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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왕가 비선실세-204화 (204/341)

〈 204화 〉 19장 - 내전

“….”

율리아는 자신에게 갑옷을 입혀주는 플랑슈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분명 평소와 다름없는, 일말의 표정 변화도 없는 메이드가 맞는데.

아까 전부터 자꾸만 묘한 이질감이 그녀에게서 들고 있었다.

뭐라고 해야 할까, 행동 하나 하나에 자신감이 붙었다고 해야 하나?

이전까지는 자신을 대하는 데에 있어서 조심스럽다, 그런 것 말고 또 다른 뭔가 있었는데.

“플랑슈.”

“네, 마왕 전하.”

“그와 밤을 보냈구나. 그렇지?”

눈앞의 이 메이드가 내는 기운이 달라진 이유는 그것밖에 없다.

율리아가 보기에 플랑슈라는 이 마족은 다른 부분은 일절 상관없이 오직 클라우스에게만 모든 것이 맞춰져 있는 느낌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리고 자신이 플랑슈의 공을 직접 인정하기도 했으니, 아마 이 앙큼한 메이드라면 바로 그에게 달라붙어서는 저 무표정한 얼굴을 싹 치워버리고 아양을 떨었을 것이다.

“….”

침묵은 곧 긍정이라고 했던가.

플랑슈의 반응을 지켜보면서 율리아는 한동안 잊고 있었던 불길이 다시 타오르는 걸 느꼈다.

아카데미에서는, 그래. 이해할 수 있었다.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다.

자신은 왕이 아니라 생도였고 그는 자신의 신하가 아니라 교수였다.

클라우스를 자신의 남자라고 여기고는 있지만 거기에서 얻을 수 있는 뭔가를 위해 여인들과 접점을 만들어두었고 결과적으로 다 율리아에게 나쁘지 않은 결과로 다가왔다.

하지만 여기는 마왕성, 자신의 왕좌가 있는 곳이며 자신이 왕으로 있는 곳이다.

여기에서 자신의 남자가 다른 여인과 살을 맞대면서 구른다고 생각하니 짜증이 치솟았다.

이해하자, 이해할 수 있다, 분명 그렇게 스스로에게 말했었는데.

정작 이렇게 그 이해할 수 있다 한 상황을 마주하니 질투심이 확 일었다.

“좋았니?”

플랑슈가 막 손목 보호대를 착용해주다 말고 멈칫거렸다.

율리아의 목소리에서 짜증, 분노, 그리고 질투가 흘러나오고 있음을 눈치 챈 것이었다.

잠시 고민하던 메이드는 이 마왕을 자극하지 않기 위해 몸을 숙이기로 했다.

“죄송합니다, 마왕 전하.”

“난 그런 대답을 들으려고 이 바보 같은 질문을 한 게 아니야, 메이드 플랑슈.”

“죄송합니다.”

“다시 한 번 물을게. 좋았어? 클라우스의 품에서 행복했냐고.”

“그렇습니다.”

망설이지 않고 바로 대답을 하는 플랑슈.

내심 조금이라도 고민하는 기색이 보였다면, 자신의 눈치를 살피는 느낌이 났다면 대답이 느리다는 걸 핑계 삼아서 클라우스 곁에서 떨어트릴 생각이었는데.

또 저렇게 얄밉게 피해가는 걸 보니 확실히 보통 메이드는 아니었다.

하아, 한숨을 쉬면서 율리아는 몸을 돌렸다.

그러자 메이드의 손길이 그녀의 등 뒤 부분 이음새를 마저 마무리해주었다.

“그래, 네가 공을 세웠고 내 입으로 내가 허락한다면 메이드의 업무가 아닌 다른 것을 해도 된다고 했으니 이런 대화는 의미가 없겠지. 미안하다, 플랑슈. 못 볼꼴을 보였어.”

“아닙니다, 마왕 전하. 전하께서 사과하실 일이 아닙니다.”

말을 마친 후 플랑슈가 조심스레 뒤로 물러섰다.

율리아의 모습을 한 번 쭉 둘러보는 것이 혹 미흡하게 준비된 곳이 있나 확인하는 모양새였다.

잠시 상태를 확인하던 플랑슈는 다 되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앞으로도 계속 그렇게 충성을 다 해주었으면 한다, 플랑슈.”

“여부가 있겠습니까.”

“하지만, 이거 하나는 확실히 해두자.”

꾸욱, 꾸욱-.

갑옷의 관절 부분을 이리저리 움직이며 불편한 곳이 없는지 확인하는 율리아.

그리고 검을 휘두르는 것 같은 모습을 취하다 말고 플랑슈 쪽을 바라보았다.

