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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왕가 비선실세-238화 (238/341)

〈 238화 〉 22장 - 숨 고르기

“동부의 마왕께 인사 올립니다.”

서부 연합에서 왔다는 사신이 깊숙이 허리를 숙여 보인다.

그 꼴을 보고 있자니 두 다리를 박살내고 제대로 꿇으라고 말하고 싶은 생각이 치민다.

지금도 율리아가 마음만 먹으면 능히 서부를 싹 밀어버릴 수 있다.

그저 동부에 최대한 부담이 적게 가게 하는 식으로 택한 터라 준비를 보다 철저히 한 후에 완벽한 때와 명분을 쥐고서 폭풍처럼 휘몰아치려고 참고 있는 것이지.

하지만 사신의 행동이 완전히 틀린 것이냐고 묻는다면, 그건 또 아니었다.

조금 분하지만 지금의 대륙 상황은 동부와 서부가 아직 대등한 관계라고 보는 게 맞다.

대륙 전쟁에서 먼저 패배를 인정한 쪽은 동부이지 서부가 아니다.

협정에서 딱히 불리한 조항을 안고 가지는 않았어도 어찌 되었든 패한 건 패한 것이다.

그러니 서부 입장에서는 자존심 다 굽히고 숙이고 들어갈 부분을 아직 느끼지 못 한 거다.

해서 클라우스는 여전히 동부와 마왕을 깔보고 있을 저 사신 놈과 그 뒤의 서부 연합 대가리들을 일단은 그냥 두고 보기로 했다.

“어서 오시오. 먼 길 오느라 고생이 많았겠군.”

“아닙니다. 국경에서부터 잘 대해주어서 참으로 편안하였습니다.”

그래도 모가지에 힘 빳빳이 주고 다니는 게 취미는 아닌 모양이다.

율리아의 말에 미소를 지으면서 고개를 숙이는 걸 보니 적당하게 숙이고, 또 적당하게 목에 힘을 주라는, 그런 명령을 듣고 온 것 같았다.

“그보다 갑자기 사신이라니. 이런 경우는 없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아아. 실은 매우 다급한 사안이라 이리 오게 되었습니다. 혹 무례하게 느끼셨다면….”

“그 정도는 아니다. 이 먼 곳까지 온 이유나 한 번 들어보도록 하지.”

그러자 서부 측 사신은 고개를 숙이고는 제 용건을 말하기 시작했다.

“이번 교역 재개로 인해 그동안 굳어있던 서부와 동부의 분위기가 다시금 유해지는 것 같아 매우 환영하는 바입니다. 이로 인해 서부는 더 아름다운 세공품에 눈을 뜰 수 있을 것이고 동부는 더욱 윤택한 삶을 누릴 수 있게 되었으니 서로 아주 좋은 일이라 전하라고 하셨습니다.”

“고맙군. 그렇지 않아도 교역 재개를 흔쾌히 수락해서 선물이라도 보낼까 했어.”

“아닙니다. 선물은 이전에 보내신 것들로 충분하고도 넘칩니다.”

선물이라 함은 교역 재개를 하기 직전 클라우스가 보낸 것, 즉 뇌물이었다.

어차피 서부 연합의 대가리들 몇만 설득하면 교역 재개하는 거야 일도 아니다.

그들에게 아름다운 보석 세공품 몇 개만 쥐어줘도 알아서 헤벌쭉하면서 누이 좋고 매부 좋은 게 뭐냐면서 다 들어준 것이었다.

심지어 클라우스는 대담하게도 그 뇌물을 선물이라고 하면서 대놓고 내주었다.

단순히 잘 봐달라는 뜻만이 아니라 동부에서 선물을 보낸 몇몇 가문들에게는 그게 자신들의 힘과 권위를 상징하는 것이기도 했다.

마왕마저 자신들이 실세임을 알고 있다, 그러니까 서부의 너희들도 알아서 모셔라.

뭐 이런 식으로 눈치를 줄 수도 있었다.

“오히려 선물은 서부 측에서 드리고 싶다 하셨습니다. 하여 동부 측에 우선적으로 밀 쉰 수레와 보리 쉰 수레를 각각 마왕께 선물로 보내 드리고자 하니 받아주셨으면 합니다.”

사신의 말에 율리아는 클라우스의 예측이 맞았음을 직감했다.

동부가 먼저 손을 내밀었으니 자신들도 그에 맞춰서 손을 내밀어준다.

혼란을 이용하려고 했으나 단 두 달 만에 그걸 정리한 동부이고 마왕이다.

괜히 자극해서 적의를 키웠다가는 좋은 명분만 줄 터이니 일단은 구슬린다.

이것이 서부가 생각하는 현재의 진행 방향이었고, 클라우스가 말한 예측이었다.

어쩜 이리 정확할까, 속으로 중얼거리면서 율리아는 입가에 살짝 미소를 그렸다.

“서부 연합의 호의에 감사를 표해야겠군. 그 정도면 꽤나 많은 양일 터인데.”

