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17화 〉 20장 - 나의 왕이시여
율리아가 전열을 정비한 후에야 진격할 것이라고 생각했던 자들의 예상은 결국 빗나갔다.
순식간에 들이닥친 마왕군을 바라보며 남은 자들은 이를 악물어야만 했다.
더 견고하고 방어가 용이한 성이 아니라 제 성으로 가겠다는 아우펜의 고집을 따른 이유도 율리아가 바로 공격을 하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었기에 그런 것이었는데.
아우펜의 성 바로 앞까지 들이닥친 마왕은 이번에 끝장을 볼 생각인 모양이었다.
“이러면 정말 큰일 아닙니까…!”
“이곳은 워낙 거대한 성이라 방어가 쉬운 곳이 아닌데.”
아우펜에 대한 충성심, 혹은 희망을 가지고서 여기까지 따라온 자들.
하지만 정작 그들의 주군이라 할 수 있는 아우펜은 가면 갈수록 초조함을 숨기지 못 하며 안절부절 못 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아무리 신하들이 견고하고 또 흔들리지 않는다고 해도, 그 주군이 흔들리면 그 균열은 자연스레 굳건히 버티고 있던 자들에게도 영향을 끼치는 법이다.
적의 숫자가 많지 않다, 공성 무기는 고사하고 포위조차 불가하다.
여러 말들로 아우펜을 안심시키고자 했으나 돌아오는 것은 의심 어린 눈빛뿐이었다.
아무래도 이전 협곡에서의 전투에서 두 번의 치명적인 배신, 그리고 가장 믿고 의지했던 리리오의 전사가 아우펜에게 너무나 큰 영향을 끼치고 있는 모양이었다.
그의 눈빛에서는 ‘혹 너희들도 나를 배신하려는 것이냐. 나를 안심시키고 뭘 하려고?’ 라는 느낌이 강하게 느껴졌다.
덕분에 제 가문마저 뒤로 하고 그를 보좌하기 위해 성 안으로 들어온 마족들은 점점 입장이 난처해지고 있는 중이었다.
“방금 첩보가 들어왔습니다. 숫자는 그리 많지 않지만 저기에 마왕은 물론이고 레블랑 가문의 세실리 영애, 그리고 남부의 악마 클라우스까지 함께 왔다고 합니다.”
그 말을 들으니 수천에 불과한 병력으로 여기까지 밀고 들어온 마왕을 이해할 수 있었다.
가까스로 생존한 병사들의 말을 들으니 말도 안 되는 마법들이 펼쳐져 아군 마법사들을 모조리 제압했다고 했다.
어지간한 마법 실력으로는 턱도 없는 일, 자연스레 마왕군에 끼어있는 세실리가 그 일을 가능하게 한 유력한 인물로 꼽힐 수밖에 없다.
그도 그럴 것이 뭔가 활약을 했기에 레블랑 가문의 마족임에도 마왕이 저리 데리고 다니는 것이리라.
더해서 협곡에서의 전투에서 군을 지휘하면서 리리오까지 살해한 클라우스까지 왔다.
아무리 적의 병력이 적어도 그걸 지휘하는 자가 그 인간이라면 안심할 수가 없다.
대륙 전쟁까지 갈 것도 없이 당장 협곡 전투에서 처참하게 패배했으니까!
심지어 이들은 율리아나 클라우스는 생각하지도 않은 부분까지 지레짐작하고 있었다.
“분명 이후 병력들이 속속 도착할 겁니다. 전투가 격렬했으니 일단 안전한 곳으로 사상자들을 옮긴 후 나머지 병력을 추슬러 계속 이곳으로 밀고 올 거예요.”
“큰일 아닙니까. 패전 소식이 전해지면서 점점 민심도 이반하고 있는 터인데….”
“만에 하나 적이 공성을 시작했을 때 내부에서 이전처럼 배신자라도 나온다면 그 때는 모두가 끝입니다. 기회조차 잡지 못 하고 모든 게 그대로 무너질 게 확실해요.”
처음에는 무척이나 단단하던 결속력도 이제는 많이들 풀어졌다.
결정적인 전투에서 연이어 벌어진 패배와 배신, 그리고 모두가 믿고 있던 자의 죽음.
더해서 점점 코너로 몰리자 한계가 드러나는 아우펜의 모습과 반대로 예상을 깨트리며 코앞까지 밀고 들어온 율리아까지.
일이 이 지경까지 몰리니 제아무리 심지가 굳은 이라고 해도 이 정도로 몰리게 되면 자연스레 살 궁리를 할 수밖에 없다.
물론 레블랑 가주와 몇몇 이들은 아직도 아우펜에 대한 기대를 , 그리고 충심을 저버리지 못 했다.
어찌 되었든 자신들이 택한 주군이고, 자신들이 보좌해야 하는 자신들의 ‘왕’이 아니던가.
여태껏 그가 보여주었던 모습들이 자신들이 꿈꾸던 왕의 모습과 부합했기에.
