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24화 〉 21장 - 동부 재건
마왕이 돌아왔다.
자신의 권위에 도전했던 역적들을 처단하고, 그 흔적들을 모조리 지워버리고서.
율리아의 귀환 소식에 마왕성에 먼저 도착했던 자들이 성 바깥으로 나와 그녀를 맞이했다.
“승전을 감축드립니다, 마왕 전하!”
먼저 마왕성으로 향했던 인원들은 일이 이렇게 빨리 끝날 줄 상상도 못 했을 것이다.
공성전이 뉘 집 개 이름도 아니고 뚝딱! 하고 성을 점령할 수 있는 일이 절대 아니다.
율리아가 한 달 내로 돌아오겠다고 했을 때도 긴가민가했던 자들이다.
헌데 한 달은 고사하고 3주가 채 되기도 전에 모든 것이 끝났다고 한다.
아우펜이 죽었고 그의 식솔이 죽었으며 성문을 열고 투항한 자들까지 모조리 죽었다고 한다.
그 속에서 살아남은 이는 오토와 그 휘하 병사들, 그리고 레블랑 가주가 전부였다.
나머지는 마왕의 명령에 의해 그 자리에 참살 당했다.
율리아의 행보에 몇몇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지만 또 몇몇은 의문을 표했다.
당장 전투 때도 투항한 자들이 여기에 있는데 성문을 열고 항복한 자들을 모조리 죽여 없앴으니 이들이 느끼는 두려움이나 걱정이 분명 배가 될 것이다.
그 두려움이 자칫 또 다른 반란으로 번질 수도 있음을 생각한다면 그 의문이 괜한 건 아니다.
더해서 그들을 모두 죽이는 것으로 동쪽 지역의 모든 성들을 하나씩 떨어트려야만 한다.
아우펜 곁에 있던 자들 모두가 동쪽에 바탕을 두고 있는 귀족들이다.
그 가문의 주인들을 죽인 상황에서 나머지 마족들이 항복할 리가 없다.
역적의 수괴를 바쳤음에도 죽음을 맞이했는데 무엇을 믿고 고개를 숙이겠는가.
차라리 죽더라도 싸우다가 죽겠다고 항전의 깃발을 내걸 것이다.
“마왕 전하께서 전원 소집을 명하셨습니다.”
마왕성으로 귀환했으니 일단 휴식을 취하지 않을까 했는데.
모두에게 지금 즉시 회의실로 모이라는 왕명이 떨어졌다.
그에 따라 기존의 충성파들은 물론이고 전투 이전에 합류한 중립파들, 마지막으로 전투 도중에 투항한 귀족들까지 모두가 한 자리에 모이게 되었다.
아직 자리에 모이지 않은 이는 회의를 소집한 마왕 율리아와 전사장 카엘라.
그리고 아직 아무런 직위도 없다고 하지만 함부로 대할 수 없는 인간, 클라우스였다.
“전하께서 들어오십니다.”
시종장 칼라굴의 말에 모두가 자리에서 일어선다.
그 뒤를 이어서 마족 여인이 무척이나 당당한 걸음걸이로 회의실 안으로 들어선다.
여전히 아름다운 자태가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마족 여인.
그러나 그 속에 잘 갈무리된 날카로운 기세를 이제는 모두가 선명하게 느낄 수 있는 정도다.
율리아의 뒤를 이어서 전사장 자리를 맡게 된 카엘라가 그녀의 뒤를 바짝 붙는다.
바로 옆에 클라우스가 같이 따라 들어오고 있었고 그 다음 같이 들어서는 마족 여인에게 자리에 모여 있던 자들의 시선이 집중되었다.
“저 분은….”
“세실리 영애가 아닙니까?”
“그러고 보니 마왕 전하를 따라 전투에 종군했다고 했지요.”
그녀가 협곡에서의 전투에서 적의 마법을 무력화했다는 건 이제 모두가 알고 있다.
혼자서 수십의 마법사를 상대했다는 것은 그만큼 그녀가 뛰어나다는 증거.
때문에 자리에 모인 자들이 세실리를 존중하는 이유는 충분했다.
다만 그녀의 출신이 다름 아닌 레블랑이라는 것.
그리고 레블랑 가주는 끝까지 역적의 편에 섰다가 생포되어 끌려왔다는 것을 생각하면.
아무리 공을 세웠다고 해도 저렇게 마왕의 바로 뒤를 따라 들어온다는 것은 충성파들의 입장에서 보자면 조금 걱정스러운 부분이 없잖아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런 신하들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율리아는 가장 상석에 마련되어 있는 왕좌에 몸을 앉혔다.
그리고는 상당히 오만해 보이는 눈빛으로 자리에 모인 모두를 둘러본다.
“다 모인 건가, 시종장?”
“그렇습니다. 전하.”
