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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왕가 비선실세-214화 (214/341)

〈 214화 〉 20장 - 나의 왕이시여

“….”

“….”

“….”

율리아를 위시하여 마왕군의 지휘관들 전원.

그리고 아우펜을 배신하고 마왕 측으로 돌아선 모든 이들까지 한 자리에 모인 지휘 천막 안.

그곳에는 무척이나 불편한 침묵이 계속 흐르고 있는 중이다.

조금은 무리한 게 아닐까 하는 격렬한 공세까지 펼쳤건만.

결국 아우펜을 죽이거나 생포하는 것에 실패했기 때문이었다.

더해서 서쪽 틈에서 대기하고 있던 적병들도 대부분이 협곡을 빠져나갔다.

그들 대부분이 아우펜에게 충성하는 자들의 군세인 것을 감안하면, 이번 승리는 반의 목표를 이루었으나 나머지 반은 달성하지 못 한 것.

아우펜과 그가 이끌던 군세 중 다수가 살아나갔다.

이리 되면 율리아와 그 휘하 입장에서는 불씨가 다 꺼지지 않은 것과 다름이 없다.

그 부분을 잘 알고 있는 자들은 입을 다문 채 율리아의 눈치만 살피고 있었다.

“잘나신 내 숙부 새끼가 도망을 쳤다. 그렇게나 잘난 척은 다 하더니 꽁무니를 빼다니.”

그 소식을 들은 율리아는 하하하! 하고 영혼 없는 웃음을 흘렸다.

그러다가 들고 있던 지휘봉을 한 손으로 와득! 하고 부러트리긴 했지만.

어지간한 칼질 정도는 버티도록 제작된 것인데, 그걸 악력으로 저리 만들어버렸다.

‘슬슬 성격 나오기 시작하는군.’

여태까지 율리아가 클라우스에게 보인 모습은 오직 ‘클라우스’ 에게만 보이는 것.

가면을 썼다고 말하기에는 조금 어폐가 있을 테지만 일단 그녀가 다른 이들과 클라우스를 대하는 것에 있어서는 거의 다른 사람이라고 불러도 좋을 정도로 차이가 있었다.

가장 힘들고 어려운 시기에 마왕의 후계자이니 적통이니 선대 마왕의 유지를 따른다니 식의 이유가 아닌, 그냥 본인 자체를 믿고 따르겠다는 유일한 사람에 대한 대우라고 할까.

그 외의 상황에서는 여태껏 억눌려있던 마왕의 모습이 나오기 마련이다.

특히 지금과 같이 상당히 불쾌하고 기분이 더러운 경우에는 더더욱 그럴 수밖에 없다.

“아군 상황은 어떠하지. 카엘라?”

“우군은 큰 손상이 없습니다. 당장이라도 진군할 수 있을 정도입니다. 다만 좌군과 중군이 많은 손실을 입었기에 당장 전투는 물론이고 진군조차 불가합니다.”

“…에슐리 팔라티나트.”

“네, 전하!”

“그대와 함께 반역자의 무리에서 떨어져 나온 자들은 어떠하나.”

“솔직히 말씀드리면 이동은 가능해도 격전을 벌이는 것은 무리일 겁니다.”

아우펜과 리리오가 이끄는 병력은 적의 핵심 세력이었다.

당연히 그 저항이 만만치 않았기에 아군의 모든 이들이 피해를 꽤나 많이 봤다.

전체 병력의 2할 이상이 사상자이니 에슐리가 괜한 말을 하는 게 아니었다.

“후우.”

율리아 역시 더는 전투가 불가하다는 부분을 알고 있다.

바로 앞에서 병사들을 지휘하면서 얼마나 큰 피해를 입고 또 입혔는지 직접 보았으니까.

혹 다른 의견을 가지고 있는 이가 있다면 들어볼까 했는데 다들 비슷한 생각인 듯 하다.

“지금쯤이면 서부에도 이쪽의 소식이 전해졌을 겁니다.”

“그렇습니다, 전하. 저 악랄한 인간 놈들이 또 무슨 꿍꿍이를 품고 서부 연합을 뒤흔들어서 아국의 뒤를 칠 수도 있습니다.”

“이 이상 적을 쫓아 더 깊숙이 들어가면 뒤가 불안하다, 이 소리군.”

정전 협정을 맺었다고 하지만 서부도 동부도, 그 어느 누구도 그걸 평화라고 생각지 않는다.

그저 잠깐의 숨고르기일 뿐, 그런 종이 쪼가리는 언제는 불태우고서 또 싸울 수 있다.

한쪽이 틈을 보이면 자연스럽게 그 사이를 파고들 뿐이다.

