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36화 〉 22장 - 숨 고르기
찰랑, 찰랑-.
“저, 저… 사, 사령관님.”
“굳이 이러지 않으셔도 된다, 뭐 이런 비슷한 말 할 거면 하지 마라. 벌써 너 아홉 번이나 그 소리하고 있는 건 알고 있지, 카엘라?”
“하, 하지만…. 사령관님께서 이런 일을 하실 필요는….”
“발 만져달라며. 그래서 마음껏 만지려고 발 닦아주고 있는 건데 무슨 문제라도 있나?”
처음 카엘라에게 포상을 할 때 아마도 자신과의 관계를 요청하지 않을까, 그렇게 생각했다.
율리아야 항상 고픈 여인이라고 하지만 나머지 여인들도 티만 내지 않을 뿐 언젠가 클라우스가 와서는 안아주지 않을까 기대하고 있으니까.
그리고 그 여인들 중 카엘라도 포함되어 있고 말이다.
하지만 카엘라는 그런 클라우스의 예상을 벗어나는 보상을 원했다.
제 발을, 정확히는 맨발을 만져달라는 여인의 부탁.
수인들이 가장 민감해 하는 부위가 귀와 꼬리, 그리고 발이라는 부분을 감안해도 한 번 안아주기를 원한다는 대답과는 거리가 상당히 떨어진 것이었다.
신임 전사장으로서 마왕성 근위병들의 마음도 잘 휘어잡았고 율리아를 지키는 임무도 잘 수행하고 있으며 무엇보다 이전에 있었던 전투에서 많은 활약을 했다.
상을 받을 이유는 충분하기에 클라우스는 단순히 발을 만져주는 게 아니라 아예 여태껏 자신을 위해 고생만 한 이 여인의 발을 씻겨주기로 했다.
“으읏….”
그리고 현재, 카엘라는 클라우스의 손에 이곳저곳 만져지고 있는 제 발을 바라보며 어쩔 줄 몰라 하고 있는 중이었다.
“네가 부탁해놓고 그리 부끄러워하면 조금 난감하다, 카엘라.”
“죄, 죄송합니다. 시정하겠습니다.”
“그 정도까지는 아니고. 그래서, 기분이 좀 좋아졌나?”
단순히 발만 씻겨주는 게 아니라 손으로 발바닥이나 발가락 등을 꾹꾹 눌러주면서 마사지까지 같이 겸해주고 있는 중이었다.
클라우스를 자신의 리더로, 대장으로 따르고 있는 카엘라에게는 너무나도 충격적이고 또 생소한 모습일 테지만 그만큼 기분이 좋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네… 기분… 좋습니다, 사령관님….”
“그러면 다행이네. 난 또 부담만 가지느라 아무 것도 못 느끼는 줄 알았지.”
그렇게 답한 후 반대편 발도 정성스레 씻어준다.
문득 장난기가 동해서 보드라운 발바닥을 살살 간지럽혀주니 카엘라가 흠칫 몸을 떨면서 ‘흐잉!’ 하는, 상당히 귀여운 신음 소리를 흘리고 만다.
클라우스가 그 소리를 듣고 일부러 과장되게 방금 이게 뭔 소리지? 라고 물으니 허둥거리면서 자신은 절대 아니라고 일단 말하고 보는 호랑이 여인이었다.
“아아, 그러면 내가 낸 소리인가? 그건 또 몰랐네.”
너무나 충성스럽고 또 너무나 진지해서, 은근히 놀리는 맛이 있는 여인이다.
이런 부분들이 마음에 들어서 조금은 과하다 싶을 정도로 충성을 바침에도 일부러 계속 그녀를 곁에 두고 있는 이유였다.
당연히 아름답고, 또 속살도 상당히 부드러운 것도 한 이유 하겠지만.
“난 네가 당연히 나와의 관계를 요구할 거라고 생각했다.”
“….”
“그런데 발을 만져달라니, 무슨 생각인 거냐.”
클라우스의 질문에 호랑이 여인이 이리저리 눈동자를 굴린다.
어떻게 대답을 해야 할까, 어떤 답을 내놓아야 눈앞의 남자가 만족할까.
항상 모든 부분에서 우선시되는 것은 자신이 아닌 클라우스.
때문에 카엘라는 잠시 고민하다가 이유라는 것을 꺼내놓았다.
“사령관님께서 피곤하시면 곤란하실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내가 피곤하다고 언제 말한 적 있었나?”
“몸에서 마왕 전하의 냄새가 아주 진하게 나고 있습니다. 아마도 밤새 거사를 치르신 것이겠죠. 그런 분께 대련에 이어서 또 다른 피곤함을 부탁드리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 뿐입니다.”
“내가 설마 네게 상을 내려주면서 피곤하다고 투덜거릴까.”
“물론 사령관님께서 그러실 일은 없겠지만, 그저 제 마음이 불편해서 그렇습니다.”
