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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왕가 비선실세-220화 (220/341)

〈 220화 〉 20장 - 나의 왕이시여

한 번 기울어진 전투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성문을 열었다고 하는 무리들은 애당초 마왕군이 들어오자마자 휘하 병사들과 함께 투항했고 남은 것은 레블랑 가주와 몇 안 남은 충성파들이 전부였다.

결국 내성까지 순식간에 밀고 들어온 마왕군에 의해 대부분이 전사하거나 포로로 붙잡히는 것으로 모든 일이 거의 마무리되어 가고 있었다.

다만 오토 헤들러와 그 휘하 병사들은 여전히 저항을 계속하고 있었는데 마왕군이 먼저 공격하지 않으니 그쪽도 더는 반격하지 않으면서 일종의 제스처를 취하고 있었다.

안전을 보장한다면 더는 싸우지 않고 항복하겠다고 말이다.

챙강!-

그 속에서 세실리는 여전히 제 아비인 레블랑 가주와 치열한 접전을 벌이고 있었다.

전투 마법을 사용한다면 조금 더 확실하게 승기를 점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아에 이번 기회에 자신의 근접 전투 능력이 어디까지 있는지 시험하고자 했다.

그리고 레블랑 가주는 자신의 딸이 이 정도로 성장했을 줄은 몰랐다며 진심으로 감탄하고 있는 중이었다.

와아아아!!-

그러다가 내성 깊숙한 곳에서 함성 소리가 들려왔다.

뒤를 이어서 역적의 수괴가 죽었다는 외침까지 들리니 레블랑 가주는 두 눈을 질끈 감았다.

마침내 모든 것이 끝났음을 자각한 것이었다.

그 흔들림은 당연하게도 몸에 확실하게 나타났다.

때를 놓치지 않고 세실리가 크게 검을 한 번 휘두르니 피가 튀면서 그대로 레블랑 가주가 검을 놓치고는 두어 발자국 물러나다가 그대로 허물어진다.

“…다 끝났구나.”

“네. 다 끝났어요.”

“나를 죽인다면, 최소한 레블랑 가문 전체가 멸문되는 일은 막을 수 있는 것이냐.”

“확실한 건 없어요. 다만, 자비를 구할 수 있는 기회 정도는 얻을 것 같네요.”

세실리의 대답에 레블랑 가주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억지가 아니다, 자신이라고 해도 이 정도면 기회를 줄 만하다고 생각할 것이다.

가주로서 그릇된 자를 주인이라고 따랐다가 이 꼴이 났으니 어찌 살기를 바랄까.

오히려 이런 상황에서도 가문을 유지할 수 있는 길이 있다면 그게 천운이다.

자신의 목숨을 내어주는 한이 있더라도 레블랑의 이름은 유지되었으면 한다.

“세실리. 미안하구나. 이런 일을 네게 맡겨서.”

“…그렇게 말씀하셔도, 이미 늦었어요. 늦어도 너무 늦었다고요.”

바들바들 떨리던 손을 애써 갈무리하며 세실리는 강하게 검을 쥐었다.

마법으로 해도 되는 일이지만, 이렇게 제 손으로 직접 끝을 내고 싶은 생각 따위는 없었지만.

확실하게 해야만 율리아의 앞에서 조금이나마 고개를 들 수 있다.

아버지를 제물로 바쳐 가문을 구하겠다고 나선 괴물 같은 자신이니, 그래야만 한다.

고개를 돌릴까, 두 눈을 감을까 고민도 해보았지만 그건 상대방에 대한 무례라고 했다.

네 손으로 누군가를 해할 때, 도망치지도 피하지도 말고 똑바로 바라봐라.

네가 누구를 죽이는지, 네 손에 의해 죽는 자가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 기억해라.

그리고 너는, 그렇게 비참하게 죽지 않을 궁리를 하면서 살아라.

언젠가 바닥에 널브러져 학학거리던 자신을 향해 경고인지 조언인지 모를 말을 해주던 클라우스를 떠올리면서 막 세실리가 검을 내리긋는 순간이었다.

“거기까지.”

쩌엉!-

세실리는 자신을 향해 똑바로 날아드는 마력을 느끼고는 급히 몸을 돌렸다.

동시에 그녀가 들고 있던 검이 그대로 산산조각이 나더니 유리 파편마냥 바닥으로 부스러져 떨어져 내리기 시작했다.

갑작스레 벌어진 일에 세실리는 물론이고 레블랑 가주까지 당황한다.

“그만하면 되었어. 세실리 레블랑.”

무척이나 오만한 목소리로 그렇게 속삭이며 옆으로 다가온 여인.

가장 먼저 보이는 건 이 끔찍한 전장 속에서도 돋보이는 아름다운 외모.

그 뒤를 이어 보통의 인물은 절대 지닐 수 없는 고귀함이 주변에 일렁인다.

“저, 전하.”

“물러나렴.”

율리아의 명령에 세실리는 잠시 우물쭈물하다가 급히 뒤로 물러섰다.

설마 율리아가 자신을 말릴 것이라고는 미처 생각하지 못 한 듯 하다.

