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48화 〉 23장 - 돌아왔다
“…해서 붉은 독거미 측과 정보를 합쳐본 결과, 아무래도 제국의 황제가 붕어한 것 같아요.”
클라우스 앞에 무릎을 꿇고서는 여태까지의 상황을 보고하는 리르.
이제는 아카데미의 경계 정도야 우습게 여길 정도로 마음대로 드나드는 중이었다.
그녀 역시 클라우스와 몸을 섞으면서 알게 모르게 잠입 능력이 성장했다.
거기에 한 식구로, 무리의 일원으로 인정한 카엘라가 마왕성에서 계속 대련을 해주기도 했고.
플랑슈가 조금 더 확실한 잠입 방법을 가르쳐 주기도 했으며.
자신이 제 임무를 성공할 때마다 확실한 보상이 따라오니 본인 스스로도 노력했다.
덕분에 리르의 전체적인 실력은 이제 그림자 때보다도 훨씬 상승한 후였다.
“그래서. 제국 상황은?”
“애써 숨기고 있는 모양새에요. 황제의 뒤를 이을 후계자가 없는 상황에서, 심지어 황실의 어느 누구도 없는 이때에 그 말이 나온다면 귀족들 간에 또 무슨 싸움이 벌어질지 모르니까요.”
“벌어지고도 남겠지. 황실과 혈연을 맺은 가문들이 있으니 서로 서열권을 주장할 테고 거기에 올라타서 뭐라도 얻어먹으려는 놈들이 있을 테니까.”
“왕국은 아직 그 사실을 모르는 것 같아요. 하지만 그것도 얼마 가지 않을 거고 곧 대귀족 가문들은 그 정보를 입수할 거예요. 마침 자신들의 국왕도 노쇠하였는데 마땅한 후계자가 없으니 제국이 어찌 돌아가는지 보고 대비책이라도 찾으려고 할 테죠.”
“말만 제국이지 왕국보다도 더 낡아빠진 곳, 도대체 뭘 보고 배우려는지 모르겠군.”
인간 쪽에는 두 개의 거대한 집합체, 제국과 왕국이 있다.
그런데 왕국에 비해서 제국의 언급이 무척이나 적은 이유.
바로 제국이 말만 제국이지 실상은 왕국보다도 못 한 곳이기 때문이었다.
귀족들은 더욱 부패하였고, 백성들은 더욱 죽어나가며 대륙 전쟁의 여파를 직격으로 맞아 그나마 몇 안 되었던 충성스러운 자들은 죄다 쓸려나갔다.
당장이라도 무너져 내리는 것이 마땅한 상황에서 버틸 수 있었던 이유는 다른 서부 연합들이 그들이 무너지기를 바라지 않기 때문이었다.
제국이 무너지면 방대하다고는 할 수 없으나 그렇다고 또 작은 것도 아닌 영토는 누가 먹고.
거기에서 쏟아지는 수없이 많은 난민은 또 누가 책임지며, 온갖 문제투성이로 점철된 자들은 또 누가 안고 가느냐, 그것만 생각해도 서로 골치가 아프니까 말이다.
“왕국 상황은. 귀족들 동향은 어떻지?”
“분위기를 보아하니 여전히 두 파벌로 갈려서 싸우는 중인 것 같아요. 동부와의 관계를 더욱 개선하자. 그와 반대로 동부와 자꾸 이어지면 안 된다. 이 둘이 말이에요.”
“리르, 네가 보기에는 어떠냐.”
“네?”
“동부와의 관계 개선을 말하는 온건파와 동부와의 관계를 지금이라도 파하자는 강경파. 그들 중 누가 이길 것 같냐고.”
갑작스러운 질문에 놀란 걸까. 아니면 클라우스가 제 의견을 듣고 싶어 하는 것에 놀란 걸까.
리르는 눈에 띄게 당황한 표정을 해 보이다가 조심스레 입을 연다.
“저, 클라우스님. 저 같은 여자의 의견을 어찌 물으시는지….”
“너도 그렇고 붉은 독거미도 그렇고, 현장에서 직접 뛰고 있지. 너희들이 그저 명령에 따르는 이들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그곳 상황이나 분위기를 가장 먼저 느끼기도 해. 해서 의견을 묻고 있는 거다. 네가 보기에 어떤지, 무슨 이유에서 그러한지.”
“저는 다른 분들에 비해서 부족한 점이 너무도 많은데….”
“리르.”
자꾸만 물러나려고 하는 여인을, 남자가 이름을 부르는 것으로 붙잡는다.
나는 지금 네게 할 수 있느냐, 없냐를 묻는 게 아니다.
의견을 말하라고 명령을 내리고 있는 거니 솔직하게 말하라고.
그런 클라우스의 반응에 리르는 잠시 망설이는 빛을 내보이다가 입을 열었다.
