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19화 〉 20장 - 나의 왕이시여
성문이 열렸다는 소식은 아우펜에게도 금방 전해졌다.
적이 공성전을 시작했다는 보고는 전해진 것이 단 하나도 없었다.
그렇다는 건 오직 하나의 가능성만을 의미한다.
문은 바깥에서 연 것이 아니라, 안의 누군가가 열어준 것이라는 점.
“역시! 이럴 줄 알았다! 이 역겨운 배신자 놈들!”
아우펜의 머릿속으로 자신 곁에 남아있던 자들의 얼굴이 떠오른다.
이중 과연 어떤 놈이 역겨운 배신자일까, 어떤 놈이 저 혼자 살겠다고 주인을 팔았을까.
순차적으로 얼굴을 떠올리던 아우펜의 생각 속에 레블랑 가주를 위시한 충성파들의 모습까지 떠오르기 시작했다.
한 번 그 의심이 번지기 시작하니 감당조차 되지 않을 만큼 사방으로 번져간다.
믿을 수 없다, 아무도 믿을 수 없다, 전부 다 수상하게 느껴질 뿐이다.
피가 나도록 입술을 깨물며 아우펜은 그들을 저주했다.
능력도 없는 것들이 자꾸 자신의 앞을 가로막아 일이 이렇게 되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절망적인 상황에서 벗어나고 싶다는 생각이 자기 합리화와 책임 회피로 번져간다.
나는 아무런 잘못이 없다, 밑의 신하들이 하나같이 쓸모가 없어서, 운이 없어서.
그리고 신이 장난을 쳐러 이리 된 것이라고 욕설을 퍼부으면서.
또 이곳에서 벗어나기 위해 막 문을 열려는 순간이었다.
퍼억!!-
둔중한 충격이 전해지면서 앞이 새하얗게 변한다.
가슴에 구멍이라도 뚫린 듯 엄청난 고통이 전해지고, 숨을 쉬기가 어려워진다.
“커헉! 컥, 콜록! 콜록!”
바동거리며 턱 막혀오는 숨을 간신히 몰아쉬어본다.
적들이 내성까지 진격해오고 있다고는 했지만 아직 전투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그렇다면 충분히 빠져나갈 시간이 있다는 뜻인데, 갑자기 이게 무슨 일일까.
“숙부.”
순간 무척이나 나긋한 여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우펜은 두 눈을 홉뜨더니 급히 고개를 돌려 앞을 쳐다보았다.
거기에는 제 꿈에서 몇 번이고 범했던 자신의 아름다운 조카, 율리아가 자리하고 있었다.
“네가 어떻게.”
“아무래도 병사들과 함께 움직이면 숙부가 도망칠 듯 하여, 이렇게 조용히 찾아왔습니다.”
그렇게 말하는 율리아의 뒤로 한 남자가 문을 닫고서 굳게 잠그는 모습이 보인다.
저 남자가 누구인지 단번에 파악한 아우펜은 슬그머니 주변을 둘러보았다.
보아하니 저 둘만 무슨 수를 써서 내성의 깊숙한 곳까지 침투한 모양이다.
아군도 보이지 않고 적군도 보이지 않는다, 이 방 안에는 오직 셋뿐이다.
“또 도망갈 곳이라도 찾고 있나요? 숙부?”
귓가에 들려오는 여인의 목소리가 달콤하기 그지없다.
저런 것이 마왕이라니, 남자를 즐겁게 해주는 여인으로 제격인 녀석인데.
주체할 수 없는 욕망이 슬그머니 고개를 들려고 했으나 상황을 인지하지 못 할 만큼 어리석은 이는 아니다.
아우펜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뒤에 던져두었던 검을 집어 들었다.
“나를 직접 보기 위해 이렇게까지 찾아오다니, 고맙다고 해두마. 율리아.”
“별 거 아니었답니다.”
“보아하니 네 뒤에 있는 저 남자가 ‘그 남자’ 인 모양인데. 몸이라도 팔아서 나를 죽여 달라고 부탁이라도 했느냐? 그래서 이렇게 둘이 손을 잡고 찾아온 것이고?”
그러자 문을 막고 서있던 남자의 눈썹이 꿈틀, 하고 치솟는다.
아마 아우펜은 몰랐을 테지만, 그리고 율리아도 눈치를 채지 못 했을 테지만.
그 남자, 클라우스가 손 한 번만 움직였다면 그대로 아우펜의 가슴팍에 구멍이 났을 것이다.
클라우스가 참은 이유는 단 하나, 이 일은 오직 율리아만이 마무리 지어야 하는 것이기에.
왕으로서, 왕이기에, 그래서 누구의 손도 빌리지 않고 직접 해야 하는 일이기에.
“안타깝지만 틀렸어요, 숙부. 숙부는 내 손에 죽을 거예요. 저 남자는 그냥 단순한 길잡이였죠. 무섭지 않나요? 그 와중에 내성의 구조와 길목까지 전부 파악했다고 하더라고요.”
