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0화 〉 18장 - 새로운 바람
불편하다, 불편하다, 엄청나게 불편하다.
세실리가 마왕성으로 들어온 후 느끼는 감정은 오직 그것뿐이었다.
클라우스에게 언제나 괴롭힘을 당하고 싶어 안달이 난 변태 마족.
그게 세실리의 숨겨진 본모습이긴 하지만 거기에 함몰되어 완전히 눈이 돌아간 건 아니다.
세실리 본인도 나름 거대한 귀족 가문의 영애다.
자신을 바라보는 이들의 눈빛에 호의가 담겨있는지, 아니면 불신이 남겨있는지.
어떤 생각을 품은 채 이쪽을 바라보고 있는지 그 정도는 다 알 수 있다.
‘애써 아닌 척 하지만 마왕성에 있는 마족들의 표정이 좋지 않았어.’
간간이 클라우스나 카엘라, 심지어 율리아까지 찾아오곤 했지만.
그것만으로는 다른 마족들의 경계심을 전부 떨쳐버릴 수 없었다.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자신은 다른 곳도 아닌 레블랑 가문의 영애니까.
현재 율리아의 숙적이자 반 마왕파의 중심에 서있는 아우펜 아그리시오.
그를 도와 초창기부터 함께 반 마왕파를 구성한 핵심 멤버 중 하나가 바로 현 레블랑 가주.
즉 세실리의 아버지 되는 마족이었던 것이다.
이런 식이니 당연하게도 경계와 불신이 잔뜩 어린 시선을 받을 수밖에 없다.
혹 이곳에 들어와서는 정보를 빼돌리는 것이 아닐까 의심하는 눈치였다.
심지어 헤에타리 전사장의 배신 사실이 알려진 이후 그런 느낌은 더욱 강해졌다.
“어, 어떻게 해야 하지.”
자신이 이곳에 온 이유는 율리아에게 자신과 레블랑 가문이 적이 아님을 알리기 위해서.
더 나아가 클라우스 곁에 조금이라도 당당하게 있기 위해서가 아니었던가.
헌데 이런 식이면 정말 아무 것도 할 수 없을 게 확실했다.
뭔가 해야 하는데, 율리아가 자신을 불러서 뭐라고 시켰으면 하는데 찾아와서 티타임이나 좀 가지다가 사라지니 세실리 입장에서는 점점 더 초조해질 뿐이었다.
툭툭-.
초조함이 너무 강해진 것인지 이제는 손톱까지 물어뜯는 세실리.
이러다가 정말 자신의 유용성, 그리고 충성을 증명하지 못 한다면 결국 방출되어 클라우스와는 적으로 마주할 가능성이 매우 높았다.
‘무슨 방법을 찾아야 해. 내, 내가 가서 말을 해볼까? 무언가 할 게 없냐고.’
율리아나 클라우스가 자신을 찾아와 뭔가 명령이나 임무를 주지 않을까 했다.
해서 조용히 방에 들어앉아 침묵하며 기다렸는데 감감무소식이다.
차라리 잊고 지낸다면 기대라도 하지 않을 터인데 가끔씩 찾아와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는 사이다보니 오히려 더더욱 미칠 것 같았다.
해서 마음의 결심을 내린 세실리가 막 방에서 나서려는 찰나.
갑자기 문 너머에서 정중한 기색이 묻어나는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세실리 레블랑님. 메이드 플랑슈입니다. 마왕 전하의 명령을 받아 영애를 모시러 왔습니다.”
분명 시작은 클라우스 휘하의 메이드였을 텐데.
어느 순간 마왕성의 메이드, 아니 율리아의 직속 메이드로 활동 중인 플랑슈였다.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일의 효율이 매우 뛰어나서 칼라굴 시종장조차 놀랄 정도라나.
아무튼 세실리는 플랑슈의 말에 마참 잘 되었다고 생각했다.
이대로 더 시간을 지체하면 죽도 밥도 안 될 것이다, 자신이 이곳에 온 이유가 있지 않은가.
자신은 아버지와는 다르다는 것을, 레블랑의 뜻이 하나가 아님을 보여주어야 한다.
‘아버지는 나더러 가문을 배신한 어리석은 막내딸이라고 하시겠지만, 어쩔 수 없어. 클라우스님이 인정한 마왕 전하라면 아버지가 말씀하셨던 그 어리석은 마왕은 다 연기였던 거야. 모두가 속았던 거라고. 우리 가문이 풍비박산이 나기 전에 나라도 손을 써야 해.’
비록 변태 마족이라곤 하지만, 머리까지 굳은 건 아니다.
클라우스가 왜 자신을 주시하는지 그 이유를 세실리도 이제는 대충 알고 있다.
아카데미에서는 그저 클라우스에 미쳐서 생각을 하지 못 했지만.
마왕성에 들어온 이후 자신을 대하는 율리아와 클라우스의 모습에서 알아차렸다.
