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7화 〉 18장 - 새로운 바람
“하! 역시 그럴 줄 알았습니다! 역겨운 놈, 여태껏 제 잘난 맛에 살다가 마왕에게 넘어가놓고서는 한다는 말이 이제까지 자신을 믿어준 왕국이, 그리고 우리들이 문제였다니. 참으로 어이가 없지 않습니까?!”
클라우스를 체포하기 위해 보냈던 기사는 혀가 잘려서 돌아왔다.
그리고 병사들 모두가 패닉에 빠져서는 겁에 잔뜩 질려있었다.
모두가 나름 괜찮은 자들, 상대가 그 클라우스임에도 막힘 없이 임무를 수행할 수 있는 이들이었는데 모두가 와르르 무너져서는 돌아온 것이었다.
소식을 들은 귀족들은 바로 이게 자신들이 원하던 것이었다는 듯.
이번 기회에 클라우스보다 훨씬 급이 떨어지는 대륙 전쟁의 참전자들도 몰아세울 구실이 생겼다는 듯 기뻐서는 어쩔 줄 몰랐다.
“….”
하지만 그 사이에서, 정작 강성한 세력을 지닌 귀족들은 전부 표정이 굳어있었다.
원래부터 클라우스와 돈독한 관계를 지니고 있던 키엔마이어 후작은 물론이고 프리몬트 백작 역시 여기저기서 터져 나오는 귀족들의 날선 반응에 불편한 기색이 역력했다.
그런데 이상한 점은, 그들이야 그렇다고 쳐도 요제프 대공의 표정까지 엉망이라는 것이었다.
귀족파의 수장이자 클라우스와 가장 사이가 좋지 않은 이를 꼽으라면 반드시 들어가는 인물.
심지어 이번에 클라우스를 체포하여 아카데미에서 빼오라는 명령을 내린 이도 요제프 대공이다.
꾸욱-.
그 요제프 대공이 한창 신나서 떠드는 귀족들 사이로 입술을 깨문 채, 주먹을 쥔 채 무척이나 놀라고 당황했다는 기색을 여지없이 흘리고 있었다.
원래는 주변 귀족들이 왜 그러냐고 묻기라도 해야 했는데, 클라우스가 사고를 쳤다는 부분에 다들 너무 흥분해서 그 부분을 놓치고 만 모양이었다.
‘이 빌어먹을 평민 자식이! 갑자기 이제 와서, 그렇게 나온다고?’
오늘보다 더 했던 경우가, 오늘보다 더 한 처우가 있었던 것이 어디 한 두 번인가?
당장 대륙 전쟁이 한창이던 시절에 엄청난 전공을 세운 현장 지휘관을 이상한 빌미로 빼내고서 이후 벌어진 패전을 책임지라는 식으로 다시 보냈을 때도 묵묵히 수행한 놈이지 않은가.
그 이후에도 온갖 음해에 시달릴 때도, 추종자들이 수상한 움직임을 보일 때에도 두문불출 하면서 끝까지 왕국 걱정을 하던 놈이 아니었는가!
그런 클라우스의 모습을 본 것이 자그마치 10년이 훨씬 넘는다.
이 인간의 본성은 결국 이렇구나, 아무리 찔러도 요지부동이구나.
죽더라도 이 왕국을 껴안은 채 죽은 것이구나, 요제프 대공은 그렇게 결론을 내렸다.
바로 그 부분을 이용해서 전쟁으로 인해 힘을 잃어가던 귀족들의 힘을 다시 세웠는데.
전쟁의 공훈자들이 함부로 움직일 수 없는 일종의 안전장치로 활용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그 클라우스가 전혀 예상치 못 한 반응을 보이고 말았다.
물론 그가 화를 낼 수도 있다는 건 대충 예상했다.
하지만 당신을 여전히 따르고 있는 자들을 빌미 삼으면 곧 진정하지 않을까 했다.
어리석은 남자가 아니니까, 클라우스라는 이름이 지니는 무게가 얼마나 무거운지 알고 있으니까, 그래서 일단은 한 번 숙이고 또 지고 들어올 거라고 생각했었다.
이제까지 그렇게 해왔던 남자니까, 결국 고개를 숙이는 평민이었으니까.
딱히 욕심도 없고 생각도 없던 이라는 걸 확실히 알았기에 최대한 선을 아슬아슬하게 타면서 이용을 해먹을 계획이었는데….
‘설마 이런 식으로 완전히 예상을 벗어날 줄은 미처 몰랐다. 이런 빌어먹을!’
요제프 대공은 신나서 떠들어대는 귀족들을 바라보았다.
저리 기분 좋아서 날뛰는 모습을 이해를 못 하는 건 아니다.
이로 인해서 다른 껄끄러운 자들을 쳐낼 수 있는 훌륭한 명분이 되었으니까.
평민들이 아직까지도 고개에 힘 빳빳이 넣고 다니는 이유 중 하나는 클라우스라는 거인이 뒤에 있다는 부분이 분명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런 자가 갑자기 왕국을 버리고, 서부를 배신하고 동부의 마족들에게.
