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21화 〉 20장 - 나의 왕이시여
아우펜을 참하고 그의 성을 완벽하게 손에 넣은 후.
율리아가 가장 먼저 한 일은 아우펜이 몰래 준비하고 있던 자신의 왕좌에 앉는 것이었다.
무척이나 오만한 자세로 의자에 몸을 기댄 그녀는 킥, 하고 미소를 지었다.
“우리 숙부, 그래도 본인 챙기는 일은 참 철저하단 말이에요. 마왕성에 있는 왕좌가 쿠션감이 좀 많이 떨어지는 건 또 어떻게 알고 이런 좋은 왕좌를 준비했을까?”
“주제에 나름대로 준비는 한 모양이군요. 그래서, 편한가요?”
클라우스의 질문에 율리아는 그렇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후 자리에서 일어난 그녀는 자신을 기다리던 클라우스를 향해 말했다.
“이 역겨운 것 당장 치워버리라고 전해요. 녹이든 때려 부수든 마음대로 하라고.”
“저 왕좌 같지도 않은 의자만 그리 하면 되겠습니까?”
“아뇨. 당연히 안 되죠. 이 성 전체를, 추악하고 구린내가 진동하는 이곳 전부를 완전히 무너트리고 땅을 뒤엎고 소금까지 뿌려 황무지로 만들어버려야죠.”
반역을 꾸민 자의 말로를 전 동부에 똑똑히 보여준다.
살아서는 물론 죽어서도 그 흔적조차 남기지 못 할 것이라고.
마왕의 권위와 분노를 아주 강렬하게 남기겠다고 율리아는 생각했다.
“아, 그리고 듣자하니 오토라는 마족. 나름 괜찮은 자더군요. 추잡한 것들이 제 주인을 배신하고 성문을 열 때도 거기에 합류하지 않고 최소한 자신의 도리는 다 했다고 하던데.”
그 말에 클라우스는 속으로 미소를 지었다.
역시 오토 헤들러는 눈치 빠르게 자신이 나서야 할 때와 나서지 말아야 할 때를 구분했다.
전투에서는 모호한 입장을 취하며 적의 함정이 작동하지 못 하도록 했고.
이곳 성에서는 철저한 충신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해서 주군을 저버리는 배신자도 아니었다.
클라우스가 보낸 서신대로, 나름 괜찮게 처신을 한 것이었다.
“허면 오토는 기용하는 겁니까?”
“일단 두고 봐야죠. 혹 뒤가 구린 게 있다면 어찌 될 지는 그 자가 더 잘 알 테니.”
“그러면 그렇게 알려두겠습니다. 그리고 역적의 남은 식솔들은 다 어찌 하렵니까?”
아우펜은 율리아의 숙부, 즉 그의 식솔들은 그녀에게 있어 친척이 된다.
때문에 그에 대한 처분을 물은 것인데 율리아는 클라우스를 물끄러미 쳐다보다가 이내 그의 품에 안겨 들어서는 속삭이듯 입을 열었다.
“당신 생각은 어떤가요?”
“일단은 율리아의 친척, 마왕의 친척이니까요. 죽이지 않고 서민으로 강등하거나 그도 모자란다면 노예로 부리는 방법도 있습니다.”
“즉, 죽이지 말고 살리자. 이런 말이네요.”
잠시 고민하던 율리아는 이내 천천히 고개를 내저었다.
그 행동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잘 알고 있는 클라우스는 ‘진심입니까?’ 라고 재차 그녀의 마음을 확인하고자 했다.
“후환을 남기고 싶지는 않네요. 끊어내야 할 건 얼른 끊어내는 것이 좋지 않겠어요?”
담담한 목소리, 입가에 지은 미소, 그러면서 말하는 누군가의 최후.
어찌 보면 잔혹하다고 할 수도 있으나 지금의 상황에서는 아주 당연한 것이었다.
말 한 마디로 수십이 훨씬 넘는 자들이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다고 해도.
권력의 정점에 선 자는 그런 부분에 미동도 하지 않아야만 살아남을 수 있다.
“율리아. 하나만 물어봐도 될까요.”
클라우스는 잠시 침묵을 지키다가 가장 궁금했던 것을 묻기로 했다.
여태까지 자신이 갖은 노력을 기울여도 변하지 않던 무언가가 갑자기 뒤틀렸다.
아무리 생각하고 또 생각해봐도 자신이 뭔가 실수를 했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전투도, 그리고 아우펜의 마지막도 모두 똑같이 진행되었는데 왜 갑자기 이번 회차에서 일이 이렇게 크게 달라진 것일까, 라고 고민하던 클라우스는 한 가지 결론에 도달했다.
이번 변화는 온전히 율리아가 이끌어낸 것이라는 점이다.
자신이 개입하여 그녀의 마음을 움직이려고 하지도 않았고, 본인이 뭔가를 바꾸려고 하지도 않았다, 오직 율리아 스스로가 생각하고 결심하여 일어난 일이라는 것이다.