이런 식으로, 매번 클라우스부터 챙기고 보는 부관이다.
때로는 조금 투정을 부려도, 앙탈을 부려도 좋을 텐데 기어코 그걸 부관으로서의 충성심으로 억누르고 마는 대단한 여인이었다.
그나마 발정기 때는 그런 거 다 집어치우고 달려들기에 색다른 맛이 있다고 할까.
어쩌면 자신에게 과분한 여자는 율리아 하나만이 아닐 수도 있겠다고 생각이 든다.
장담하건데 자신의 부관으로 묶이지 않았다면 카엘라는 분명 수인 사회에서 첫 손에 드는 가장 강한 전사가 되었을 게 분명했다.
‘그런데 그리 되었다가는 당장 율리아한테 살해당할 확률이 너무 높아지는군.’
율리아가 가장 즐겨 쓰던 방식, 상대들이 가장 의지하고 또 믿는 자를 회생 불가능한 상태로 만들거나 아예 죽여 없애서 절망의 구렁텅이로 밀어 넣는 것이다.
잡음도 거의 없고 강자를 쓰러트리면 약자는 알아서 따라야 한다는 마족들 특유의 성향이 영향을 미치는 것이라고 볼 수도 있다.
그런 의미에서 클라우스 옆에 있는 건 카엘라에게 있어서 오히려 득이라고 할 수도 있었다.
“그동안 고생 많았어, 카엘라.”
“네?”
“대륙 전쟁 때부터 오늘까지. 어디를 가도 고생길만 펼쳐지는 사령관 때문에 고생했다고.”
“그건….”
“미안해. 그리고, 그리고 너무 고마워.”
수건으로 발의 물기를 닦아주면서 나긋한 어조로 그리 말한다.
입에 발린 소리가 아니라, 뭔가를 얻거나 노리기 위한 이유가 있는 게 아니라.
그냥 정말로 고마워서, 반드시 해야 했던 말이고 꼭 하고 싶었던 말이기에.
하지만 여태까지 그 말을 제대로 해본 적이 없어서 망설이다가 이제야 겨우 해본다.
여태까지 모든 여인들을 그저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수단으로 이용했었다.
회차가 엉망으로 꼬일 때에는 카엘라조차 가차 없이 미끼로 던지기도 했었다.
그럼에도 카엘라는 그 속에서 웃으면서 죽어갔다, 그 모습을 잊을 수가 없다.
여인의 그 처량한 얼굴이 너무 진하게 박혀 그걸 잊으려고 더 미친놈처럼 지내기도 했다.
감정을 품고 살아가면 그 감정에 잠식되어 이 저주에서 벗어날 수 없을 것이다.
그 공포에 그 압박감에 사로잡혀 꽤나 많은 시간을 괴물처럼 보냈었다.
그러다가 얼마 전의 회차들부터 겨우 깨달을 수 있었다.
이렇게 살다가는 정말 미쳐버릴 것 같다고, 결국 나도 인간이기에 인간처럼 살아야한다고.
“사, 사령관님. 혹시, 혹시 제가 뭘 잘못했습니까?”
클라우스가 갑작스레 그런 말을 하니 호랑이 여인이 무척 당황하고 또 놀란 표정을 짓는다.
설마 그런 말을, 이런 분위기에서 들을 줄은 정말 상상도 못 했다는 듯이.
그래서 혹 자신이 뭔가를 잘못했고 이대로 추방당하는 건 아닌지 걱정하는 눈치였다.
카엘라의 그 모습에 클라우스는 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동시에 자신의 무관심에, 그리고 냉정함에 혀를 차면서 조금은 후회가 되기도 했다.
조금 더 잘해줄걸, 조금만 더 관심을 가져주고 대해줄걸, 여태 뭐가 그리 초조해서 이런 여인들을 두고 미친놈처럼 굴리기만 했는지 모르겠다.
“네가 상상하는 그 어떤 이유도 아니야. 그냥 새로 자리를 잡고, 나를 믿어주는 이들 곁에 있으니 문득 나는 내 밑의 녀석들을 어떻게 대했나. 거기로 생각이 닿아서 그래.”
“사령관님께서는 완벽한 분이셨습니다. 그 어떤 문제도 없었습니다.”
“말은 그렇게 해도 너도 내심 서운한 게 있었을 지도 모르지.”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제가 어떻게 사령관님께 그런 생각을!!”
자신의 충성심이 의심 받았다고 생각하는 것일까, 카엘라가 무척 격앙된 목소리를 낸다.
여기서 자신이 침묵한다면 카엘라는 더더욱 날뛸 것이 분명하다.
수인들에게 있어서 제 강함을 무시 받는 것, 그리고 제 충성심을 의심 받는 것이 죽는 것보다도 더 한 치욕이라고 했다.
그 부분을 아주 잘 알고 있기에 서둘러 다음 말을 덧붙여준다.