“그대들을 이리 불러 모은 것은 내가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 혹 무슨 일이 있지는 않았는지. 그리고 있었다면 어떻게 처리했는지. 그에 대해서 보고를 받고자 하는 것이다. 더해서, 그대들과 함께 이 땅의 재건을 위해 어찌 하면 좋을지 의논도 하고 싶고 말이야.”
율리아는 말을 마친 후 앞쪽에 서있던 데스테가 가장 먼저 입을 열었다.
왕명을 받아 바로 마왕성으로 복귀한 후 부상자들을 치료하고 전사자들에 대한 장례를 최대한의 예우를 갖춰서 진행했다고.
지휘고하를 막론하고 왕을 위해 싸우다가 죽은 자들이니 그에 마땅한 대접을 했다고 말이다.
데스테의 보고에 율리아는 미소를 짓고서는 아주 잘 했다며 데스테와 그 일들을 처리한 이들을 모두 칭찬했다.
왕을 위해 싸우다가 죽은 모두가 이 동부의 영웅이니 말단 병사든 고급 지휘관이든 차별을 두지 말고 엄숙한 분위기에서 예우를 갖춰 장례를 진행하는 것은 당연하다고 덧붙였다.
다음 보고는 이번 전투에서 나름 공을 세운 페르디난트 차례였다.
“전하. 전투 이후 협곡에 널브러진 적병들의 시체가 협곡을 가득 덮을 정도였습니다.”
“그러했지. 그 좁은 곳에서 물경 2만에 달하는 병력이 부딪친 것이니까.”
“원래 반역의 무리에 가담한 자들은 죽어서도 쉬지 못 할 것이라는 경고의 의미에서 시신조차 수습하지 않는 게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그곳에서 죽어간 병사들은 그저 상관의 명령에 따라 싸우다가 죽은 자들이고 또 크게 보면 동부의 백성들이었습니다. 하여 여유가 되는 자들을 동원하여 적당한 자리에 그들을 매장하였습니다.”
자칫 마왕의 심기를 거스를 수도 있는 조치였고 보고였다.
하지만 페르디난트는 그에 대한 보고를 분명하게 하고 왕의 다음 말을 기다릴 뿐이었다.
그리고 율리아는 씁쓸한 미소를 지으면서 입을 열었다.
“고생했다, 페르디난트 엘세. 자칫 소홀해질 수도 있는 부분을 잡아냈군. 그대의 말대로 전투에서 죽은 대부분의 병사들은 아무 것도 모르고 끌려나온 자들이 대부분이다. 비록 전장에서는 적이었다고 하나 그게 끝난 이상 내가 품어야 할 나의 백성들이다. 그들은 죽었지만 그 식솔들마저 역적으로서 대할 수는 없는 노릇이겠지. 그렇지 않나?”
“마왕 전하의 말씀이 참으로 옳습니다.”
“나의 이름을 빌려 동부에 널리 공표하라. 비록 역적의 편에 섰다고 하나 그 가족들까지 전부 역적으로 대할 생각은 없다고. 오히려 그를 들먹이며 또 한 번 분란을 조장하는 자가 있다면 그자야말로 반역의 무리라 할 수 있으니 당장 그 자리에서 죽여도 문제가 없을 것이라고.”
“지엄하신 왕의 명령을 따르겠습니다.”
페르디난트가 고개를 숙이며 물러나자 곁에 서있던 전 중립파 귀족들이 한숨을 내뱉는다.
혹 그가 심한 질책이라도 듣는다면 자칫 자신들까지 위험해질 수도 있다고 생각했었다.
다행히 그의 선견지명으로 확실하게 마왕의 눈도장을 받아두었으니 그런 일은 없을 것이다.
다음 보고는 팔라티나트의 가주, 에슐리가 하게 되었다.
바로 얼마 전까지 아우펜과 함께 종군했던 인물이기는 하지만 결정적인 순간에 투항하여 적들을 완전히 격멸하는 데에 지대한 공을 세운 인물이다.
더해서 이번에 투항한 자들의 중심을 맡고 있기도 하니 그럴 만한 위치도 되었다.
“현재 전하께서 명령만 내리신다면 바로 운용할 수 있는 병력은 만 명이 넘습니다. 이것은 동부의 국경과 각 요충지의 수비 병력을 제외한 것이며 징집 역시 제외한 것입니다. 병사들이 상하기는 했습니다만 실전 경험을 얻었기에 최악은 아니라고 할 수 있을 듯 합니다.”
“…그 실전 경험이 썩 유쾌하지 않군. 내전을 통해 얻은 실전 경험이라니.”
“송구하옵니다. 혹 제가 불쾌하게 해드렸다면 용서를….”
“아니다, 팔라티나트 가주. 그대 덕분에 좌군이 무리 없이 적병을 물리칠 수 있었지. 그대를 탓할 생각은 조금도 없다. 그보다 전투에서 붙잡은 포로들은 어찌 하고 있지?”