“…아마도… 동부와의 관계를 단절하자는 자들이 이길 것 같습니다.”
“그래? 이유는?”
“그게….”
“난 망설이는 녀석은 참 싫어해. 조심스러운 건 이해해도, 그 조심스러움이 해가 되는 순간마저 그걸 버리지 못 하면 문제가 많은 거지. 리르, 너도 그런 녀석인가?”
클라우스가 그렇게 물으니 리르는 세차게 고개를 내저었다.
인정을 하면 자신이 부족하다는 것 또한 받아들이는 것이고, 그리 되면 클라우스 곁에서 완전히 내쫓길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 것이었다.
잠시 제 생각을 정리하던 리르는 곧 천천히 입술을 떼고는 제 이유를 설명했다.
“합리적인 온건론보다 근거 없는 강경론이 보통의 사람들에게 더 잘 먹히니까요.”
“….”
마침내 리르가 대답을 했을 때, 클라우스는 별 다른 반응이 없었다.
그냥 아무 말도 없이 리르를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는데 덕분에 리르는 답을 해놓고도 점점 더 초조해하고 있었다.
혹시 자신이 무슨 실수라도 한 걸까? 틀린 답이라도 내놓은 것일까?
온갖 걱정이 들어찼고 급기야 리르는 다급히 바닥에 머리를 조아리기까지 했다.
“죄,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클라우스님! 제, 제가 부족한 식견으로 헛소리를 했습니다! 제 어리석음을 용서해주시기를 이렇게 간청 드리겠습니다! 제발….”
“리르.”
제 말을 끊고,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남자.
리르는 움찔 몸을 떨고는 부디 그의 입에서 최악의 것만 나오지 않기를 바랄 뿐이었다.
이제 겨우 기댈 곳을 찾았는데, 여전히 무섭고 두려운 존재이지만 기대에 부응한다면 세상 그 무엇보다도 든든한 존재가 되어주는 남자인데.
자신의 어리석음에 혹 실망한 건 아닐까 가슴이 터지도록 걱정이 되었다.
“고개 들고, 일어나봐.”
명령이다, 명령이니까 무조건 따라야 한다, 리르의 몸이 자동으로 움직인다.
미약도 풀지 않았고 최면도 쓰고 있지 않지만 이제 틈 하나 없이 완벽하게 클라우스의 것이 된 여인은 마구 흔들리는 눈동자를 하면서도 자리에서 일어섰다.
덥썩-.
“아?”
갑자기 제 몸이 앞으로 휙, 하고 빨려 들어가는 것이 느껴진다.
이게 무슨 일인가 하고 상황을 판단하려는 찰나 갑자기 입술에 따스한 뭔가가 와 닿는다.
설마, 하는 마음을 미처 품기도 전에 그 다음으로 남자의 혀가 침입해 들어온다.
“으으으?!”
무척이나 갑작스러운 키스, 전혀 예상치 못 한 일이었기에 순간 여인이 바동거린다.
하지만 곧 이 남자에게 반항해서는 안 된다는, 그리고 그리 하고 싶지도 않다는 마음이 퍼지면서 미약하게나마 저항하던 여체가 잠잠해진다.
오히려 조심스레 클라우스의 상의를 쥐고는 아주 조금 제 쪽으로 끌어당겨 보기까지 한다.
여인으로서의 귀여운 몸짓, 지금의 이 순간이 꿈이 아니라는 걸 알고서 조금만 더 오래 지속되기를 바라는 속내를 전부 드러낸다.
“아으….”
꿈같던 키스가 마침내 끝나자 리르의 입가에서 안타까움이 가득 실린 한숨이 흘러나온다.
클라우스가 왜 이런 행동을 하는지 도저히 모르겠지만 이제는 이유 따위 상관없다.
거칠게도 아니고, 험하게도 아닌, 리르 스스로도 깜짝 놀랄 정도로 부드럽게 대해주었다.
미치도록 가슴이 뛰어서 당장이라도 터질 것처럼, 세차게 심장이 요동친다.
“상이다.”
“네, 네…?”
“방금 그 대답, 너 혼자만의 생각이겠지? 다른 누군가에게 들은 게 아니라.”
“그, 그렇습니다. 저 혼자 생각했어요.”
“왜 그런 생각을 했는지, 이유를 말해달라고 하면 말해줄 수 있을까?”
그러자 리르는 잠시 생각하다가 자신이 왜 그런 대답을 꺼냈는지 그 이유를 설명했다.
아무리 합리적인 이유를 대도 근거 없는 강경한 자들은 이길 수 없다고.
결국 사람들은 더 날카로운 반응이 돌아오는 자들을 의식해서 거기에 있으려고 한다고.
괜히 그들과 척을 져서 싫은 소리를 듣기 싫어하니 그게 틀렸다고 여겨도 아니라고 나서서 말하는 자들이 없으며 그렇게 해서 결국 서로가 서로에게 휩쓸린다고 말이다.
