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45화 〉 23장 - 돌아왔다
방에 들어가자마자 바로 야한 짓을 하는 건 절대 아니었다.
물론 나타샤가 클라우스의 품을 무척이나 그리워했다고 하지만.
그리고 클라우스 역시 은근히 나타샤를 안고 싶어 했지만 둘 모두 일의 순서는 안다.
지금 상황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역시나 서부의 상황을 알아보는 것.
특히 요정 사회가 어떻게 돌아가고 어떤 분위기를 내는지 파악하는 것이었다.
“인간 측은 완전히 엉망진창이죠. 그쪽은 어때요, 나타샤.”
“다행히 인간만큼은 아니지만 비슷해요. 요정들도 희생한 자와, 그 희생으로 더 강성해진 자가 있죠. 어쩔 수 없는 일 같아요. 세상에 매번 좋은 이만 있을 수는 없으니까.”
“그래도 요정 사회는 많이 덜 할 줄 알았는데요.”
“인간 귀족들 마냥 대놓고 도망치지는 않았어요. 대신 위험한 전선에는 유력한 가문의 자제들을 보내는 걸 지양하고 대신 보통의 요정들을 투입했죠. 그래서 그 세대의 전사자가 유독 많았어요. 제 또래 요정들 말이에요.”
“생존자들과 그 전사자들의 가족들 목소리가 컸겠군요.”
“네. 적절한 보상과 함께 영원히 요정 사회의 영웅으로 지정해달라고 주장했죠.”
당연한 결과, 당연한 요구다. 자신들의 피를 뿌리고 목숨을 바쳐가며 구한 땅이다.
그 땅에서 살고 있는 자들이라면 응당 감사를 표하고 보상을 함이 마땅했다.
하지만 요정 사회 역시 인간 측과 별반 다르지 않은 부류가 존재했다.
그들로 인해 혹 자신들의 확고한 권위가 흔들리는 것을 경계해서.
만에 하나 그들이 대륙 전쟁 당시의 일들을 파고들어 자칫 자신들이 저지른 비리들이 드러날까 그들이 목소리를 내는 것을 극력 경계한 자들 말이다.
처음에는 일단 알겠다고, 곧 처우 개선을 마련하겠다고 답했었다.
하지만 곧 그들은 싹 말을 바꿔서는 차일피일하기 일쑤였는데, 그 이유가 참 황당했다.
“설마 나를 이용해 먹을 줄은 상상도 못 했죠.”
“마침 좋은 핑계였을 거예요. 대륙 전쟁 최고의 공훈을 세운 인간 측의 클라우스도 침묵하고 있는데 그만큼 공도 세우지 못 한 너희들은 왜 자꾸 목소리를 높이냐고. 인간들에게 부끄러운 모습 보이고 싶지 않다면 일단 기다리라고 말이에요.”
“꼴에 또 인간들에게 못난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았던 요정들이니 그 말도 안 되는 주장에 설득을 당해서 침묵했고요. 정말이지, 이렇게 말하고 있으면서도 어이가 없네.”
클라우스가 웃음을 터트리니 나타샤도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인간은 인간이고, 요정은 요정이다. 둘 사이에 비교하는 것조차 불가능하다고 할 때는 언제고.
필요해지니 갑자기 인간은 저러는데 요정들은 왜 이러냐, 식으로 나왔다.
더 웃긴 건 당사자들조차 그 주장에 넘어갔다는 것이리라.
“심지어 그 침묵이 얼마 전까지 이어지다가 내 이탈 상황에 몇몇 가문들이 요정 측 공훈자들도 다시 조사를 해서 공이 정말 있냐 없냐 조사를 해야 한다고 했다죠.”
“그게 불을 지핀 꼴이 되었어요. 그리고 요정들은 일단 한 번 논쟁이 붙으면 설득을 하거나 당하기 전까지는 계속 싸우는 터라 지금도 분위기가 좋지 않아요.”
자기들 잘난 맛에 사는 것들의 공통점이라고 할 수 있다.
전형적인 흑백 논리, ‘너와 나는 다르다.’ 라는 전제 조건을 가지지 않는다.
그저 나는 옳고 너는 틀렸다, 내가 바르고 너는 그릇되었다, 그것만 주장할 뿐이다.
이것 역시 클라우스 본인이 넣어둔 서부의 문제점 중 하나였다.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이 최악의 것들만 고르고 골라 넣었는지 아직도 모르겠다.
만약 과거로 돌아갈 수 있다면, 그래서 이 세상의 세계관을 구상하던 때로 돌아간다면.
장담하건데 클라우스는 본인의 뺨을 후려갈기면서 장난도 적당히 하라고 외쳤을 것이다.
“그런 와중에 나타샤, 당신이 두각을 드러내기 시작했다고요.”
