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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왕가 비선실세-223화 (223/341)

〈 223화 〉 20장 - 나의 왕이시여

“클라우스.”

몇 번이나 이어진 정사 후에 서로를 부둥켜안은 채 침대 위에 스러진 두 남녀.

그러다가 자신을 부르는 나른한 목소리에 슬쩍 품에 안긴 마왕을 쳐다본다.

“왕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과업 중 하나가 무엇인지 아나요?”

이 질문, 분명 이전 회차들에서도 몇 번 받은 적이 있다.

당시에는 그냥 이 여자의 몸을 탐하는 것에 미쳐서 그런 진지한 고민 따위 하지 않았지만.

이제 진심으로 제 품에 안긴 율리아의 모든 것을 사랑하고자 하니 그 이후의 일들.

그리고 남녀의 사랑 이후 맺게 되는 결실에 대한 부분도 생각을 해야만 했다.

“…아마도, 후계자 문제이지 않을까 하는데요.”

여기서 모르겠다, 라고 하면 상당히 눈치가 없는 남자가 되는 거다.

율리아가 하필 이 타이밍에, 또 한 차례의 격렬한 정사 후에 이런 말을 하는 것이라면.

분명 그것과 연관이 있는 답을 생각하고서 질문을 하는 것이니까.

클라우스의 대답에 율리아는 잔잔한 미소를 짓는다.

그리고는 흉터로 가득한 남자의 가슴께를 어루만지면서 입술을 뗀다.

“맞아요. 아무리 뛰어난 군주라고 해도 후계자 문제를 정리해두지 않으면 마지막에 그 평가가 좋을 수가 없죠. 왕들에게 있어서 후계자 문제는 필수이고, 의무이니까요.”

“율리아 말이 맞네요. 아무리 뛰어난 자가 뭔가를 일궈두어도 그 뒤를 이을 자가 그만큼의 역량이 없다면 모조리 말아먹을 테니.”

“후계자 자리는 빠르게 채워져 있는 편이 훨씬 안정적이에요. 그래야 살아있는 동안 자신의 뒤를 이을 아이에게 더 많은 것을 알려주고, 가르치고, 물려줄 수 있으니까.”

그리 말한마왕이 은근한 눈빛으로 남자를 쳐다본다.

클라우스는 그런 율리아를 쳐다보다가 짐짓 모르는 척 말해본다.

“반역도 전부 진압이 되었고 이제 남은 건 동부의 재건입니다. 그 이후가 되면 율리아, 당신은 아마 가장 강력한 마왕이 되어 있을 거예요.”

“그렇겠죠.”

“자연스레 당신 곁에 아주 유용하게 이용할 수 있는 자들이 모여들 겁니다. 그리고 그 중에는 마왕의 그림자 반려가 되는 한이 있더라도 왕의 위세를 얻고 싶은 자들도 있겠죠.”

“당연히 있을 거예요. 그래서요?”

“나보다는 그들을 이용하는 게 동부의 안정에 훨씬 더 이득이 될 것 같은데.”

당연한 말이지만 지금 하는 대화들, 그냥 한 번 던져보는 것들이다.

율리아를 다른 남자에게 내어준다? 어림도 없는 일이다.

그럴 생각이 조금도 없었지만 이렇게 한 번 정도는 말을 해줘야 율리아가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고 또 어떤 방식으로 이용하고자 하는지 예측할 수 있다.

만에 하나 이번 회차에서 또 뭔가 바뀌었을지 모르니 상황 파악은 필수적인 부분이다.

“….”

클라우스의 말이 무슨 뜻인지 알아차린 율리아가 매서운 눈빛을 띤다.

그리고는 잠시 침묵한 채 자신을 안고 있는 남자를 노려보다가 은은한 노기가 서린 얼굴로 천천히 입술을 뗀다.

“그 말, 진심이야? 내가 다른 남자의 품에 안기는 꼴을 보겠다고?”

본인은 최대한 진정하고 진정해서 말을 하려고 한다지만.

전장에서 몇 십 년을 뒹굴고 또 상대방의 기세를 읽는 데에 도가 튼 클라우스다.

지금 율리아가 얼마나 분노했는지, 얼마나 불쾌해 하고 있는지 피부로 다 느껴질 정도다.

대답을 잘 해야 하는 건 둘째 치고 조금이라도 망설이거나 시간을 끌어서는 안 된다.

율리아의 진심을 재차 확인했으니 이제 남은 건 마왕의 화를 풀어주는 일 뿐이다.

“절대 아니죠. 솔직히 말해서, 이렇게 말하는 도중에도 속이 다 뒤틀려요.”

“그런데 왜 그런 말을 해. 당신도 그렇게 생각하면서 대체 왜….”