“네, 말하세요. 클라우스.”
“왜 레블랑의 가주를 살려둔 거죠? 세실리가 마음까지 먹고 그를 죽여 충심을 증명하려고 했는데요. 만약 그대로 두었다면 세실리의 충심은 어느 누구도 의심할 수 없었을 겁니다.”
“…그 부분이 궁금했던 모양이군요.”
이런 질문이 나올 줄 알고 있었다는 반응의 율리아.
아마도 살려두어서 쓸 구석이라고는 한 곳도 없는 자를, 심지어 자칫 후환이 될 수도 있는 적을 왜 살려두냐는 뜻으로 받아들인 것인지 그녀는 멋쩍은 미소를 지었다.
“조금. 아니… 많이 불편했어요. 그 순간이.”
“세실리가 자신의 부친을 처단하는 모습이 말입니까? 물론 천륜을 저버린 짓이기는 하지만 그것만이 레블랑 가문이 살아남을 수 있는 기회이자 명분을 쥐는 것이었습니다.”
“알아요. 나도 알고 있어요. 그래서 그냥 두고 보려고 했는데… 그래서 더더욱 무시할 수가 없었어요. 내 신하가 되겠다는 녀석이 제 아버지를 죽이는 꼴을 영 보고 싶지가 않더라고요. 죽여도 내가 죽여야지, 그 아이에게 떠넘기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았어요.”
“약해지면 안 됩니다, 율리아. 당신은 이곳 동부의 단 하나뿐인 왕이에요.”
“흔들리지 않았어요. 다만 내 사람들을 걱정할 뿐이죠. 그 자리에서 세실리가 제 아비를 죽였다면 더는 어느 누구도 입 바깥으로 세실리와 새로운 레블랑 가문 앞에서 충심을 의심하는 말은 하지 못 하겠죠. 하지만 그 녀석의 속까지 괜찮을지, 확신할 수가 없네요.”
그 말 직후, 율리아는 크게 숨을 들이마셨다.
여기까지 오는 데에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해준 인물이다.
다 무너져가던 자신을 붙잡고 이렇게 굳건히 서게 만들어준 남자다.
그 어떤 왕도 신하에게 함부로 속내를 보이지 않는다고 하지만.
클라우스는 단순한 신하가 아니다, 자신에게 모든 것을 건 사람이다.
‘그리고….’
그리고, 왕이 마음에 품은 단 한 명의 연인이기도 하다.
“클라우스. 나는 왕이 될 거예요. 진정한 의미의 ‘왕’ 말이에요. 내 사람들을 챙기고, 나와 내 사람들을 위협하는 적들을 그 살점 한 조각까지 지워버릴 거예요. 그러기 위해서는 또 반대로 누군가를 용서하고 받아들이고, 설사 그렇게 하지 못 한다고 해도 어딘가로 치워버려 다시는 보지 않는 선에서 끝내야 하기도 하죠.”
“….”
“걱정 마요. 이렇게 마음을 써주는 건 얼마 되지 않을 테니까. 그리고 레블랑 가주에 대해서 잘 알고 있기에 멈춰 세운 거예요. 뭐 대단하게 반역 좀 일으켰다가 죽어버린 숙부에 대한 충심은 여전할 테지만 그렇다고 해서 원수를 갚겠다고 할 위인은 아니거든요. 그냥 그 상태로 어디 한적한 곳에 처박혀서 조용히 살다가 조용히 죽을 남자에요. 전 레블랑 가주는.”
율리아의 대답을 들은 클라우스는 그건 맞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전장에서 레블랑 가주를 몇 번 마주한 적이 있기에 그의 성정이 모질거나 악하지 않다는 건 클라우스도 잘 알고 있는 부분이었다.
그래서 설득하려고 했고 그래서 율리아의 편으로 들이려고 했던 것이다.
결국 그러지 못 했고 끝내 적으로서 완전히 지워버리는 게 낫다고 판단했지만.
잠시 생각하던 클라우스는 아무래도 좋다는 듯 어깨를 으쓱였다.
예상하지 못 한 일이 벌어진 건 조금 찝찝하지만 오히려 이런 부분이 흥미를 일으킨다.
원래 고이고 고인 물일수록 변화를 내심 바란다고 했던가?
솔직히 말해서 이제는 얼마나 흘렀는지도 모를 시간 속에서 지겹게 반복되기만 하는 사건 사고들에 진절머리가 날 지경이었다.
더해서, 이런 변화는 빠르게 파악하고 인지해두는 편이 좋다.
그래야 만에 하나 일이 꼬여서 또 다시 회차를 반복하게 되는 경우.
참조하는 아주 중요하고 소중한 경험이 될 테니까 말이다.
