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28화 〉 21장 - 동부 재건
“언니!”
“미에르!!”
나이차가 많이 나서 그런지 자매라고 하기보다는 거의 모녀라고 봐도 무방할 정도였다.
저렇게 어린 동생의 목숨을 손아귀에 틀어쥐고 있으니 리르 입장에서는 좋든 싫든 그림자의 일원으로서 아우펜의 명령을 따라야만 했을 것이다.
“어디, 어디 다친 곳은 없니?”
“응. 괜찮아. 언니는 괜찮아? 또 나 없는 동안 막 힘든 일 하고 그랬어?”
“아니야, 아니야. 언니도 괜찮아. 아무런 일 없었어. 오히려 여기서 너무 잘 지냈어.”
“다행이다!”
“그래, 다행이야. 정말로 다행이야. 미에르, 미에르. 정말 다행이야….”
리르의 두 눈에서 눈물이 뚝뚝 흘러내린다.
여태까지 동생과 자신의 삶, 그리고 죽음을 인질로 붙잡혀 이용만 당해왔다.
끝내 마왕까지 해하라는 명령에 피할 권리조차 없이 나서야만 했다.
그런 와중에 일이 틀어졌고 마침내 모든 것을 막아선 남자를 조우했을 때.
리르는 비로소 자신에게도 비참한 최후가 다가올 것이라 직감했었다.
그리고 지금, 그녀는 매일 밤마다 그 남자를 떠올리며 자위를 하고 있었고 말이다.
“다행이 아우펜 놈이 경황이 없어서 인질들까지 정리하지 못 했더군.”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클라우스님.”
“틀렸다. 감사 인사는 내가 아니라 마왕 전하께 하는 거다. 나는 그저 마왕 전하의 명에 따라 네 동생을 구한 것이니 감사를 하려거든 그 분에게 할 것이고 은혜를 갚는다고 해도 그 분에게 갚아야 하는 거다. 내 말 확실하게 이해했나?”
“네. 이해했습니다. 이해했고말고요. 그래도, 그래도 정말 감사드립니다, 클라우스님….”
마왕을 해하려고 했던 자신을 살려두고 또 그 마왕에게 자신을 이용하라고 설득한 남자다.
그리고 인질이 붙잡혀있고 그로 인해 반대로 이쪽의 사람으로 만들 수도 있다고 말한 이 또한 클라우스였을 것이다.
리르도 바보가 아니기에 이렇게 동생을 만나게 된 것이 클라우스 덕분임을 알고 있다.
그래서 그에게 감사 인사를 올리는 것뿐이다, 그게 전부다.
“네 동생… 미에르라고 했나? 아무튼, 이곳 마왕성에서 지내면서 시녀로 둘까 하는데.”
“시녀라고요.”
“어린 나이에 부모는 물론이고 일가친척도 없더군. 너는 당장 네 일이 있으니 동생을 돌볼 수 없을 테고 그리 되면 안전한 울타리가 필요하지 않겠나?”
“그렇… 죠.”
“마왕 전하께서 허락하셨다. 너만 동의한다면 시종장 칼라굴이 데려가서 교육을 시키면서 자신의 손녀처럼 보살필 거다. 그라면 안심해도 돼. 마왕 전하께서도 인정한 인물이니까.”
“….”
“시녀도 말 그대로 울타리인 것이지 나중에까지 시녀로 살 필요는 없을 거다. 저 아이가 원한다면 다 성장해서, 그래서 스스로 살아갈 수 있는 나이가 오면 내보내줄 수도 있다.”
이런 파격적인 제안은 리르 입장에서는 듣도 보도 못 한 것이었다.
시녀라 하는 건 무슨 노예들이 하는 잡스러운 일이 절대 아니다.
정말 신뢰할 수 있는 자들에게 맡기는, 거르고 걸러 전문적인 자들만 할 수 있는 일.
당장 귀족 가문의 영애들이 그보다 더 권세가 높은 가문의 시녀로 들어가거나 아예 왕가의 시녀로 몇 년 활동하는 일은 흠이 아니라 당연시될 정도라고 볼 수 있다.
그런 일에 아무 것도 없는 제 동생이 들어가서 세상에서 가장 안전한 울타리 안에서 먹고 자고 쉴 수 있는 것이다.
해서 기뻐야 하지만, 그저 감사하다고 고개를 숙여야 하지만.
리르는 문득 든 어떤 생각에 불안한 기색을 숨기지 못 했다.
그리고 그 기운은 클라우스에게 바로 들키고 말았다.
잠시 리르를 쳐다보던 그는 옆에 서있던 시녀에게 미에르를 데리고 가라고 했다.
미에르에게는 저 시녀를 따라가면 제 방을 알려줄 거라고 말했고 말이다.
제 언니에게 조금 있다 보자고 말하면서 고사리 같은 두 손을 열심히 흔드는 아이다.
그런 꼬마 아이가 멀어지는 것을 확인한 클라우스는 리르에게 말했다.
“왜. 혹 이번에도 네 동생이 인질로 잡히는 것 같아서 그런가?”
“죄, 죄송합니다.”