“왕이란, 백의 가식을 이용하기 위해서 하나의 진심을 버릴 수도 있어야 하니까요.”

“….”

“당장 괜찮은 상대를 물색해서 마왕의 반려 자리에 두고, 그 자를 이용하여 동부 전체를 더더욱 쉽게 통제할 수도 있을 겁니다. 이 부분은 율리아도 인정할 텐데요.”

그러자 율리아는 상당히 화가 난 얼굴을 유지하고 있으면서도 고개를 끄덕였다.

왕실에서 혼인이란 정말 사랑하는 연인과 맺는 백년가약 따위가 아니다.

서로가 서로를 이용하고, 손해를 줄이며 더 큰 이득을 취하기 위해 맺는 계약이다.

당장 혼인을 핑계로 율리아 본인이 꽉 쥐고 흔들 수 있다면 더 많은 피를 보지 않아도 된다.

반역의 무리마저 평정한 이래 마왕의 권력이 그 어느 때보다도 강력해질 건 불 보듯 뻔한 일.

그런 때에 혼인을 맺을 수 있다면 간이고 쓸개고 다 내어줄 테니 말이다.

하지만, 율리아는 그런 식으로 살고 싶지 않았다.

이미 지난 몇 년을 다 썩어 문드러진 속을 간신히 지니고서 살아왔다.

장담하건데 이 남자가 자신을 도와주지 않았다면, 이 상황을 돌파할 기회를 주지 않았다면.

자신은 그 역겨운 남자에 의해 수도 없이 더럽혀지고 말았을 것이다.

후우. 한숨을 뱉으며 미친 듯이 요동치던 마음을 진정시킨 율리아는 다시금 원래의 말투로 돌아와서는 입을 열었다.

“솔직히 말할게요, 클라우스. 난, 당신을 원해요. 신하로서만 원하는 게 아니라 내 남자로서, 마왕의 반려로서 말이죠. 다른 놈들은 생각하고 싶지도 않아요. 하나같이 어리석고, 능력도 없으면서 눈치나 살살 살피고 있을 멍청이들이 전부죠.”

“칭찬 고마워요. 하지만 그 중에서 정말로 괜찮은 마족이 있을 지도 모르잖아요.”

“그럴 수도 있겠죠. 하지만 말이에요, 클라우스.”

율리아가 슬쩍 몸을 움직여서는 자신을 끌어안고 있던 남자와 시선을 똑바로 마주한다.

분노는 다 사라졌지만 여전히 여인의 두 눈은 번쩍이는 빛을 발하고 있었다.

강렬한 뭔가를 한가득 품은 그 모습을 바라보며 클라우스는 그녀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이곳 동부만이 아니라 서부까지 생각하면, 마족으로는 부족해요. 서부 입장에서 봤을 때 나를 믿을 만한 이유 하나는 필요해요. 그래서 더더욱 당신이 필요하고요.”

“…율리아. 그 말은….”

“나는 동부의 재건으로 만족할 생각이 없어요. 나는, 서부까지 도모하고 싶어요.”

그 말을 듣는 순간 클라우스는 여인 율리아를 맞이할 때와는 또 다르게.

심장이 미친 듯이 두근거리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동안 율리아의 눈에 들어오기 위해서, 그리고 자신을 내세우기 위해서.

성장하기에, 눈에 띄기에 가장 좋은 배경으로 삼았던 곳이 바로 전쟁터였다.

그곳에서 백년이 넘는 세월을 보내니 이제는 전쟁이 주는 살벌함에 중독이라도 된 것 같다.

남들처럼 평화롭게 하루를 보내는 것이 이상하고 또 낯설다는 느낌이 많이 들었었다.

그 와중에 들려온 마왕의 말, 서부를 도모한다.

그 말은 즉 동부를 평정하고 서부까지 손에 넣고 말겠다는 왕의 선언이다.

여태까지 자신을 욕보이고 함부로 대하던 자들에게 비수를 꽂으러 갈 수 있다.

자신의 왕이, 자신의 여인이 그걸 결심했고 또 허락할 것이다.

“당신이 필요해요, 클라우스. 방금 내게 말했죠? 다른 자들을 더 유용하게 쓸 수 있다고. 그 말 그대로 돌려줄게요. 지금 내게 그 어떤 잘난 동족보다도 당신이 더 매력적으로 보여요. 이미 세운 전공은 누구와도 비교 불가에 동부의 누구보다 서부에 대해서 잘 알고 있죠. 거기에 당신의 이름만 대도 서부에서 나를 따르겠다고 할 자들이 많을 거예요. 당장 이곳 동부에서조차 당신과 적이었던 내 동족들이 클라우스, 당신에게 무한한 신뢰를 보이고 있죠. 이게 내 대답이에요.”