“어찌 되든 클라우스는, 그 남자는 내 거다. 지금이야 사정이 있어서 독점을 잠시 동안 포기했지만 너무 많은 여인들이 그의 곁에 있는 건 딱 질색이야.”

“이해했습니다.”

“적당히 해. 내가 받아들일 수 있는 선에서. 이해해주겠다고, 허락하겠다고 해놓고서 이리 말하는 게 우스울 수도 있겠지만 원래 마음이란 게 항시 변하고 흔들리는 법이니까.”

왕으로서 변덕은 가장 피해야 하는 것 중 하나라고 배웠다.

하지만 지금 이 변덕은 왕으로서 하는 것이 아니라 여인으로서 하는 것.

그러니까 클라우스도 조금은 이해해주지 않을까 하고 생각하는 율리아였다.

플랑슈 역시 율리아가 매우 불편해 하고 있다는 부분을 확실히 인지하고 있다.

해서 그녀는 다른 말은 없이 그저 알겠다고만 대답했다.

지금 상황에서 다른 말을 해서 이득이 될 것이 일단 전혀 없고.

거기에 플랑슈 본인도 율리아와 클라우스의 관계가 단순한 남녀 관계 이상임을 안다.

아카데미에서부터 면밀하게 관찰한 결과, 그 부분을 확실하게 인지하게 되었다.

보통의 군신 관계라 하기에는 너무 가깝고, 그저 달달한 남녀 사이로 보기에는 과하게 달아오른 면도 있으며 뜻을 같이 하는 동지라고 하기에는 그 경계가 모호하다.

때문에 더더욱 그 사이에 끼어드는 것이 위험하다는 걸 플랑슈는 확실하게 알았다.

질투가 나지 않느냐고 묻는다면 물론 거짓말이겠지만 눈앞의 이 마왕보다는 덜 할 것이다.

“마왕 전하께서 심려하시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하물며 이번 일도 마왕 전하께서 허락하시어 가능했던 일입니다. 나중에 또 공을 세워 전하께 인정을 받기 전까지는 결코 메이드의 업무를 벗어나는 행위를 하지 않을 겁니다.”

“…그리 말해주니 참 고맙네. 말이라도 말이야.”

가벼운 미소를 지은 채 율리아가 손을 내민다.

그에 플랑슈는 옆에 놓여 있던 율리아의 검을 조심스레 잡아서는 그녀에게 올렸다.

허리춤에 그 검을 착용한 율리아는 거울에 비친 제 모습을 바라보았다.

검을 착용한 적이야 많이 있지만 이렇게 갑옷까지 전부 입은 건 처음 있는 일이었다.

대륙 전쟁 당시 그녀는 아직 어렸기에 전장으로 나아갈 수 없었고, 전황이 그리 좋지도 않은 판국에 더더욱 왕위를 계승할 후계자를 내놓는 법은 어디에도 없었다.

해서 율리아는,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이 무척이나 낯설게 느껴졌다.

‘심지어 내가 상대해야 하는 적들이, 동부를 위협하는 자들도 아니고 그래도 이 동부의 주축이라는 자들이라니. 더더욱 비참하기 짝이 없어.’

입술을 앙다물며 율리아는 그래서 더더욱 스스로에게, 그리고 숙부에게 분노했다.

차라리 본인이 더 일찍 철이 들고, 더 일찍 강해졌다면 이런 일은 없었을 텐데,

혹은 말도 안 되는 욕심을 품지 말고 오롯이 이 동부를 위해서 조카를 도와주었으면 좋았을 텐데.

당장 서부 연합이 여전히 좋지 않은 눈길을 한 채 동부를 노려보고 있는 와중이다.

전정 협정을 맺었다고 하지만 국경 인근의 긴장 상태를 보면 평화의 시대라 할 수도 없다.

이런 때에 동부에서 난리가 났다는 소식이 전해진다면 과연 그들이 침묵할까?

“마왕 전하, 부디 대승을 거두고 오시길 간절히 기원하겠습니다.”

문득 옆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천천히 고개를 돌려본다.

거기에는 플랑슈가 바닥에 무릎을 꿇고서 납작 조아린 채로 승리를 기원하고 있는 중이었다.

감히 마왕에게 반기를 드는 역적들을 모조리 처단하고 승전보를 울리시기를.

율리아는 그렇게 바라는 은발 메이드를 한동안 말없이 쳐다보다가 미소를 지었다.

“그래. 이기고 돌아오마. 그래야 너도 또 한 번 내게 허락을 받을 테니까. 잠시 자리를 비우는 동안 이곳을 잘 부탁한다. 메이드 플랑슈.”

