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50화 〉 23장 - 돌아왔다
아카데미의 학기가 다시 시작된 지 시간이 흐르고 또 흘러갔다.
이제 서부와 동부가 대륙 전쟁 시기 전과 비슷하게 관계가 회복되었음에도.
여전히 서먹서먹한 분위기가 묘하게 생도들 사이에 흐르고 있었다.
대륙 전쟁이 남긴 상처는 무척 크다. 지워낼 수 없는 흉터와 같다.
동부와 서부가 정전 협정을 맺었다고 해도, 끊어졌던 무역 재개를 하고 국경을 일부 개방하면서 서로에게 더는 적이 아니라고 온몸으로 증명한다고 해도.
양측 도합 수십만이 죽거나 다친 전쟁은 100년이 지나도 쉽게 잊히지 않을 것이다.
“….”
“….”
아카데미에 다시 들어온 서부 연합 측 생도들은 어느 정도 유한 분위기를 취하는 이들.
그런 그들조차 마족 생도들과는 처음부터 지금까지, 여전히 거리를 두고 있다.
교역이니 사신 왕래니 이것저것 노력을 함에도 이 분위기가 전혀 나아지지 않는 이유.
아마도 서부 연합이 계속해서 강경파와 온건파로 나뉘어 대립하기 때문일 것이다.
강경파 중 몇몇은 정말로 대륙 전쟁 시기의 마족들을 기억하기에 그들이 성장하는 것을 꺼려서 그런 주장을 펼치기도 하지만.
또 다른 자들은 전혀 다른 이유에서 강경론을 유지하는 중이었다.
자신들이 투자한 세공 사업이 동부에 밀려서 자칫 완전히 망할 수도 있으니까.
경쟁 자체가 되지 않는 걸 뻔히 알고 있는데, 손해를 보는 그림이 훤히 보이는데.
아무리 동부의 세공품이 서부의 것보다 질적으로 훨씬 뛰어나다고 하지만 무조건적으로 반길 수가 없는 게 바로 그 이유였다.
반대로 온건파 중 반수 이상은 동부에 식량을 팔아 이윤을 남길 수 있는 자들이었다.
딱히 서부에서는 큰 이득을 벌 수 없는 것들이 동부와의 교역이 재개되면서 보다 더 큰 이득을 볼 수 있게 되었다.
이런 식이면 당연히 그들 입장에서는 온건파 쪽으로 기울 수밖에 없음이 당연했다.
‘이득을 따라가는 건 당연한 거지. 짐승은 본능을 따르며 이성을 갖춘 존재들은 자신에게 득이 되는 것으로 마음이 기울 수밖에 없어.’
그것을 탓할 생각은 없다, 클라우스 본인도 자신에게 이득이 되는 부분을 좋아하니까.
허나 그 이득라는 것이 당장의 상황에는 좋을 수 있어도 미래에는 해가 된다면.
그건 더는 이득이 아니라 손해라고 판단해야 하는 것이 옳다고 할 수 있다.
클라우스가 끝내 서부를 포기한 것은 서부의 권력층들이 이미 그 판단력을 잃었기 때문이다.
당장의 이득에 눈이 멀어 앞으로 다가올 손해는 전혀 생각지 못 하는 것.
그게 창조주의 손에 의해 정해진 자들의 한계였고, 클라우스가 아무리 발버둥을 쳐도 그 결과를 바꿀 수는 없었다.
모든 서부의 이성체들이 그렇다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서부를 좌지우지하는 자들은 대부분이 그러하다.
때문에 결국 그 자들이 있는 한 서부는 더 발전할 수도, 위험에서 벗어날 수도 없다.
언젠가 클라우스가 그 쓰레기들을 싸그리 다 잡아 죽였던 적도 있다.
하지만 누구 하나를 죽이면 다른 누군가가 더 추악한 놈이 되었다.
그리고 또 다시 다른 자를 죽일 때마다 클라우스는 점점 더 사회적 악마가 되어갔다.
인간, 요정, 수인들 전부에게 온갖 욕과 저주를 들어먹었다.
이게 다 누구를 위한 것인데, 무엇을 위해 본인이 희생하는 중인데.
고귀한 영웅 따위가 될 생각은 추호도 없었던 클라우스는 그날로 서부를 포기했다.
어차피 이렇게 세상이 개판인 거 본인이 뭘 더 어떻게 노력하겠는가.
그리고 알아주지도 않는 거 왜 그런 짓을 하겠는가.
그저 혼자 알아서 잘 살면 그만일 텐데 멍청한 짓은 이제 더 사절하고 싶었다.
“클라우스 교수님.”
딱히 강의도 없는 터라 그냥 한량처럼 아카데미 내부를 산책하고 있던 참이었다.
몇몇 생도들이 조심스레 자신 곁으로 다가와서는 말을 건다.
두 명은 인간 생도고 나머지 셋 중 하나는 수인, 남은 둘은 요정이었다.
