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6화 〉 19장 - 내전
마왕의 명령에 따라 지휘 막사에서 세 인물을 제외한 모두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들이 떠난 후 안에 남은 인물은 각각 클라우스, 카엘라, 그리고 데스테라는 마족이었다.
마왕성에서 군을 총괄하는 임무를 띠고 있는 마족이지만 사실 군권은 마왕이 완전히 쥐고 있기에 자리가 상당히 모호할 수밖에 없는 인물.
또 호위라고 하기에는 전사장이 있으니 더더욱 난감한 자리에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럼에도 끝까지 마왕성에 남은 걸 보면 어느 정도 전투 경험이 있는 마족에 충성심이 특히 돋보인다고 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지휘관형 마족이었다.
너무 과묵하다는 단점이 있지만 능력은 평균 이상에 심성도 괜찮다.
이 정도면 율리아의 곁에 둬도 합격이라고 할 수 있었기에 클라우스는 데스테를 이후 율리아의 밑에서 독자적으로 하나의 군을 통솔하는 인물로 은근히 밀어주는 중이었다.
“클라우스님. 차라리 제가 좌군을 맡겠습니다.”
그 과묵한 마족이 먼저 입을 열고는 그렇게 말한다.
평소라면 데스테의 말에 율리아가 미소를 지으면서 ‘데스테, 그대가 그리 길게 말하다니 내일 뭔가 엄청난 일이 일어나겠군!’ 이라고 농담이라도 한 마디 던졌을 테지만.
“….”
지금 순간만큼은 율리아도 무척이나 진중한 얼굴을 한 채 클라우스를 바라보고 있었다.
“이유를 물어도 되나요? 데스테.”
“아주 기본적인 이유입니다. 당신은 마왕 전하께 지휘권을 위임 받은 위치에 있습니다. 일개 선봉장이 아닌 군 전체를 통솔해야 하는 지휘관이란 말입니다. 전장에서 그 지휘관이 일선에서 싸우다가 전사한다면 그대로 군이 무너집니다.”
“마왕 전하가 계시는데 군이 무너진다니. 말이 너무 과하군요.”
확실히 율리아에게는 민감한 부분일 수도 있었다.
마왕이 떡하니 살아있는데 지휘관 하나 죽었다고 군이 무너진다면 그것은 병사 어느 누구도 그 군주에 대한 신뢰나 믿음이 없다는 말과 다름이 없다.
하지만 데스테도, 그리고 율리아도 그 부분에 대해서 딱히 동요하는 느낌이 없었다.
오히려 그런 생각은 전혀 하지 않는다는 느낌이 들 정도로 고요할 뿐이었다.
“클라우스. 그대가 대륙 전쟁 시절부터 항상 일선에서 싸우던 건 알고 있어. 하지만 이곳은 그대에게 유리하기만 한 전장이 아니야. 최악의 수도 고려를 한다면 그대가 선봉으로 나서서 적과 드잡이질을 하는 건 옳지 않다고 생각한다만.”
율리아까지 저리 말하면 보통의 경우 한 발 물러나는 것이 정상이다.
그러나 클라우스는 전혀 그런 일 따위, 만약이라는 것은 존재하지도 않는다는 걸 알고 있다.
더해서 자신이 직접 나아가서 예봉을 꺾어야만 일의 진행이 한 결 수월해진다.
“….”
클라우스는 곁눈질로 반대편에 앉아있던 카엘라를 바라보았다.
카엘라도 자신이 아니라 클라우스가 선봉에 선다는 것에 불만을 가지고 있을 테지만.
지금은 그럴 수밖에 없는 상황이고 또 그런 클라우스가 능력이 충분하다는 걸 잘 알고 있다.
때문에 이런 상황에서는 클라우스의 안위를 걱정하는 부관의 마음보다는 역시 가장 믿을 수 있는 자를 가장 중요한 전장으로 보내는 전사의 기질이 앞서게 되어 있었다.
“마왕 전하. 저 또한 클라우스님이 굳이 가장 선두에 서는 게 그리 달갑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지금 상황에서는 그것이 가장 최선의 길이라고 판단됩니다. 제가 꽤나 오랫동안 옆에서 지켜본바 일선에서 싸우는 와중에도 지휘가 흔들린 적이 없었으며 난전에서도 밀려난 적이 없습니다. 장담하건데 저보다도 더 훌륭하게 전투를 치를 것입니다.”
“전사장님. 하지만 지금 클라우스님의 위치가….”
“당시에는 믿을 것이 클라우스님 밖에 없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도 일선에 나섰는데 하물며 마왕께서 바로 옆에 계시거늘 무엇이 걱정입니까. 자신의 주군이 바로 옆에 있다면 신하된 자로서 응당 가장 앞에서 싸우는 것이 우리와 같은 무장들의 숙명입니다.”
