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25화 〉 21장 - 동부 재건
충심을 증명할 기회를 달라.
세실리의 입에서 그 말이 떨어지니 다들 묘한 표정이 된다.
일단 충성파와 전투 전에 합류한 중립파들은 나쁘지 않겠다는 얼굴빛을 하고 있다.
계속해서 당신의 자리를 비운다면 좋은 게 단 하나도 없으니까.
역적들이 일으킨 불길은 다 꺼졌다. 그 잔불이 남았다고 해서 왕이 움직일 필요는 없다.
지금쯤이면 서부에 모든 소식들이 분명하게 전해졌을 것이다.
이런 중요한 때에 왕이 또 자리를 비우면 그만큼 만만한 순간도 없다.
“레블랑 가주. 충심을 증명할 기회를 달라고 했나?”
“그렇습니다. 마왕 전하.”
“허면 그대와 저기 있는 다른 자들을 데리고서 남은 지역을 평정하겠다는 말이군.”
율리아의 말에 세실리가 고개를 끄덕인다.
그러자 잠시 동안 레블랑의 새로운 가주를 바라보던 마왕은 입가에 미소를 그린다.
“믿어도 되겠나? 나는 한 달도 채 걸리지 않아 역적의 수괴를 처단했다. 또한 그대가 평정하고자 하는 지역의 반역자들 역시 모조리 죽였다. 이제 그곳에 남은 건 머리를 잃고 몸만 남은 뱀들일 뿐이지. 그런데도 좋은 소식이 들리지 못 한다면 내가 많이 실망하지 않을까?”
“그런 일이 없도록 노력해야만 이 자리에 있을 자격이 있지 않을까 합니다.”
세실리의 대답에 율리아가 더 진한 미소를 짓는다.
동시에, 여기까지 오는 내내 세실리의 연기력 지도를 했던 클라우스도 그동안의 노력이 헛것이 아니었음을 다시 한 번 느낄 수 있었다.
일만 잘 풀리면 아주 실컷 괴롭혀주겠다는 클라우스의 약속.
그 표과에 거의 각성 수준으로 돌변한 세실리는 정말 최선을 다하고 있었다.
신임 레블랑의 가주, 동시에 마왕에게 절대적인 충성을 바치고자 하는 인물.
그런 마족으로 자리에 모인 모두에게 비치고자 노력하는 중이었다.
“뭐, 그리 말까지 하니 믿어볼 수밖에 없겠군. 레블랑 가주가 그리 말한다면 나도 더는 말릴 수가 없겠어. 허면… 팔라티나트 가주.”
“네, 마왕 전하.”
“그대들도 다른 이들의 시선이 조금은 불편할 터이니 확실한 것을 만들어두는 편이 좋겠지? 어떤가. 레블랑 가주와 함께 남은 역적의 잔당들을 소탕하고 오겠는가?”
여기서 거부할 이유 따위는 존재하지도 않는다.
거기에 표면상으로 왕이 제안을 하고 있다 뿐이지, 명령과 다름이 없다.
강력한 숙적마저 완벽하게 제압하고 동부를 완벽하게 손에 넣은 율리아다.
지금 상황에서 그녀가 하는 말은 곧 법이고, 다른 이들의 명줄을 쥔 칼이기도 했다.
“마왕 전하의 명령이시라면 그저 따를 뿐입니다.”
“그리 말해주니 든든하군. 아아, 그대들에게만 기회를 주는 건 조금 불공평하려나? 이렇게 하지. 엘세 가주!”
“신 페르디난트. 하문하십쇼.”
“그대도 함께 가는 건 어떤가. 군공을 세우기는 했지만 반역의 잔당들을 소탕하면서 보다 더 큰 공을 세울 수도 있을 테니까. 그대의 충심을 의심하는 게 아니다. 오히려 믿기에 보내려 하는 것이야.”
거기까지 이야기가 닿자 분위기가 묘해진다.
세실리의 말대로 동부 끄트머리에 반역자들의 영지가 다수 남아있는 건 맞다.
하지만 가주를 잃고 사병들마저 거의 잃어버린 상태라 할 수 있다.
율리아는 괜히 많은 자들을 보낼 필요가 전혀 없는 때에 이곳에 모인 자들을 대거 그쪽으로 보내겠다는 말을 하고 있었다.
이러니 충성파의 마족들도 조금 불안한 모습을 보이기 시작한다.
저들에게 공으로 밀리는 것을 걱정하는 게 아니라, 자칫 병사들을 딸려보냈다가 저들 전부가 다시 돌아선다면 그거대로 또 엄청나게 골치가 아프기 때문이다.
기껏 반란을 진압했는데 그 뒤를 이어 또 다른 반란이 일어나는 경우는 비교적 흔하다.
더구나 반란을 진압한 세력에 재차 반란을 일으킨다면 더더욱 피곤해진다.