해서 그들은 충심을 바치고 열과 성을 다해 모시려고 애를 썼다.
하지만 클라우스가 말한 대로, 율리아가 예견한 대로.
그것은 단편적인 부분이었을 뿐 한계에 부딪치자 아우펜의 민낯이 그대로 드러났다.
평소에는 신하들을 적절히 이용하되 과신하지 않으면서 흔들리지 않는 모습을 보였건만.
자신이 생각하던 것과 반대로 일이 진행되니 완전히 허물어져서는 중심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전대 마왕은 영 재주가 없었고 후계자인 율리아는 너무 어렸다.
그 틈을 타서 천천히, 오랫동안, 차곡차곡 준비할 시간이 있었기에 모든 게 완벽했다.
완벽함 속에서 단 한 번도 제 약점을 공개하지도, 본인 스스로조차도 알지 못 했다.
그것이 바로 지금 상황에서 최악의 독이 되어서는 사방으로 번져가고 있었다.
“전하께서는.”
“아직도 방에 틀어박혀 리리오의 이름만 부르고 계십니다.”
“허면 수성 지휘는 지금 누가 하고 있는 거지?”
“레블랑 가주일 겁니다.”
레블랑 가문이라면 동부에서는 알아주는 가문이다.
그리고 그곳의 가주는 아우펜의 충신이었지만 어찌 된 일인지 그 딸인 세실리는 마왕을 따라 종군하면서 이제는 성 바로 앞에까지 와 있었다.
성이 무너진 것도 아니고 병력이 없는 것도 아니며 식량이 부족한 것도 아니다.
아직 무엇 하나 밀리는 부분이 없지만 이전까지 가지고 있던 희망이 이제는 아예 없다.
설사 지금 공격을 막는다고 해도 그뿐일 것이며 이후 군세를 회복한 마왕군이 다시금 밀려든다면 자신들에게 더는 기회가 없을 것이다.
차라리 팔라티나트나 다른 가문처럼 빠르게 돌아섰어야 하나 싶다가도, 그래도 자신들이 택한 주군인데 이리 쉽게 버리는 게 과연 맞나 하는 생각도 들었다.
“여러분. 방금 전 마왕이 화살에 서신을 묶어 성 안으로 보냈다고 합니다.”
“무슨 서신이었답니까?”
“그게… 전장에서 먼저 스러진 자들에게 술 한 잔 올릴 때 역적의 머리를 같이 올리고 말겠다고 했답니다. 반드시 주군을 참살하고 말겠다고….”
율리아가 이리 난폭한 느낌이 가득한 말을 한 적이 있었던가.
예전 그 조용하던 마왕의 모습만 생각하던 귀족들 입장에서는 당연히 율리아의 분노가 커도 아주 크게 다가올 수밖에 없었다.
여기까지만 한다면 참 좋았을 것이다.
문제는, 또 다른 서신이 날아왔다는데 바로 그게 불꽃을 지피고 말았다.
“그리고… 또 다른 서신이 하나 있었는데.”
“그게 무엇이기에 이리 뜸을 들이는 겁니까?”
“이제 그만 고집을 부리고 지금이라도 죄를 뉘우친다면 살 길이 열릴 것이라고….”
그 말을 듣는 순간 자리에 모여 있던 자들은 율리아가 무엇을 노리고 있는지 알아차렸다.
싸우기도 전에 이쪽을 완전히 분열시키겠다는 계략.
아우펜이 원래부터 의심이 많은데 지금 그 의심이 도를 넘었음을 뻔히 다 알고 있다는 듯 이런 서신을 보내서 그 사이를 흔들려는 수작이었다.
이런 글을 처음부터 받았다면 아우펜도, 그리고 휘하 마족들도 그냥 웃어넘겼을 것이다.
하지만 이전 전투에서 배신자들로 인해 리리오가 전사해버렸고.
그나마 작동할 수 있었던 함정도 배신자인지 아닌지 알 수가 없는 오토에 의해 꼬여버렸다.
심지어 그 오토 헤들러는 제 병사들을 이끌고 이 성 안에 들어와 있다.
배신자라고 보기에는 당시 상황을 보면 이해할 수 없는 게 아니고, 그가 거느린 병사들이 나름 괜찮은 자들이라 쳐내기에는 너무나 아쉬웠던 것이다.
이런 때에 율리아가 이런 내용의 서신을 보냈으니 이제는 누구도 믿을 수 없게 되었다.
서신이 정말 마지막 배신을 종용하는 것인지, 아니면 균열을 일으키기 위한 것인지 알 수는 없지만 한 가지 확실한 건 이게 아우펜에게 분명 영향을 끼칠 것이라는 점이었다.
“주군의 성격 상 그 서신을 본다면 더더욱 크게 의심을 할 겁니다.”
“오토 헤들러, 그 자는 감시를 받고 있으니 따로 접선을 할 수 없을 테지만….”
“만에 하나 또 다른 배신자가 있다면 성문이 열리는 건 금방일 겁니다.”
