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16화 〉 20장 - 나의 왕이시여
율리아가 군을 이끌고 이동하기 하루 전.
“저, 카엘라님. 정말 이대로 가도 되는 건가요…?”
전투 직전까지는 레블랑 가문의 일원이기에 참 많은 의심을 받았다.
하지만 전투에서 보여준 압도적인 마법 실력으로 인해 이제는 그 의심을 떨치게 된 세실리.
그녀는 못내 불안한 표정으로 한창 돌아갈 준비를 하고 있는 카엘라에게 그리 말했다.
자신이 전투에는 문외한이라고 해도 기본은 알고 있다.
성에서 농성을 벌이는 적을 공격할 때 가장 중요한 것은 역시나 보급을 막는 것.
그러기 위해서는 포위가 필수고 그걸 하기 위해서는 숫자가 중요하다.
헌데 율리아의 결정은 그 모든 것을 정면으로 받아치는 일이었다.
“이미 마왕 전하께서 결정하신 일입니다, 세실리 영애.”
“하지만….”
“전하께 직접 말씀드릴 게 아니라면 그만하시죠.”
낮게 가라앉은 카엘라의 말에 세실리는 입을 다물고 말았다.
사실 그녀가 걱정하는 것은 율리아나 클라우스의 패배가 아니다.
그 두 남녀가 질 것이라고는 전혀 생각하고 있지 않았으니까.
지금 세실리가 걱정하는 것은 이후 레블랑의 미래에 관한 부분이다.
‘아버지… 결국 끝까지…!’
들리는 소식에 의하면 레블랑 가주, 즉 세실리의 아버지는 결국 아우펜을 따라갔다고 한다.
팔라티나트의 가주처럼 그냥 항복을 했다면 어떻게 용서를 구할 기회라도 얻을 수 있었을 텐데 이런 식이면 이제 그 어떤 것도 더는 통하지 않을 게 확실하다.
제 가문이 자신의 앞길을 기어코 가로막는다면 끝내 버릴 수도 있겠지만, 그래도 레블랑은 자신이 지내던 곳이고 자신의 가족들이 있는, 고향과도 같은 곳이다.
세실리 입장에서는 어떻게든 레블랑을 구해내고 싶은 마음이 절실했다.
끝내 방법이 없다면, 아버지를 제 손으로 죽이는 한이 있더라도.
“아, 그리고. 세실리 영애. 클라우스님께서 세실리님 역시 이번 진군에 동참하라 하셨습니다.”
“저요?”
“네. 마왕 전하께서도 허락하신 일입니다.”
“클라우스님의 부하인 카엘라님도 가지 않는데 왜 저를….”
“마왕 전하께서도 허락하신 일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저는 클라우스님의 부하가 아니라 마왕성의 전사장입니다. 다른 이들의 의심을 살 언행이니 주의해주셨으면 합니다만.”
카엘라는 꽤나 쌀쌀맞은 어조로 그리 경고했다.
덕분에 세실리는 당장 아카데미에서 클라우스의 그림자도 밟으려고 하지 않던 카엘라가 떠올라 정말 이 여자가 마왕에게 충성하는 건지, 아니면 그조차 클라우스의 명령에 따르고 있는 건지 헛갈릴 정도였다.
그러는 사이 율리아가 자신을 호출했다는 소식에 급히 마왕의 막사로 향하는 세실리.
안으로 들어서니 율리아가 자리에 앉아서는 그녀를 응시하고 있는 중이었다.
바로 무릎을 꿇고 예를 취하자 되었다는 듯 손을 휘젓는 율리아는.
“전사장과 함께 있었다니 이야기는 들었겠지. 그대도 나와 함께 역적을 쫓는다.”
라고 운을 떼었다.
“저도… 말입니까.”
“그래. 세실리 레블랑, 그대도 함께 한다. 이미 나한테 말하지 않았나? 그대의 충심을 증명하겠다고. 해서 이전 전투에서 아주 큰 활약을 한 것이지 않나. 내 말이 틀린가?”
“아닙니다, 마왕 전하.”
“허니 세실리 레블랑, 그대를 데리고 가겠다는 것이다. 듣자하니 레블랑의 가주가 역적 놈과 함께 전장을 이탈했다고 하더군. 팔라티나트와 다른 가문들은 일찌감치 내게로 고개를 조아렸는데 그는 여전히 그 알량한 충심을 저버리지 못 하겠다면서 기어코 기회를 차버렸어.”
“….”
“이런 말을 해서 무척 미안하지만, 이런 식이면 레블랑 가문에 대한 의심은 해소될 수 없어. 아무리 자네가 레블랑 가문의 사람이라고 해도. 내 곁에서 많은 공을 세우고 충심을 증명한다고 해도 가주가 저런 식이라면 내 밑의 신하들이 뭐라고 할까.”
제 아버지가 그 정도로 패배를 겪으면 뜻을 굽힐 줄 알았다.
미련한 분이 아니기에 당연히 대세를 읽고 더는 가라앉는 배를 고집하지 않을 거라 여겼다.