서부와 동부의 관계는 딱 거기까지일 뿐 더 좋은 방향으로 나아갈 수가 없다.

거기까지 이야기를 들은 율리아는 일단 모두 돌아가라 말했다.

어차피 전투가 끝난 지 채 하루도 지나지 않은 상황이다.

추격을 하든 아니면 이대로 돌아가든 오늘 당장은 아닐 것이다.

대부분의 지휘관들이 막사를 나서고 이제 남은 것은 오직 클라우스 뿐.

율리아는 완전히 박살난 지휘봉을 바라보면서 천천히 입을 열었다.

“당신의 생각도 저들과 마찬가지겠죠.”

“….”

“고마워요, 클라우스. 그래도 당신 덕분에 좌군의 희생이 적었다고 들었어요. 적들을 포섭한 것도, 리리오를 참살한 것도 전부 다. 만일 당신이 없었다면 좌군이 거의 전멸 직전까지 몰렸을지 모르겠어요. 아니… 그 전에 여기까지 오지도 못 했겠네요.”

“율리아.”

“돌아가야겠죠. 병력이 많이 상한 바로 이때가 서부가 노리는 절호의 기회가 될 테니까. 나는 그들과 공생하고 싶었으나 기어코 우리들의 뒤를 치려 한다면….”

“추격하죠.”

추격하자는 클라우스의 말에 율리아는 눈길을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

진심이냐는 그 뜻에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곤 말을 잇는다.

“잡아야 합니다. 적이 주 병력을 전부 잃고 몇 안 되는 지지자들이 전부라 하지만 양쪽에 잠재적 위협을 두고 지낼 수는 없어요. 하나는 반드시 척결해야 합니다.”

“하지만 서부 측 움직임이….”

“당연히 서부는 이번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을 겁니다. 하지만, 지금 상황에서는 어림도 없어요. 당장 분열되어 서로 물어뜯고 싸우는 데에 정신이 없는데 이곳까지 병력을 보낼 여력 따위 절대 없을 겁니다. 비록 군에서 물러난 지 꽤 되었다고 하지만, 서부의 군 동원 상황에 대해서는 나보다 더 잘 아는 이가 없을 거예요.”

“….”

율리아는 그 말을 듣고서는 작은 미소를 지었다.

누구 하나라도 저런 말을, 형식적으로나마 해주기를 바랬었다.

자신도 안다, 추격을 하기에는 병사들 상황이 너무 좋지 않다는 것을.

서부의 공격은 둘째 치고 이곳에서 죽고 다친 병사들이 곧 동부의 마족이요 백성이다.

마왕인 자신이 책임지고 더 윤택한 삶을 내어주어야 할 자들이다.

그런 이들을 무의미한 죽음으로 내몰 생각 따위 전혀 없다.

누군가가 찬성한다고 해도 고개만 끄덕이고는 일단 군을 재정비하자는 말로 마무리할 생각이었다.

“고마워요, 클라우스. 당신이라도 그렇게 말해줘서.”

해서 율리아는 클라우스가 그냥 한 번 해본 말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제 왕을, 제 여인을 탐하려고 했던 빌어먹게도 역겨운 남자에 대한 증오.

그런 불길을 보여줌으로서 제 안의 분노를 조금은 잠재우려고 한다고 여겼다.

“그냥 하는 말이 아니에요, 율리아. 우군이라도 움직여서 당장 쫓아야 합니다.”

“네?”

클라우스가 얼굴을 굳히면서 그렇게 말하기 전까지는 말이다.

“우군이 멀쩡하다고 하지만 그 수가 얼마 되지 않는다는 건 알고 있겠죠, 클라우스. 역적 놈이 본대를 다 잃고 제 몸만 빼냈다고 하지만 동시에 협곡을 탈출한 자들을 규합하면 우군을 상회하는 병력은 금방 갖출 거예요.”

“전부 패잔병에 불과합니다.”

“적들도 바보가 아닌 이상 수성으로 버틸 텐데요? 공성전에서 가장 중요한 건 병력의 숫자에요. 적보다 적은 수로 성을 두드리는 건 어리석은 일이에요, 클라우스.”

특수한 경우가 아니라면 공격자가 방어자보다 항상 두 배는 더 많은 병력을 이끌어야 한다. 아무리 클라우스라고 해도 성이라는 단단하기 짝이 없는 방어물을 두고 적보다도 적은 수로 피해 없이 단시간 내에 뚫기는 어려운 법이다.

공성 장비도 문제고 적이 지원을 받지 못 하도록 성을 포위해야 하는데 그럴 만한 숫자도, 그리고 식량도 여유가 없는 상황이다.