“동부가 먼저 이런 호의적인 분위기를 내어주었는데 어찌 가만히 있겠습니까.”

“보내주겠다는 선물은 잘 받도록 하지. 고맙다고 꼭 전해주시게.”

“여부가 있겠습니까.”

마왕의 입가에 흡족한 미소가 피어오르자 사신 역시 미소를 지었다.

아무래도 진짜 이야기는 이 다음부터 있을 듯 했다.

“마왕 전하. 그 교역 말입니다. 서부 측에서는 이번 기회에 이전에 끊어진 식품 교역도 다시금 재개하였으면 어떨까 하고 생각 중에 있습니다.”

“아아. 그러고 보니 동부가 세공품을 교역품으로 삼았다면 서부는 식품이었지?”

“그렇습니다. 서로가 더 길게 교역을 유지하려면 순환이라는 게 필요하지 않겠습니까. 서부의 잉여 생산품이 동부로 가서 자그마한 이득이 된다면 서부의 여러 사람들 역시 동부에 대한 반감을 다 버릴 수도 있을 겁니다.”

틀린 말은 아니다, 먹고 사는 문제가 걸리게 되면 자연스레 극단적일 수가 없게 된다.

동부와의 교역으로 이득을 취하고, 가족을 먹여 살리는 자들이 많아진다면 그들은 제 살 길을 위해서라도 전쟁이 일어나는 것을 극력 반대할 것이다.

서부 연합의 머리들은 바로 그 부분을 이유 삼아 교역 확장을 주장했다.

우리 서부의 돈만 흘러나가는 것이 거슬리는 것을 꽤나 아름답게 포장했다.

이런 거대한 집단과 집단 사이에 손해와 이득이 어느 정도 균형을 이루어야 하지 않겠느냐.

그들은 율리아와 동부를 향해서 그렇게 묻고 있었다.

“확실히 서부 측의 말도 맞는 것 같군. 허면 그렇게 하도록 하지.”

“아, 정말입니까? 감사합니다, 마왕 전하. 진심으로….”

“다만 이전과 같이 무제한적으로 들이지는 않을 걸세.”

“예?”

“우리 동부도 최소한의 세공품은 교역품으로 보내고 있지 않은가. 듣자하니 서부에서 세공품 기술을 어떻게든 향상시키려고 노력을 한다더군. 그런 기술자들의 노력을 헛되이 만들지 않기 위해서라도 동부의 물건이 너무 많이 들어가면 안 될 것 같아. 그것과 같은 이치네. 동부도 서부와의 식량 교역에만 매달리지 않는 선에서 노력들을 하고 있어.”

“저, 그게….”

“서부의 사정을 알기에 이리 조치했네만. 허면 우리들도 무제한적으로 교역을 허락해도 된다는 건가? 서부 측에 어떤 혼란이 올지 몰라서 이러고 있는 것인데.”

동부의 세공품이 들어오고 나서 무슨 사달이 났는지 사신은 알고 있다.

서부 측의 기술자들이 별의별 짓을 다 해도 이루지 못 했던 세공법이었는데.

그걸 동부의 기술자들은 밥 먹듯이 너무나 쉽게 해내고 있었다.

안에 불순물이 단 하나도 없도록 만들고 빛을 받으면 더 많은 빛을 반사해내도록 하는 작업.

서부의 기술자들에게는 아직도 갈 길이 먼 첨단 기술과 같았다.

그에 반해서 동부에서 들여온 보석들은 서부의 것과 비교가 불가능할 정도로 아름다웠다.

당장 돈 좀 있다 하는 귀족들이 죄다 달려들어서는 깨끗하게 털어갔다.

어찌나 미쳐 날뛰는지 대귀족 가문조차 세공품을 구하지 못 해서 어이가 없어할 정도로.

‘세공품들을 무제한적으로 풀면 중반까지는 귀족 가문들의 대부분이 동부 보석을 쥐게 될 거다. 그러는 동안 동부로 흘러가는 돈이 얼마일까.’

문제는 거기서 그치지 않을 거다.

그렇게 보석을 미친 듯이 풀다가 귀족들이 더는 사지 않는다면.

그들은 교역의 자유를 이유삼아 가격을 내려서 부유한 평민들로 시선을 옮길 것이다.

이게 바로 동부의 세공품이니, 귀족들은 하나씩은 다 가지고 있다는 것이니 하면서.

귀족들이 왜 보석에 목을 매는가. 아름다워서? 비싼 것이어서?

답은 희소가치에 있다. 너는 없고, 나만 있는. 설사 너는 있어도 내 것과 비교해서 전혀 급이 안 맞는다는 이런 형태로.

그런 보석들을 평민들이 지니고 다닌다고 생각하면 귀족들이 참고 있겠는가?

무슨 수를 써서라도 세공품들을 지니지 못 하게 할 것이 분명했다.

