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15화 〉 20장 - 나의 왕이시여
그 다음날 아침, 지휘 막사 내부.
어제까지는 혹 율리아의 심기를 거스를까 긴장하던 이들이 지금은 무척이나 당황한 얼굴빛을 띤 채로 자신들의 왕을 바라보고 있었다.
“저, 전하? 방금 무슨….”
“그대들은 먼저 마왕성으로 돌아가라. 그리고 내가 돌아오기 전까지 기다리라 했다.”
“마왕 전하!”
“부상병들이 많다. 가서 그들을 돌보도록. 나는 우군을 이끌고 기어코 내 손아귀에서 도망친 그 역적 놈의 목을 취하러 가야겠다.”
옅은 분노가 서린 마왕의 말에 몇몇 인사들이 움찔거리며 입을 다문다.
하지만 다른 이들은 절대 불가하다며 반대의 뜻을 내놓았다.
아우펜이 살아남은 병력을 이끌고서 어디로 갔겠는가, 당연히 제 성일 것이다.
아군은 협곡에서의 전투만 생각했지 공성전까지는 미처 준비하지 못 했다.
따라서 아우펜이 성으로 들어가 농성을 벌인다면 기약 없는 긴 싸움이 될 확률이 높다.
심지어 우군만 데리고 간다면 아군이 적병의 숫자와 거의 비슷할 것이다.
적보다 배는 더 많은 병력으로 성을 두들기는 게 정석인데 동수의 수로 공성을 한다니.
제대로 된 포위조차 이루어지지 않아 적의 보급을 막을 수 없을 지도 모른다.
“전하. 우군만으로는 무리입니다. 차라리 전투가 가능한 모든 병사들을 끌고 가심이.”
“모두가 격전으로 지친 자들이다. 그리고 다들 공도 세웠지. 우군만 빼고 말이다. 그들에게도 공을 세울 합당한 기회를 주어야하지 않겠는가?”
“전하…!”
원래 율리아 휘하에 있던 아인, 데스테는 물론이고 먼저 합류했던 페르디난트.
심지어 에슐리를 위시한 항복한 자들마저 도통 받아들일 수 없다는 표정들이었다.
카엘라마저 고개를 갸웃거리면서 이게 말이 되는 건가, 싶은 반응을 보일 정도.
하지만 율리아의 얼굴에 서린 결연한 표정을 확인한 이들은 설득이 불가하단 걸 깨달았다.
누가 봐도 무리수가 자명한 이 상황에서 과연 저 마왕의 마음을 되돌릴 수는 없는 것일까.
그리 생각하던 이들이 곧 하나둘씩 끄트머리에 앉아있는 클라우스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이번 전투에서 가장 큰 공을 세우기도 했고, 배신을 종용하여 적을 무너트렸다.
또한 반역의 무리들이 자랑하던 맹장을 참살하여 사기를 꺾는 데에도 크게 일조하였다.
거기에 율리아가 직접 영입한 인물이니 그에 대한 신뢰가 두터울 것이다.
비록 다른 이들처럼 공식적인 작위나 자리는 없었지만 이 자리에 있는 누구보다도 율리아 가까이 다가갈 수 있는 인물이라고 모두가 생각하고 있었다.
“….”
하지만 클라우스는 침묵만을 유지한 채 어떤 의견도 내놓고 있지 않았다.
전쟁에 대해서는 이 자리에 모인 어느 누구보다도 더 잘 알고 있을 인물인데.
아무리 봐도 공성전을 치를 수 없는 상황에서 적을 쫓겠다는 제 주군을 말리지 않고 있다.
혹시 저 인간이 정말 동부를 완전히 말아먹으려는 건가, 싶은 생각이 들다가도.
그가 아니었다면 이번 전투의 향방이 또 어떻게 흘러갔을지 모른다는 부분에 생각이 닿으니 함부로 그리 여길 수도 없었다.
“아인.”
“네, 전하.”
“너는 나와 함께 간다. 그리고 클라우스도 같이. 나머지는 모두 마왕성으로 돌아가도록.”
율리아의 결정에 다시 한 번 자리에 모인 모두가 그녀를 부른다.
재고해달라는 간청, 하지만 마왕은 손을 들어 모두를 제지했다.
더 이상의 반대 의견은 받지 않겠다는 왕으로서의 명령.
그럼에도 몇몇 귀족 출신 마족들이 막 발언권을 요구하는 찰나였다.
툭, 툭, 툭-.
너무 크지도, 그렇다고 작지도 않은 소리.
클라우스가 회의용 테이블을 손가락으로 가볍게 두드리고 있었다.
왕의 앞에서 무례할 수도 있는 행동이었으나 클라우스는 개의치 않는다는 듯 다른 이들의 시선이 자신에게로 쏠릴 때까지 그 행동을 반복했다.
마침내 자리에 모인 모든 마족들이 클라우스를 바라보는 순간.
