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32화 〉 22장 - 숨 고르기
자신이 마왕성으로 돌아온 지 두 달이 넘게 흘렀다.
율리아는 자리에 앉아서 조용히 차를 머금으면서 생각에 잠겼다.
그동안 참으로 많은 일들이 일어나고 또 마무리되었다.
다시는 되찾지 못 할 것 같았던 마왕가의 영광을 이리 쉽게 손에 넣었다.
콧대 높던 귀족들은 자신의 말 하나, 하나에 바짝 긴장하여 고개를 조아린다.
동부의 마족들은 이제 자신들이 사는 땅의 영주보다 왕을 더 존경한다.
그리고 서부에는 자신의 이름이 널리, 아주 널리 전해졌을 것이다.
“하아.”
아직도 꿈을 꾸는 것 같아서 때로는 무서울 때도 있었다.
여태까지의 모든 게 허황된 것이었고, 눈을 떠보면 자신은 그 초라하고 힘없던 시절로.
그저 이름만 왕인 그 순간으로 돌아가 있던 건 아닐까 하고서.
하지만 아침이 되어서 일어나보면 모든 것은 꿈이 아닌 현실이었다.
시종장의 보고를 시작으로 현재 장인들의 세공 수준은 어디까지 진행되었으며 서부에 얼마나 많은 양의 세공품을 공급할 것인가 이야기를 하기도 했고.
이후 들어온 아인에게서 마왕성 북쪽에 있는 소금 광산이 아주 잘 돌아가고 있다는 소식을 전해 듣기도 했으며.
그 외에 다른 신하들에게서 혼란스러웠던 동부가 급속도로 안정되어 가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불과 몇 년 전만 하더라도 아무도 예상치 못 했던 일이었다.
서부만큼 동부의 상황 역시 불안정했고, 언제라도 균열이 가서 갈라질 것만 같았다.
과거의 율리아는 그걸 대화로서 풀어야 한다고 생각했었다.
그게 당연하게 느껴졌고, 모든 것이 무너지기 직전의 상황에서 힘은 아무런 의미도 없는 게 아닐까 하는 바보 같은 마음도 품었었다.
바로 그 부분을 클라우스가 정확하게 짚어냈다.
그리고 힘으로 이 동부를 평정하게 만들었고 그건 확실하게 통했다.
결과적으로 아우펜을 위시한 반란의 세력들은 모조리 참살되었고 항복한 자들은 몸을 납작 엎드린 채 마왕의 자비에 감사하며 평생을 살게 되었다.
“마왕 전하, 플랑슈입니다.”
“들어와.”
율리아의 허락이 떨어지자 정갈한 복장을 한 은발의 마족이 안으로 들어선다.
시종장 칼라굴의 업무를 조금씩 이어 받고 있는, 마왕성의 내부를 총괄할 플랑슈였다.
아직까지는 메이드 업무에 집중하고 있지만 곧 시종장의 자리를 물려받아 그 능력을 유감없이 펼치게 될 것이었다.
“이번에 귀족들이 서부와의 교역 재개를 환영한다고 뜻을 밝혀왔습니다.”
“그렇겠지. 여기서 어느 누가 감히 싫다고 말할 수 있을까.”
“아울러 서부와의 관계 개선에 쓰이면 좋겠다고 말하면서 여러 선물들을 마왕 전하께 바친다고 했습니다. 아마도 마왕 전하의 위명으로 서부에 전해지기를 바라는 모양입니다.”
아주 간이고 쓸게고 다 내어줄 셈이구나, 율리아는 미소를 지으면서 그렇게 생각했다.
아마 예전의 자신이었다면 인상을 찡그리면서 속 보이는 짓을 한다고 욕을 했을 것이다.
하지만 권력의 자리는 그리 만만한 것도 아니고 항상 옳아야 하는 것도 아님을 이제는 안다.
해서 율리아는 귀족들의 호의 아닌 호의를 웃으면서 받아주었다.
어차피 수틀리면 그냥 싹 쓸어버릴 수도 있는 게 바로 귀족들이다.
아우펜과의 전투, 그리고 그 이후 벌어진 동부 토벌까지.
귀족들의 힘은 약화되었고 반대로 마왕가의 힘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았다.
이제 각각의 영지에는 수비를 위한 최소한의 병력만 남게 되었고 나머지는 전부 마왕이 직접 통솔하고 이끄는 마왕만의 군대가 되었다.
“그리고 국경으로 파견을 나가 있는 오토의 보고에 의하면 서부도 이제 동부의 소식들을 모두 접하고 대비에 들어갔을 때라고 합니다.”
“거짓 정보를 조금 더 흘릴 걸 그랬나? 주제에 꽤나 빠르군. 네 생각은 어떠하냐, 플랑슈.”
메이드, 혹은 시녀가 아무리 전문직이라고 하지만 이건 다분히 정치적인 부분이 진하다.
다른 이도 아니고 플랑슈에게 그런 질문을 하는 것이 조금은 이상하게 보일 수도 있지만.
플랑슈는 잠시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율리아의 물음에 답했다.