그런 이유로 충성파에 소속된 마족들은 적당하게 찢어두는 편이 어떨까 생각했다.
하지만 율리아는 그런 신하들의 마음을 모르는 것인지.
그게 아니면 다 알고 있으면서도 다른 뜻이 있는지 계속 페르디난트를 응시했다.
“마왕 전하께서 그리 마음을 써주시니 제가 어찌 거부하겠나이까. 당장 달려가서 감히 마왕 전하의 마음을 어지럽히는 자들을 모조리 처단하겠습니다.”
페르디난트가 수긍하니 중립파 귀족들도 어어? 하는 반응이다.
자신들은 그래도 전투가 벌어지기 전에 율리아에게 합류한 자들 아닌가.
기존 충성파들에게는 비교할 바가 못 되겠지만 그래도 저기 있는 팔라티나트를 위시한 자들보다야 내심 낫다고 생각하는 중이었다.
그런데 그 중심이라 할 수 있는 페르디난트가 자신의 공을 앞세우지 않고 철저하게 고개를 숙이면서 마왕의 심기를 조금이라도 거스르지 않겠다고 분명하게 말한다.
그에게 의지하여 여기까지 온 귀족들로서는 어쩔 수 없이 거기에 따를 수밖에 없었다.
마침내 모든 인선이 정해지자 율리아는 가볍게 박수를 치면서 그대들을 믿겠다고 말했다.
더해서 그 근처에 레블랑이나 팔라티나트 같이 자신에게 고개를 숙이기로 한 가문들도 있으니 지원도 받을 수 있지 않겠냐고 하면서 병력은 5천 명 정도를 내어주겠다 했다.
적다면 적을 수도 있지만, 반대로 보자면 그런 상황에서도 최고의 효율을 보이라는 왕의 뜻.
여기서 마왕의 기대를 충족시키는 자가 신임을 얻어 새로운 힘을 얻게 될 것이었다.
“출정은 사흘 후로 잡겠다. 그러는 동안 레블랑의 가주, 세실리 레블랑. 팔라티나트의 가주, 에슐리 팔라티나트. 엘세 가문의 가주, 페르디난트는 어떤 방식으로 남은 잔당 세력들을 제압할 것인지 의논하도록 하라.”
그 말을 끝으로 모든 회의가 끝이 났다.
물러가라는 왕의 명령에 가장 먼저 세실리가 인사를 해보이고는 회의장을 나선다.
레블랑 가문이 얼마 전까지만 해도 강력한 세력을 구축한 가문임을 생각하면.
그곳의 가주라는 여인이 저리 나오니 다른 귀족들도 다른 생각을 품을 수가 없었다.
뒤를 이어서 에슐리와 페르디난트도 물러나고, 데스테와 충성파도 전부 사라진다.
시종장 칼라굴까지 전부 사라지고 마침내 회의장 안에 홀로 남게 된 율리아.
아니, 정정하겠다. 끄트머리에 한 남자가 미소를 머금은 채 앉아있었다.
“세실리 연기력이 나쁘지 않더군요. 솔직히 처음에는 걱정했는데.”
“감정 표현이 예상 외로 풍부한 여자에요.”
“…그걸 왜 알고 있는지 묻고 싶지만, 참도록 하죠. 이런 멋진 연극을 준비했으니까.”
굳이 저들 전부를 보내려하는 이유, 충성파들이 걱정함에도 모두 전선으로 내모는 이유.
이제부터 모든 귀족들은 서로를 견제하며 오로지 마왕에게만 집중해야 한다.
그녀의 눈에 들기 위해서 때로는 개처럼 짖고 배를 보이기도 하며.
또 때로는 재빠르게 배신자를 색출해서 잡아 바치고 공을 세워야 한다.
이제 귀족들이 실권을 쥐고 휘두르는 시대는 끝이 났다.
지금부터는 철저하게 마왕의 지배 아래 모든 것이 돌아갈 것이다.
저들이 저들 손으로 남은 귀족들을 제압한다면 당장은 공이 될 것이다.
하지만 동부의 백성들이 보기에 귀족이 귀족을 때려잡는, 그들 스스로 자신들의 위신과 명예를 깎아먹는 짓이 될 것이다.
귀족이라고 해도 결국 왕 앞에서는 한낱 신하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저들이 한때는 너희들 앞에서 자신들이 하늘이라 생각하는 귀족들이었지만.
왕 앞에서는 그저 명령에 충실해야 하는 동부의 백성에 불과하다.
그 인식이 백성들에게까지 확실하게 전해지면, 이전과는 또 다른 왕실이 될 것이다.
그 부분을 확실하게 하기 위해서 세실리를 이용한 것이다.
한 가문의 가주 직을 계승하는 것은 오롯이 그 가문에서 정하는 일이다.
헌데 율리아는 그것마저 깨버리고 스스로 레블랑의 차기 가주는 세실리라 정했다.
