하면 준비가 얼추 끝났다고 합니다.”

“얼추는 없어요. 확실해야 해. 단숨에 몰아붙여서 또 단숨에 끝내야 해요. 대륙 전쟁 봤잖아요? 몰아붙이지 못 하니 여기저기서 계속 살아나는 거. 그렇게 해서는 또 반복에 불과해요.”

“….”

“그러니까, 다시 한 번 물을게요. 클라우스.”

자리에서 일어난 율리아가 천천히 발걸음을 옮긴다.

그리고 앞에 앉은 남자의 얼굴을 감싸면서 천천히 입술을 뗀다.

“어찌 해야 좋을지 말해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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