그리고 그건 율리아의 뒤에 서있던 클라우스 역시 마찬가지였다.

‘…뭐지? 여태까지 이런 적은 한 번도 없었는데?’

레블랑 가문은 동부에서 꽤나 알아주는 가문 중 하나다.

해서 클라우스 본인도 이전 회차들에서 그를 아군 쪽으로 끌어들이고자 몇 번 노력을 했었다.

팔라티나트처럼 대륙 전쟁 때부터 안면을 터두고 나중에 또 은근히 이쪽으로 오라고 해보기도 했지만 결국 모든 방법이 실패했다.

자신이 관여해도 더는 진척이 없자 결국 레블랑 가주를 설득하는 것은 더 불가능하다고 판단한 후 그 자리를 세실리가 완벽하게 이어받도록 처리하는 것으로 결정을 지었었다.

절대 바꿀 수 없는 지점, 레블랑 가주의 죽음. 여태까지 클라우스 자신은 그렇게 알고 있었다.

그런데, 그게 이번 회차에서 처음 깨졌다.

자신이 무슨 수를 써도 절대 바뀌지 않던 그 지점을 율리아 스스로 뒤틀어버린 것이다.

‘뭐야. 도대체 어디서 뭐가 어떻게 바뀐 거지? 큰 흐름은 이전 회차들과 완벽하게 동일한 흐름으로 진행되었는데? 뒤틀린 것도 없고 바뀐 것도 없다. 그런데 어째서….’

클라우스가 한창 혼돈의 도가니에 풍덩 빠진 사이.

율리아는 천천히 걸음을 옮겨서 자리에 주저앉은 채로 자신을 올려다보고 있는 레블랑 가주 바로 앞까지 다다랐다.

그의 바로 옆에 검이 떨어져 있음에도 전혀 개의치 않는 모습.

그걸 보면서 레블랑 가주는 눈앞의 이 마왕이 예전과는 달라도 완벽하게 달라진 것임을 바로 파악할 수 있었다.

“꼴이 말이 아니군. 레블랑 가주.”

“….”

“내 숙부, 역적의 수괴, 그대의 주군이라는 자는 죽었어. 비참하고, 더럽게.”

“… ….”

“당신은 어떻지? 저기 성문 근처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을 자들처럼 이제라도 목숨을 구걸하겠나? 그게 아니면 싸우다가 죽어버린 역적들처럼 명예이니 뭐니 떠들면서 죽겠나.”

“패배한 자가 무슨 말을 더 하겠습니까. 뜻대로 하십쇼.”

“뜻대로 하라. 그 말에 정말 후회는 없겠지.”

그리 중얼거린 율리아는 잠깐 고민 좀 해보겠다는 듯 턱을 만지작거린다.

이후 결심했다는 듯 가볍게 손가락을 튕긴 후 뒤에 서있던 세실리를 향해 말한다.

“세실리 레블랑.”

“네, 전하!”

“동부의 모든 것 위에 군림하는 마왕으로서 명하마. 이제부터 레블랑 가문의 가주는, 너다.”

“제가… 말입니까?”

“그래. 그리고 전대 레블랑 가주에 대한 처분은….”

죽일까, 살릴까. 클라우스는 조금 긴장한 상태로 율리아를 바라보았다.

자신조차 뒤트는 것이 불가능한 것을 설마 저 여인이, 마왕이 흔들어버릴 수 있다는 것인가.

“일단 보류하겠다. 단단히 묶어서 마왕성까지 압송하도록.”

“아, 알겠습니다! 마왕 전하!”

세실리에게 레블랑의 가주를 맡으라고 말한 것은, 일단 레블랑을 완전히 무너트리지 않겠다는 속뜻이 들어가 있는 처우였다.

그리고 전대 레블랑 가주를 이 자리에서 바로 죽이지 않는다는 건, 어쩌면 그에게 정말 살길이 열릴 수도 있음을 의미하기에 세실리는 기쁜 낯을 감추지 못 했다.

“….”

그런 와중에 클라우스는 여전히 계속되는 혼란에 머리가 지끈거릴 정도였다.

여태껏 단 한 번도 레블랑 가주가 이 자리에서 죽음을 피한 적이 없었다.

세실리가 망설인 적이야 있었다고 해도 결국 죽음을 맞이하는 건 변하지 않았다.

그리고 율리아도 따로 개입하지 않고 세실리가 직접 잘라내는 것을 바라만 보고 있었다.

레블랑 가주를 설득할 수 없다는 걸 알고 있었던 클라우스 역시 따로 그녀들을 말리지 않았고.

헌데 상황이 갑자기 이렇게 되니, 그것도 처음 보는 일을 겪게 되니 무척 당황스럽다.

계산을 벗어나도 한참 벗어나는 일이고 율리아의 의도를 파악할 수 없으니 더욱 답답하다.

아무래도 이곳의 일이 다 마무리된다면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레블랑 가주에 대한 판단을 보류한 것인지 한 번 물어봐야 할 듯 싶다.

“클라우스.”

“네, 전하.”