“….”
“아, 그리고 몸을 판 건 아니지만, 몸을 섞기는 했죠.”
“뭐라고?”
“숙부가 그렇게나 탐내던 여인은, 다른 남자의 여인이 되었다는 거랍니다.”
마치 아우펜을 놀리듯 율리아가 은근한 어조로 중얼거린다.
동시에 옆에 서있던 클라우스에게 슬며시 몸까지 기대니 그 모습이 상당히 야릇하다.
그 모습을 본 순간 아우펜의 두 눈에 불꽃이 튀겼다.
의심 많고 질투도 많은 그 성정에 다른 남자가, 그것도 인간이 율리아를 안았다는 말을 들으니 여간 분노한 것이 아닌 모양이다.
“그 표정, 마음에 드네요. 하나씩 하나씩 다 빼앗겨서 이제는 남은 것 하나 없는 역적. 아아, 이 모습을 전대 마왕께서 보셨어야 했는데.”
“멍청한 년. 역시 네 아비를 닮아서 어리석기 짝이 없어. 들일 놈이 없어서 저 남자를 들였느냐? 설사 내가 없다고 해도 다른 마족들은 반발할 것이다. 제 형제자매를 전장의 원귀로 만들어버린 자를 마왕의 신하로 받아들인다고?! 동부도 조만간 끝이 나겠구나!”
“걱정 마요, 숙부. 아무도 반발하지 못 할 거예요.”
“네가 어찌 확신하느냐? 내 반란조차 막지 못 한 네년 따위가 뭘 안다고?”
“간단하죠. 반란을 일으킬 만한 세력들은, 모조리 박살내놓으면 되니까.”
웃으면서 그렇게 말하는 율리아를 바라보면서, 아우펜은 저도 모르게 흠칫 몸을 떨었다.
자신이 알던 제 조카가 저런 식으로 미소를 짓고, 저런 말을 했었던가?
무슨 말을 해도, 어떤 행동을 보여도 그냥 애송이라는 생각 밖에 들지 않았던 때가 있는데.
지금 보고 있는 눈앞의 저 여인, 저 마왕이 그 애송이와 동일인물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그리고 그 일의 시작은, 우리 숙부의 목이 되겠죠. 그러니까, 이제 그만 내어주겠어? 난 당신의 목이 필요하거든. 나를 위해서, 나의 사람들을 위해서.”
스르릉-.
검을 빼어드는 율리아의 모습이 아름다우면서도 또 몸서리 쳐질 정도로 공포스럽다.
아우펜은 뭔가 잘못된 것 같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예전 그 겁쟁이의 모습만 보이던 율리아를 떠올리면서 자신 역시 검을 뽑아 들었다.
“이왕 이렇게 된 거, 여기서 마왕의 핏줄을 죄다 끊어주마. 내가 가지지 못 할 동부라면, 소용돌이에 휩싸여 완전히 망해버리라지.”
“역적다운 역겨운 유언, 참 고마워.”
그 말이 끝나는 것과 동시에 율리아가 몸을 날렸다.
어찌나 그 속도가 빨랐던지 클라우스조차 한 순간 그녀의 검 끝을 놓쳤을 정도였다.
그리고 당연하게도, 아우펜은 바로 제 눈앞에 검이 날아오는 그 순간까지 전혀 눈치를 채지 못 하고 있다가 그대로 공격을 허용하고 말았다.
“크악!”
어깨를 베고 지나가는 검에 아우펜이 비명을 지르면서 허우적거린다.
리리오에게 검을 배웠기에, 해서 나름 검술에는 자신이 있다고 생각한 본인이었는데.
그리고 율리아가 딱히 뛰어난 재능을 보인 적이 없기에 안심하고 있었는데!
‘무슨! 눈에, 눈에 보이지도 않았다!’
눈에 보이지도 않았는데 허면 어떻게 피한 것이냐고?
피한 게 아니다, 아우펜은 끝까지 율리아의 공격을 알아차리지 못 했다.
다만 율리아가 아우펜의 목이 아니라 어깨를 노렸을 뿐, 오직 그렇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정신 차려. 마왕을 친히 이까지 행차하게 했다면, 저항다운 저항은 해줘야지.”
“이이익….”
“당신 때문에 잠조차 제대로 자지 못 하고, 몇 년을 혼자 썩어문드러져 갔던 내 시간. 그걸 조금이라도 보상 받기 위해서라면 아직 한참 멀었어. 아우펜 아그리시오.”
더는 듣고 싶지 않다는 듯 이번에는 아우펜이 먼저 움직였다.
조금 전 공격을 허용한 것은 자신이 방심해서 그럴 뿐이다, 이길 수 있다.
그렇게 생각하며 검을 휘둘렀지만 그의 검은 허공을 의미 없이 가를 뿐이었다.
“끄억!”
허벅지에서 피가 튀며 그대로 자리에 주저앉고 마는 아우펜.