다들 이름은 잘 모르지만 일단 자신에게, 그리고 대륙 전쟁의 공훈자들에게 나름 호의적인 시선을 보내는 생도들이라는 건 알고 있다.
해서 클라우스는 되도록 날이 선 모습을 보이지 않으려고 했다.
“오랜만에 보는군요. 다들. 방학 동안 잘 지냈습니까?”
“…네.”
“잘… 지냈죠, 아마?”
당연히 다들 잘 못 지냈을 것이다.
서부 상황이 지랄 맞다는 건 클라우스가 세상에서 가장 정확하게 알고 있을 거다.
특히나 저들이 모두 지금의 지배 세력들과 반대되는 뜻을 지니고 있기에.
그만큼 상당히 귀찮고 또 피곤한 시간을 보냈을 게 확실하다.
가끔 저런 녀석들을 보면 아주 조금은 미안하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본인도 결국 제 이득을 좇아 서부와 저런 이들을 버리고 율리아 곁으로 간 것이니까.
자신에게는 수십 번의 반복되는 삶이겠지만 저들은 딱 한 번 있는 삶이니까.
“교수님. 질문 하나만 드려도 될까요…?”
“얼마든지요.”
“저, 그게… 기분이 많이 상하실 수도 있는데.”
“무엇이든 상관없습니다. 해보세요.”
클라우스의 허락이 떨어지자 생도들은 서로 눈치를 보기 시작했다.
나름 존경하는 인물 앞에서 감정이 상할 수도 있는 질문을 과연 누가 하느냐.
그 총대는 인간 귀족 생도가 맡기로 한 모양이었다.
“교수님께서 서부를, 왕국을 완전히 버리시고… 많은 일들이 있었습니다. 누구는 잡혀서 감옥에 들어가고 또 누구는 같은 배신자가 아니냐며 손가락질을 받고, 또 누구는 교수님께 실망하여 매일 같이 술독에 빠져 살고 있다고 합니다.”
“그렇군요. 그거 참 유감입니다. 안타깝기 그지없어요.”
클라우스의 대답에 생도들이 움찔 몸을 떤다.
저 남자가 정말로 자신들이 이전에 알던 그 ‘전쟁 영웅’ 이 맞는가 싶다.
당시에는 소탈하면서도 명예를 알고 주변인들을 살뜰히 챙기던 이였다.
그 모습에 얼마나 많은 이들이 호감을 가지고 또 존경했던가.
심지어 평민을 개돼지 취급하던 귀족들조차 클라우스 때문에 평민들에 대한 인식을 바꿨다.
마지막의 마지막 순간까지도 왕국과 서부에 대한 충성심을 저버릴 것 같지 않았던 남자.
그가 완전히 변해버린 것 같다, 안타깝다는 그의 목소리에는 진심이 담겨있지 않았다.
꾸욱-.
인간 귀족 생도는 입술을 살짝 앙다물다가 다시 말을 이었다.
“…꼭 동부였어야 했습니까? 마족 외에는 선택지가 없었던 건가요? 왕국이 싫으셨다면 제국도 있고, 인간이 아니더라도 요정이나 수인도 있는데 왜 하필….”
“왜 하필 나와 적으로 싸웠던, 대륙 전쟁에서 전우들과 서부민들을 해쳤던 자들에게로 귀의했느냐. 그 이유가 궁금하다는 거군요.”
클라우스의 질문에 생도들이 고개를 끄덕인다.
대륙 전쟁의 영웅이 당시의 적이었던 마족들에게로 향했다는 점.
그리고 그들의 군주인 마왕에게 신하가 되겠다고 한 점은 분명 저들에게 충격이었을 것이다.
마족들에 의해 얼마나 많은 이들이 죽거나 다쳤는가.
그 중에는 분명 클라우스 휘하의 병사들도 있었다.
왕국 남부가 최악의 격전지 중 하나였고 그곳을 맡았던 이들이 다름 아닌 그들이다.
제 병사들이 그곳에서 스러졌는데, 그 상대가 마족이었는데.
어떻게 당신이 그들의 희생을 알면서도 동부로 향할 수 있냐고.
눈앞에 선 생도들은 클라우스에게 그렇게 묻고 있었다.
“여러분들이 어떤 마음을 지니고 있을지, 어떤 생각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을지 다 압니다.”
“….”
“실망스럽겠죠. 안타깝겠죠. 이해할 수 없겠죠. 그 외에 많은 감정들이 들겠죠. 대륙 전쟁에서 나와 함께 싸운 전우들이 있고, 힘든 시기에 나를 믿어준 친우들이 있는데 그들을 전부 두고서 나 혼자 동부로 향한 것이니 어찌 그런 생각이 들지 않겠습니까.”
눈앞의 생도들이 그래도 정신머리가 어느 정도는 제대로 박혀있는 자들이기에.
쌍욕을 박아주고 나불거리는 주둥이를 찢어버려도 모자랄 귀족들은 아니기에.