‘거기서 나올 혼란과 사회적 불만은 또 어떻게 할 것이고.’

원래라면 동부 측의 약점을 쥐고 흔들어야 함이 옳았다.

예전 서부와 동부 사이의 이런 비슷한 이야기 때도 그것 덕분에 서부가 유리한 지점을 차지할 수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소금, 식량을 제외하고서 동부와 비교했을 때 또 한 번 우위를 점하고 있던 가장 중요한 것.

그 위협적인 무기를 이제 서부는 더는 쓸 수가 없었다.

원래라면 식품 교역에 소금을 끼워서 어떻게 손도 못 대도록 하는 것이 이전의 전략이었다.

하지만 얼마 전 동부에서 엄청난 규모의 소금 광산이 발견되었다는 소식은 그 전략을 쓰려던 서부에게 충격과 짜증을 동시에 전해주었다.

좋게 생각하자, 동부가 아예 받아들이지 않을 가능성도 생각해두지 않았는가.

소금 문제는 진작 해결했고 동부의 혼란이 크게 번질 거라는 예상은 완전히 빗나갔다.

단 두 말 만에 모든 것을 안정시키고 성장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이 타이밍에 괜히 딴지를 걸었다가 그 날카로운 기세가 서부로 향하면 큰일이었다.

“허면 어느 정도의 제한을 두고서 식량 교역을 하면 되는 것입니까?”

“그렇다고 볼 수 있겠지. 동부의 식량 사정이 서부만큼 여유롭지는 않으니까 말이야.”

율리아가 일부러 자신들의 약점을 굳이 노출시킨다.

우리가 부족한 부분이 분명 있으니 괜히 경계하거나 긴장하지 말라는 뜻이었다.

“저, 그리고… 이건 그냥 드리는 말씀입니다만.”

“무엇이지?”

“요정 측의 영토와 마왕 전하의 영토가 맞닿는 곳에 은광이 하나 있습니다. 헌데 채굴을 하면서 경계를 넘었다고 했는데 그 부분이 잘 정리 되었는가 해서….”

“아무 문제없이 잘 해결되었다. 그건 그대들이 아닌 그 광산의 책임자와 광산 소유주와 나눌 이야기인데. 왜 그대들이 갑자기 끼어들려는 건가?”

이유야 뻔하다, 건수 하나 잡아서 어떻게 콩고물이라도 좀 얻어먹으려는 것.

연합이라는 이름 하에 일단 뭉쳐있기는 하지만 인간도, 요정도, 수인도 서로를 경계한다.

어느 한쪽의 세력이 너무 커지면 그에 반발하여 나머지 두 종족이 힘을 합쳐 다른 하나를 억누르곤 했었다.

그게 세 종족이 살아가는 지혜라고 할 수도 있지만, 항상 이점보다는 손해가 더 컸다.

당장 동부에 마족이라는 강력한 적들이 있음에도 화합하지 못 하는 이유.

그들의 성향이 창조신이 정해둔 방향으로 너무나 착실하게 흘러가기 때문이었다.

“잘 해결이 되었다면 환영입니다. 다른 뜻은 없었으니 오해치 마십쇼, 마왕 전하.”

“그렇다면 다행이군. 나는 또 서부 연합과 얼굴을 붉혀야 하나 싶었어.”

“아무쪼록 이번 교역 확장에 대해서 그렇게 알고 있겠습니다.”

“고생했네. 오늘 하루는 이곳 마왕성에서 쉬었다가 내일 출발하는 걸 허락하지.”

“마왕 전하의 자비에 감사할 뿐입니다.”

그 대화를 끝으로 서부에서 온 이가 물러난다.

직후 옆문을 통해서 클라우스가 슬쩍 안으로 들어온다.

“어떻습니까?”

“당신 말이 맞았어요. 시간을 끄는 게 목적으로 보이네요. 동부와 대립각을 세운 채 내부를 정리할 수는 없으니 차라리 내어줄 건 내어주고 내부부터 안정시키자, 이런 식이더군요.”

“그들 딴에는 나름 최선의 방법이었을 겁니다. 동부의 혼란이 몇 달은 이어질 줄 알았는데 단 두 달 만에 전부 끝났다고 하니 초조해질 수밖에요. 만에 하나 자신들의 틈을 노려 동부가 다시 쳐들어온다? 심지어 유일한 방패는 자신들 손으로 동부에 내어주었는데?”

“이해가 가지 않네요. 서부의 고위층들은 그런 것조차 생각하지 않은 건가요? 당장의 욕심에 이끌리면 미래에 벼랑으로 굴러떨어지는 게 보일 텐데?”

그 말에 클라우스는 잠시 생각하다가 미소를 짓고는 이렇게 말했다.

그들 딴에는 그게 나름 최고라고 생각한 것이라고.

어쩔 수 없게도 이 세상에는 한계라는 것이 존재하고, 그들은 그저 세상을 창조한 누군가가 정해둔 한계에 봉착한 것이라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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