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29화 〉 21장 - 동부 재건
“교역을 재개하고 싶다고요?”
율리아는 클라우스의 말을 듣고 인상을 찡그리고 말았다.
이 남자 앞에서는 되도록 아름다운 모습만 보이고 싶었는데.
그 결심마저 순간적으로 무뎌지게 만들 정도로 그가 내민 제안은 파격적인 것이었다.
“글쎄요. 내 생각에는 좋은 방안이 아닌 것 같은데.”
“단순히 재개에서 끝낼 일이 아닙니다, 율리아. 나는 교역 재개가 아니라 확장을 목표로 하고 있어요. 그것도 마왕가가 직접 나서는 그런 엄청난 규모 말이죠.”
그러자 율리아의 표정이 더욱 이상하게 일그러진다.
단순히 개개인이나 상단 간의 무역이 아닌 왕실이 직접 개입하는 사업으로 가자고?
현재 서부를 바라보는 동부의 민심과 반대로 동부를 바라보는 서부의 민심이 협정 이래 최악이라고 봐도 무방할 정도인데?
도저히 이해를 할 수가 없다는 표정을 짓고 있으니 클라우스가 미소를 짓는다.
슬그머니 율리아의 앞으로 다가와서는 뾰로통한 입술 위로 가볍게 키스를 해주니 마왕이 두 눈을 깜빡이면서 ‘어어어?’ 하고 탄식을 흘린다.
“지금 율리아가 뭘 걱정하는지 다 알고 있어요. 분위기가 흉흉하기 짝이 없는 이때에 다른 곳도 아니고 마왕가가 서부와 교역을 재개하겠다니. 그것도 아주 조금만 터주는 것이 아니라 이전보다도 더 크게 교역을 확장한다고 하니 신하들 입장에서는 이게 뭔가 싶겠죠.”
“당연하죠. 그래도 당신에게는 경외심이라는 감정을 가지고 있지만 그 나머지 서부의 자들에게 좋은 감정을 가지고 있는 이는 몇 없을 거예요. 충성파는 아카데미에서 있었던 일로, 나머지는 전쟁에서 있었던 해묵은 앙금 때문에 말이죠.”
“감정싸움. 물론 중요하죠. 급할 때에는 내부 단결에 이용하기도 좋고요.
“…계속 해봐요.”
“필요할 때는 그 감정을 배제하고 이득을 좇아야 할 때도 있는 겁니다.”
클라우스의 말에 율리아는 지금이 그 이득을 좇아야 하는 때냐고 물었다.
그에 고개를 끄덕이니 마왕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왜 하필 지금이냐고 반문한다.
차라리 신하들이 다 있는 때에 언급했으면 차라리 바로 뜻을 물었을 텐데.
바로 어제 세실리를 필두로 하여 에슐리 팔라티나트, 페르디난트 엘세, 그 외 많은 귀족들이 병력을 거느리고 동쪽으로 떠났다.
이들이 없는 사이에 이런 민감한 사항을 멋대로 다루었다가 저들이 반발이라도 한다면 설득하는 데에 시간을 낭비하게 될까 우려스러웠다.
“율리아.”
하지만 다음 들려온 남자의 말에 그 걱정은 씻은 듯이 사라졌다.
“이 동부는 당신의 것입니다. 당신이 하겠다면 하는 거예요. 당신이 왕이고, 당신이 주인이고, 당신이 곧 동부입니다. 저들은 지금 당신의 명령에 따라 반역의 잔불을 끄러 간 것이에요. 본인들의 임무를 수행하러 간 것이죠. 그리고 당신은 왕으로서 해야 할 일을 하면 된답니다.”
동부도 크게 보면 서부의 인간 왕국과 별 다를 것이 없다.
마왕이 있고 왕실이 있지만 그들이 절대적인 권력을 휘두르는 것은 절대 아니다.
그 밑에 각 영지를 다스리는 영주들이 있고, 권리와 의무를 동시에 지니는 귀족이 있다.
그나마 마족 귀족들이 더 나은 축에 속하지만 어찌 되었든 귀족들과 왕이 서로를 견제하고 과한 힘이 쏠리지 않도록 하는 건 동부와 서부가 비슷했다.
다만 그 힘의 균형이 서부는 결국 귀족 측으로 기울면서 완전히 망해버린 케이스고.
동부는 그 반대로 마왕 쪽에 조금 더 기울어서 어떻게 정리가 되는 모양새였다.
‘하지만 내가 원하는 건 그 따위 귀족 나부랭이들이 떠드는 사회가 아니야.’
그래서는 절대 자신이 원하는 비선실세가 되지 못 한다.
뭔가를 해보려고 해도, 왕이 떠드는데 옆에 있는 귀족이 딴지를 걸지 않겠는가.
그 따위 꼴 절대 못 본다. 심지어 그 대상이 율리아라면 더더욱 볼 수가 없다.
