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5화 〉 19장 - 내전
“그 빌어먹을 조카 녀석이 드디어 출병을 했다고.”
“그렇습니다, 전하.”
“병력 숫자는? 그래도 이쪽과 얼추 비슷한 숫자는 맞추려고 했을 것 같은데.”
“저희도 그렇게 생각했으나 선발대와 본대는 물론이고 후군을 합쳐도 7천이 간신히 넘는 수준이라는 소식이 조금 전 들어왔습니다.”
“7천이라. 만 명도 안 되는 병사들을 가지고서 진군을 시작했다?”
아우펜은 턱을 만지작거리면서 생각에 잠겼다.
상대 진영에 제 조카만 있었다면 초조해서, 그리고 병력 숫자가 전투의 향방을 결정하는 아주 결정적인 요소가 되지 않음을 믿고서 오는 것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이제는 그 모든 긍정적인 믿음들에 아무런 의미가 없게 되었다.
역적 토벌을 외치며 진군하는 그들 사이에, 아우펜은 물론이고 반 마왕파 귀족의 어느 누구라도 해도 함부로 대할 수 없는 인간이 하나 끼어있었으니까 말이다.
“전하, 뭔가 이상하지 않습니까. 그 남부의 악마 놈이 같이 있음에도 병력 우위를 점하지 않고서 그대로 진군하고 있습니다. 뭔가 께름칙합니다.”
“아무래도 클라우스, 그 인간이 뭔가 술수를 부려둔 게 아닐까요.”
의견을 제시하는 자들은 모두가 대륙 전쟁에 참전한 경험이 있는 실전형 무장들이다.
그런데도 이렇게 긴장해서는 이런저런 의견을 내놓는 모습을 보라.
저것만 봐도 클라우스라는 이름이 가지는 위력이 어느 정도인지 아주 확실하게 알 수 있었다.
“흐음.”
침음을 흘리면서 아우펜은 지도를 다시 한 번 들여다보았다.
자신의 영역에서 마왕성으로 향하려면 반드시 지나쳐야 하는 곳이 하나 있다.
세하라 협곡으로 불리는 지형인데, 만일 적들이 발 빠르게 나서서 이곳을 확보하고 아군의 진군을 방해할 시 부득이하게 아군은 그 몇 배나 되는 거리를 빙 돌아서 이동해야만 했다.
‘그렇지 않아도 먼 거리다. 이동이 길어지면 적들이 기습하기에 딱 좋은 순간이야.’
병력의 이동 속도는 항상 그 병력의 규모와 비례한다.
물론 아닌 때도 있다고 하지만 보통의 경우에는 그 법칙이 지켜지기 마련이다.
숫자가 많다면 행렬이 더 길게 늘어지고, 명령을 한 번 전달해도 몇 십 분이 걸리기도 한다.
그리고 그렇게 해서 늘어진 행렬은 조금만 흔들어도 크게 망가지기 쉽다.
만에 하나 정말로 협곡이 적의 수중에 떨어진다면 시작부터 지고 들어가는 일인 것이다.
해서 아우펜은 무리를 하지 않는 선에서 속도를 최대한으로 끌어올렸다.
행군 속도가 올라가면 올라갈수록 싸움을 하기도 전에 전력 손실이 오게 된다.
따라서 적절하게 속도를 유지하는 것이 관건이지만, 이번에는 어쩔 수가 없었다.
병사들도 적이 협곡을 먼저 점하면 결국 피곤한 건 본인들임을 잘 안다.
그렇게 하여 결국 협곡 근처까지 다다르게 되었는데, 어찌 된 일인지 당장이라도 협곡을 점해야만 하는 쪽인 율리아가 이제야 군을 움직였다는 보고가 날아온 것이었다.
‘세하라 협곡은 적은 숫자로 다수를 막을 수 있는 곳이다. 만약 역으로 이곳을 우리에게 넘겨주면 무슨 일이 일어날지 클라우스는 물론이고 율리아도 모를 수가 없어. 여기를 문 삼아 마왕성을 계속 두드리면 결국 무너지는 것은 자신들임을 모를 수가 없단 말이다.’
아무래도 뭔가 이상해서 몇 번이고 확인을 했지만 이제야 진군을 시작했다는 게 틀림없었다.
무슨 사정이 있었던 것인지, 아니면 뭔가 다른 수가 있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이제 더는 무를 수도 없는 순간까지 왔다.
이왕 이리 된 거 빠르게 세하라 협곡을 점령하고 이후 적들의 움직임을 살펴야 했다.
“우리 군의 선봉은 언제쯤 협곡에 닿는다고 했지?”
“늦어도 이틀 안이면 도착한다고 했습니다.”
“빠르군. 혹 진군에 무리를 해서 병사들이 싸우기도 전에 지치면 곤란하다.”
“그 부분에 대해서 확실하게 주의를 해두었습니다, 마왕 전하.”
“그렇다면 다행이겠지만.”