아무래도 귀족들과 함께 몇 년을 지내다보니 인내심만이 아니라 화술까지 배워온 모양이다.
맨날 치고 박고 싸우는 것에만 열중하던 호랑이 수인 치고는 꽤나 현란한 말솜씨.
덕분에 과묵하기로 소문난 데스테는 그 일격을 얻어맞고 침묵할 수밖에 없었다.
여기서 더 걸고넘어지면 자칫 자신의 주군, 동부의 마왕인 율리아에게 무례를 범하는 말이 될 수도 있음이었다.
데스테는 조심스레 테이블 중앙에 앉은 율리아를 쳐다보았다.
이런 식으로 의견 차이가 좁혀지지 않으면 결국 모든 결정권을 쥐고 있는 왕이 결정해야 한다.
자신이라고 해서 클라우스가 공을 세우는 게 배가 아프다거나, 혹은 그를 못 미덥게 여겨서 이러는 게 절대 아니다.
세상에서 가장 경계해야 하는 것이 바로 자신 스스로라고, 오만해지고 자만하는 바로 그 순간을 가장 두려워해야 한다고, 데스테는 그렇게 배워왔다.
클라우스라는 인간 남자는 실패를 모른다, 패배를 모른다, 그리고 적에 대해서 모른다.
아무리 대단한 지휘관이라고 해도 빈틈 하나로 인해 패배에 닿게 되는 건 순식간이다.
정말 만에 하나라도 뭔가 일이 잘못 되어서 사정없이 꼬이게 된다면 아군 측은 가장 강력한 카드를 시작부터 잃어버릴 수도 있음이다.
“전하.”
제 앞에 앉아있는 이들의 부름에 율리아는 감고 있던 두 눈을 떴다.
그녀의 시선은 잠시 동안 데스테와 카엘라에게 머무르다가 곧 클라우스에게로 고정되었다.
율리아도 알고 있다, 지금 데스테가 무엇을 걱정하고 있는지.
병사들의 충성심이 물론 확고하다고는 하지만 마왕인 자신 못지않게 클라우스에게도 기대를 하고 있는 것이 당장 두 눈에 보인다.
그런 상황에서 저 남자가 혹여나 눈 먼 화살이라도 맞아서 쓰러진다면, 설사 죽지 않는다고 해도 사기 부분에서 최악의 피해를 입고 말 것이다.
‘…하지만, 그 부분을 클라우스가 모르고서 저리 나설 리는 없어.’
결정을 내린 율리아는 클라우스를 바라본 상태로 고개를 끄덕였다.
당신이 원하는 대로, 좌군을 맡아 가장 먼저 협곡 안쪽으로 들어가도 된다는 뜻이었다.
율리아의 결정에 데스테는 고개를 숙였고 클라우스는 미소를 지으면서 입을 열었다.
“감사합니다, 전하. 실망시켜드리지 않도록 최선을 다 할 것입니다.”
* * * * * * * * * *
세하라 협곡 안으로 먼저 들어온 쪽은, 역시나 반 마왕파였다.
병력이 배는 더 많았음에도 먼저 출발했고 또 속도도 늦추지 않았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협곡으로 들어온 후 아우펜과 휘하 마족들은 바로 포진을 하기 시작했다.
세하라 협곡은 비교적 낮은 산지에 감겨있는 지형이고 가운데에 분지가 있는 형태다.
일종의 항아리라고 생각하면 될 텐데 마왕군은 좁은 길을 통하여 그 항아리로 들어와야 한다.
때문에 반 마왕군은 좁은 길이 시작되는 지점에 부대를 순차적으로 위치시켰다.
뿐만 아니라 목책까지 두르고 방어 진지까지 두를 정도로 완벽하게 전투를 준비했다.
“이 상태라면 적들은 좁은 언덕길을 올라서 협곡을 돌파해야겠군요.”
“이상하군요. 이런 지형에 들어온다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인데, 여기를 내주다니.”
이미 협곡 안의 동쪽 비탈은 물론이고 남쪽 부근까지 포진을 마친 반 마왕군이다.
항상 매사에 의심을 품고 또 조심하는 성격의 아우펜이 자신의 본대까지 이끌고서 마왕군이 뚫고 들어와야만 하는 동부의 낮은 산을 점령하고 기다리는 중이었으며.
그 밑에는 그를 보좌하는 여러 마족들이 자신들의 병사들을 이끌고 다섯 겹에 이르는 방어진까지 펼치기까지 했다.
“거기에 그 남쪽에는 미리 숨겨둔 좌군 선봉 팔라티나트 가주가 대기 중이었죠.”
“가문은 그리 크지 않으나 병사 하나하나가 정예이니 쐐기를 박을 때 유효할 겁니다.”