“돌아오시면 바로 온수에 몸부터 담그실 수 있도록 준비를 해두겠습니다. 마실 건 뭐로 하시겠습니까? 밀크티? 커피? 아니면 차로 준비합니까?”

“그건 돌아와서 정하지. 뭐가 마시고 싶을지는 나도 확신하지 못 하겠군.”

허면 그리 알고 기다리고 있겠다 답하는 플랑슈였다.

그녀를 바라보면서 확실히 메이드 업무는 잘 하는 것 같네, 라고 생각하면서.

율리아는 걸음을 옮겨 바깥으로 향하기 시작했다.

“… …!”

“… … …!”

한 걸음, 한 걸음, 마왕성의 계단을 내려갈수록.

이후 1층에 다다라 문을 열고 바깥으로 향할수록.

마침내 마왕성 바깥으로 향하는 성문 앞에 가까이 다가가면 갈수록.

율리아는 거대하고 대단한 기세가 오직 자신 하나만을 기다리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비록 제 숙부가 모은 1만이 훨씬 넘는 군대에 비하면 절반 정도밖에 되지 않는 숫자이지만.

아직 정식으로 군 앞에 모습을 드러낸 적이 없는 율리아로서는 수천이 넘어가는 병사들 앞에 서는 것이 무척이나 부담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어제까지만 해도 별 일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오늘 아침에 일어나서도 정말 별 것 아니라고, 평소와 다름없이 그냥 말 몇 마디만 하면 끝이라고 여겼는데.

갑옷을 입고 검을 찬 후 마침내 병사들이 도열해있는 장소로 향하고 있다 생각하니.

율리아는 미친 듯이 심장이 두근거리고 당장이라도 터지는 건 아닐까 걱정도 들었다.

이제부터 다른 누구도 아닌 바로 자신을 위해서 싸우고, 다치고, 또 죽어야 하는 자들이다.

그런 병사들 앞에서 최소한 그럴 만한 가치가 있는 왕임을 알려주어야 한다.

멋지고, 또 웅장한 말로서 전의를 불태우고 뜻을 하나로 모아야만 한다.

만약 실수라도 한다면, 저들 앞에서 실망스러운 모습을 보인다면 그 때는….

“아무 일도 없을 겁니다, 율리아.”

문득 옆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고개를 돌려본다.

거기에는 율리아처럼 완전 무장을 갖춘 채 제 옆으로 다가오는 클라우스가 있었다.

그는 슬쩍 주변을 둘러보고서 아직 율리아의 곁에 아무도 없음을 확인한다.

직후 긴장한 기색이 역력한 율리아의 이마에 조심스레 입술을 맞추었다.

“고작 말 한 마디 못 한다고 해서 떠나갈 자들이었다면, 여기 나서지도 않았어요.”

“아, 아아….”

“비록 당신에 대한 의문은 있을 수 있어도, 결국 이 동부의 주인은 마왕이라는 것. 그리고 마왕에 반하는 자는 더 생각해볼 가치도 없는 역적이라는 것. 이게 그들의 생각이고 결론이랍니다. 그러니까, 긴장할 필요 없이 평소대로, 원래 준비한 대로. 그대로 하면 될 뿐이에요.”

다른 이도 아니고 7년의 그 긴 전쟁에서 단련이 된 남자가 해주는 말이다.

율리아는 다른 그 어떤 위안보다도 그 말이 더 안심이 되는 것을 느꼈다.

미친 듯이 쿵쾅거리던 가슴이 점점 잦아들고, 그 빈 자리에는 자신감이 차오른다.

율리아는 여유로운 미소를 짓고서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마침내 마왕성의 성문이 열리고, 그 앞에 도열해 있던 지휘관들과 병사들은 비로소 자신들의 가장 위에서 모든 명령을 내릴 동부의 군주와 직접 마주할 수 있었다.

“….”

도통 속내를 알 수 없는, 무표정한 얼굴로서 단상 위에 자리하는 율리아.

그녀는 잠시 제 앞에 선 병사들과 그 지휘관들을 바라보다가 옆에 있던 클라우스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곧 클라우스의 증폭 마법이 발현되고, 율리아의 목소리가 단상 바로 앞에서 수천의 대열 끝까지 아주 확실하게 전달되기 시작했다.

“긴말하지 않겠다. 지금의 내가, 너희가 어떤 모습인지 한 번 살펴봐라.”

마왕의 명령에 병사들이 자신을 한 번 내려다보고, 옆에 선 동료들을 살핀다.

딱히 별 다를 것이 없는 모습들, 전장으로 나아가는 병사의 모습이다.

“다 보았다면, 이제 그 모습을 잊어라. 전부 잊어라. 승리하고 돌아온다면 모든 것이 바뀌어 있을 테니까. 그대들은, 지금과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살아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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