“실은 클라우스, 당신 덕분이에요. 결국 모든 일의 시작은 돈이니까. 그것으로 동족들의 마음을 사고, 지지를 얻고, 마침내 가문에서도 나를 주목하기 시작했죠.”
은광에 대한 막대한 투자, 그리고 오직 본인만이 남은 상황에서 얻게 된 소유주 자리.
그 은광에서 마침내 엄청난 양의 은을 발견했을 때 나타샤는 농담 하나 한 치고 개인으로는 요정 사회에서 가장 큰 부자가 되었을 정도였다.
나타샤는 거기서 얻은 첫 이득을 아주 현명하게 소비했다.
가장 먼저, 때를 맞춰 일어난 갈등 속에서 대륙 전쟁의 공로자들에게 이전의 빚을 갚는 식이라고 말하면서 그들에게 남김없이 기부한 것이었다.
그 파격적인 행보에 수많은 가문들이 화들짝 놀랐단다.
나타샤가 소비한 금액이 어지간한 가문의 한 달 소비량과 맞먹었던 것이다.
당연히 나타샤에 대한 보통 요정들의 인기가 치솟을 수밖에 없었는데, 그 와중에 또 나타샤는 영리하게도 한쪽만 아군으로 두는 짓은 하지 않았다.
공개적으로는 일반 요정들에게 부를 나눠주는 모습을 취하면서.
비공개적으로는 제 가문인 벨라루스와 다른 유력한 가문들에게 접점을 마련한 것이었다.
“물론 돈만 가지고서는 어려웠을 거예요. 당신이 제 마법을 성장시켜준 덕분에. 그래서 동족들이 저를 바라보는 시선이 달라졌기에 그에 맞춰서 더 강하게 밀어붙일 수 있었어요.”
“확실히 내 덕도 있기는 하지만 당신 역시 고생 많았어요. 그러니까 마법 부분은 내 덕이 아닌 당신의 노력 덕분이라고 하는 게 옳을 것 같네요.”
겸손 아닌겸손에 나타샤는 킥킥 웃음을 흘리면서 그렇게 하자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다가 갑자기 아아, 하고 탄식을 흘리고는 살짝 굳은 얼굴을 한다.
이미 이유는 알고 있으나 클라우스는 짐짓 아무 것도 모르는 척 입을 열었다.
“표정이 왜 그래요. 혹 무슨 문제라도 있나요?”
“은광 때문에요. 정확히는 채굴에 관한 문제에요. 처음에는 우리 요정들 영토에 동부의 국경 일부까지면 충분할 줄 알았는데 대충 조사를 해보니 인간 측 영토에까지 뻗어있을 수도 있다고 해서요. 아직은 인간 측에 알리지 않았지만 곧 그들도 눈치를 챌 테죠.”
“연합이라고는 하지만 서로 견제하기 바쁜 세 종족이니 그 사실을 안다면 바로 달려들어서는 채굴권을 인정할 테니 그에 상응하는 대가를 내놓으라고 하겠죠.”
“그리고 동부에 주는 대가만큼은 달라고 할 거예요.”
“정확하게 얼마나 차지를 하는지 파악하고서 요구하는 게 순서 아닐까요?”
“클라우스님도 아시겠지만 인간 측은 분명히 동부와의 비교를 하면서 이렇게 나설 거예요. 얼마 전까지 적대하던 이들에게도 그렇게나 많은 대가를 지불하면서 이웃이고, 동맹이고, 같은 편인 자신들에게는 그것이 아깝냐고 말이죠.”
당연히 아깝다, 인간이라고 요정과 천년만년 동맹일 것 같은가?
서로에게 이득이 되지 않는다면 언제든 깨지는 것이 바로 그 동맹이라는 것이다.
심지어 은광이 이어지는 넓이는 동부 측이 훨씬 더 넓다.
인간 측에서 아무리 조사를 한다고 해도 마족의 반이 약간 안 되는 수준일 거다.
그런데도 동부에 주는 것과 똑같은 대가를 바란다고 한다면.
그건 칼만 안 들었을 뿐이지 그냥 강도라고 불러도 무방할 것이었다.
“안 봐도 뻔해요. 불 끄는 게 급하니 일단 내부 불만을 외부로 돌리자. 그리고 그게 교역을 재개한 마족한테는 좀 그러니 은광을 발견해서 배가 아프게 만든 요정에게도 돌리자. 이렇게 생각했을 거예요.”
인상을 찡그린 채 나타샤는 제 몫의 커피를 홀짝였다.
그러다가 정말 오랜만에 클라우스가 타준 커피를 마신다면서 행복한 미소를 짓고는 마치 아이가 맛난 음료를 아껴먹는 모습까지 보이기 시작했다.
그냥 더 타달라고 하면 될 것을, 일부러 저러는 거면 귀여운 거고 모르고 그러는 거면 더더욱 귀여운 행동이었다.