“그대들의 왕께서, 하명하시지 않나. 돌아가서 병사들을 수습하라. 자신의 위치에서 군말 말고 기다리라. 혹 그 간단한 것도 자신이 없는 건가? 왕께서 자리를 비우는 게 그리도 걱정인가? 왕께서 자리를 비운 사이 다른 꿍꿍이를 꾸밀 것도 아니면서 다들 너무 반발하는군.”
“무슨 그런 말을….”
“신하면 신하답게, 너희들이 할 수 있는 선에서 최선을 다 하는 게 왕에 대한 믿음이자 걱정이고 또 충심 아닐까 하는데. 선택은 너희 자유야.”
클라우스의 노골적인 발언에 그게 무슨 소리냐고 막 반문하려던 찰나.
가장 먼저 에슐리와 페르디난트가 비로소 율리아의 뜻을 이해했다는 듯 입을 다문다.
지금 율리아는 기존의 인원들에 그 후 더해진 자들을 합쳐서.
새로이 편성된 제 신하들의 충성심과 능력을 확인해 보겠다고 말하는 중이었다.
왕을 걱정하는 것은 신하로서 당연한 일, 그러나 신하로서 지켜야 하는 선을 넘으면서 왕이 하고자 하는 일을 막아설 수는 없다.
따라서 왕을 붙잡을 수는 없으니 명령을 따른다, 마왕성으로 돌아가서 기다린다.
하지만 그렇게 해서 여기 모인 자들의 할 일이 끝이 나는 건 절대 아닐 것이다.
병사들을 수습하고 서부의 상황에 귀를 기울이면서 예기치 못 한 상황이 발생 시 서부를 막거나 그게 아니면 가능한 선에서 병사나 보급을 지원할 수도 있는 일이다.
동시에 왕이 잠시 자리를 비운 상황에서 애먼 놈이 제 숙부와 같이 허튼 짓을 하지 않을까.
너희끼리 잘 살피고 감시하면서 너희의 충성심을 확실히 증명하는 방법으로 삼으라.
율리아는 그렇게 이곳에 모인 자들에게 이야기하고 있는 중이었다.
“내가 없는 동안 마왕성을 잘 부탁하마.”
“….”
설사 이 자리에 모인 모든 자들이 다른 뜻을 먹는다고 해도 충분히 뒤집을 수 있다는 듯.
율리아는 여유로운 미소를 지은 채 기존의 충성파와 이후 합류하거나 항복한 자들을 한 곳에 뒤섞어 마왕성으로 돌아가도록 했다.
그곳에서 기다리며 후일 내가 돌아왔을 때 누군가는 자신의 능력을 내게 보이고.
또 누구는 조금이나마 남아있던 불씨를 꺼트려 충성심을 증명하는 일을 기대하겠다고.
“허면 전하의 뜻대로 먼저 마왕성으로 돌아가 근처에서 병사들 상태를 확인하겠습니다.”
가장 먼저 데스테가 고개를 숙이고 왕의 명령에 따르겠다고 한다.
그 후 페르디난트와 에슐리가 경쟁이라도 하듯 어느 누구도 율리아가 자리를 비운 사이에 마왕성은 물론이고 동부의 어느 곳도 내어주지 않을 거라고 입을 연다.
핵심 인물들이 이런 식으로 나서니 더는 율리아의 뜻을 막고자 하는 이들도 없어졌다.
왕이 자리를 비운 사이에 책잡힐 일은 하지 않고, 대신 제 능력을 보여야 한다.
다른 이들은 몰라도 페르디난트와 에슐리는 이로서 확실하게 이해했다.
반역의 수괴를 잡아 죽인 후 동부에 대대적인 정리가 있을 것이라고.
아니, 정리는 좋게 말한 것일 뿐 더 심하다면 숙청으로 번질 수도 있다고 말이다.
아우펜에게 넘어가 율리아에게 칼을 들이민 자들이 동부의 반에 이른다.
그들 중 몇몇은 용서를 받고 지금처럼 살 수 있을 것이지만.
몇몇은 처벌을 받아 완전히 나락으로 떨어지지는 않아도 지금보다는 훨씬 못 한 삶을 보낼 수도 있고 또 몇몇은 극형을 받을 수도 있다.
현재 막바지 작업에 이른 왕은 논공행상과 처벌을 같이 생각하고 있는 중이다.
이런 때에 납작 엎드리지 않으면, 그리고 기대에 부응하지 못 하면 바로 살생부에 오를 거다.
“좋다. 그러면 한 달 정도만 잠시 내 성을 맡겨두도록 하지.”
한 달, 고작 한 달이라는 시간 내에 역적 놈을 붙잡을 것이다.
자리에 모인 모든 마족들의 귀에는 율리아의 말이 그렇게 들렸다.
그렇게 우군과 마왕성에서부터 함께 온 근위병들까지.