“어찌 보면 그게 맞다. 인질인 거지. 네가 혹 다른 생각을 하지 못 하도록.”
“저는, 저는 충성을 다 할 것입니다! 그러니까 제 동생은….”
“너는 그러겠다고 얼마든지 말할 수 있을 테지만 다른 이들은 아니야. 항상 만약을 대비하는 것이 이 바닥의 당연한 섭리지. 너도 이해할 텐데?”
“….”
“네가 다른 생각을 하지 못 하도록. 만에 하나 적의 손에 붙잡혀서 모진 꼴을 당한 끝에 마음이 흔들리려는 그 순간에도 입을 열지 않게 하도록. 그래서 동생을 여기 두는 것이냐고 묻는다면 나는 ‘그렇다.’ 하고 답하겠다. 리르.”
괜한 거짓말이나 헛된 희망을 품게 만드는 말은 하지 않는다.
이미 그런 말에 한 번 넘어가서 신나게 이용당한 저 여자에게는 괜히 신뢰만 깎아먹는 짓.
클라우스는 차라리 자신의 속내를 조금은 드러내는 것이 더 이득이라고 판단했다.
“하지만 네 동생의 목숨을 인질로 삼지는 않겠다. 나는 네게, 그리고 네 동생에게 남부럽지 않게 살 수 있는 미래라는 것을 인질로 삼겠다. 네가 나와 마왕 전하의 기대만큼 움직여준다면 너도, 네 동생도 이 울타리 속에서 영원히 지낼 수 있을 거다. 어느 누구도 너희 자매를 함부로 대할 수 없어. 설사 동부의 고위 귀족이라고 해도 불가능하다. 너를 벌할 수 있는 건 오직 마왕 전하와 나, 이 둘이 될 것이다.”
“그런….”
“여태까지 하던 대로, 서부로 향해서 정보를 모으고 첩보 활동을 하면 된다. 무리할 필요는 없어. 이번에 우리가 손을 잡아준 붉은 독거미라는 조직과 접점을 두고 움직이면 될 거야. 내가 살리고 마왕 전하께서 살린 목숨이니 다시 한 번 제대로 일해보라는 거다. 네가 노력한 만큼 너와 네 동생은 행복할 거다. 임무를 성공하지 못 하면 동생이 죽는다, 가 아니라 너희 두 자매가 당당하게 살 수 있도록 도와줄 터이니 우리를 도우라는 말이다. 리르.”
해야 하는 일만 놓고 보면 크게 바뀐 것은 없다.
바깥을 돌면서 원하는 정보를 가져오고 상황을 살피면서 필요한 경우 다른 일도 한다.
그 상대가 율리아와 클라우스를 적대시 하는 세력이 될 것이라는 부분은 리르도 예상했다.
다만 다른 것이 있다면 공포와 두려움을 조장하여 움직이는 게 아니라 합리적인 뭔가를 제안하면서 스스로 열의를 가지도록 만드는 부분이다.
너는 이제 ‘우리 쪽 사람’ 이니 노력해서 성과를 내라.
그렇다면 우리 역시 네 노력과 성과에 부응하여 상을 내릴 테니까.
클라우스는 여태껏 이용만 당하면서 괴롭게 살아왔던 리르에게 그렇게 속삭이고 있었다.
“할 수 있겠지, 리르?”
“…네. 클라우스님 말씀대로, 당신과 마왕 전하께서 살려주신 목숨이니… 죽는 순간까지 두 분을 위해서 일하겠어요.”
“의도는 좋은데, 그런 말 하지 말라고 했다. 죽을 필요는 없어. 죽을 것 같으면 그냥 도망쳐라. 임무가 우선이 아니라 네가 우선이다. 살아야 네 동생 크는 것도 보고 하는 거야.”
“아….”
힘겹게 살아온 사람일수록 누군가의 신뢰와 온기를 미치도록 그리기 마련이다.
아우펜은 모든 그림자를 대하듯 리르 역시 공포와 두려움으로 조종했다지만.
그녀에 대해서 그녀 본인보다도 더 잘 알고 있는, 그리고 원한다면 스스로 목숨조차 끊을 수 있게 할 정도로 완벽하게 틀어쥐고 있는 클라우스로서는 그럴 이유가 없었다.
이런 부류는 적당히 잘 대해주면 거기에 부응하고자 더 노력하는 스타일이니까.
“이 정도면 내가 해줄 수 있는 것은 다 했다고 본다. 나머지는 이제 네가 하기에 따라 달렸다. 실망시키지 않을 자신 있겠지?”
“네. 꼭 이 은혜에 보답토록 하겠습니다, 클라우스님.”
“좋아. 믿음직하네. 그러면 ‘공적’ 인 대화는 여기까지 하고….”
이 여자가 그저 은혜를 갚고자 이렇게 움직이는 게 아니란 건 피차 다 알고 있는 사실이다.
당장 자신이 다가가면 갈수록 몸을 배배 꼬는 모습이 저 여자에게 심어둔 ‘욕정’ 의 모든 것이 완전히 발아해서 아주 활짝 만개했음을 알 수 있는 대목이었다.