“성문을 연 자들은 아직도 그 근처에서 대기 중이겠지?”

“그렇습니다. 주변에 병사들을 배치하여 따로 무슨 이상한 짓을 하지 못 하도록 조치를 해두었습니다.”

“우리 군이 안까지 들어왔음에도 항복하지 않고 계속 저항하던 병사들은 죽어버린 역적 놈들 휘하의 병사들인가?”

“대부분이 그렇지만 일부는 아닙니다. 오토 헤들러라는 마족 휘하의 병사들입니다.”

“조금 전까지 계속 교전 중이라고 했지. 혹 아직도 저항 중인가?”

“역적 아우펜이 죽었다는 이야기를 전해 듣자 더는 싸울 이유가 없다며 무기를 버렸습니다.”

직접 주도하여 배신을 하고 성문을 연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해서 전부 죽을 각오로 끝까지 처절하게 싸운 것도 아니다.

오토는 클라우스가 귀띔해준 대로 상당히 모호한 모습을 보였고, 그 부분이 율리아의 흥미를 동하게 만든 것이 확실했다.

율리아는 오토를 성문으로 데리고 오라는 명령을 내린 후 그곳으로 먼저 향했다.

거기에는 항복을 청하며 성문을 열었다고 하는 귀족들이 한 자리에 모여 있는 중이었다.

혹시나 아우펜이 나타나면 어쩌나 싶은 표정의 그들은 율리아가 나타나자 안도의 한숨을 내뱉으며 바로 자리에 무릎을 꿇고는 무슨 충성스러운 자들 마냥 떠들기 시작했다.

“마왕 전하! 승전을 축하드리나이다!”

“반란의 수괴를 처단하셨다 들었습니다. 진심으로 감축 드립니다!”

별 다른 피해 없이 아우펜과 그 지지자들을 제거했다.

자칫 장기전이 될 수도 있었던 상황에서 지금의 승리를 가능하게 한 인물들이 누구인가.

바로 자신들이다, 성문을 열고 마왕을 맞이한 바로 자신들이 1등 공신인 것이다!

만약 성문이 열리지 않고 싸움이 장기전으로 치달았다면 피해는 만만치 않았을 것이다.

이것은 정복도 아니고 방어도 아닌, 그저 내전일 뿐이다.

장기전으로 흘러갔다면 동부의 어느 누구에게도 이득이 될 수 없는 싸움이었다.

그 싸움을 빨리 끝내게 해준 이들이 바로 자신들이니 이제 곧 율리아에게 고맙다는 말을 들을 것이라고, 설사 공은 인정하지 않는다고 해도 용서는 받을 수 있다는 게 그들의 생각이었다.

“그대들이구나. 성문을 열고 나를 맞이한 것이.”

마침 율리아가 인자한 미소를 지은 채 다가오니 그들의 기대는 더욱 커졌다.

처음에는 그냥 용서만 받을 수 있다면 충분하다고 여겼는데.

생각해보니 모두가 놓친 아우펜을 자신들이 거의 잡아다 바친 것과 다르지 않다.

거기까지 닿으니 조금은 더 커다란 것을 기대해도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그래도 꼴에 주군이라고 부르면서 뒤를 쫓던 자들이 제 주인을 팔아먹은 놈들이구나.”

하지만 율리아의 얼굴에서 미소가 사라지고, 입에서 그 말이 나오는 순간.

그들은 뭔가 잘못되어도 아주 단단히 잘못 되었음을 깨달았다.

“신하로서 주군에 대한 가장 기본적인 것조차 저버린 너희들을 내가 왜 품어야 할까. 역겹기는 내 손에 죽은 숙부보다 더 한 놈들이구나. 나에게 대항해 싸우던 자들보다도 못 난 놈들이구나. 너희에게 돌아가는 동부의 모든 것이 다 아까울 지경이다.”

“에, 예…?”

“전원 참하라.”

왕이 손짓을 하니 대기하고 있던 근위병들이 그들을 모조리 포박하기 시작한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놀란 자들이 저항하려고 하니 그 위로 무자비한 폭력이 쏟아진다.

“저, 전하! 마왕 전하!”

“왜 이러십니까! 저, 저희는 역적을 전하의 앞에 바쳤습니다!”

“역겨운 배신자들의 말은 듣고 싶지 않다. 귀가 썩어버릴 것 같아. 입부터 막아라.”

“이럴 수는 없습니다! 경우에 맞지 않습니다! 항복한 자를 이리 대하시다니!!”

“협곡에서 배신한 자들은 받아주시지 않으셨습니까! 그런데 어찌하여… 으으읍!!”

순식간에 벌어진 일에 성문을 연 자들이 모두 아연실색하여 율리아를 바라본다.

그러자 동부의 마왕은 미소를 짓더니, 곧 죽을 자들에게 베푸는 마지막 자비라고 자신의 마음을 솔직하게 전달했다.

“그때는 그들이 필요했던 것이고, 지금은 딱히 너희가 필요하지 않아. 그뿐이다. 너무 억울해 하지 마라. 그냥 변덕이 조금 심한 왕의 눈에 거슬렸다고 생각하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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