“그런데요. 율리아. 그렇게 말하면 이번에 싹 다 죽여 버린 그 귀족들은 어떻게 설명할 거죠? 이전 전투에서 항복한 자들은 그대로 기용하고 역적의 수괴를 잡아 죽이는 데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자들은 반대로 모조리 죽었잖습니까.”
“아뇨. 이건 경우가 다르죠. 그들은 아직 승기가 팽팽할 때 우리 쪽으로 와주었고 덕분에 아군이 대승을 거둘 수 있었어요. 비록 역적들의 편에 섰던 것은 잘못이라지만 충분히 넘어가줄 수 있다고 할 수 있었잖아요?”
“하지만 그들은 다르다는 겁니까?”
“다르죠. 패배가 확실해지니 살 길을 찾고자 제 주인을 팔아먹은 놈들이에요. 그래도 숙부라는 남자는 그것들을 믿었을 텐데 그걸 아주 시원하게 걷어 차버린 놈들. 내게는 그 남자만큼 그 놈들도 역겹네요. 놈들을 살려둬서 이득이 된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어요.”
율리아의 말을 들으면서 클라우스는 미소를 지었다.
따로 그들에 대해서는 이런저런 평가를 내려준 적이 없다.
이제부터는 마왕 스스로 상대방을 판단하여 그를 이용할 것인지 버릴 것인지 정해야 한다.
자신이 되고자 하는 것은 꼭두각시 마왕을 조종하는, 숨어있는 권력의 정점이 아니다.
어느 누구도 감히 똑바로 쳐다볼 수 없는 강력한 마왕의 뒤에서.
그녀와 함께 새롭게 쓰이고 만들어져 갈 세상의 2인자가 되는 것이다.
그러다가 가끔 율리아에게 속삭여서 원하는 바를 이룰 수 있다면 금상첨화고.
“흐음. 그러면 남은 자들이 더더욱 문제겠네요.”
“남은 자들이라 하면, 이번에 모조리 참형을 당한 어리석은 자들의 식솔들을 말하는 건가요?”
“항복을 했는데도 죄다 그 끝이 죽음이었으니 이제는 무조건 항전하려 하지 않겠습니까?”
“그렇겠죠. 나 같아도 그럴 거예요. 이래도 죽고 저래도 죽는다면 저항해서, 그래서 최소한 상처 하나는 입혀두고 죽으려고 하겠죠.”
“말하는 걸 듣고 있자니 이미 거기까지 다 생각하고서 일을 진행한 것 같은데요. 마왕님.”
클라우스의 말에 율리아는 미소를 짓더니 슬그머니 그의 곁으로 다가왔다.
그리고는 남자의 귓가에 제 붉은 입술을 가져가서는 아주 달콤하게 속삭인다.
“여기서 말고, 다른 곳에서 이야기할까요?”
“마왕성에 돌아가면 침실로 부른다고 한 걸로 기억하는데요.”
“원래 그러려고 했는데…. 생각해보니 여기서 하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아. 내 빌어먹을 숙부가 나를 겁탈하려고 했다는 거, 알고 있지? 클라우스.”
“대충 알고 있었죠. 제 조카를 탐하는 자라니. 웃음 밖에 안 나오더군요.”
“숨이 끊어지는 마지막 순간까지 아주 비참하게 죽은 남자라지만, 이렇게 끝을 내기에는 영 마음이 안 풀려. 정말 영혼이라는 게 있다면, 원혼이라는 게 있다면. 아마 한동안은 내 곁에 붙어있지 않을까?”
그럴 수도 있겠다는 뜻으로 고개를 끄덕인다.
클라우스의 반응에 율리아는 더더욱 매혹적인 미소를 짓더니 입술을 열어 클라우스의 귀를 살짝 깨물기 시작했다.
“정말로 그 남자의 영혼이 아직 이곳을 떠돌고 있다면. 그러면 그 원혼에게 보여줘야지. 네가 그렇게나 원하던 여인은, 다른 남자의 품에 안겨서 행복하게 잘만 살고 있다고. 너는 죽어도 감히 건드리지도 못 한 이 몸을, 이 남자는 아주 마음껏 탐하고 있다고. 심지어 그런 모습을 제 침실에서 보는 거야. 어때? 이 정도면 아주 재미난 복수이지 않을까 싶어.”
“…잘은 모르겠지만 일단 확 이끌리는 제안이긴 하네요.”
클라우스가 그리 대답하자 ‘그러면 승자의 여유를 누리러 가볼까.’ 하고 그의 품에 안기며 얼른 자신을 안고서 침실로 향하자는 율리아였다.
이미 대강의 정리는 다 끝마쳤고, 밤이 깊은지라 병사들도 휴식을 취해야 한다.
아직 해야 할 일이 산더미이지만 오늘 밤을 새서 일한다고 끝이 나는 건 아니다.
그렇다면 그냥 차라리 오늘 밤은 마음 편히 즐길 걸 즐기는 게 낫겠다고.
클라우스도, 그리고 율리아도 그리 생각하면서 미소를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