모조리 눌러두고, 싸그리 밟아두고 율리아 앞에서 고개조차 못 들게 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힘이 필요하고, 그 힘은 결국 ‘돈’에서 나오는 법이다.
붉은 독거미 측이 내어주는 자금이 있다지만 이게 계속 들어오는 고정 수입은 결코 아니다.
이건 어디까지나 그들이 이쪽에게 보인 ‘호의’ 에 불과하다.
그것도 율리아에게 보이는 호의가 아니라 클라우스에게 보이는 호의 말이다.
나타샤가 은광 개발 이후 권리 포기에 대한 금액을 보내는 것도 있다.
하지만 이건 마왕 개인적인 자산이라고 보기에는 조금 불편한 부분이 많다.
무엇보다 이 은광에 대한 부분은 율리아의 선견지명과 혜안을 강조하기 위한 장치로 쓰여야 하며 여기서 얻는 금액들은 전부 동부의 일반 마족들에게로 돌아갈 것이다.
민심을 얻는 데에 최고로 좋은 것은 먹이는 것이고, 먹이는 일에는 돈이 들어다니까 말이다.
그렇다면 남는 것은 결국 교역 밖에 없다.
지금은 동부와 서부가 거의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완전히 막아두었지만.
서부는 동부의 잘 세공된 보석을 원하고 동부는 서부에서 나는 또 다른 물건들을 원한다.
이걸 막아둔 것이 각각 마왕가와 왕국 귀족 의회였는데 실상 이게 서로에게 득보다 실만 많다는 것은 모두가 알고 있다.
자존심 때문에 먼저 접지는 못 하고, 그냥 서로 죽어나가는 중이라고 할 수 있었던 것이다.
“대륙 전쟁이 발발하고 교역이 모두 끊어졌죠. 그 이후 정전 협정이 맺어졌지만 말만 협정이지 불안하게 흘러가던 정세 때문에 교역 재개는 어림도 없는 일이었어요.”
“그걸 이제 다시 시작하면 되는 거 아니겠습니까, 율리아.”
“서부에서는 귀족들이 그걸 막았다고 하죠. 그러면 동부에서는 누가 막았는지 아나요?”
“전대 마왕이시죠.”
“정확히는 부왕, 그리고 나까지. 이 둘이 명령을 내린 거예요. 교역을 금하겠다고. 왜 그랬냐고요? 우리는 몰랐거든요. 그런 명령이 내려진 것을요. 알고 보니 그 빌어먹을 숙부라는 자가 귀족들과 마왕가의 관계를 완전히 파탄내기 위해서 꾸민 일인지도 모르고 있었죠.”
당시 마왕가의 상황이 최악이었음은 클라우스가 가장 잘 알고 있다.
왕이라는 타이틀을 달고 아무 것도 하지 못 한 채 그저 허수아비 노릇만 하느라 바빴다.
욕은 욕대로 먹고 책임져야 하는 일만 잔뜩 늘어나고 이득은 아우펜이 모조리 챙겨갔다.
그렇게 당했는데도 멀쩡하면 그게 더 이상한 일일 것이다.
화병이 걸려도 무방하다고 볼 수 있는 그 상황에서 율리아의 아버지는 그렇게 죽어갔다.
“다른 자들의 눈을 신경 쓸 때가 아니에요. 지금 이 순간에 어느 누구도 감히 마왕가 앞에 고개를 들 수 없도록 모든 준비를 해야 할 때랍니다.”
“알고 있어요. 그냥, 그냥 이렇게까지 그 빌어먹을 남자가 나와 부왕을 괴롭히는 것 같아서 짜증이 났을 뿐이에요. 하아….”
아우펜은 죽어서도 제 흔적을 고스란히 남기고 떠났다.
도대체 무슨 생각을 품고 있던 건지 동부에 별 이득도 안 되는 것들을 잔뜩 심어두었다.
그 자가 율리아를 상대로 승리하고 마왕의 자리에 오르는 모습까지는 봤는데 그 이후로 동부가 어찌 되었는지는 클라우스도 알지 못 한다.
아우펜이 왕이 되었다면 마지막의 마지막에 동부가 승리하기는 해도 상처뿐인 영광만 가득하지 않을까 싶다.
“하나 더. 동부가 얻는 게 있다면 서부도 얻는 게 있어야 해요. 그렇지 않고서야 서부 연합이 제 돈이 나가는 꼴을 보고만 있지 않을 테니까요.”
“이전부터 동부의 특산품이 잘 세공된 보석이었다면 반대로 서부의 특산품은 차나 커피, 그리고 꿀 같은 품목들이었죠. 거기에 동부와 비교해서 기후도 좋고 토지도 더 비옥해서 일반적인 식량 생산량이나 질도 그쪽이 훨씬 좋고요.”
“당신도 알고 있겠지만 바로 그 식량 부분이 가장 걱정하는 부분이에요. 질에서도 가격에서도 서부에서 들여오는 것이 훨씬 싸게 먹혔죠. 그게 동부에 퍼지면서 자연스레 이쪽의 경쟁력이 다 죽어버렸어요. 나중에 서부가 식량을 무기로 삼으려고 했을 때 그제야 위험을 깨닫고 급히 내부의 식량 문제를 해결하고자 경작 부분을 점검한 거고요.”
