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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왕가 비선실세-242화 (242/341)

〈 242화 〉 23장 - 돌아왔다

아카데미의 새로운 학기가 시작되었다.

클라우스는 자신의 방에 앉아서 반 정도의 학생이 빠져나가긴 했으나 여전히 활달한 분위기를 내는 아카데미를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었다.

여기는 전쟁의 불길을 조금 피해갔으면 하는데, 그게 영 쉽지가 않았다.

국경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자리하고 있는 것도 문제고 아카데미 자체가 하나의 거대한 성이기도 해서 서부 연합이 아카데미를 강제로 흡수하고 요새로 사용하려던 적도 있었다.

원래라면 그냥 밀어붙이면 되었을 테지만 율리아도, 클라우스도 서로가 처음 만난 추억이 있는 이곳 아카데미를 완전히 때려부수는 것을 그리 선호하지 않았다.

해서 다른 지역으로 쭉쭉 밀고 들어갈 동안에도 아카데미는 여전히 남아있던 적도 많았다.

‘이제 얼마 안 남았군. 머지않아서 서부 놈들이 초조함에 또 일을 저지를 테니.’

내 불행보다 더 불안한 건 남의 행운이다.

심지어 그 남이라는 자가 한때는 치열하게 치고받고 싸우던 원수가 같은 자라면.

자신보다 몇 배는 더 잘나져서 본인을 내려다보는 상상에 미쳐버릴 지도 모른다.

지금의 서부가 딱 그러했다.

전쟁 전까지만 해도, 그리고 전쟁 후에도 여전히 서부가 조금 더 유리한 방향이 많았다.

식량 생산은 자신들이 앞서고 소금을 구할 길이 막힌 동부는 분명 끙끙대고 있을 테고.

거기에 왕에게 충성하는 자는 별로 없고 반역을 꿈꾸는 자 옆에 오히려 더 많이 붙어있으니 자신들은 그저 여유롭게 동부가 점점 허물어지는 모습을 구경이나 하면 되었을 거라 믿었다.

갑자기 그 보잘 것 없다는 마왕이 단 몇 달 만에 모든 것을 정리하고.

동부에서 소금 광산이 발견되어 오히려 소금 부분에서 유리한 고지를 점하고.

그 어떤 추가 반란의 조짐도 없이 모든 마족들이 마왕 앞에 고개를 조아리고.

그리고 결정적으로, 마족이 어느 때 얼마나 쳐들어와도 무조건 막아낼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던 남자가 동부로 떠나버리기 전까지는 말이다.

“클라우스.”

뒤를 돌아보니 오늘 강의를 다 마치고 돌아왔는지 율리아가 서있었다.

그녀의 모습을 확인한 클라우스는 미소를 지으면서 자신에게로 다가온 여인을 안아주었다.

율리아 역시 그의 품에 안겨서는 다른 평범한 여인들처럼 가슴께에 볼을 부비적거렸다.

“오늘 하루 지루하지 않았나요? 강의도 못 하고 있고, 답답할 것 같아요.”

“전혀요. 오히려 당신을 기다리느라 하루종일 기대가 되었는데.”

“거짓말.”

“거짓말 아니에요. 내가 왜 이런 걸로 거짓말을 할까.”

“그것도 거짓말 같아요.”

율리아는 그렇게 말하면서도 행복해 죽을 것 같다는 듯 더욱 진한 미소를 지었다.

현재 클라우스는 아직 교수의 자리를 유지하고 있기는 하다.

그러나 전투 마법 강의를 재개할 경우 대부분의 학생들이 강의 내용에 집중하기보다는 서부를 버리고 동부에 귀의한 클라우스라는 인간한테 더 집중할 것이 뻔했다.

당연히 강의도 지지부진해질 것이 뻔하니 차라리 강의를 쉬는 게 낫겠다고 판단했다.

루스칼 총장 역시 그런 클라우스의 의견에 고개를 끄덕였다.

아카데미 내부의 소란스러움도 있고, 외부에서의 압박이나 견제도 한 몫 했다.

여전히 클라우스를 배신자라고 여기는 귀족들이 많은 상황에서 그가 또 다시 교수 자리에 서서 강의를 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는다면 분명 게거품을 물것이 확실했다.

“오히려 난 좋아요. 이전처럼 매일 같이 강의 준비할 필요도 없고, 그냥 아침에 일어나서 당신 보고 동부와 서부에 관한 보고 좀 받다가 다시 율리아, 당신이 돌아오면 또 맞이해주면 그만이죠. 이걸로도 난 충분해요.”

이미 지랄 맞게도 고생을 한 자신이다.

할 수만 있다면 이제는 그냥 뒤에 앉아서 쉬면서 가끔 가다가 일이나 하는 게 좋았다.

그런 의미에서 지금 순간이야말로 아마 최고로 편할 때가 아닌가 싶다.

“그것보다 나타샤는 만나봤나요?”

“네. 그렇지 않아도 방금 전에 그녀와 차 한 잔 하고 오는 길이에요.”