“나타샤.”
“네, 클라우스님.”
“이미 예상을 얼추 하고 있을지 모르겠지만. 나는 서부에 미련이 없어요.”
“네, 알고 있어요.”
“그리고 율리아는 동부를 위해서 서부를 도모하려고 하고 있죠.”
“그것도 알고 있어요.”
“만약 공식적으로 나와 당신이 적이 되어 싸워야 한다면, 그 때는 어쩔 건가요?”
“바로 클라우스님께 항복할 생각인데요?”
단 1초의 고민도 없이 바로 대답을 내놓는 나타샤였다.
하긴, 당연해도 너무 당연한 것이니 다른 대답이 나올 거라고는 생각지도 않았다.
다만 클라우스가 원하는 대답은 이보다 조금 더 상세한 것이었다.
“마침 벨라루스의 현 가주가 슬슬 차기 가주를 지목하려고 한다고 했죠. 나타샤, 당신도 그 중 하나에 있고요. 만약 벨라루스라는 거대한 가문을 당신이 총괄하는데….”
“그러면 벨라루스를 통째로 들고서 항복할게요. 만약 불가능하다면 가주 자리도 내려놓고 올 수도 있어요, 클라우스님.”
그건 너무 갔어, 이 요정아. 클라우스는 속으로 그리 중얼거리면서 고개를 내저었다.
가문을 들어 바치는 배신자가 아니라 가문의 안위와 미래를 위해서 어쩔 수 없이 굴복을 택하는 가주의 희생을 돋보이게 할 필요가 있다.
인간 측에는 키엔마이어 후작과 그 외에 여럿이 있지만 요정에는 나타샤가 전부다.
다만 그 나타샤가 벨라루스라는 아주 큼지막한 고깃덩이를 들고 있으니 그것 하나만 취한다고 해도 자신과 율리아 입장에서는 이득이라고 할 수 있었다.
클라우스는 나타샤에게 자신이 생각하는 바를 일러주었다.
아무리 동부의 힘이 강성하다고 해도, 자신이 그걸 이끈다고 해도.
모두가 저항의 의지를 품고서 덤비면 정복은 절대 이룰 수 없는 것이 된다.
그걸 막기 위해서 누군가는 그 땅에서 민심을 안정시키고 끌어 모아 밑으로 들어가자는 분위기를 형성해야만 한다.
자존심을 지키겠다고 저항하다가 아무 의미 없이 죽을 바에.
차라리 자존심 좀 굽히고 그 외의 모든 것이 보장된 곳에서 평소와 같이 살면 될 것이다.
“혹 율리아, 그러니까 마왕께서 자치 구역을 생각하고 계신 건가요?”
“확실한 건 아니지만 아마 그렇게 되지 않을까 해요. 다 죽이고 빈 땅을 차지하면 그게 정복입니까? 그냥 대규모 학살일 뿐이지. 율리아는 서부와 동부를 하나로 통합하기를 원하고, 나는 그녀의 밑에서 모든 이들이 잘 살기를 원해요. 그래서 서부를 두고 동부로 향한 거죠.”
“서부에는 그런 뜻을 품은 이도, 그걸 행할 능력을 지닌 이도 없다고 생각하셨군요.”
정확하게 보았다는 뜻으로 클라우스가 고개를 끄덕인다.
그러자 나타샤는 다 이해했다는 듯 클라우스를 따라 고개를 끄덕이고서 입을 열었다.
“아직 요정 사회에서는 마족하면 멀리 하는 경향이 있어서 섣불리 나서기가 힘들어요. 하지만 아예 방법이 없는 건 아니니 최대한 그 경계심을 누그러트릴 수 있는 쪽으로 생각해볼게요.”
“이제는 척하면 척이네요.”
“후후후. 이렇게 해야 조금이나마 더 붙잡을 수 있으니까요. 마왕 전하만큼은 아니어도 저 역시 유능한 여인이라는 걸 알려야 클라우스님이 절 한 번 정도는 붙잡아줄 테니까요.”
역시 클라우스가 선택한 여인들 중 하나다운 안목이었다.
이 정도면 안심하고 벨라루스와 요정 사회를 맡겨도 될 듯 싶다.
아직 서부와 동부가 전쟁으로 돌입하기 전까지는 시간이 남았으니 그 안에 조그마한 변화 정도는 이끌어낼 수 있을 거다.
“자, 그러면 이야기는 이 정도로 해두고….”
“해두고… 요? 그 다음이 뭔데요?”
“그렇게 질문하면서 왜 당신은 웃고 있을까요, 나타샤?”
“글쎄요. 아마 클라우스님과 같은 이유이지 않을까 싶네요.”
서로를 마주보고 웃으면서, 거의 동시에 자리에서 일어난 두 남녀가 그대로 얽혀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