“대부분이 저항하고자 하는 의지를 보이지 않고 있습니다. 마왕 전하께서 승리하셨다는 소식이 알려지니 모두가 얼른 역적을 따랐다는 오명을 벗어던지고 다시 마왕 전하의 백성으로 살아가기를 희망하고 있습니다.”
에슐리의 보고에 율리아는 그들에게 조만간 왕의 뜻을 전하겠다며 말을 마쳤다.
이후 몇몇 보고들이 더 이어졌고 거기에 율리아는 적절한 답변을 해주었다.
얼마 후, 마침내 먼저 마왕성에 도착해있던 자들의 보고가 끝이 났다.
율리아는 제 밑의 신하들이 나름 노력했음을 확인하고서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혹 농땡이를 피운 자가 있다면 어찌 엄벌에 쳐해야 할까 생각도 했었는데 확실히 다들 눈치 하나는 좋아서 이런 때에 왕의 눈 밖에 나는 짓을 해서는 안 된다는 걸 알고 있는 듯 했다.
“더 할 말이 없다면, 다음 안건을 논해야겠군. 레블랑 가주.”
마왕의 입에서 갑작스레 ‘레블랑 가주’ 라는 말이 나오자 모두가 화들짝 놀란다.
레블랑 가주는 아우펜의 열렬한 지지자이자 항복을 거부한 자가 아니던가.
그런 자가 이곳에 와있다고 생각하니 다들 꽤나 당황하고 놀란 모양.
또각, 또각-.
하지만 곧 그들의 앞에 모습을 드러낸 이는, 그들이 알던 레블랑 가주가 아니었다.
“세실리 레블랑. 마왕 전하의 명을 받고 자리에 나섭니다.”
아우펜과 그 식솔들은 그 자리에서 모조리 참해졌다.
그리고 그를 따르다가 배신한 자들 역시 그 뒤를 이었다.
오직 레블랑 가주만이 살아남았지만 그는 여전히 율리아를 지지하지 않는다.
때문에 레블랑 가문이 무척이나 난처해질 것이라고 모두가 생각했는데.
아무래도 마왕은 그런 레블랑 가문을 무너트리기보다는 왕가의 충실한 수족으로 만들 생각인 모양이었다.
“그대가 말해보라. 이제부터 나는 무엇을 해야 하겠는가?”
“남은 불씨를 전부 꺼트려야 하지 않을까 합니다.”
“남은 불씨라 한다면 동쪽 끄트머리에 자리를 잡고 있는 역적들의 식솔들을 말하는 건가?”
“그렇습니다. 마왕 전하의 분노가 고작 투항 따위로 잠재워질 수 없다는 걸 알았으니 이제 그들 모두가 죽음을 각오하면서 저항할 것이라 사료됩니다. 그들을 정리하지 않고서는 재건 사업에 들어갈 수가 없을 것입니다.”
자리에 모인 자들은 침묵한 채 둘의 대화에 집중했다.
세실리가 율리아를 따라 종군했음을 알고 있기에, 자연스레 두 여인 사이에 모종의 대화가 오고 갔음을 충분하게 짐작할 수 있었다.
그렇다는 건 지금 저 두 여인이 나누고 있는 대화가 미리 약속이 되었다는 말이다.
자신들이 할 일은 그 대화에 집중하면서 자신들의 왕이 원하는 것을 집어내면 된다.
“허면 어찌 할까. 이번에도 내가 나서서 그 불씨들을 꺼트려야 할까, 레블랑 가주?”
“제 부족한 식견으로나마 한 말씀 올리자면, 그러실 필요는 없을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지?”
그러자 세실리는 잠시 고개를 돌려 누군가를 바라본다.
그곳에는 에슐리와 저번 전투에서 투항한 귀족들이 자리하고 있었다.
잠시 그들을 바라보던 레블랑의 새로운 가주는 다시금 마왕을 향해 말했다.
“이번 기회에 저희들의 충심을 시험해보시는 것이 어떨런지요.”
“충심을 시험한다. 더 자세히 말해보도록. 레블랑 가주.”
“여기 있는 이들 중 몇몇은 송구스럽게도 역적을 따랐거나, 따랐던 자와 관련이 있습니다. 물론 그 죄를 뉘우치고 마왕 전하께 귀의했다고 하지만, 잡음이 일 가능성은 얼마든지 있습니다. 여태껏 충심 하나로 견뎌온 다른 이들에게는 특히 더더욱 불쾌한 일일 테고요.”
세실리의 말에 여태껏 침묵하던 충성파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리 공을 세웠다고 하지만 결국 반역의 무리에 끼어있던 자들이다.
한 번 배신을 한 자는 또 언제든 배신을 할 수 있다 의심하는 게 당연한 일이다.
“그러니까, 기회를 주셨으면 합니다. 마왕 전하.”
세실리의 결연한 의지가 느껴지는 한 마디였다.
물론, 여기까지 오는 내내 율리아와 클라우스에게서 연기 지도를 받은 덕분이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