그 순간 자리에 모인 모든 귀족들은 알아차렸을 것이다.
이제는 자신들의 힘이 예전 같지 않을 것이라고, 가주의 자리에 오르는 것조차 왕의 허락을 받아야 하는 절대왕정의 때가 다가올 것이라고.
물론 그들에게 채찍만 주어서는 안 된다.
충분히 받아들일 수 있는 당근도 내어주면서 이렇게 하면 너희가 이전만큼 거대한 권세를 누릴 수는 없어도 남부럽지 않게 살아갈 수 있다, 그렇게 다루어야만 한다.
해서 ‘역적의 잔당을 남김없이 소탕한 충신들’ 이라는 것을 넘겨주지 않았던가.
“저들이 혹 그 잔당들의 꾐에 빠져서. 혹은 저들끼리 단합해서 반란을 일으킬 확률은요?”
“없습니다. 페르디난트 엘세가 그리 멍청한 놈이 아니고, 에슐리 팔라티나트는 기껏 정한 제 뜻을 하루아침에 바꿀 정도로 미련한 자가 아닙니다. 거기에 세실리가 끼어있으니 더더욱 문제될 것도 없지요.”
“그녀를 꽤나 믿는군요.”
“율리아도 세실리의 마음이 진심이라는 건 알고 있지 않나요?”
“알고 있죠. 당연히 알고 있죠. 다만, 그 진심이 어디서 흘러나와 어디로 흘러가느냐. 이게 문제 아닐까요? 클라우스?”
세실리도 여인이고, 율리아 본인도 여인이다.
당연히 저 여자가 정말 자신에 대한 순수한 충심만을 가진 것인지.
아니면 그 충성을 바치면서 또 뭔가를 얻으려고 하는 것인지 다 알 수 있다.
율리아가 보기에 지금 세실리는 클라우스의 눈에 더 들기 위해 노력하는 모습이었다.
마치 첫사랑을 마주한 소녀처럼, 아주 몸과 마음이 다 달아서는 어쩔 줄 몰라 하고 있다.
“원래 다 그런 게 아니겠습니까, 율리아. 모두가 순수한 의도로 충성을 바치지는 않아요. 다들 원하는 게 있어서. 그걸 이루기 위해서는 왕의 곁에 가장 안전해서, 그래서 왕에게 충성을 바치고 모든 명령에 따르는 것이죠.”
“…당신도 그런가요?”
갑작스레 훅 치고 들어오는 율리아의 질문.
당신도 혹시 다른 뭔가를 노리고서 내게 가식을 보이고 있냐는 뜻이다.
그에 클라우스는 조금은 팔다리가 뒤틀리는 대답을 해주기로 했다.
“당연하죠.”
“당연하다고요?”
“지금 나는 마왕의 신임을 얻기보다는, 율리아라는 여인의 마음을 완벽하게 사로잡고자 노력하는 중이니까. 그걸 노리기에 충성을 다 바치는 거랍니다.”
어디 술집의 반반한 남자나 할 법한 말이다.
덕분에 그런 말이 나올 거라곤 미처 예상치 못 한 율리아가 ‘…어어?’ 하고 당황한다.
이런 낯 뜨거운 말을 침대 위도 아니고 이런 곳에서 하다니.
부끄럽기는 한데, 가슴이 간질거리기는 한데, 기분이 나쁘지는 않다.
오히려 그런 이유라면, 충분히 그래도 좋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사박-.
왕좌에서 천천히 몸을 일으킨 마왕이 나는 듯 클라우스 앞으로 다가온다.
그리고 갑작스레 그를 와락 끌어안더니 그 품속에서 깊게 숨을 들이마신다.
“…나도 마찬가지에요. 당신의 사랑을 독차지하려는 여인이 되기 위해서. 그래서 이렇게 강한 왕이, 매력적인 왕이 되고자 하는 거죠.”
“그 말을 들으니 너무 송구합니다, 마왕 전하.”
클라우스의 대답은 곧 율리아의 진한 키스에 의해 옅어졌다.
그렇게 한창 달콤한 키스를 나누던 두 남녀는 바깥에서 들려오는 인기척에 슬그머니 거리를 벌렸다.
아직 둘의 사이를 알리기에는 시기상조라고 할 수 있었다.
“마왕 전하. 시종장입니다.”
“들어오라.”
허락이 떨어지니 시종장 칼라굴이 모습을 드러낸다.
그의 손에는 곱게 접힌 서신이 하나 들려있었다.
“마왕 전하. 요정 측에서 비밀리에 서신을 보내왔습니다.”
“요정 측에서? 내게 서신을 보냈다?”
“그러하옵니다. 서신을 보낸 쪽이… 벨라루스라고 합니다.”
칼라굴의 입에서 벨라루스의 이름을 듣는 순간 클라우스가 미소를 지었다.
아무래도 이번에 투자한 나타샤 코인이 제대로 떡상한 모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