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3화 〉 18장 - 새로운 바람
또각, 또각-.
마왕성 안의 대전 안으로 구두 소리가 낭랑하게 울려 퍼진다.
적당하게 우아한 걸음걸이로 중앙 부근까지 들어선 한 여인이 어느 한 지점에 멈춰 선다.
그리고는 아주 예의 바르게 그 자리에 엎드리고는 왕좌에 앉은 마왕에게 인사를 올린다.
“마왕 전하를 뵙습니다.”
“….”
일개 메이드가 대전 안으로 들어와 마왕을 알현하는 장면은 상당히 이질적이었다.
마왕성 내부에서 일하는 자들은 모두 시종장 칼라굴의 명령을 받는다.
때문에 그들에게 하명할 것이 있다면 응당 칼라굴을 통해서 내려가는 것이 맞는데.
지금 이 장면은 마왕성의 다른 이들이 보자면 심히 이해가 가지 않는 것일 수 있었다.
“메이드 플랑슈.”
율리아의 부름에 반짝거리는 은발을 찰랑이며 플랑슈가 고개를 살짝 든다.
이후 자신을 바라봐도 좋다는 허락이 떨어지니 그제야 똑바로 고개를 들었다.
“그대에게 내린 명령은 어찌 되었지?”
“마왕 전하의 명에 따라 그들 모두를 즉결 처분하였습니다. 목격자 하나 없이, 새어나갈 곳 하나 없이, 전하께서 주문하신대로 아주 깨끗하고 깔끔하게 청소하였습니다.”
여전히 예의 바르고 사근사근한 목소리.
허나 율리아는 그 속에서 왠지 모르게 서늘한 예기가 풍겨지는 것을 느꼈다.
자신을 향하는 것이 아니기에 딱히 뭐라고 하지는 않지만, 다른 이도 아니고 일개 메이드가 저런 기세를 품고 있으니 상당히 낯설고 또 걱정스러웠다.
만약 플랑슈가 클라우스 밑의 메이드가 아니었다면 그녀를 수상하게 여겨 뒤를 조사했을 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클라우스의 말에 따르면 그들이 전부라고 하였다. 혹 네가 확인했을 때 그들 외에 또 다른 끄나풀들이 있지는 않았나?”
“제가 확인했을 때는 그들이 전부였습니다. 너무 많은 이들을 운용하면 보안도 지키기 어렵고 자칫 꼬리를 밟힐 우려도 있기에 수를 줄여둔 것 같았습니다.”
“그래…?”
말하는 것마저 일개 메이드라고 보기 어려웠다.
저건 마치 이런 곳에 상당히 숙련된 경험이 있는 이와 비슷한 모습이지 않은가.
저 정도의 여자가 왜 메이드로 일을 하고 있는 것인지 율리아는 도통 알 수가 없었다.
“고생했다. 메이드 플랑슈. 마왕성의 어느 누구도 모르게 일을 처리해주었어.”
“과찬이십니다. 저는 그저 마왕 전하께서 주문하신 부분을 충실히 따랐을 뿐입니다.”
이전에 은근히 도발을 하거나 부딪치던 모습들은 단 한 점도 찾아볼 수 없었다.
지금 플랑슈에게서 보이는 것은 지극히 공손한 자세로 마왕을 모시고 있는 메이드뿐이었다.
율리아는 그런 플랑슈를 바라보다가 그만 나가봐도 좋다는 말을 했다.
그에 플랑슈가 공손하게 허리를 숙이고는 막 뒷걸음질로 물러나려는 찰나.
뭔가 생각났다는 듯 율리아가 그녀를 불러세웠다.
“메이드 플랑슈.”
“부르셨습니까, 마왕 전하.”
“…인정해주마.”
갑작스러운 율리아의 말에 플랑슈는 무슨 뜻으로 말씀하시는 것인지, 라고 질문한다.
알고서 저러는 것인지, 아니면 정말 몰라서 묻는 것인지.
그걸 알 수가 없었기에 율리아는 속으로 투덜거리면서도 짐짓 아무렇지도 않은 척 제대로 말을 해주었다.
“이번 일을 네 공으로 인정한다는 소리다.”
“그 말씀은….”
“네가 클라우스에게, 나의 클라우스에게 메이드의 업무 이외의 것을 아주 조금은 하는 것을 허락한다는 말이다.”
그 말에 플랑슈는 잠시 두 눈을 깜빡이다가 곧 입가에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아찔한 기운마저 느껴지는 그 웃음에 율리아는 침음을 흘렸고 클라우는 역시 지나가던 메이드 수준이라며 대단하다고 속으로 박수를 쳤다.
“하늘과 같은 마왕 전하의 은혜에 몸 둘 바를 모르겠나이다. 감사합니다, 마왕 전하.”
“…대신 클라우스가 여유로울 때 만이다. 혹 그의 업무를 방해하는 것이 내 눈에 들어온다면 바로 철회할 것이니 그리 알도록 해.”