그런데 기어코 아우펜을 따라가면서 레블랑이 발을 뺄 수 있는 마지막 기회를 날렸다.
그는 충심이라고 생각하겠지만, 세실리와 가문의 사람들이 보기에는 자기 위안에 불과했다.
세실리는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지키고 있던 선을 넘어야 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은 결코 클라우스를 저버릴 생각이 없고, 레블랑 가문의 멸문지화를 보고 싶지도 않다.
본인이 아우펜과의 전투에서 공을 세우고, 아버지가 항복을 한다면 어떻게 용서라도 한 번 구할 수 있지 않을까 했는데 이런 식이면 정말 방법은 하나뿐이다.
“마왕 전하의 뜻에 따르겠습니다.”
이전과는 다르게 세실리의 언행이 꽤나 굳어있다.
그걸 바로 알아차린 율리아였으나 따로 뭐라 말을 하지는 않았다.
어리석은 여인이 아니니 이제 자신에게 남은 길이 무엇인지 잘 알고 있을 것이다.
비극적이고, 참혹하고, 이런 일을 강제하는 자신이 조금은 밉기도 하지만.
원래 이 권력판이라는 것이 그런 것이고 살기 위해서는 부모형제자식도 없는 게 이곳이다.
당장 가주를 쳐내지 않아 가문의 모든 이들이 역적으로 몰려 멸문지화를 당할 수도 있다면.
가문과 그에 속한 이들, 그리고 본인을 구하기 위해서 결단을 내려야만 한다.
“내일 오전 중으로 출발할 거다, 세실리 레블랑. 준비토록.”
“알겠습니다.”
율리아에게 인사를 하며 물러나는 세실리.
그녀는 어쩌면 바로 이 순간을 위해 아카데미에서 그 많은 고생을 한 게 아닐까 생각했다.
제 아버지이자 레블랑 가문의 가주는 마법도 마법이지만 검술도 제법 뛰어나다.
장담하건데 아무리 자신의 마법 실력이 뛰어나도 그라면 순식간에 거리를 좁혀 자신을 능히 제압할 수 있을 게 확실했다.
하지만, 이제는 아닐 것이다.
그동안 아카데미에서 피땀 흘려가며 배운 것이 무엇인가.
시작은 클라우스에게 어떻게든 잘 보이고 싶은 마음이었다지만.
결과적으로 자신의 근접 전투 능력이 눈에 띄게 성장했다.
거기에 본래 가지고 있는 마법 실력까지 들어간다면, 정 반대의 결과를 이끌어낼 수도 있다.
‘아버지. 부디 저를 용서하시길.’
미리 사과를 하며 세실리는 마음을 굳혔다.
자신과 레블랑 가문이 살아남을 수 있는 마지막 길.
그 가시밭길을 세실리는 마땅히 걸어주겠다, 그리 생각했다.
“….”
한편, 세실리가 나선 후 율리아는 그녀가 사라진 곳을 가만히 쳐다보고 있었다.
미안하다는 생각이 잠깐 들기도 했으나 곧 고개를 저으면서 그런 감정들을 지워버렸다.
이것은 선택이 아닌 필수적인 것, 이것으로 충심을 증명하지 않는다면 자신은 결국 레블랑 가문을 완벽하게 쳐낼 수밖에 없다.
클라우스가 말한 정리 작업, 바로 귀족들에 대한 대대적인 숙청.
원래 제 옆에 남아있던 자들 중 대단한 세력을 지닌 자들은 하나도 없다.
동부에서 강성한 권위를 지녔다 하는 가문은 죄다 아우펜에게 붙었었다.
승리가 자명해 보이는 상황에서 얼른 붙어먹어야 받을 것이 더 많다는 생각에서 비롯된.
그리고 새로운 마왕의 밑에서 자신들의 권력을 더욱 공고하게 만들겠다는 환상에서 나온 결론들이었다.
이번에 팔라티나트와 함께 그중 몇몇이 눈치를 채고 빠르게 노선을 갈아탔다지만.
율리아는 그들을 가만히 지켜볼 생각이 전혀 없었다.
당장이야 항복한 자들을 불안하게 만들면 곤란하니 치하를 좀 해줄 테지만.
시간이 흐르고 동부가 안정되면 그때부터 본격적으로 모조리 쳐낼 것이다.
‘엘세 가문을 위시한 중립파 몇몇에 팔라티나트를 위시한 몇몇만 공을 인정해주고, 나머지는 용서를 받은 것만으로도 감지덕지 하라고 하자. 그자들은 그것만으로도 감사할 거야.’
그나마 그것도 이전 전투에서 배신한 자들에게 베푸는 자비다.
나머지 것들은 이제 기회를 줘도 무의미하다.
클라우스가 말한 대로, 뒤가 불안정해서는 앞에 신경을 쓸 수 없는 노릇이다.
과거의 자신은 서부와 동부가 평화롭게 교류하며 지내는 환상을 품었지만.