리르 바로 앞까지 다가간 남자가 슬그머니 손을 내려서 여인의 몸을 가볍게 어루만진다.
언뜻 보면 연인을 대하는 손길 같이 부드러워 보이지만 저게 언제든지 흉포한 맹수의 발톱과 이빨이 되어서 제 몸을 헤집을 수도 있다는 걸 리르는 알고 있다.
그리고 그걸 결코 거부할 수 없도록 ‘개조’ 가 끝난 상태이고 말이다.
“네 보고는 1차적으로 나를 거치고, 그 다음 내가 마왕 전하께 보고하는 형식을 취할 거다.”
“….”
“이게 뭘 의미하는지 알고 있겠지.”
“…하읏!”
그냥 대충 손끝으로 가랑이 사이를 부드럽게 스치고 지나간 게 전부였다.
그런데도 리르는 파르르 몸을 떨면서 마치 진득한 애무라도 당한 여인처럼 달뜬 신음 소리를 흘리고 있는 중이었다.
한동안 건드리지 않았더니 참 많이도 외로워진 모양이다.
아마 이 상태로 조금만 더 괴롭혀주면 아래쪽에 물이 흥건히 고이지 않을까 싶다.
당장이라도 이 자리에서 바지를 벗기고 안을 확인해보고 싶다는 욕망이 고개를 들었지만 여기는 마왕성, 엄연한 마왕의 영역 안이다.
아무리 자신이라고 해도 지켜야 할 선 정도는 지키면서 행동하는 편이 이롭다.
“하윽, 하으으….”
“만족스러운 보고가 올라올 때마다, 내게 들어오지 않은 최선 정보나 극비 정보를 가져올 때마다 네가 얻을 수 있는 보상도 그만큼 많아지는 거다. 그리고 그 끝에는 네가 그렇게나 원해 마지않는 쾌락이 기다리고 있겠지.”
“정말, 정말… 저도, 저도 안아주시는 거죠?”
“보면 모르냐. 지금도 이유만 있다면 너를 충분히 안아줄 수 있어.”
사아악, 사아악-.
여인의 은밀한 곳을 부드럽게 쓸고 지나가는 남자의 손가락.
속옷을 입고 있고, 그 위에 바지까지 입고 있지만 리르는 클라우스의 손이 한 번 움직일 때마다 몸이 찌릿 하고 울리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얼른 저 남자의 손이 제 은밀한 곳을 마구잡이로 괴롭혀주었으면 좋겠다.
위에 걸친 옷들을 거추장스럽다며 다 찢어버리고 밤새도록 범해주었으면 좋겠다.
침이 꼴깍거리며 넘어가고 심장이 당장이라도 터질 듯이 두근거린다.
리르는 그런 제 속내를 간신히 감추면서 억지로 입을 열었다.
“클라우스님의 기대에 부응하도록 노력을….”
“아니지, 리르. 마왕 전하가 먼저 나와야지. 날 난처하게 만들지 마라.”
“죄, 죄송합니다. 마왕 전하와 클라우스님의 기대에 부응하도록 하겠습니다.”
“좋아. 그러면 지금 당장 국경 인근으로 이동해서 이 마을의 이 여관으로 가봐.”
클라우스가 내민 것은 붉은 독거미가 운영하고 있는 여관의 위치가 찍힌 지도였다.
그걸 받아든 리르는 여전히 열기가 다 가라앉지 않은 표정으로 고개를 숙여 보였다.
아마도 지금 한 번 안아주면 안 되는 것일까, 하고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클라우스도 그냥 미리 한 번 해주고 보낼까 생각했지만 시간적 여유가 없었다.
잠시 후면 율리아와 다른 마족들을 데리고서 동부 재건을 위한 회의가 시작된다.
그 자리에서 단순히 반역의 잔불을 꺼트리는 일 뿐만 아니라 향후 동부의 빠른 발전을 위해서 어떤 전략을 가지고 동부의 일을 진행해야 할지 결정을 해야 할 것이다.
‘서부는 내부의 혼란을 외부로 분출하기 위해 동부와의 갈등을 조장한다. 전형적인 수법이지. 내부의 불만을 외부로 쏟는다…. 하지만, 그 외부가 거기에 어울리는 뭔가를 해주지 않는다면 전혀 가능한 일이라고 볼 수 없을걸.’
이제부터 동부는 철저하게 서부에게 웃는 모습을 보여준다.
그래서 서부의 선동꾼들이 아무리 지껄여도 대부분의 사람들이 ‘아닐 것 같은데?’ 라고 생각하게 만들어야 한다.
오히려 내부의 혼란이 더욱 커지도록 부추겨야만 한다.
가볍게 건드려도 알아서 와르르 무너지도록 말이다.
‘분위기 쇄신을 위한 가장 좋은 방법은, 역시나 교역이지.’
그리고 동부의 특산품은 참으로 모순적이게도 인간 귀족들이 가장 좋아하는 귀금속.
원석이 가장 많이 나는 곳도, 그리고 그 원석을 가공하여 하나의 아름다운 보석으로 만드는 장인들이 가장 많은 곳도 바로 동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