그건 자신이 레블랑 가문의 막내딸이기에, 자신으로 인해 반 마왕파의 균열을 일으킬 수 있기에, 그리고 더 나아가 승리를 거두고 그 마지막 순간에 자비를 베풀 명분이 되기 때문이었다.
해서 세실리는 클라우스와 율리아가 실망하지 않도록 해야 했다.
그래야 곁에 남을 수 있고, 그리야 클라우스의 손에 잔뜩 괴롭힘을 당할 수 있었다.
“어서 와요, 세실리 레블랑 영애. 간단히 할 이야기가 있어서 이리 불렀답니다.”
사적인 자리에서는 아카데미에서처럼 여전히 존대를 써주는 율리아였다.
그 부분에서 아직 율리아가 자신을 내치지 않았다는 걸 알아차린 세실리는 신하로서 군주에게 바치는 예를 취한 뒤 그녀의 앞에 조심스레 앉았다.
“반역자 무리들이 마침내 군을 일으켰다는 소식은 들었겠죠.”
“네. 그렇습니다. 마왕 전하.”
“그 사이에 레블랑 가주와 그 병사들도 끼어 있다고 하고요.”
“그, 그렇겠죠. 송구할 따름입니다.”
여전히 나긋하고 사근사근한 율리아의 목소리였다.
하지만 세실리는 본능적으로 그 안에서 아주 고요한 분노가 용솟음치고 있음을 느꼈다.
어떻게든 지금의 상황을 타개해야 하는데 적절한 방법이 떠오르지 않는다.
무슨 말을 해야 자신의 자리를 만들고 레블랑 가문의 살 길이 열릴까.
“해서 우리 역시 진군할 생각입니다. 마왕성은 요새로서의 가치는 그리 높지 않으니 이곳에서 싸움을 벌여봤자 무고한 백성들만 피해를 볼 테니까요.”
“아. 혀, 현명하신 생각입니다. 이곳의 마족들까지 싸움에 휘말리면 좋지 않으니까요.”
“세실리도 그렇게 생각하나요? 기쁘네요. 그리 말해주니 아주 든든해요.”
그렇게 말하면서 율리아는 플랑슈가 내어준 커피를 홀짝였다.
원래 커피에는 눈길도 주지 않던 여인이 이제는 차보다는 커피를 더 많이 찾게 되었다.
물론 여전히 꿀이나 설탕을 다른 이들보다도 더 많이 넣긴 하지만.
처음에는 단순히 클라우스 때문에 즐겼다면 이제는 입맛에 어느 정도 붙은 모양이었다.
율리아는 세실리에게도 얼른 커피를 마시라면서 잔을 권했다.
덕분에 일단 급하게 커피를 마시기 시작한 세실리였으나 지금 자신이 입으로 커피를 마시는 것인지 아니면 코로 들이키고 있는 것인지도 모를 수준에 가까웠다.
어떻게 지금의 이 답답한 상황을 타개해야 하는데.
마왕인 율리아와 그 휘하의 클라우스 모두가 침묵하고 있는 이 시점에서.
자신을 마왕성으로 데리고 가달라는 요청을 먼저 했던 것처럼 이번에도 자신이 먼저 나서서 이쪽에 짙게 서려있는 의심의 눈초리를 지우고 싶다고 해야 하는데.
과연 무엇으로 그 답을 대신해야 할까 세실리는 머리가 터질 지경이었다.
“진군은 앞으로 닷새 후가 될 거예요. 그쯤이면 미리 준비해두었던 병사들도 전부 모여들어서 어느 정도 전투 준비가 될 테니까요.”
“아….”
“뭐, 아무튼 닷새 후에는 이렇게 여유롭게 앉아서 커피 한 잔 할 여유도 없을 것 같아 이렇게 부른 거였어요. 내가 할 이야기는 이게 다랍니다.”
그리 말한 율리아는 돌아가고 싶다면 방으로 돌아가도 좋다고 말했다.
순간 세실리는 지금 이 순간이 처음이자 마지막 기회임을 알아차렸다.
아무리 닷새 후면 이럴 시간이 없다고 해도 다른 이도 아니고 율리아가 아무런 이유 없이 이렇게 시간을 허비할 마왕이 절대 아니다.
그렇다면 분명 자신에게 뭔가를 은밀히 강조하기 위해서, 혹은 말하기 위해서 이런 자리를 마련했을 확률이 아주 높았다.
“….”
말을 내뱉기 전 마지막으로 생각을 해보는 세실리.
그러다가 이게 정답이기를 바라는 눈빛으로 마침내 입을 열었다.
“마왕 전하.”
“네, 세실리 레블랑 영애.”
“군이 출정하는 날에 저도 참전하고 싶습니다!”
세실리의 입에서 참전이라는 말이 나오자 율리아가 조그마한 탄성을 흘렸다.