마왕이 이미 버젓이 있건만, 아우펜의 수하는 제 주군을 마왕이라 칭하고.
그 말을 듣는 아우펜도 아주 당연하다는 듯 그것을 듣고 있었다.
율리아가 예상 외로 매우 대담하게 나오고, 거기에 클라우스가 옆에 있다고 하지만.
이쪽도 믿는 수가 여럿 있으니 두려워만 할 필요는 없었다.
병력의 숫자에서 이미 두 배 정도 차이가 나고 지휘관들 역량도 이쪽이 우세하다.
무엇보다 실전을 치렀던 이들이 자신들 진영에는 아주 많은 반면, 저쪽은 거의 없다고 봐도 무방할 정도였다.
다만 마음에 걸리는 부분이 하나 있다면, 그 실전 경험을 치른 몇 없는 이들 중에 하필 클라우스가 끼어 있다는 것이었다.
괜한 걱정, 혹은 설레발을 치는 것이 절대 아니다.
대륙 전쟁에서 동부의 그 어떤 인물이라도 그 남자를 넘어선 적이 있었던가?
없다, 한 번도 없다, 정말 눈을 씻고 찾아봐도 그런 마족은 없었다.
있는 건 그를 찬양하고 추종하는 마족들, 아니면 역으로 이를 가는 자들이 전부였다.
이렇게 해야 그를 이길 수 있다 뭐 이런 식으로 조언을 할 수 있는 이가 없는 것이었다.
‘자칫 잘못하면 한 번에 말아먹는 수가 있다. 조심해야 해, 조심해야 한다.’
클라우스만이 경계된다면 이렇게 걱정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를 추종하는 마족들이 자신의 진영에 없다고 어느 누구도 확신할 수 없다.
당장 어떤 놈이 그에게서 비밀 서신을 받고서 이상한 꿍꿍이를 지니고 있을 수도 있다.
배신자가 생기면 아군의 전력은 줄어들고 반대로 적의 전력은 늘어나게 된다.
그게 몇 번만 발생해도 압도적으로 유리한 자신이 거꾸로 당할 수도 있다.
이런 식이니 아우펜도 절대 안심하고 일을 진행할 수가 없었다.
이런저런 말로 포장하기는 했지만, 결국 자신이 반역자인 건 변함이 없다.
만약 자신 밑의 누군가가 새로운 왕을 세우는 공신이 아닌, 거대한 역적을 쳐죽이는 충신이 되기로 하고 칼을 거꾸로 잡는다면 상당히 큰 문제가 발생할 수 있다.
원래부터 의심이 많은 성격인 아우펜은 덕분에 요즘 최고로 민감했다.
혹 누군가가 다른 생각을 하는 건 아닌지, 뚱한 대답을 하는 모두가 의심스러웠다.
팔라티나트도 그 중 하나였는데 그나마 그곳의 전대 가주가 아직까지 자신을 따르고 또 지지하고 있기에 대놓고 경계하지 않고 있을 뿐이었다.
그들을 선봉에 세운 것도 조금이라도 허튼 짓을 한다면 뒤에서 찔러서 완전히 궤멸 시킬 계획까지 가지고 행한 일들이었다.
“군 배치도를 다시 가져와라.”
불안한 기색으로 서성이던 아우펜이 입을 열었다.
곧 수하가 아군의 배치 현황도를 가져오니 그는 두 눈을 가늘게 뜨고서는 몇 개의 군 배치를 바꿔서 다시 제 수하에게 내밀었다.
“이대로 다시 재배치해라. 그리고 이상한 낌새가 보이면, 그대로 밀어버리라고 해.”
“알겠습니다, 전하.”
아우펜의 수하는 수정된 배치도를 가지고서 막사를 나섰다.
* * * * * * * * * *
한편, 진군을 막 시작한 율리아 측도 여전히 불안하기는 마찬가지였다.
마왕이 확언을 했고 군의 지휘를 맡은 클라우스가 더는 언급을 하지 않으니 자신들이라고 해서 뭐라 말을 할 수 없는 상황이지만.
그래도 세하라 협곡을 적에게 그대로 홀라당 내어준다는 건 여전히 불편한 것이었다.
비유하자면 저 앞에서 날아오던 칼날이 순식간에 턱 바로 아래까지 들어오는 격.
다른 이들 같았으면 그걸 방지하기 위해서 빠르게 군을 움직여 협곡을 점했을 거다.
하지만 클라우스는 오히려 훈련 때보다도 더 느리게 군을 이동시키고 있는 중이었다.
“그대들이 불안해 하는 것을 이해하지 못 하는 건 아니다.”
율리아는 회의 시간 때마다 그런 제 신하들을 안심시켰다.
클라우스를 믿으라는 것이 아니라 그를 믿는 자신의 안목을 믿으라.
이번 싸움이 중요하다는 것을 나도 알고 그도 알고 있으니 한 번 지켜보라.