조심해라, 내지는 어찌 되었든 저 남자는 나의 것이다, 라고 말하려고 했던 모양인데.
플랑슈는 딱히 그 부분은 어떻게 되어도 좋다는 듯 그저 미소만 지을 뿐이었다.
율리아가 자신의 공을 치하해주고 또 옆에 서있는 클라우스에게 그 모습을 보여주었다는 것이 기쁘다는 듯 말이다.
결국 플랑슈가 대전을 나서자마자 율리아는 ‘뭐 저런 메이드가 다 있어!’ 라고 말문을 열었다.
“클라우스.”
“네, 율리아.”
“정말 저 메이드 믿어도 되는 건가요?”
“내가 장담하건데 나나 율리아에게 해가 될 이는 절대 아니에요.”
“너무 이상하잖아요. 본인은 메이드라는데 알고 보니 전문 암살자 뺨치는 실력을 가졌다고요? 이건 다른 누가 들어도 이상하다고 여길 거예요.”
“정 의심스럽다면 플랑슈에 대해서 조사를 해보셔도 좋습니다.”
어차피 파헤쳐도 나올 것도 없다.
플랑슈가 저런 실력을 지닌 것은 수련이나 실전을 통한 게 아니니까.
그냥 원래부터 저런 여인이었던 것을 아무도 몰랐을 뿐이다.
클라우스의 그런 확신 어린 대답에 율리아는 끄응, 하고 침음을 내뱉었다.
자신은 클라우스를 믿는데 그 클라우스가 확신하는 이를 조사한다는 게 조금 이상했다.
그렇다고 이대로 넘어가자니 헤에타리 때가 생각나서 또 은근히 불안하고.
‘…일단 플랑슈에 대한 문제는 조금 후로 넘기자. 당장 할 일이 태산이야.’
클라우스가 자신이 휘하로 들어왔다는 소식은 곧 동부에 퍼질 것이다.
지금도 중립파의 일원이었던 귀족들이 계속 몰려드는 상황.
그런 와중에 그 남부의 악마가 스스로 무릎을 꿇었다는 소식까지 전해진다면 어떤 그림이 그려질 지는 너무나도 뻔한 것이었다.
“클라우스. 당신 의견을 듣고 싶네요. 이제 어쩌는 게 좋을까요? 나를 찾아올 다른 귀족들을 기다리면서 어떻게 충성 서약을 받아낼지, 그들의 마음을 사야 할 지 고민해야 하나요?”
“아뇨, 율리아. 그럴 필요 없습니다. 왕에게 충성을 바치는 것은 저들이 알아서 결정할 일이지 율리아가 노력할 일이 아니에요. 당신이 해야 할 일은 일단 이 마왕성에 거주하는 평범한 마족들의 삶부터 확실하게 돌보는 겁니다.”
“백성들의 생활부터 살피라, 이 말인 것이군요.”
율리아는 클라우스가 정확하게 무슨 말을 하고자 하는지 바로 이해한 모양이었다.
어차피 귀족들이야 백성들의 평가를 들으면서 마왕을 또한 평하려 할 것이다.
그리고 무언가 확신을 서게 해주는 것이 보인다면 지체 없이 달려와 무릎을 꿇고 다른 마족들과 마찬가지로 충성을 맹세하리라.
헤에타리를 치워내고 율리아는 본격적으로 마왕의 업무에 들어갔다.
원래는 수 없이 많은 신하들에게 보고를 받고 확인을 하며 그에 대한 결재를 해주면 되었을 테지만 지금은 많은 자리가 텅텅 비어 있었다.
시종장 칼라굴과 재무관 메이로어가 힘을 쓰고 있다고 하지만 한쪽은 마왕성 내부의 일에 집중을 해야 하는 이고 다른 한쪽은 돈을 관리하는 것만으로도 빠듯하다.
그렇다고 해서 이번에 합류한 중립파 마족들을 쓰자니 아직 제대로 검증조차 되지 않은 상태인지라 힘에 겨운 부분이 많았다.
특히 헤에타리의 배신 이후 그런 부분은 더욱 철저해졌다.
확실하게 그 충성심이 검증되지 않은 자는 무턱대고 기용할 수 없다.
그것이 율리아의 생각이었고 클라우스도 그런 마왕의 생각에 딴지를 걸지 않았다.
그 빈자리는 자신이 얼마든지 채울 수 있는 것이었으니까 말이다.
물론 일의 강도가 다른 자들과는 비교도 안 되게 무시무시했다.
계속해서 쌓이는 보고서와 율리아에게 보여야 할 서류들.
거기에 서부의 소식과 율리아의 숙부가 보일 동향도 살펴야했기에 정신이 없었다.
‘괜찮아요? 혹시 힘들다면 일단 급한 대로 일을 할 줄 아는 이를….’