힘의 균형이 완벽하게 무너지지 않는 이상 어느 한쪽만 이득을 볼 수는 없다.
어떤 교역으로 동부가 이득을 보면 서부는 그만큼의 손해를 메우고자 또 다른 물품을 준비해서 동부에 팔아먹으려고 할 것이다.
돈이 흘러가는 만큼 다시 자신들에게 돌아오는 것도 중요하다.
그렇지 않으면 결국 손해 보는 장사라 되는 법이다.
“이제는 많이 달라질 거예요, 율리아. 더는 귀족들의 눈치를 볼 필요가 없어요. 당장 백성들은 귀족들을 보며 왕을 배신한 자들. 내지는 자신들의 목숨 보전을 위해 같은 귀족들을 때려잡는 자들이라고 비칠 테죠. 이번 기회에 더 확실하게 밀어붙이세요.”
“나 또한 귀족들을 배제한 완벽한 통치 구조를 만드는 거야 찬성이에요.”
“그렇게 말하면서도 여전히 얼굴에는 걱정이 가득한데요?”
그러자 율리아는 결코 귀족 때문이 아니라고 다시금 말을 했다.
이후 볼을 긁적이다가 옆에 걸려있던 지도를 바라보더니 그 서쪽을 응시하면서 말했다.
“서부 반응이 마음에 걸려서 그래요. 지금도 뒤숭숭하다고 했잖아요. 이런 때에 우리가 손을 내미는 게 뭘 의미하는지. 그 손을 잡으면 또 무슨 혼란을 초래할지 다 알고 있을 거예요.”
“뻔히 보이는 걸 붙잡을 이유가 없다는 말이군요.”
“대륙 전쟁이 터지고, 그리고 그 직후. 서부에서 우리 동부의 물건들을 싹 다 모아놓고 때려 부수거나 불태우거나 했던 일들이 비일비재했어요. 그 중에서는 귀족들이 앞장서서 세공품들을 다 파괴하기도 했고요. 내가 알기로는 이후 동부에 기대는 걸 줄이기 위해 자체적으로 보석 세공에 무척 열중했다고 하는데.”
확실히 그렇기는 했다. 그게 오래 갈 수가 없어서 문제지.
동부에서 오는 모든 물건을 파괴하고 다시는 얽매이지 않겠다고 했지만.
결국 다른 귀족보다 더 튀고 싶은, 더 잘 나가고 더 대단하게 보이고 싶다는 허영심은 결코 포기할 수가 없는 부분들이었다.
그렇다고 동부에 다시 세공품을 요청할 수는 없으니 귀족들은 대신 서부의 기술자들에게 보석 세공 기술을 연마토록 했다.
심지어 귀족들이 나서서 자금까지 지원해줬을 정도로 아주 열정적으로 말이다.
그러나 그것도 그 기술자들이 보석 세공을 원해야 하고, 또 훨씬 이전부터 축적된 기술이 있어야만 가능한 일이었다.
여태껏 동부에서 훨씬 더 뛰어난 세공으로 잘 깎인 보석이 들어오는데 서부에서 그 일을 하고자 하는 기술자들이 있을 턱이 없었다.
설사 있다고 해도 동부의 세공 기술만큼 아름다운 세공법은 찾지도 못 했고.
결국 아무리 투자를 해도 원하는 결과물이 나오지 않자 귀족들은 하나둘 나가떨어졌다.
기술이라는 것이 몇 년 만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고 못 해도 10년, 혹은 그보다 훨씬 더 많은 시간이 걸리는 부분을 감안하면 인내심이 전혀 없는 자들의 최후라고 할 수 있었다.
“걱정 마요. 장담하는데 동부가 먼저 부탁해서 교역을 재개하고 세공품들을 팔기 시작하면 처음에는 아닌 척 하던 귀족들도 결국에는 전부 모여들 겁니다.”
남들보다 있어 보이고 싶고, 부자라는 걸 알려주고 싶고, 제 힘과 권위를 뽐내고 싶다.
그런 부분에서 아름답게 세공된 보석은 단순히 여인만이 아니라 그냥 모든 귀족들의 허영심을 자극하는 폭탄과도 같은 물건이었다.
“…당신이 그렇게까지 말하니 지금부터 계획을 짜야겠군요. 일단 장인들부터 불러 모으는 게 일이겠어요. 대량으로 보석을 세공해서 물량 공급에 차질이 없도록….”
“아뇨, 율리아. 그럴 필요 없습니다.”
“네?”
“충분한 물량 공급을 할 필요는 없어요. 아니, 그럴 수도 있어도 그러지 마세요.”
원래 그냥 사치품보다, 한정판이라는 말이 붙은 사치품이 더 잘나가기 마련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