그리 말하는 마왕의 얼굴과 목소리에는 진중한 기운이 가득 담겨있었다.
“모두가 불안해하는 것은 이해한다. 하지만 이 이상의 불안은 되레 나를 불쾌하게 만들 뿐이다. 내가 아무리 군에 대해서 모르는 것이 많다고 하지만, 좁은 곳에 군을 이끌고 미리 포진까지 하고 있을 적과 싸우는 게 이기는 길인지 아니면 패배하는 길인지 모를 정도는 아니다. 나는 남부의 악마를 믿는 것이 아니라 내게 충성을 맹세한 신하를 믿는 것이야. 그 믿음을 믿지 못 한다면 나에 대한 믿음이 부족한 것이니 이제들 그만 해주었으면 한다.”
이번의 전략은 클라우스가 냈다고 해도 결국 거기에 동의하고 밀어준 이는 마왕 율리아다.
그렇기에 이 이상의 불안감은 불쾌할 뿐이라고, 곧 싸워야 할 이들에게 전혀 좋지 않은 것이라고 율리아는 은근히 강한 어조로 중얼거렸다.
그러는 사이 군의 행군 상태를 보러 나갔던 클라우스가 돌아왔다.
율리아를 제외하면 군의 최고 지휘관이라고 할 수 있는 이가 쉬지 않고 돌아다니는 중이었는데 몇몇 마족들은 그런 클라우스의 모습을 신기하게 쳐다보곤 했다.
“다녀왔습니다, 전하.”
“그래. 나갔던 일은 전부 다 끝내고 온 건가?”
“이 정도 속도면 사흘 후 협곡에 진입할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좌군이 먼저 진입하고 다음이 중군, 마지막으로 우군이 후위를 맡다가 진입할 계획입니다.”
“협곡이 길지는 않다고 하지만 길이 좁은 것은 사실이다. 만약 도중에 공격을 당한다면 좁은 곳에서 공격을 받을 터인데?”
“아우펜, 그 자는 중군이 막 협곡을 건너기 전까지 공격하지 않을 겁니다.”
클라우스의 확신에 가득 찬 대답에 마족들은 물론이고 율리아마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는다.
예측이라면 또 모를까, 확언을 하는 것이 조금은 이해가 가지 않는 모양이었다.
“역적 아우펜은 본래 의심이 많습니다. 우리가 협곡을 그냥 내어준 것도 이상할 텐데 그 안으로 병력을 들이민다고 하면 더더욱 수상하게 보일 테죠. 심지어 그들을 이끄는 이가 저라고 이미 다 알려졌으니 그 의심은 더더욱 짙어질 것입니다.”
“…그래서?”
“원래는 적의 군이 들어오면 진형을 짜기 전에 공격하는 것이 맞습니다. 당연한 부분이죠. 허나 제가 확신하는데 그 자는 제 의심에 스스로 넘어지고 말 겁니다. 좌군이 들어온 것이 그냥 정석적인 공격 방법임을, 중군이 이후 들어오는 것을 확인하고서야 비로소 의심을 거둘 겁니다. 그 때 첫 전투가 벌어질 겁니다.”
율리아는 그 말에 잠시 고민에 빠졌다.
클라우스의 말대로 자신의 숙부는 의심이 매우 많은 남자다.
좋게 보자면 조심스러운 것이고, 나쁘게 말하자면 속이 좁은 것.
여태까지는 그 성격의 좋은 부분이 계속 나타나서 사사건건 자신을 방해했다지만.
이런 전격적인 결정과 행동이 필요한 순간에는 역으로 독이 될 수 있었다.
“하지만 클라우스님. 만약 역적 아우펜이 군 지휘권을 다른 자에게 넘긴다면….”
“방금 클라우스가 말하지 않았나. 내 숙부는, 역적은 의심이 많다. 그 남자도 바보가 아닌 이상 배신의 가능성을 열어두고 있을 거다. 심지어 우리처럼 몇 안 남은 이들이 강한 결속력을 지닌 것도 아니고 요 몇 년 사이에 급격하게 세력을 불려서 아직 누구를 믿어야 하는지 확신이 들지 않는 상황에서는 더더욱 의심할 수밖에 없겠지.”
클라우스가 일을 서두른 이유도 바로 거기에 있었다.
시간을 주면 어차피 유리한 쪽은 세력을 정비해야 하는 역적 놈들이다.
저들의 군세를 가장 효과적으로, 또 재빠르게 움직여서 일격에 박살내야만, 아카데미 방학 안에 전부 마무리 할 수 있다.
“클라우스. 그러면 가장 먼저 진입하는 좌군이 중요하겠는데, 누가 좌군을 맡게 되는 거지?”
“원래 좌군은 회전에서는 주로 적의 우군을 받아내는 데에 주력한다지만, 이번에는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해야 합니다. 그렇기에.”
잠시 뜸을 들인 클라우스는 율리아를 바라보면서 말을 이었다.
“제가 그 선두에 설 생각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