“오히려 적당하다고 사료됩니다. 괜히 거짓 정보를 더 흘렸다가 서부의 경계심이 높아져 교역 재개에 차질이 빚어졌다면 상당히 난처해질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제법이네. 그런 부분까지 생각하고 있다니.”
“혹시나 불편하셨다면 사죄드리겠습니다, 마왕 전하.”
“아니, 전혀 아니다. 칼라굴의 뒤를 이어 시종장 자리에 오르려면 그런 기본적인 소양 정도는 가지고 있어야지. 돌아가는 현 상황을 적당히 알아야 휘둘리지 않는 법이야.”
아무 것도 모르면 순수한 게 아니다.
아무 것도 모르면 이용당하기 딱 좋은 상태가 될 뿐이다.
자신이 그러했고 그렇게 실컷 이용당하여 큰일까지 치를 뻔 했다.
“그보다, 지금 클라우스는 어디 있더냐.”
“현재 집무실에서 업무 중입니다.”
“클라우스더러 이곳으로 좀 오라고 전해주겠나, 플랑슈?”
“알겠습니다.”
공손한 기색으로 허리를 숙인 채 조용히 사라지는 은발 메이드.
그 모습을 잠시 바라보던 율리아는 다시금 시선을 창가로 돌렸다.
여기까지 오는 데에 1등 공신이 누구였냐고 묻는다면, 너무 당연한 대답이나 침묵할 것이다.
물론 여태껏 자신을 위해 참고 기다려준 충성파들의 노고를 잊을 생각은 없다.
하지만 그들 중 더러는 ‘마왕가’ 에 충성을 바치는 이들이기도 했고.
또 몇몇은 부왕에 대한 충심으로 율리아에게 또한 그 충성을 바친 것이기도 했다.
다른 걸 다 떠나서 율리아라는 마왕에게 충성했다고 해도, 기약이 없는 기다림이었다.
반역의 무리들은 그들보다 훨씬 강했고 훨씬 영악했으며 훨씬 거대했다.
그걸 무너트린 자가 1등 공신이라는 자리에 오르는 것이 당연하다.
그리고 클라우스는 마치 한 편의 잘 짜인 연극을 연출하는 것 마냥 그리 만들었다.
“마왕 전하, 클라우스입니다.”
“들어오도록.”
문이 열리면서 클라우스와 플랑슈가 함께 안으로 들어선다.
한창 업무를 보고 있던 것인지 손가락에 살짝 잉크가 묻어있다.
마왕인 자신조차 잠시 쉬고 있는 이 시간에 일을 하고 있다니.
괘씸하기도 하고, 또 살짝 미안하기도 하고, 묘하게 질투심이 들기도 한다.
자신에게 그리 취한 모습을 보일 때는 언제고 이제는 일에 파묻히다니.
“플랑슈는 그만 가 봐도 좋다. 찾기 전까지는 오지 말거라.”
“마왕 전하의 명령을 따릅니다.”
플랑슈까지 멀리 보내는 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클라우스는 잘 알고 있다.
문이 닫히고 플랑슈의 기척이 멀리 사라지자 율리아는 가볍게 한숨을 흘리더니 오직 그와 단 둘이 있을 때만 보이는 자신의 진짜 모습, 율리아라는 여인을 꺼내놓았다.
“내가 말했을 텐데요? 업무도 좋지만 쉴 때는 쉬라고요.”
“쉬고 있었던 거예요.”
“이제는 거짓말까지 하는 건가요? 손을 봐요. 거기에 잉크가 묻어있잖아요.”
“아, 이건 업무를 보다가 잉크가 튄 걸 못 본 거예요.”
“자꾸 나를 속이려고 드네요. 클라우스. 솔직하게 말해요. 그러면 용서해줄 테니까.”
“…실은 군 편제에 대해서 좀 살펴보고 있었어요.”
이 남자가 진짜, 왜 말을 안 듣는 것인가.
율리아는 답답한 마음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그의 앞으로 다가갔다.
일을 하는 거, 업무를 보는 거, 나쁘지 않다. 환영할 일이다.
하지만 최소한 제 몸은 챙겨가면서 일을 하는 것이 곧 충성이고 또 능력이다.
역적의 무리들을 전부 정리하고 서부와의 교역 재개, 소금 광산 개발, 그 외에 민생 안정을 위한 여러 정책 등 온갖 일에 손을 대고 있는 클라우스였다.
저번에 삼일 밤낮을 샜다는 소리를 듣고 얼마나 화가 났는지 몰랐다.
그러다가 혹 몸에 이상이 생기면, 그 때 자신의 마음에 들 미안함은 어쩌려고 그러는 건지!
“왕명이에요, 클라우스. 쉴 땐 쉬어요. 나는 내 남자를 실컷 부려먹다가 과로사하게 만든 왕이 되고 싶지 않아요. 차라리 침대 위에서 복상사 당한 남자로 만들고 싶다면 또 모를까.”
“알겠어요. 알겠으니까 그렇게 죽일 듯이 노려보지는 마요.”