수천에 이르는 병력이 동쪽으로 도망친 아우펜의 뒤를 쫓기 시작했다.
원래는 아우펜의 영향력이 남아있는 곳이기에 율리아를 향해 공격을 해도 전혀 이상하지 않은 곳이었으나 이제는 그런 일 따위 일어나지 않았다.
지지 세력 중 반은 이탈하고 반은 무너졌으며 남은 자들은 얼마 되지 않는다.
원래 아우펜의 영향력이 미치던 곳이 이제는 완전히 비어버린 것이다.
“아인, 클라우스.”
“네, 전하.”
“여기서부터 속도를 조금 늦춘다. 주변 민심을 잘 다독이도록.”
이건 클라우스가 귀띔해준 것이 아니다, 그저 율리아가 생각하고 결론을 내린 것이다.
클라우스는 그저 아우펜을 뒤쫓아야 한다는 율리아의 의견에 힘을 보탰을 뿐이다.
그 이유나 방법은 따로 말하지도, 알려주지도 않았다.
이제 막 피어나기 시작한 꽃인데 더는 장식 따위 필요가 없다.
그저 율리아 스스로 행동하고 결정하며 때로는 조언을 구할 때 해주면 그만이다.
멍청하고, 시기심만 많고, 우유부단하며 끝까지 배울 생각이 없었던 인간 귀족들과는 달리.
클라우스의 앞에 가고 있는 저 마족 여인은 더 강해지고 싶고 더 뛰어나고 싶으며 더욱 위대한 이가 되고 싶은 그의 왕이었다.
“어떨 것 같습니까?”
야영을 하던 어느 날, 클라우스는 마치 율리아를 떠보듯 그렇게 질문했다.
많은 의미를 포함하고 있는 질문이었지만 그의 앞에 앉아있는 마왕은 용케 그 질문의 의도를 파악하고서는 미소를 지었다.
“아우펜, 대역죄인, 빌어먹을 내 숙부. 그 남자는 의심이 많아요. 좋게 평가하자면 조심스럽다고 할 수 있겠지만 그게 지금은 독이 되었을 거예요. 분명 이전 전투로 인해 이탈자가 참으로 많이도 생겼으니 남은 자들 중에서도 누구를 믿어야 할지 확신이 서지 않겠죠. 아니, 죄다 의심하고 있으려나? 그러니 더 안전한 곳 대신 제 성으로 들어갈 게 확실해요.”
율리아의 말대로 아우펜은 패닉 상태에 빠져서 한창 의심의 눈길이 짙어진 상황이다.
더 막기 쉽고 안전한 후방으로 가는 게 아니라 그냥 제 성에 틀어박히고 만다.
수비가 아예 불가능한 건 아니지만 다른 곳에 비하면 상대적으로 공격하기 용이한 곳 말이다.
“사람을 끌어들이는 데에 또 재능이 있던 남자라 이런 상황에서도 곁에 남은 자들이 분명 있을 거예요. 마왕 측도 피해가 크고 서부가 움직일 수도 있으니 일거에 몰아치지는 못 할 거라는 생각도 깔려있으니 더더욱. 하지만 지금과 같이 마왕이 직접 쫓아오고 거기에 제 주군이라는 자가 두려움과 의심이 가득 어린 눈을 하고 있으면 신하도 흔들릴 수밖에 없을 거예요.”
“애당초 율리아, 당신은 공성전 따위 생각하지도 않고 있었군요.”
클라우스가 그렇게 말하니 율리아는 싱긋 미소를 짓는다.
그리고는 ‘다 당신 덕분이죠.’ 라고 클라우스의 귓가에 소곤거린다.
“당신에게서 힌트를 얻었어요. 당장의 싸움에서 어떤 방식으로 힘을 휘둘러서 이길 생각만 하지 말고 어떻게 상대방의 힘을 빼야 하는지, 그 부분을 고민하는 것. 여태까지 그 부분을 놓치고 있었어요. 나도 참… 멍청하고 바보 같으며 부족한 부분이 많은 왕이에요.”
“왕이라고 해서 완벽할 수는 없습니다. 그걸 누구보다 빠르게 인정하고 받아들이고, 그렇게 해서 더 빠르게 본인을 성장시켜야 하는 법이죠.”
율리아는 지금보다 훨씬 더 유능하고 강한 마왕이 될 것이다.
그리고 어느 순간에 이르면, 더는 자신의 도움을 필요로 하지 않을 것이다.
그 때가 오기 전에 율리아의 마음 아주 깊은 곳에 뿌리를 심어두는 것.
그게 바로 클라우스가 계획한 마왕가의 비선실세였다.
“클라우스 말이 맞아요. 나는 왕이니까, 누구에게도 뒤쳐질 수 없어요.”
“그렇습니다. 평범한 자의 무능은 죄가 아니지만, 누군가를 책임져야 하는 자의 무능은 죄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