비로소 왕의 자리에 제대로 앉아 똑바로 세상을 바라보니 그게 불가능함을 깨달았다.
결국 서부의 권력층도 제 숙부와 다를 바가 없는 놈들이다.
언제든 자신과 동부의 마족들을 위협하고 겁박하려고 들 것이다.
본성은 바뀌지 않는다, 대화는 무의미하고 오직 힘만이 모든 걸 결정할 뿐이다.
더 이상은 약해지지 말자, 진정한 의미의 ‘왕’ 이 되자.
율리아는 제 손을 내려다보면서 속으로 그렇게 중얼거렸다.
자신을 위해 여태껏 참고 참은 충성스러운 자들을 위해서.
이번 전투에서 죽고 다친 한 명, 한 명의 병사들을 위해서.
그리고, 자신의 모든 것을 뒤로 하고 제 옆에 다가와 자신을 일으켜준 한 남자를 위해서.
‘나를 따르는 자들을 위해 동부 역사상 최강의, 아니 대륙 최강의 마왕이 되자.’
율리아는 그렇게 생각하면서 이제부터 품고 있던 모든 잡념을 지우기로 결심했다.
어쭙잖은 평화니 화합이니 용서니, 이제는 아무 의미도 없다.
그것이 제 사람들의 배를 채워주는 게 아니라 피와 살을 깎아먹는 짓이라면.
자신은 그 따위 것 모두 집어던지고 본인은 절대 되지 않으리라 생각했던 왕이 될 것이다.
누군가에게는 잔혹하다느니 악마 같다느니 말을 듣는다고 해도, 그로 인해 자신을 따르는 자들에게 그 어떤 존재보다도 대단한 왕이 될 수 있다면 기꺼이 그래줄 것이다.
그리고 그 시작은, 비록 제 숙부이나 절대 용서하지 못 할 반역자.
그 역겨운 자를 자신의 손으로 직접 처단하는 것부터 시작할 것이다.
“…모두에게 좋은 왕은 없어.”
율리아는 등받이에 몸을 깊숙이 기대며 그리 중얼거렸다.
더 강해지자, 몸도 마음도, 마침내 홀로 남아도 무너지지 않을 정도로. 홀로….
그러다가 율리아는 갑자기 킥, 하고 웃음을 흘렸다.
홀로, 남지는 않을 것이다.
제 옆에는 항상 자신을 따르고자 하는 이들이 있을 것이다.
아무리 실패하고 또 실패한다고 해도 남아있을 것이다.
설사 모두가 다 흩어진다고 해도, 최소한 그 남자만큼은 제 옆에 있을 것이다.
“실망하는 일은 없을 거야. 클라우스.”
* * * * * * * * * *
먼저 보냈던 정찰병들에 의해 소식들이 속속 전해졌다.
율리아의 예상대로 적들은 더 동부의 깊숙한 곳이 아닌 아우펜의 성으로 향했다.
그리고 성문을 걸어 잠그고 농성 준비에 들어갔으며 주변에 전령들을 보내 지원 요청을 했다고 한다.
“…그리 좋은 상황은 아닌 것 같습니다, 마왕 전하.”
아인이 슬쩍 의견을 내놓았다.
이제라도 멈추거나 하다못해 원군 요청이라도 하자는 뜻인 모양.
하지만 율리아는 딱히 개의치 않는다는 듯 성 바로 앞까지 진군토록 했다.
아우펜의 성은 ‘방어하기 최고의 조건은 아니다.’ 라는 평대로 아주 웅장하고 화려했다.
그 규모가 마왕성에 비견될 정도로, 아니 그보다 더 아름다울 정도였다.
“역겹군.”
율리아는 그 성을 바라보면서 첫 감상을 내뱉었다.
당장이라도 불태우고 뒤집어엎고 싶다는 듯, 마왕의 두 눈에서는 불길이 이글거렸다.
“클라우스.”
“네, 전하.”
“진영을 꾸리고 적의 공격 거리에 들지 않는 선에서 가볍게 살펴보도록.”
클라우스는 율리아의 명령에 바로 실행하겠다며 먼저 자리를 비웠다.
이제 자리에 남은 건 아인과 세실리 뿐.
잠시 눈치를 보던 두 남녀 중 먼저 입을 연 건 의외로 세실리였다.
“마왕 전하. 정말로 성을 공격하실 건가요?”
“당연히 무너트려야지, 세실리 영애. 감히 왕의 권위를 무시하는 저 자들을 넋 놓고 바라볼 수는 없잖은가.”
“마왕 전하의 말씀이 옳습니다. 다만….”
“다만, 조금 기다려보도록 할까.”
그 말에 세실리가 무슨 말이냐는 듯 두 눈을 깜빡인다.
당장이라도 공성전을 치를 것처럼 진격하더니 이제 와서 기다리자는 게 무슨 말인가.
“무너트리는 것도 나쁘지 않지만, 무너지는 꼴을 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입가에 냉소를 머금은 채, 율리아는 그렇게 속삭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