원래라면 감히 왕의 것을 탐낸다고 하여 경계심을 잔뜩 내비쳤을 율리아다.

하지만 그녀가 나타샤에 비하여 감히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우위에 있음을.

다른 누구도 아닌 클라우스 본인이 나서서 확실히 해주었다.

이렇게 되면 율리아도 어느 정도는 너그러이 나타샤나 다른 여인들을 받아들일 수 있었다.

물론 그게 언제고 유지되지는 않을 테지만 말이다.

“요정 사회도 왕국이나 제국만큼 시끄럽다고 하더군요.”

“그렇겠죠. 인간 귀족들만큼은 아니지만 대륙 전쟁 때 뒤에 숨어 있다가 이득만 취한 자들이 어디 한둘이겠습니까. 원래 나쁜 놈이 끝까지 잘 사는 법이죠. 괜히 희생한 자는 바보가 되고요.”

“나는 절대 그들의 전처를 밟지 말아야겠어요. 그렇지 않아도 대륙 전쟁 시기부터 얼마 전에 있었던 반역 진압 때까지. 왕실을 위해서 기꺼이 목숨을 내던진 자들을 추모하는 행사를 정기적으로 열까 생각 중이에요.”

“당연히 그래야죠. 집단을 위해 개인이 희생했는데 그 집단이 나서서 그 넋을 위로하지 않는다면 앞으로 누가 나서려고 하겠습니까.”

클라우스의 말이 맞다는 듯 율리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후 그녀는 나타샤와 나눈 이야기들을 계속해서 제 남자에게 들려주었다.

일단 은광은 아주 순조롭게 작업을 이어나가고 있다고 한다.

어지간한 광산은 감히 비교 자체도 불가능할 정도로 매장량이 많다고 하는데 이걸 다 캐내려면 못 해도 수십 년은 더 걸릴 것 같다고까지 했다.

무엇보다 마족 측에서 국경을 넘어가는 부분까지 허락해준 덕분에 잡음 하나 없이 사업이 점점 더 크게 확장되어가고 있단다.

“덕분에 더 많은 보상을 약속받을 수 있게 되었죠. 아마 얼마인지 안다면 서부 연합이 배가 아파서 미쳐 날뛸 걸요?”

“장담하건데 그 부분 또한 빌미의 하나가 될 겁니다. 손해 보는 건 죽어도 못 참는 부류들로 가득하거든요.”

“푸핫! 손해? 손해요? 지금 그걸 손해라고 생각하는 건가요?”

율리아의 입가에서 웃음이 터져 나온다.

하지만 저 웃음이 정말로 긍정적인 의미의 웃음이 아니라는 것을.

오히려 그 안에 흐릿하기는 하나 분명한 분노가 서려있음을 클라우스는 알고 있었다.

“그 광산이 발견되었을 때 딱히 이득이 될 것 같지 않다는 말에 다들 몸을 뺐죠. 그 와중에 오직 당신의 의견을 들은 나타샤만이 무리하다 싶을 정도로 자금을 투자했고요. 그게 아니었다면 광산은 반도 채 파고 들어가지 못 하고 문을 닫았겠죠. 저들이 한 게 뭐가 있다고요? 그런 주제에 이제 와서 배가 아프니 자신들이 손해를 본다고 생각한다? 아하하하하!!”

나를 향한 것이 아닌데, 내게 향하는 분노가 아님을 아는데.

그런데도 클라우스는 왠지 모르게 등골이 섬뜩해지는 것을 느꼈다.

가끔 가다가 저렇게 큰 목소리로 웃음소리를 내는 율리아가 세상에서 두 번째로 무서웠다.

참고로 첫 번째는 자신 앞에서 눈물을 보이는 율리아였고, 세 번째는 토라진 율리아였다.

“정말이지 너무 일관되어서 역겹다는 말도 이제 황송할 지경이네요. 도대체 어쩌다가 그런 자들이 서부를 지배하는 자들이 되었을까? 정말 신기하지 않나요?”

신기하고 자시고 할 것도 없다.

그들이 그런 성향을 지니게 된 것, 그런 자들에게 서부가 지배 받고 있는 것.

모든 게 다름 아닌 클라우스, 자신이 만든 것에 의해 그리 되었으니까.

저번에도 말했지만 역사에서 드러난 최악의 형태들만 모아놓은 곳이 바로 서부다.

자기 딴에는 마족이 나쁜 게 아니라 항상 선하다고 보여지는 인간, 수인, 요정 등이 오히려 악의 세력으로 보였으면 했던 게 그 이유였다.

그래서 설정을 그리 잡아둔 것인데, 이렇게 소설 속 세상에 빠지게 될 줄 알았는가.

이럴 줄 알았다면 조금은 덜하게 병신으로 잡아두는 것인데.

속으로 한숨을 쉬다가도 차라리 이게 낫지 않았겠는가, 하는 생각도 든다.

이걸로 율리아가 서부를 때려부수는 것을 부담 없이 볼 수 있으니까.