클라우스는 최대한 조곤조곤한 목소리로, 하지만 내용만큼은 전혀 부드럽지 않게 말했다.
“그런데요, 여러분. 내가 그 긴 세월 서부에서 무엇을 겪었는지 알고 있습니까?”
“그건….”
“아뇨, 대답하지 마세요. 이미 모두가 다 알고 있는 대답이니까. 전쟁이 일어나고 마족의 공세 앞에서 남부를 지켜낸 순간부터 전쟁이 끝나고 나 스스로 모든 걸 내려놓기까지. 내가 겪어야 했던 건 ‘무례’ 였습니다. 말만 영웅이지 역적보다 더 한 견제를 받았어요. 혹시 이 말에 반박 의견을 내놓을 수 있는 생도가 있습니까?”
없었다, 아무도 없었다.
특히나 인간 왕국 측 일들을 잘 알고 있던 귀족 생도는 침울한 표정을 감추지 못 했다.
자신들을 구한 자를 자신들 손으로 내쫓은 것인데 무슨 할 말이 더 있겠는가.
거기에 동참하지 않았어도, 반대를 했어도 결국 같은 귀족임은 변하지 않는다.
그래서 더더욱 그를 보기가 부끄러웠고 또 처참했다.
“그런 내가 동부로 넘어간 후. 서부의 모든 이들이 적이라고 부르던 마족들 곁으로 간 후 가장 먼저 받은 느낌이 뭐였는지 알고 있습니까?”
“….”
“존중이었습니다. 십 년이 훨씬 넘는 세월동안 서부에서는 단 한 번도 느끼지 못 했던 것을. 나와 생사를 겨루며 적으로 싸웠던 자들에게 느낄 때 기뻤을 것 같습니까? 아니면 비참했을 것 같습니까?”
당연히 기뻤다. 비참했을 리가. 항상 기대하던 일인데.
하지만 생도들은 클라우스가 분명 비참함을 느꼈을 거라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아군한테조차 겪어보지 못 했던 존중을 과거 적이었던 자들에게 받는다.
아마도 클라우스 같은 남자라면 기쁨보다는 슬픔과 괴로움이 가득했을 것이다, 라고.
당장 완전히 굳어버린 저 얼굴이 확실한 증거라고 할 수 있었다.
“내게 실망했다면, 이해합니다. 하지만 사과하지는 않겠습니다. 그렇게 말하는 당신들도 결국 내게는 짊어져야 했던 짐이었지, 필요한 순간에 나서서 도와주지 않은 방관자들이지 않습니까. 그래서 나는 후회하지 않습니다. 나의 결정을.”
과거의 한 때는 서부를 어떻게든 구해보겠다고.
내가 이 세상의 창조주이니, 좋은 스킬들이 넘쳐나니, 누가 문제이고 또 누가 필요한지 다 알고 있으니 충분히 그럴 수 있을 거라 믿었다.
하지만 한 가지 간과한 사실이 있었다.
아무리 대단한 스킬을 지니고 있다고 해도, 미래를 다 알고 있다고 해도.
본인은 전지전능한 ‘신’ 이 아닌, 지극히 평범한 한 명의 보통 사람이었다는 것을.
온갖 일을 겪고 겪으면서 점점 썩어가던 속은 문드러지다 못 해 이에 다 사라졌다.
남은 것은 오직 욕망뿐이었다.
살고 싶다는, 사람답게 살고 싶다는, 이왕 살 거 제대로 살아보고 싶다는.
제대로 살 거 아예 즐길 거 다 즐길 수 있는 그런 삶을 보내보자는 그런 욕망.
클라우스는 휘적휘적 발걸음을 옮겨서 율리아의 방으로 향했다.
조용히 책을 읽고 있던 그녀는 갑자기 들이닥친 클라우스를 반갑게 맞이했다.
그러다가 그의 표정이 살짝 굳어있음을 확인한 율리아는 걱정스러운 목소리를 내었다.
“무슨 일 있었어요?”
“…얼른 끝내고, 쉬고 싶네요.”
“네?”
“얼른 당신이랑 아무 걱정 없이 행복하게 살고 싶다고요.”
“어, 어… 나, 나도 그래요. 나도 그런데… 갑자기 왜….”
여태까지 스스로를 몰아붙였던 이유는 살기 위한 몸부림.
그리고 미치지 않기 위해 스스로를 채찍질하는 행위.
그 채찍질이 조금이라도 느슨해지면 아슬아슬한 정신 상태가 모습을 드러낸다.
클라우스는 품안의 마왕을 부서질 듯 껴안았다.
얼른 다 끝내고, 제발 편히 좀 쉬고 싶었다.
조만간 피어오를 작은 불꽃이, 어느 누구도 예상하지 못 한 거대한 불길이 되어 전 대륙을 집어삼킬 것이다.
그 순간이 간절하게 기다려지는 클라우스는 율리아를 계속 끌어안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