“네 충성심을 의심하는 게 아니야. 내 부족함이 있을 수도 있다는 거지.”
“그렇지 않습니다. 사령관님은 완벽하십니다.”
“나도 인간이야. 나를 깔보고 무시하며 견제하던 귀족들과 똑같은 인간.”
“같은 인간이지만 다릅니다. 그들은 구제불가능의 쓰레기이고 사령관님은… 앙!”
놔두면 비행기를 태우다 못 해 아예 우주선에 태워서 우주까지 날려버릴 기세다.
카엘라의 충성심이야 항상 반기는 것이지만 이 정도로 띄워지고 싶은 생각은 전혀 없기에 이번에도 카엘라의 발을 간지럽혀주니 바로 말을 끊고 마는 호랑이 여인이었다.
“가, 간지럽습니다! 자, 자꾸 그러시면….”
“자꾸 그러시면 뭐. 기분 좋다고?”
“아응! 그, 그러시면… 그러시면…!”
보들보들한 발바닥을 계속 만져주고 또 간지럽히니 여인의 발가락이 귀엽게 오므려진다.
정 못 참겠으면 그냥 발을 빼면 될 터인데 그건 또 전혀 안중에도 없다는 듯.
그냥 계속 클라우스의 손 위에 발을 올려둔 채 연신 몸을 비트는 카엘라였다.
“하윽! 카응! 흣! 키잉!”
어찌나 기분이 좋은지 그렇게나 숨기려고 하던 수인들 특유의 울음소리까지 흘린다.
원래 너무 만지다보면 대부분의 수인들이 적당히 하라며 화를 내는 게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그 상대가 연심을 품은 이라면, 그리고 절대적인 복종을 맹세한 자라면.
본인이 기절하는 수가 있더라도 절대 도망치지 않는 게 바로 수인이기도 했다.
“흐읏!”
입술 사이로 달뜬 신음 소리가 들려오고 여인의 허벅지가 꽉 오므려진다.
마치 뭔가는 숨기려는 듯 가랑이를 꼭 닫으니 그제야 클라우스가 간지럽히던 행위를 멈추고는 카엘라를 조용히 바라보았다.
원래 이런 질문을 하면 카엘라가 무척 난처해진다는 걸 알고 있다.
그리고 덤으로, 율리아와 카엘라의 사이도 아주 조금은 불편해질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한 번 마음의 벽을 허무니 괜스레 장난이 치고 싶어서 견딜 수가 없었다.
저 굳건한 여자가 어쩔 줄 모르고 허둥거리는 모습이 또 보고 싶었다.
“마지막 기회야, 카엘라.”
“네?”
“원하는 거 있으면 말해. 뭐든 들어준다. 대신 지금만이야. 생각해서 나중에 말하겠다, 뭐 이런 건 없어. 지금 당장 말한다면 들어주고, 아니면 아닌 거지. 어떠냐.”
그러자 카엘라의 몸이 움찔! 하고 크게 떨린다.
실은 남자의 손길이 제 발을 마구 희롱하는 순간 저도 모르게 흥분하고 말았다.
아마 팬티를 벗어보면 제 은밀한 곳에서 흘러나온 애액으로 흥건하게 젖어있지 않을까 싶다.
“….”
주변을 돌아본다, 여기는 아까의 대련장이 아니라 제 방이다.
누구도 볼 수 없고 누구도 오지 않는다.
잠시 이 남자와 어울리고 뒹군다고 해서 문제가 되지 않을 것이다.
안기고 싶다, 안고 싶다, 마왕이 그런 것처럼 나도 사랑 받고 싶다.
율리아보다도 먼저 지니고 있던 마음이니 무리한 부탁은 아니지 않을까.
내가 저분에게 바친 시간이 몇 년이고, 보인 충성심이 얼마인데 이 정도 부탁도 못 할까.
‘하지만….’
하지만, 클라우스의 몸에서 나는 여인의 진한 향기가 그녀의 결심을 붙잡는다.
밤새 마왕과 함께 있다 잠시 나온 것이 분명하다.
그리고 그녀가 깨어나기 전에 다시 방으로 돌아가서 함께 시간을 또 보낼 것이다.
이제 앞으로 계속해서 서로의 손을 잡고 나아가야 할 사이이니 그런 부분이 매우 중요하다.
그 중요한 시간을 자신이 혹 뺏어 버리는 건 아닐까, 제 욕심이 자칫 클라우스를 난처하게 만드는 건 아닐까, 카엘라는 그게 걱정이었다.
“사령관님.”
제 욕망과 제 충성심, 그 사이에서 갈등하던 카엘라는 결정을 내렸다.
조금은 분하지만, 조금은 아쉽지만, 어차피 조만간 발정기가 올 때다.
그 때가 폐를 끼치게 될 게 분명하니 지금은 한 발 물러서고자 했다.
“입맞춤 한 번만… 해주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