비록 아직 젊은 여인이지만 마법 실력만큼은 마왕인 자신보다도 뛰어나다.
거기에 다른 곳도 아닌 레블랑 가문의 영애이니 반역자들이 당장 레블랑 가문을 의심할 수밖에 없는 상황도 조성될 것이다.
또한 그 밑의 병사들에게는 핵심 가문의 영애마저 대세를 읽고 미리 고개를 숙였는데 어리석게도 거기에 있다가 죽지 말라며 공작을 펼칠 수도 있고 말이다.
“글쎄요. 군의 인사들이 거부할 것 같은데.”
하지만 율리아는 몇 초만의 고민 끝에 바로 부정적인 대답을 내놓았다.
같이 참전하여 혹 적에게 이쪽의 움직임이나 병력의 상태 같은 중요한 정보를 흘릴 수도 있는 위험이 있다는 게 그 이유라고 덧붙였다.
그에 세실리가 펄쩍 뛰면서 절대 그런 일은 없을 거라고, 만약 걱정이 된다면 자신 옆에 감시를 붙여도 아무 불만을 표출하지 않겠다고 말했다.
‘공을 세워야 해. 클라우스님이 그랬던 것처럼, 공을 세워야만 하는 거야!’
세실리가 생각한 길은 바로 그것, 율리아의 밑에서 자신의 이름으로 공을 세우는 것이다.
그리고 지금 상황에서 그 무엇보다 확실한 공은 역시나 전투에서의 공훈.
이전까지는 전투라고 해봤자 가문의 마법사들과 간단하게 마법 대결이나 조금 깔짝이는 수준이었지만 지금의 자신은 과거의 그 멍청하고 여렸던 자신과 전혀 다르다.
해낼 수 있다, 해내야만 한다, 해내서 내 자리를 만들어야 한다.
그리 생각하면서 세실리는 오랜만에 레블랑 가문의 영애로 돌아왔다.
“마왕 전하. 결국 모든 것에 대한 결정은 전하께 있는 것으로 알고 있어요.”
“일단은 그렇지요?”
“제 부친인 레블랑 가주가 그 역적과 한곳에 있음을 부정하지는 않겠습니다. 하지만 저는 다르다고 말씀드릴게요. 한 번만, 한 번만 저를 믿어주세요. 제가 가문의 이름 아래 지내는 멍청한 계집이 아니라 저 스스로 뜻을 품고 결정을 내리는 마족임을. 저의 가문이나 핏줄이 아닌 실력으로 당당히 설 수 있음을 보여드리겠어요!”
요 근래 보기 힘들었던 세실리의 아주 당찬 모습이었다.
클라우스에게서 마조 본능을 조교 당한 이후 많이 희석되었던 그 모습이 다시금 이 자리에서 나타난 것이었다.
율리아는 그런 세실리의 모습을 바라보면서 속으로 미소를 지었다.
자꾸 자신의 뜻을 내비치려하지 않는 것이 소심하다고 할 수도 있지만, 지금과 같은 상황에서는 다른 이들에게 그저 수상한 이로 내비칠 뿐이다.
해서 마왕으로서, 세실리가 직접 청하기를 기다렸고 마침내 오늘 그 결과가 나왔다.
“…지금 내뱉은 그 말에, 책임을 질 수 있겠어? 세실리 레블랑. 넌 지금 다른 이도 아닌 동부의 군주, 마왕 앞에서 맹세를 하고 있는 중이다. 허투루 말을 했다가는 나중에 무슨 일이 들이닥칠지 모를 텐데. 각오는 되어 있나?”
여태껏 하던 존대는 사라지고, 다시금 마왕의 차가운 하대가 자리한다.
그에 세실리의 몸이 움찔 하고 떨리기는 했지만 그 떨림이 계속되지는 않았다.
오히려 그녀는 평소보다도 더 굳건한 목소리로 고개를 조아린 채 입을 열었다.
“마, 마왕 전하의 기대에 부응토록 하겠어요. 실망시켜드리는 일은 절대 없을 거예요. 제 마법은 오직 전하께서 가리키는 곳으로 쏟아져 내릴 것임을 맹세하겠습니다!”
세실리의 외침에 율리아는 잠시 턱을 만지작거리며 고민하는 척을 했다.
바로 받아주면 조금은 재미가 없으니, 일부러 약간 뜸을 들이는 것이었다.
- 조만간 세실리가 찾아올 겁니다. 아마 잔뜩 초조한 눈치로요. 그럴 수밖에 없겠죠. 기껏 마왕성에까지 와서 손님으로 지내는데 딱히 이렇다 할 게 없으니까. 그녀가 스스로 나서기를 기다리세요. 아마 율리아의 마음에도 들 만한 말을 할 거랍니다. -
클라우스의 말을 떠올리면서 율리아는 미소를 지었다.
역시, 자신이 아주 훌륭한 남자를 곁에 둔 것 같다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