“도, 동부에서도. 그리고 서부에서도. 그런 모습들을 많이 봤어요. 그리고 그걸 이용하기도 했고요. 지금의 마왕 전하께는 무척 죄송스러운 말씀이지만… 동부에서 무척 유용하게 써먹은 방법이에요. 대부분의 이들은 이유도 모른 채 강경한 자들의 편을 든다는 것… 으응!”
다시 한 번 와락 날아드는 남자의 키스 세례.
당황한 리르는 또 한 번 바동거리다가 곧 얌전히 클라우스를 받아들였다.
심지어 전보다 더 확실하게, 클라우스의 상의를 강하게 잡아당기면서 이왕 이럴 거 이 이상도 해주면 안 되겠냐고 몸짓으로 의사를 전달할 정도였다.
“그런 모습, 그런 판단, 나쁘지 않아.”
입술을 뗀 후, 클라우스는 리르의 머리를 부드럽게 쓸어주며 그리 속삭였다.
내 명령을 충실히 이행하는 것, 무슨 수를 써서라도 반드시 행하고야 마는 것.
그것은 당연히 해야 할 일이다, 그것으로 칭찬을 해주는 건 이제 별 의미가 없다.
그보다는 이제 그 이상의 결과를, 그리고 그 과정에서 얻어가는 뭔가가 있어야 한다.
클라우스가 내심 원하던 게 바로 그것이었고 리르는 훌륭히 그 조건에 부합했다.
“어, 어… 아아….”
여태껏 단 한 번도 이렇게 자신을 안아준 적이 없었던 것 같은데.
침대에서조차 거칠게 몰아세우고, 한계까지 밀어붙이고, 엉망진창이 되도록 대할 뿐이었는데.
이렇게 품에 안겨서 마치 강아지처럼 귀여워해주는 클라우스의 모습은 리르에게 엄청난 충격이었고, 또 단 한 번도 가져보지 못 했던 충만함을 가져다주었다.
조금만, 조금만 더 욕심을 내면 안 될까.
여전히 자신은 마왕을 해하려고 했던 죄인, 클라우의 연인에게 몹쓸 짓을 하려 했던 자다.
용서받는다는 건 기대도 안 했는데 이런 식이면 자꾸만 기대를 하게 된다, 욕심을 부리게 된다.
“아앗…! 아, 아아아…!”
클라우스의 손길이 제 몸을 노닐자 리르는 흥분되어 어쩔 줄 모르겠다는 반응을 보였다.
이대로 범해져도 좋을 것 같은데, 예전처럼 엉망진창으로 당해도 좋을 것 같은데.
그러면서도 오늘만큼은 그냥 평범한 남녀 관계로 있고 싶다는 생각이 자꾸만 든다.
“다음 보고가 있지 않아, 리르?”
“아응! 흣! 흐으으응!!”
리르의 귀를 부드럽게 깨물고 또 살살 핥으며 여체를 자극한다.
클라우스의 품에 안겨서 어쩔 줄 몰라 하는 리르였지만, 다음 보고가 있지 않냐는 그 말만큼은 또 용케 알아들은 모양이었다.
잔뜩 상기한 얼굴, 배배 꼬이는 몸을 가까스로 억제하면서 리르는 다른 보고를 꺼내놓았다.
“흐윽! 흑! 도, 동부에서… 소, 소식 하나를 같이 가져왔! 으읏! 왔어요. 카엘라 전사장의….”
“알만하네. 혹시 ‘그 시기’ 라고. 조만간 내게로 찾아올 거라고 했었나?”
“맞아요. 이유를 물었지만 대답하지 않았어요. 그, 그냥 클라우스님께 전달하면 하면 그 분께서 다 알아 들으실 거라고….”
“매일 같이 부려먹기만 했으니 이번 기회에 한 번 정도는 당해줘야지. 동부로 돌아가는 길에 카엘라를 만나서 이렇게 전해. 오는 건 상관없지만 되도록 조용히 오라고. 갑자기 아카데미 근처에서 호랑이가 울부짖으면 피곤하다고 말이야.”
“수, 숙지 했습… 아아!”
마침내 남자의 손길이 자신의 상의를 붙잡자 리르가 탄식을 흘린다.
정말, 정말로 해줄 거냐는 무언의 그 물음에 클라우스가 미소를 짓는다.
보다 더 시끄러운 일들이 터지면, 그리고 자신의 옆에 율리아가 항상 있다면.
이제 언제 또 안아줄 수 있을지 기약조차 할 수 없다.
그러니까 오늘 하루 정도는 선심 쓰는 생각으로 이렇게 옆에 서보았다.
“어떻게 해줄까. 리르. 이만 임무를 하라고 떠나보내면 될까? 아니면….”
아니면, 네가 그렇게나 간절히 바라던 걸 해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