그의 뒤에는 또 다시 검에서 피를 털어내며 미소를 짓고 있는 율리아가 서있었다.
이번에도 충분히 아우펜의 목을 노릴 수 있었지만 그녀는 그리하지 않았다.
여전히 모자라다, 모자라도 아주 한참 모자란다.
이것으로 자신 안에서 세차게 타오르던 분노를 다 잠재울 수가 없다.
저 자로 인해 어디까지 망가졌는지조차 모를 이 상황, 자신과 주변인들의 삶.
최악 바로 직전까지 치달은 동부의 상황과 심지어 서부와 손을 잡기까지 했다.
넘어서는 안 될 선을 몇 번이고 넘은, 역겹기 그지없는 자다.
죽여도 편하게 죽일 수 없다, 여기서 살려달라고 울부짖는 꼴을 보고 말겠다.
마법을 쓸 필요도 없었다.
지금의 율리아에게 있어 아우펜은 그냥 가지고 놀다 죽여도 아무런 가치조차 없는.
적이라는 말조차 미안해질 정도로 아무 짝에도 쓸모가 없는 놈이었다.
“크억!”
손,발을 시작하여 몸의 근육과 힘줄이 하나씩 하나씩 잘려나간다.
검을 놓치고, 땅에 주저앉고, 비틀거리다가 또 다시 피를 뿌리며 쓰러지고.
욕설을 내뱉다가 율리아를 저주하던 아우펜은 끝내 스무 번의 칼질을 당하기도 전에 고개를 처박고 처참하게 빌기 시작했다.
“유, 율리아! 조카야! 제, 제발 그만. 그만해다오! 내가 잘못했다, 내가….”
하지만 율리아는 그런 말을 지껄이던 아우펜의 입을 그대로 그어버렸다.
그대로 입과 볼이 찢어지며 쩍 벌어져서는 흉한 모습을 다 보인다.
아우펜이 괴물 같은 소리를 내며 제 얼굴을 가리려고 하던 찰나, 또 다시 섬광이 번뜩이더니 그의 두 손목을 깔끔하게 잘라버린다.
“보여줘. 당신의 그 역겹고 추악한 최후를. 그래야 당신에게 위협을 받던 이래 가장 달콤하고 편안한 밤을 맞이할 수 있을 것 같아.”
“우어어! 우어어어!!”
“개처럼 짖어. 돼지처럼 울부짖어. 당신 때문에 스러져간 나의 아버지께, 나의 사람들에게 바치는 가장 아름다운 진혼곡이야. 더 울부짖어줘. 숙부.”
여전히 미소를 그린 채 율리아는 몇 번이고 더 칼을 휘둘렀다.
아우펜이 입고 있던 옷이 모조리 잘려나가 천 쪼가리라고 해도 믿을 정도로.
멀쩡한 살갗 따위는 보이지도 않을 수준으로 베고 또 베어 그 주변이 피 웅덩이로 변한 후에야, 비로소 율리아는 우뚝 검을 멈춰 세웠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뭐에요.”
“이만하면 되었어요, 율리아.”
“놔요, 클라우스. 명령이에요.”
“비명조차 지르지 못 하는 송장에게 칼질 좀 더 한다고 달라지는 건 없어요.”
그 말에 율리아는 슬쩍 앞을 내려다보았다.
아직 숨은 붙어있지만, 그 숨이 정말 살아있기에 내쉬는 것이 아닌, 죽기 직전 가까스로 내뱉는 마지막 것임이 확연하게 드러난다.
아직도, 아직도 자신 안에 타오르고 있는 분노가 다 사그러들지 않았는데.
그동안 무던히도 자신을 괴롭게 했던 자, 이 역겨운 것이 바로 앞에 있는데.
이제 더는 괴롭게도, 후회하게 할 수도 없다는 사실이 미치도록 화가 났다.
“율리아.”
이때 자신을 조심스레, 그리고 따스하게 안아주는 감촉에 율리아는 저도 모르게 움찔 몸을 떨면서 뒷걸음질을 치고 말았다.
덕분에 클라우스의 품으로 더 깊숙하게 들어가게 된 그녀는, 가볍게 한숨을 내뱉고는 그의 품에 기대어 서서 잠시 동안 속에서 들끓던 불길을 조금씩 잠재우기 시작했다.
“왕이 하고자 하는 일을 막다니, 이것도 나름 큰 죄에요. 클라우스.”
“송구하네요. 그러면 내게는 어떤 벌이 기다리고 있을까요?”
“성에 돌아가면, 침대 위에서 알려주도록 할게요.”
조금 전 그 소름 끼치는 미소가 아닌, 진심으로 행복한 웃음을 지으면서.
여인은 남자의 볼에 가볍게 키스를 해주었다.
그 장면이 빛을 잃어가던 아우펜의 두 눈빛에 가득 들어가는 것을 확인한 율리아는 제 숙부를 향해 조소를 머금은 후, 그대로 검을 휘둘러 역적의 목을 쳐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