어차피 자신이 한 번 구해둔 세상이고, 삶을 이어갈 가치가 있는 자들은 자신이 잘만 설득한다면 얼마든지 율리아의 밑으로 들어올 거다.

죄책감 가질 필요도 없고 그럴 이유도 없다, 죽어도 싼 놈이 죽는 것, 그게 전부다.

“서부의 요즘 상황은 어떻다고 하던가요.”

율리아는 정보 부분에 있어서의 일들은 클라우스에게 일임했다.

붉은 독거미가 자신과 접점을 지니게 된 것도 결국 그가 이유이고.

꽤나 잘 활동해주고 있다는 리르 역시 클라우스가 잡아둔 여자다.

그렇기에 클라우스 외의 적임자는 찾아볼 수가 없었다.

“두 달 전과 비교하면 좋다고 봐야겠죠. 그 때까지는 당장이라도 내전이 날 법한 분위기였지만 동부가 순식간에 평정되었다는 소식에 다들 화들짝 놀랐으니까.”

“그들도 서로 싸운다면 누가 우위에 있을지 아무도 모르는 게 이유겠죠. 전쟁 경험이 많은 자들은 당장 자금과 군사가 없고, 역으로 자금과 군사가 있는 자들은 경험이 없으니 서로가 상당히 걸리적거릴 거예요.”

“듣자하니 내가 동부로 넘어간 건 일단 저 혼자만의 이반으로 두기로 했답니다. 남은 대륙 전쟁의 공훈자들은 더 건드리지 않기로 했고요. 또한 대륙 전쟁의 부분에 대한 언급은 알아서들 자제하는 것으로 마무리했다나.”

“결국 또 귀족들이 이점을 들고 가는 군요. 자신들의 치욕만 가득한 게 바로 대륙 전쟁일 텐데 그걸 언급하지 않도록 했다니. 참 무능한데 어떤 부분에서는 참 유능하단 말이에요.”

그 말에 클라우스는 고개를 내저었다.

귀족들이 유능하다기보다는 여전히 남아있는 훌륭한 이들이 괜한 분열을 막기 위해 양보를 한 것이라고 봐야했다.

자신들이 피땀 흘려가면서, 전우들의 목숨을 바치면서 지켜낸 땅인데 그게 외침도 아니고 내부의 불길로 타오르는 꼴을 볼 수는 없으니 이를 악물고 뒤로 물러난 것이다.

‘그것도 모르고 귀족 놈들은 또 자신들이 우위에 섰다고 좋아하고나 있겠지.’

원래는 키엔마이어 후작이 나서서 어느 정도 중심을 잡아주어야 함이 옳았다.

하지만 어찌 된 일인지 클라우스가 동부로 떠난 이후 키엔마이어 후작도 정계 활동을 거의 정지하면서 그나마 귀족들 중 제대로 된 머리가 박혀있는 자들의 목소리가 급격히 줄어들었다.

혹자는 키엔마이어 후작이 친구의 배신으로 큰 상처를 입은 거라고 지껄이지만.

클라우스는 그가 무슨 생각으로 이렇게 첩거에 들어갔는지 다 알고 있었다.

만에 하나, 정말로 만에 하나 자신이 타고 있던 배가 스스로 좌초되어 침몰할 경우.

제 사람들이라도 살리기 위해 배를 갈아탈 준비를 하고 있는 것이었다.

여태까지 돛의 방향도 정해주고, 물도 퍼 올리고 정말 별의별 짓을 다 했다.

그럼에도 배가 그 노력을 무시한 채 스스로 침몰하기를 선택했다면.

거기에 남아서 같이 가라앉는 것은 등신 천치 머저리 같은 짓에 불과했다.

“우리 쪽 상황은요?”

“에슐리 팔라티나트와 페르디난트 엘세가 각각 병력들을 맡아 훈련 중에 있다고 은밀하게 서신을 보내왔습니다. 어떻게 해서든 대륙 전쟁 시기의 군세를 갖추도록 말해두었습니다.”

“무리할 필요는 없어요. 괜히 무리하다가 자칫 정보가 새어나가면 피곤하니까. 서부에서 절대 모르도록 진행해야 해요.”

“여부가 있겠습니까.”

“세실리 레블랑은요. 혹시 꼬여드는 날파리는 없다던가요?”

그러자 클라우스가 미소를 지었다. 설마 날파리가 정말로 없겠느냐, 라는 뜻.

율리아는 그 반응에 같이 미소를 지으면서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죽을 자리인 줄도 모르고 꼬여든 놈들이 있다 하니 소원대로 다 잡아죽이면 될 것이었다.

“기대되네요. 정말 기대가 돼.”

속삭이듯 그리 중얼거린 율리아가 갑자기 클라우스의 셔츠를 붙잡는다.

그리고 자신에게로 와락 기울이고는 왕명을 내린다.

“오늘 밤. 내 방으로 와요. 왕의 반려로서 의무를 행해야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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