“율리아.”

“그러니까 이제 그만 해요. 나는 반드시 클라우스, 당신을 반려로 삼을 거예요. 단순히 여인으로서의 고집이 아니에요. 왕으로서의 판단인 거죠.”

더는 이야기 하지 않겠다는 듯 못을 박는 마왕이다.

그에 클라우스는 한숨을 쉬면서 알겠다고 답해주었다.

물론 속으로는 미소를 지은 채 모든 것은 계획대로, 라고 속삭였지만.

“아무튼, 본론으로 돌아가서. 동부의 상황이 정리되면 반드시 후계자에 대한 언급이 나올 거예요. 자연스레 혼인 문제 이야기도 나올 테고. 그때 이렇게 말하고 싶네요. 왕의 반려를 정하는 것에 대해서도, 후계자에 관한 부분에서도 아무 걱정하지 말라고. 이미 내가 다 안배를 해두었으니까 입들 다물고 있으라고 말이에요.”

“무슨 뜻인지 이해했어요. 하지만, 그래도 왕의 자리는 중요한 법이죠. 율리아도 알다시피 혼혈에 대한 인식은 어디를 가도 좋지 않잖아요.”

세상 어디를 가도 똑같은 것이지만, 여기서도 혼혈은 그리 환영을 받지 못 한다.

동부와 서부. 인간과 요정, 수인들과 마족 사이에서 태어난 혼혈들이 특히 그러하다.

신체에 문제를 가지고 태어나지도 않고 심각한 결점을 지니고 태어나지도 않는다.

그저 서로 적대시 하던 자들에게 그 두 세력의 혼혈은 상당히 아니꼽게 보일 뿐이다.

율리아는 그런 상황에서 아주 간단하게 해결책을 제시했었다.

어느 누구도 감히 그딴 말이나 시선을 할 수 없도록 하면 되는 것 아니냐고.

어미가 모든 것 위에 군림하는 마왕이고 아비가 그 왕을 바로 곁에서 보필하는 자라면.

오히려 세상 사람들이 서부와 동부의 화합을 상징하는 존재라고 떠받들 것이라고 말이다.

“당신은 계속 걱정하지만, 나는 반대로 계속 희망만 보이네요. 이미 결심했어요. 여기까지 이렇게 온 거, 역사에 아로새겨질 마왕이 되겠다고. 과분한 이들 곁에서 그렇게나 많은 기대를 받았으니 거기에 부응하고 싶어요. 그러니까, 이제 당신도 걱정은 그만 해요.”

마왕의 명령, 여인의 속삭임에 클라우스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것으로 율리아라는 가장 날카로운 칼날의 연마는 모두 끝이 났다.

남은 건 그 칼날이 휘둘러질 최고의 전장을 마련해주는 것이다.

동부는 정리되었고 이제 남은 건 서부와의 격차를 크게 벌여야 할 때다.

그에 대한 준비도 이미 이전부터 조금씩 행하고 있던 클라우스였다.

“그런 의미에서, 클라우스.”

갑자기 율리아가 남자의 품에서 스르륵 벗어난다.

그러더니 클라우스의 가슴을 짚고서는 슬그머니 그의 몸 위에 올라탄다.

왜 그러냐는 질문 따위를 할 필요도 없었다.

여인의 얼굴에 맺혀있는 위험하기 짝이 없는 아찔한 미소나.

보기 좋게 붉은 빛을 띠는 홍조, 그리고 적당하게 달아오른 여인의 몸까지.

눈앞의 이 마왕이 무엇을 원하는지, 지금 자신과 뭘 하고 싶어 하는지.

여인이 이렇게까지 들어오는데 여기서 ‘지금 뭐하는 건가요?’ 라고 묻는다면 단순히 분위기만 깨지는 것으로는 끝나지 않을 거다.

율리아가 클라우스 앞에서만은 그 사랑을 독차지하고 싶어 하는 여인이라고 하지만.

가끔은 정말 정색을 하면서 화를 내기도 하는, 어쩔 수 없는 마왕이기도 했으니까.

“나, 후계자가 필요해요.”

“서부를 다 도모한 후에 계획을 잡아둔 줄 알았는데. 아닌 모양이군요.”

“그게 안전할 수도 있겠지만…. 원래 어딘가로 떠나기 전에 후계자가 안전한 곳에서 만일의 사태를 대비해야 하는 법이니까요?”

맞는 말이다, 틀린 구석 하나도 없이 정말 확실하게 맞는 말.

해서 클라우스는, 살금살금 몸을 움직여 마침내 제 은밀한 곳을 남성이 있는 곳까지 옮겨온 이 위험한 마왕님을 웃으면서 맞이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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