“여기서 시간을 주면 그 망할 역적 놈이 또 다시 간사한 혀를 놀려 패배의 기운을 지우고 훗날을 도모하려고 할 겁니다. 지금이 아니면 몰아붙일 수도 없어요. 신하들은 신하들의 눈높이에서 판단하고 조언을 하는 것이지만 당신은 ‘왕’ 으로서 바라보고 판단해야 합니다. 더 높이, 더 멀리 보세요. 당장 서부가 쳐들어온다는 소식은 없습니다. 뒤를 정리하지 않고서는 앞으로 나아갈 수 없어요. 율리아.”

그럼에도 클라우스는 강력하게 주장하고 나섰다.

우군만을 움직이는 한이 있더라도 반드시 그 역적을 잡아 죽여야만 한다.

율리아는 그리 말하는 남자의 눈동자 속에서 이유 모를 분노와 증오를 읽었다.

자신이 아우펜, 제 숙부에게 보이는 것과 거의 비슷한 감정들.

그걸 바라보면서 율리아는 왠지 모르게 클라우스와 자신이 같은 것을 공유하고 있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다.

생각해보면 클라우스의 말도 일리가 있다.

아우펜이 대패한 마당에 그의 위치는 이전과 절대 같을 수가 없다.

오히려 눈치를 보면서 그를 잡아 바쳐 공을 세우려고 하는 이들이 늘어날 테지.

이 타이밍에 자신이 뒤로 물러선다면 숨이 턱밑까지 차오른 상대에게 호흡을 고를 시간을 주는 것과 다름이 없다.

몰아쳐야 한다, 이대로 들이쳐서 역적이 회복을 하기 전에 깔끔하게 정리해야 한다.

만에 하나 서부가 정말 자신들을 또 다시 적대할 것이 확실하다면.

뒤에 적을 두고서 앞의 또 다른 적을 마주할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그러면 클라우스, 정말로 우군만으로 가능하다고 보는 건가요?”

“중요한 건 병사 수가 아닙니다. 율리아, 당신의 분노와 의지, 그리고 절박함을 보여야죠. 더 정확히 말하자면, 이제야 자신들이 탄 배가 다 가라앉아 희망 따위는 전혀 없음을 알아차린 자들에게 구명정이 어디 있냐고 말해주는 것 말입니다.”

그러자 율리아는 그의 말이 무슨 뜻인지 이해했다는 표정을 지었다.

많이 되지 않는 병력을 마왕이 손수 이끌고 올 정도로, 아우펜에 대한 증오가 대단하다.

그런 순간에 그 자를 낚아채서 앞으로 가져다 바친다면 공이라고 할 수는 없어도 최소한 살 길 정도는 찾을 수 있는 방안이 되지 않을까.

“클라우스. 하나만 물어도 될까요?”

“얼마든지요.”

“이럴 줄 알았다면 숙부, 그 반역자가 군을 일으키기 전에 그 밑의 자들을 설득하면 되지 않았을까. 그런 생각이 문득 들어요. 이리 쉽게 무너질 줄 알았다면, 이렇게 결속이 약할 줄 알았다면….”

“아뇨, 율리아. 원래 무엇이든 일을 벌여봐야 그 약점이 드러나게 되는 겁니다. 그들도 출정하는 순간까지는 아마 승리를 믿어 의심치 않고 그래서 더더욱 충성을 다하고 싶었을 거예요. 막상 보니까 자신들이 택한 길이 꽃밭으로 가득한 길이 아니라 가시 덩굴로 가득한 것임을 알 게 된 것일 뿐이지.”

“….”

“그리고, 이런 식으로 약점을 잡아두어야 나중에 정리하기 좋을 겁니다.”

“정리요?”

갑자기 정리라는 말에 율리아가 이해를 하지 못 했다는 표정을 짓는다.

약점을 잡아둔다는 말은, 상황이 이상하게 돌아가니 박쥐마냥 돌아선 부분을 쥐고서 흔들겠다는 말로 받아들일 수 있다고 하지만.

그 다음 나온 정리라 하는 부분은 율리아로서도 정확하게 알 수가 없었다.

“율리아.”

그런 마왕의 귓가로, 슬쩍 몸을 기울이며 소곤거리는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귀족 나부랭이들에게 휘둘리는 왕은, 서부의 인간 머저리들로 충분해요.”

“그런….”

“왕이 왜 왕입니까. 강력한 권위와 명예로 모든 것을 발밑에 두는 존재. 그것을 왕이라고 부르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지금 상황을 보세요. 아우펜 그 역적 놈도, 그리고 나의 마왕 율리아도. 귀족들이 지지하느냐, 그렇지 않느냐에 따라 희비가 갈리고 있지 않습니까. 나는, 그게 역겨워 미칠 것 같거든요.”

귀족들에 대한 해묵은 증오가 만개하는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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