대륙 전쟁에서 서부를 쑥대밭으로 만들었던 그 괴물 같은 놈들에게 고개를 숙인 것이다.
그들과 싸우고 부하들을 전장으로 밀어 넣으면서 얻은 명예인데 말이다.
거기까지만 본다면 충분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요제프 대공 본인도 몇 번은 그런 생각을 품기도 했었다.
그런 식으로 쳐내고 잘라내서 귀찮아지기 전에 조용히 처리할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렇게 지워내기에는 그 방파제가 너무나도 크고 단단했다.
이전까지는 바깥에서 몰아닥치는 파도들을 막아주는 든든한 존재였던 방파제.
그게 어찌나 거대한지 혹 그 방파제가 무너지면서 역으로 거대한 파도가 일어 자신들 모두를 휩쓰는 건 아닐까 걱정이 들 정도였다.
그저 그런 귀족들과는 다르게 세력을 지니고 있는 귀족들이 뭔가 잘못 돌아가고 있음을 직감한 표정을 짓은 것도 아마 그런 이유에서였을 것이다.
그리고 그 걱정은 클라우스가 동부로 떠난 이후 기우가 아님이 밝혀졌다.
침묵하고 있던 자들도, 그리고 자신들의 전과를 신나게 떠들고 다니던 이들도 모두가 알았다.
클라우스가 이렇게 사라진 이상 자신들이 살 길은 둘 중 하나라고.
이번 기회에 어떻게든 귀족들의 눈에 들어서 그들이 원하는 세상으로 돌아가게 하거나.
그게 아니라면 클라우스를 내쫓은 원인을 제공한 자들을 맹렬하게 공격하거나.
이 둘 중 하나를 골라서 반드시 행해야 한다는 것을 말이다.
“이번 기회에 평민들을 모조리 찍어 눌러야 합니다!”
“더해서 주제도 모르고 자꾸 귀족들에게 대드는 자들 역시 벌해야 합니다!”
“클라우스! 역겨운 배신자놈! 은혜도 모르는 더러운 평민 나부랭이!”
귀족 회의가 점점 과열될수록 요제프 대공은 기분이 더러워졌다.
분명 자신이 원하던 그림인데, 그렇게나 바라고 또 바라던 것인데 아무리 생각해도 속고 있다는 생각이 강하게 든 것이었다.
마치 보이지 않는 뭔가에 의해 그가 원하는 대로 움직이고 있는 것 같았다.
답답한 마음에 그는 잠시 바람을 쐬겠다고 하면서 발코니로 향했다.
저녁의 바람이 불어오니 시원한 느낌이 조금 들기는 했지만 그도 잠깐이었다.
자신을 이 자리까지 올려준 제 능력, 사건이 돌아가는 것에 대한 빠른 눈치.
그것이 지금 자신에게 자꾸만 경고를 보내오고 있었다.
“요제프 대공 각하.”
뒤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고개를 돌려보니 거기에는 키엔마이어 후작이 서있었다.
클라우스와 가장 절친한 사이였기에, 그래서 이번에 벌어진 클라우스의 이반으로 인해 누구보다도 가장 많이 당황하고 또 배신감을 느꼈다고 해도 충분한 인물.
하지만 정작 그런 키엔마이어 후작의 얼굴은 꽤나 담담한 기운만 가득했다.
오히려 요제프 대공 쪽이 조금 더 초조해보일 정도였다.
“뭔가 이상하게 돌아가지요.”
“….”
“저자들은 좋다고 하지만, 최소한 대공은 아실 것 같습니다. 이번 일로 인해 어떤 후폭풍이 몰아닥칠지 말입니다. 표정이 좋지 않음이 그 증거인 것 같습니다만.”
“….”
역시 머리가 잘 돌아가는 귀족답게 클라우스가 저지른 일로 무슨 사건들이 연이어 벌어질지.
그리고 클라우스가 단순히 감정적으로 대응한 것이 아니라 뭔가 계획을 지니고서 이럴 줄 알고 있었다는 듯이 말하는 키엔마이어 후작이었다.
요제프 대공은 침음을 흘리고는 제 이마를 부여잡았다.
“그대 걱정이나 하시오. 클라우스는 이제 왕국 기준으로 역적이나 다름없으니까. 그런 놈과 친하게 지냈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의심을 받을 것이외다.”
“그렇겠지요. 다만 저는 제 스스로에게 당당하고 무엇보다 그런 정치적인 공세에 쉽게 당하지 않을 자신이 있습니다. 하지만 저와 똑같은 말을 듣게 될 다른 이들은 그렇지가 않습니다.”
“무슨 의미요?”
“감당할 수 있겠습니까? 그들이 바보들도 아니고 다음 목표는 자신들임을 눈치 채고서 분명 어떤 수를 내려고 할 겁니다. 누구는 몸을 숙이겠지만 또 누구는 오히려 더 고개를 치켜세우고 이번 기회에 싸우려고 하겠죠. 이건 호랑이를 몰겠다고 붙인 불이 아예 산 전체를 불태울우는 것과 다름이 없습니다.”