“어기면 대역죄로 처벌할 거예요. 알겠죠?”
클라우스가 몇 번을 알겠다고 대답한 끝에야 율리아가 비로소 진정했다.
잠시 숨을 고르던 그녀는 하아, 한숨을 내뱉더니 소파에 앉고서는 옆자리를 두드렸다.
얼른 옆으로 와서 좀 앉아보라는 뜻에 클라우스는 얌전히 그녀가 원하는 대로 해주었다.
“…이렇게 빠를 줄은 몰랐어요.”
“뭐가요?”
“동부의 상황이요. 내전으로 인해 많은 이들이 죽거나 다쳤고 잔불을 꺼트리느라 동부의 곳곳이 폐허로 변하고 쑥대밭이 되기도 했었죠. 솔직히 나는 그걸 모두 회복하는 데에 많은 시간이 걸릴 줄 알았어요. 그런데 이게 가능한가 싶을 정도로 회복이 빠르다고요.”
그 말에 클라우스는 미소만 지을 뿐이었다.
율리아는 모르지만, 아마 평생을 모를 테지만.
자신은 이미 모든 일들의 경과를 다 알고서 준비를 해왔다는 것을 말이다.
“그럴 수밖에 없어요. 비록 내전이 있었다고는 하지만 대륙 전쟁 당시의 인간 왕국마냥 모든 것들이 폐허가 된 건 아니었으니까. 그저 경제 부분과 군사 부분만 조금 흐트러진 게 다였답니다. 율리아.”
“그래도 당신이 아니었다면 꽤나 곤란해졌을 거예요. 특히 교역 부분.”
동부가 내미는 교역 재개, 당연히 서부는 무슨 개수작이냐며 극렬 거부했다.
당장 서부 전체가 서로 분열되어 싸우는 와중에 동부가 자극을 하기는 커녕 평화 노선을 취하려고 하니 동부를 이용하려던 자들 입장에서는 그야말로 속이 터지는 일이었을 것이다.
클라우스는 그런 순간에 또 다시 붉은 독거미에 뭔가 명령을 넣었고, 그들은 곧 서부 곳곳에 몇 가지 정보와 소문들을 퍼트리기 시작했다.
그러자 또 뭔가 받아먹은 게 있는지 극렬 반대하던 자들 중 다수가 의견을 뒤집었다.
결국 동부와 서부의 교역이 다시금 재개되었고 처음에는 뚱한 반응을 보이던 서부의 여러 자들이 선물로 보낸 각종 보석들과 귀한 물품들을 받고는 완전히 풀어졌다.
동부의 새로운 마왕은 서부를 적대시 할 생각이 없다.
클라우스가 비록 서부를 떠나긴 했으나 그는 인간이고, 왕국을 고향으로 생각한다.
그러니까 서부와 평화롭게 지내고 싶어 할 것이다, 뭐 이런 생각을 품게 되었다.
“마음이란 게 자신에게 좋은 방향으로만 자꾸 기운다고 했던가요. 참 무섭네요.”
“본능입니다. 힘겹고 답이 없는 상황에서 어떻게든 벗어나고 싶은 마음. 그게 아주 간사한 형태로 드러나는 것뿐이에요. 나는 그걸 적절하게 이용했을 뿐이고요.”
누군가를 속이는 행위, 기만하는 행위, 역시나 예전의 율리아였다면 찝찝해 했을 것들이다.
하지만 그녀도 이제는 마왕이라는 자리에, 권력이라는 것에 대해서 확실히 알게 되었다.
중요한 것은 오직 소중한 것을 지키고 유지하는 것이며 거기에 방해가 되는 것이라면 어떤 방법을 써서든 치우고 지워내고 제거하는 것이 옳았다.
“군사 부분은 어떤가요. 피해가 좀 복구가 되었나요?”
“아쉽게도 이전 전투에서 숙련병들을 잃기는 했습니다. 하지만 회복하지 못 할 건 아니에요. 무엇보다 이후 군의 핵심을 맡아줄 이들이 많이 있으니 금방 질이 향상될 겁니다.”
평화는 오래 가지 않을 것이다.
서부가 먼저 깨트리든, 아니면 자신이 먼저 칼을 뽑든.
이 기만되고 거짓된 평화는 언젠가 깨질 수밖에 없다.
중요한 것은 바로 그 순간에 누가 더 준비가 잘 되어 있느냐, 이것이다.
“그러고 보니 아카데미가 슬슬 개학을 할 때가 되지 않았나요?”
“서부가 워낙 뒤숭숭해서 일단 한 달 연기가 되었다고 합니다. 우리에게는 아주 잘 된 일이죠. 아직 교역이나 소금 광산도 안정이 필요하고 동부의 빈 땅들을 적절한 이들에게 나눠주는 문제도 있으니까요.”
“…아, 그만. 쉬는 시간이잖아요. 일 이야기는 이제 그만 해요. 그런 건 그만 하고….”
덥석-.
클라우스의 위를 점하면서, 마왕 율리아가 아찔한 미소를 짓는다.
“우리 후계자에 대해서 조금 더 논하도록 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