오죽하면 율리아마저 서류의 바다에 풍덩 빠져있는 클라우스를 확인하고서는 일단 아무나 한 번 써먹어보는 건 어떻겠느냐 라고 제안을 할 정도였다.
물론 클라우스는 단칼에 그것을 거절했다.
누구를 믿을 수 있고 없고의 문제가 아니다, 어차피 배신자 놈들은 이제 다 쓸려나갔으니까.
이제부터 중요한 것은 율리아가 자신 없이는 절대 버틸 수 없다는 것을 알려주는 것.
그리고 그녀 주변의 마족들조차, 왕에게 절대적인 충성을 바치는 자들조차 자신만큼은 내치는 것이 손해라는 것을 확실하게 인지시켜둘 생각이었다.
이전의 회차들 중에서 그런 실수를 했던 적이 있다.
그냥 율리아의 마음에 들기 위해서 온갖 방법을 동원하였고 결국 그리 되었던 회차.
헌데 율리아 주변의 마족들이 그런 자신을 경계하여 간언을 올렸고 결국 그 충고를 무시하지 못 한 율리아에 의해 토사구팽 당한 적도 있었다.
‘솔직히 그때 너무 오버를 하긴 했어. 율리아가 해야 할 일까지 전부 빼앗아버린 바람에 최고 권력자로서 가장 중요하고 민감한 부분, 역린을 건드린 꼴이 되었거든.’
아무리 충성스럽고, 아무리 뛰어나고, 아무리 사랑하는 존재라고 해도.
나의 권력에 심각한 위협을 가할 자는 결국 제거해야 하는 것이 왕의 숙명이다.
너무 뛰어난 신하는 왕을 자리에서 밀어낼 것이고 왕좌에서 밀려나면 왕은 죽는다.
아무리 그 신하가 그럴 마음이 없다고 해도 그 불안감은 사라지지 않는다.
누구는 그런 신하를 잘만 부려먹는 왕도 있다고 한다면.
뛰어난 신하를 다룰 수 있는 이는 그보다 더 뛰어난 왕뿐이다.
그리고 그런 기준에서 볼 때 클라우스는 당시 회차에서 너무 튀는 놈이었다.
율리아가 해야 했던 일까지 전부 빼앗았으니 그럴 만도 했다.
‘조심하자. 지금과 같이 딱히 빛나는 일은 아니지만 율리아가 맡기에 상당히 괴롭고 머리 아프고 멀리 하고 싶은 부분을 완벽하게 장악하면 1차 계획은 완료다. 이후 율리아에게 명예롭고 빛나는 일들을 몰아주면서 든든한 배경이 되는 것이 2차 계획.’
괜히 대륙 전쟁 시절 남부 전체를 맡았던 것이 아니다.
단순히 군 지휘를 떠나서 그 지역 전체를 총괄하며 모든 부분에서 자신을 갈고 닦았다.
미왕의 비선실세가 되려면 문무겸비는 선택이 아닌 필수라고 할 수 있었다.
‘지금쯤이면 헤에타리의 모가지가 잘 전달되었겠군.’
이미 분위기도 뒤숭숭하고 본인도 몸을 일으킬 생각을 하던 찰나였다.
그 타이밍에 율리아의 아주 깊숙한 곳에 숨겨둔 비수가 완전히 박살이 나서는 자신에게 돌아왔으니 더는 물러서거나 간을 볼 수도 없었다.
마침 영지전으로 인한 부분에서 율리아가 계속 트집을 잡고 제 휘하 귀족들을 도발하여 마왕에 대한 적의가 늘어나는 때였으니 더는 웅크리고 있을 생각도 없을 것이었다.
마침내 마왕성으로 물밀 듯이 밀려드는 역겨운 반란군 놈들.
그리고 그 선두에는 실컷 이용만 해먹다가 버림 받은 팔라티나트 가문이 있을 것이다.
“클라우스님. 시종장 칼라굴입니다.”
“들어오세요.”
잠시 서류에서 눈을 떼고 앞을 바라보니 머리가 성성한 노인이 들어와서는 허리를 숙인다.
아직 딱 정해진 직위가 없기에 클라우스에게 ‘님’ 자 만 붙이는 칼라굴.
마왕성에 갑작스레 들어온 인간이니 경계심을 품을 만도 한데 이 늙은 마족은 율리아가 신뢰하는 인간이라는 이유만으로 이렇게 최고의 예우를 다 하고 있었다.
“무슨 일입니까?”
“지금 즉시 대전으로 가보셔야 할 것 같습니다. 방금 소식이 들어왔는데….”
“역도들이 결국 일을 벌였군요.”
“…그렇습니다.”
굳은 얼굴로 대답을 하는 칼라굴.
클라우스 역시 살짝 입술을 깨물면서 드디어 올 것이 왔다는 모습을 보였다.
물론, 속으로는 낄낄거리면서 웃음을 터트리고 있었지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