키엔마이어 후작이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지 요제프 대공은 바로 알아차렸다.
호랑이가 산속에 얌전히 웅크리고 있어서 늑대나 들개, 여우 등이 조용히 지냈는데.
그 호랑이를 쫓아낸 이 상황에서 과연 그들이 얌전히 잡혀 죽어주겠냐고.
더해서 그 호랑이를 따르던 무리들이 그 뒤를 따르지 않는다는 보장이 어디 있느냐고.
키엔마이어 후작은 그렇게 질문하고 있었다.
입술을 깨문 요제프 대공은 할 말이 없다는 뜻으로 몸을 돌려 발코니에서 사라졌다.
그의 입장에서도 클라우스의 이탈은 예상치 못 한 부분이었다.
클라우스가 10년이 넘는 세월동안 그 ‘충성스럽고 굳건한 전쟁 영웅’ 코스프레를 한 것이 이런 식으로 귀족들 전부를 속여 넘겼다.
무슨 짓을 해도 서부에 남아, 왕국에 남아 죽을 때까지 든든한 방파제 노릇을 해줄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 방파제가 이제는 역으로 가장 거대한 해일이 되어버렸다.
덕분에 그를 이리저리 흔듦으로서 이용을 하려던 요제프 대공은 제대로 한 방 먹고 말았다.
심지어 이렇게 한 방 먹은 후에 뒷감당이 안 되는 게 또 문제였다.
클라우스는 클라우스대로 자신을 대우해주는 동부로 떠난 것이고, 서부는 이제 서부대로 여태의 혼란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끔찍한 혼란을 맞이할 것이다.
갈등은 있었다고 할지언정 어느 정도를 두고 있었는데 이번 사건으로 인해 대립은 극에 달할 것이며 당장 불이 붙고 폭발해도 이상하지 않게 되었다.
어느 한쪽이 고개를 숙일 수조차 없다, 숙이면 무조건 죽거나 제 모든 것을 내려놓아야 한다.
공을 세운 자들은 너희도 불만이 많을 터이니 언제든 배신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는 자들로.
귀족들은 최고의 공을 세운 자를 시기하고 모함하며 적들에게 가져다바친 멍청이들로 남게 되는 것이 기정사실화되는 순간이라고 할 수 있었다.
“….”
혼자 발코니에 남게 된 키엔마이어 후작은 한숨을 내뱉었다.
그 역시 클라우스에게서 그 어떤 언질도 받지 못 했다.
하다못해 비슷한 낌새도 느끼지 못 했다.
여태껏 귀족들의 겁박과 모함에도 꿋꿋이 버티면서 명예라는 가치를 빛내던 클라우스였다.
그런 남자가 갑작스레 귀족들을, 더 나아가 서부를 적으로 돌리고 동부로 향했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적들의 수괴였던 마왕에게 무릎을 꿇고 충성을 맹세했다.
미친 듯이 쳐죽이며 더 덤비라고 일갈하던 마족들과 한솥밥을 먹게 되었다.
이런 상황을 예상했냐고 묻는다면, 한 두 번은 상상했지만 도저히 그려지지 않는 장면이었다고 키엔마이어 후작은 말할 수 있었다.
마족과 함께 하는 클라우스라니, 솔직히 아카데미에서 마족 생도들을 가르치다가 죽이는 건 아닐까 걱정까지 했던 그였다.
‘대체 왜 그런 것인가. 그리고 무슨 생각을 품고 있는 것인가. 자네가 그리 행동하면 서부가 통째로 흔들릴 것이라는 건 그대도 명확하게 알고 있었을 텐데….’
그렇게 생각하던 키엔마이어 후작은 문득 예전에 클라우스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만약에, 정말로 만약에 서부가 또 한 번 전쟁의 참화에 휩싸이고 이전과는 다르게 전황이 흘러 마침내 왕국이 마족들의 손에 떨어지게 된다면.
해서 적들이 너와 네 사람들의 목숨을 인질 삼아서 항복을 권유한다면 과연 너는 무슨 대답을 할 것이냐고 말이다.
처음에는 단순한 장난 같아서, 그래서 그가 원할 것 같은 대답을 해주었다.
당연히 절대 그럴 수 없다고 말할 것이라고.
끝까지 싸울 것이라고, 여태 싸우다가 죽은 모든 이들을 위해서 그리 할 것이라고 말이다.
헌데 클라우스는 장난기 하나 없는 진지한 표정과 목소리로 이렇게 말했다.
‘지랄하지 마라, 다넬. 멍청하게 죽지 말고 영리하게 살아남아라. 혹시 아냐. 똥통에서 벗어나니 마침내 네가 바라던 진짜 세상이 다가올 지도.’
‘무슨 소리지?’
‘그 잘난 핏줄 빨로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능력에 따라 지배하는 세상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