“심지어 바깥에는 남부의 악마가 와 있습니다. 대륙 전쟁에서 아군을 수도 없이 궤멸시킨 그 괴물 같은 인간이 말입니다.”
이야기를 하면 할수록 부정적인 생각만 가득해진다.
원래부터 충성을 다 하던 자들이 아닌, 아우펜의 세력이 커지니 급하게 들어온 자들.
아우펜이 기존의 충성파들 힘이 너무 커지는 것을 막기 위해 의도적으로 키워낸 세력들이 이제는 되려 아우펜과의 손절 각을 재고 있는 중이었다.
마왕의 분노는 이미 하늘 끝까지 치솟았고 아우펜은 바닥까지 추락했다.
이제 어느 누구도 더는 그를 지지하지도, 도우려고 하지도 않을 것이다.
일말의 희망을 가지고 여기까지 왔건만 더는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다.
제 주군이라는 자는 주변 모두를 의심하고 있고 반대로 그를 잡으러 온 마왕은 당장이라도 반역에 가담한 모두를 잡아 죽일 듯 분노하고 있다.
이 타이밍에 단 한 명이라도 마음을 돌려먹어 성문을 연다면, 모든 게 끝이다.
‘이왕 성문이 열릴 것이라면….’
‘…내가 성문을 여는 자가 되어야 하지 않을까?’
라는 생각이 이들 머릿속에 들 수밖에 없었다.
충심으로 모인 게 아니라 철저히 이득 관계로 모인 자들.
그렇기에 아우펜의 침몰은 그들에게 있어 탈출해야 하는 때를 가르쳐주는 것.
그 이상도 그 이하도 될 수 없었다.
한편, 아우펜은 몇 안 남은 충성스러운 자들에게 이런 저런 보고를 받고 있었다.
완전히 포기한 것은 아니지만 이제 그의 눈에서는 이전의 그 번뜩이던 빛이 사라졌다.
그리고 그 안에 가득 찬 것은 의심과 원망의 대상을 찾는 그런 추악한 감정뿐이었다.
“전하, 일단 마왕 측도 함부로 공격은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성벽과 성문 쪽에 충분한 병력만 배치해도 이 싸움은 우리에게 유리합니다.”
“그러면 내 곁에는 얼마만큼의 병력을 붙일 생각이지? 그게 중요하다.”
“내성은 이미 그 자체로 또 하나의 요새입니다. 그리 많은 숫자는 필요치 않습니다.”
“그 말, 장담할 수 있겠는가?”
“….”
노골적인 의심이 서린 말에 충성파들도 난처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아우펜의 이런 모습은 그들도 처음 겪는 것, 이런 모습이 있다고는 생각도 못 했다.
그도 그럴 것이 아우펜은 여태 단 한 번의 실패도 없이 여기까지 왔다.
전쟁이 벌어져 동부의 여러 자원이 소진되는 와중에 조금씩 세력을 불렸다.
전대 마왕은 제 동생의 그런 행동을 미처 파악하지 못 했고 그걸 알아차렸을 때는 늦었었다.
유일한 대책이었던 율리아는 아직 어렸고 지지자도 없었기에 힘이 없었다.
자연스레 모든 권력은 아우펜에게로 집중되었고 그렇게 그는 달콤한 성공을 누릴 수 있었다.
신의 농간으로 거짓말 같은 패배를 당하지 않았다면.
아마 충성파들도, 그리고 아우펜 본인도 이런 모습이 있음을 영원히 몰랐을 지도 모른다.
그 사람의 바닥을 파악하고 싶다면 최악의 순간에 빠졌을 때를 보라고 했는데.
안타깝게도 그 최악의 순간이, 바닥을 볼 수 있는 때가 너무 늦게 찾아온 것이었다.
“그 간악한 것이 무슨 짓을 저지를지 모른다. 그대들도 봤을 텐데? 배신자가 또 있어.”
“주군. 그건 그냥 속임수일 확률이 높습니다. 여기까지 따라온 자들입니다. 흔들리시면 안 됩니다. 조금만 기다리면 서부 연합이 움직일 것이고 그리 된다면 바깥에 있는 적들도 결국에는 물러날 수밖에 없을 겁니다.”
“만약 그게 아니라면?”
아우펜의 반문에 마족들은 그대로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다.
그의 말대로 정말 서부가 움직이지 않는다면, 그래서 마왕이 물러가지 않는다면.
이 고립무원에서 자신들이 과연 언제까지 버틸 수 있을까?
레블랑 가주를 포함한 몇 안 남은 충성파 인원들은 아우펜의 눈치만 살필 뿐이었다.
상황은 점점 안 좋아지는데 그런 때에 자신들의 주군마저 점점 최악으로 치닫고 있다.
이런 분이 아니었는데, 이렇게 답답하신 분이 아니었는데, 라고 생각한다고 해서.
본인조차 모르고 있던 본질을 바꿀 수 있는 것은 절대 아니었다.
그리고, 그날 밤.
언제까지고 굳게 닫혀있을 것 같던 성문이 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