아우펜 입장에서는 나름의 준비를 한 것이었다.
적들이 협곡 안으로 들어오면 가장 먼저 부딪치는 건 자신과 그 본대.
다음으로는 자신을 확고히 지지하는 충성파들의 정예병들.
배신이라는 것도 결국 판이 굴러가는 상황을 보고서 해야 하는 법이다.
저쪽이 자신들의 방어를 뚫기는커녕 점점 밀려나는 장면을 본다면 허튼 생각을 하던 자들 모두가 입을 싹 닫고 자신에게 충성할 것이라는 점을 아우펜은 알고 있었다.
그래서 팔라티나트를 남쪽의 쐐기 부분에 선봉으로 두고 또 그 근처에 자신에게 충성을 다하는 또 다른 가문을 포진까지 시켜두었다.
“적들이 방어선을 밀어내지 못 하고 밑으로 밀려난다면 무방비로 측면이 노출될 겁니다. 그 때 공격한다면 결정적인 공을 세울 수 있으니 팔라티나트도 결국 다시 예전의 위세를 회복할 수 있겠군요.”
영리하게도 아우펜은 팔라티나트에게 큰 공을 세울 자리까지 만들어주었다.
쐐기 부분에 해당되는 그들이 치고 올라간다면 적들은 그대로 포위되어 공중 분해된다.
여태 섭섭한 부분이 많았음을 나도 잘 알고 있다, 그러니까 최고의 공을 세울 기회를 준다.
아우펜이 내민 그 달콤한 손길을 과연 거부할 수 있는 이가 몇이나 있을까 싶다.
단순히 병력의 숫자만이 아니라 지형의 유리함, 그리고 전투에 대한 준비까지.
병력만 보면 2배의 차이가 난다고 하지만 모든 부분을 통합해서 봤을 때 거의 다섯 배까지 차이가 난다고 봐도 아무런 무리가 없을 정도였다.
“심지어 우리에게는 더 무시무시한 함정이 있으니까….”
“아무리 그 남부의 악마라고 해도 범의 아가리에 들어오면 결국 목을 물리고 말 겁니다.”
반 마왕군의 지휘관들은 그렇게 중얼거리면서 입가에 미소를 그렸다.
남부에 팔라티나트를 위시한 좌군을 숨겨두기도 했지만, 그보다 더 치명적인 것이 있다.
바로 협곡의 서쪽에 미리 매복시켜둔 우군이 그 정체였다.
적의 선봉이 협곡 안으로 들어오고 뒤를 이어서 후속 병력이 안으로 들어오면 그대로 뒤를 끊어서 적들을 완벽하게 고립시킬 작정이었던 것이다.
만약 적의 본대에 마왕 율리아 아그네사가 있다고 가정한다면, 마왕조차 그 포위망에 갇혀서 오도가도 못 하는 신세가 될 게 분명했다.
‘이건 질 수 없는 싸움이다. 이길 수 있다.’
‘병력의 숫자에서도, 포진에서도, 전략에서도 우리가 압도적이야. 우위에 있다고.’
‘…그런데.’
‘그런데 어째서….’
비록 서로에게 당당한 기세로 이야기를 나누기는 했지만, 실은 자리에 모인 모두가 알 수 없는 불안감에 안절부절 못 하고 있는 중이었다.
대륙 전쟁에서의 악몽을 잊었는가? 악마의 무시무시함을 망각했는가?
천 여 명으로 3만이 넘는 병력을 박살낸 전적이 있다.
7년 동안 단 한 번도 패배하지 않았다, 말 그대로 악마 같은 놈이다.
그런 부분들이 겹치니 승리를 위한 모든 조건이 완성되었음에도 자꾸만 불안해졌다.
“급보입니다!!”
마족 지휘관들이 그렇게 입술을 깨물고, 팔짱을 낀 채로 끙끙거리던 와중에.
각 군의 연락을 담당하는 전령이 거친 숨을 내뱉으면서 그들을 찾아왔다.
이리도 급한 기색으로 자신들을 찾아왔다는 것은, 단 한 가지 경우만을 의미한다.
“적들이 지금 막 협곡 입구에 도착했습니다. 곧 적이 협곡 안으로 들어온다고 합니다!”
마침내 마왕의 자리를 걸고 벌어지는 내전이 시작되고야 말았다.
질질 끌면 둘 모두에게 심각한 손해를 끼친다.
모두가 단 한 번의 전투로 심각한 손상을 가하고 다시는 일어설 수 없도록 할 것이다.
“적의 좌군이 먼저 진입한다? 가장 앞에 누가 섰지? 아인인가? 아니면 데스테인가.”
“둘 다 아닙니다.”
“둘 다 아니라고?”
“예. 적의 선봉에 선 자는… 마족이 아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