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9화 〉17장 - 마왕성 도착
“저 자는… 분명 어디서 본 것 같은데요.”
어디서 많이 본 얼굴이다 싶었는데 생각해보니 아카데미에서 봤던 마족 생도다.
아주 조용하고, 그러면서도 묵묵히 강의에는 집중하던 조용한 남성 마족 생도 말이다.
율리아는 혹 저자가 헤에타리의 배신을 알려준 것이냐고 질문했다.
그에 클라우스는 그건 아니라는 듯 고개를 젓더니 고개를 돌려 그 남성 마족을.
아니, 남성 마족으로 위장한 여성 마족을 바라보았다.
“리르. 마왕 전하께 정식으로 인사 올려라.”
“네, 네. 클라우스님.”
뒤쪽으로 묶고 있던 머리를 풀어내니 적당한 길이의 머리칼이 아래로 떨어져 내린다.
남성으로 보이기 위해 약간의 변화를 주었던 얼굴과 복장을 대충 흐트러트리니 비로소 실은 여인이었다는 것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무슨… 분명 아카데미에는 귀족 가문 출신의 남성 마족이라고 하지 않았나요?”
“위장이었죠. 아카데미를 속이고, 그 안의 사람들을 속이고, 그리고 당신을 속이기 위해.”
“나를 속이기 위함이었다고요?”
“리르. 네 입으로 말해라. 아카데미에 누구의 명령을 받고 어떤 목적을 품은 채로 아카데미에 와서, 무슨 일을 벌였고 그 후 어떻게 되었는지 말이다.”
그러자 리르가 잔뜩 겁을 먹은 얼굴로 클라우스를 바라본다.
당사자 앞인 율리아 앞에서 자신의 정체와 자신이 한 일을 다 말하라.
그리 했다가 자칫 마왕의 분노를 사면 자신은 무조건 죽을 것이 뻔했다.
죽는다는 것도 두렵지만 그보다 자신이 배신했다는 게 알려지면 제 동생에게 가해질 해가 더더욱 무서웠다.
리르의 그런 고민에 클라우스는 고개를 살짝 내젓고는 싸늘한 눈빛을 번뜩였다.
생각 따위는 하지 말고 그냥 내가 시키는 대로 하면 된다.
만약 다른 생각을 할 거라면 마왕이 널 살려도 내가 널 죽일 거다.
그 느낌이 그대로 전해졌기에 리르는 마음을 다잡고는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저, 저는… 마왕 전하의 숙부, 아우펜 아그리시오 휘하 그림자의 일원입니다.”
“숙부 휘하…. 숙부가 붙인 끄나풀이었군. 네 정체.”
“그, 그리고… 그, 그날. 마왕 전하께서 인간 귀족들에게 허, 험한 꼴을 당하실 뻔한 날. 마왕 전하를 기, 기습한 것이 바로 저였습니다… 흐읏?!”
거기까지 말하고서 리르의 몸이 갑자기 굳어버리더니 곧 미친 듯이 떨리기 시작했다.
그녀를 바라보고 있는 율리아의 눈빛에서, 아니 온몸에서 진득한 살기가 피어오른 게 이유였다.
당장이라도 눈앞의 저 잡것을 찢어 죽여 버리고 싶다는 듯 율리아의 두 눈이 번쩍인다.
클라우스조차 그녀의 분노와 살기에 조금이나마 움찔거렸을 정도로, 마왕이 리르에게 보내는 적의는 무지막지하고 또 자비가 없었다.
“…클라우스. 지금 뭐하는 거야.”
“율리아.”
“저년을 당장 쳐죽었어야지. 감히 나를, 나를 그 저급한 돼지들에게 던져준 년인데. 내 몸에 그 역겨운 손길이 닿게 한 년인데! 지금 저 여자를 살려서는 내 앞으로 데리고 온 거야? 아무리 저 년이 내 숙부를 배신하고정보를 다 바쳤다고 해도! 용서할 수 있는 게 있고 없는 게 있는 거야! 이건 정도가 지나쳤어. 아무리 당신이라고 해도 이건!!”
불같이 화를 내던 율리아였지만, 곧 클라우스의 담담한 얼굴을 보고서는 입을 다문다.
자신이 알던 저 남자가 설마 자신의 반응조차 예상치 못 하고 이런 짓을 벌였을까.
저 표정을 보아하니 자신이 이렇게 화를 낼 것도, 당장 저 리르라는 여자를 죽이라고 성화를 낼 것도전부 예상하고 있었다는 반응이지 않은가.
거기까지 생각이 닿자 율리아는 마치 화산처럼 폭발하던 분노를 순식간에 잠재웠다.
당장이라도자리에서 일어나 저 가증스러운 년의 목을 뜯어버릴 것 같았던 마왕의 살기가 거짓말처럼 사라져버렸다.
율리아는 가볍게 숨을 내쉬고는 저 앞에서 바닥에 납작 엎드린 채 그저 벌벌 떨고만 있는 마족 여인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말해라.”
“마, 마왕 전하.”
“클라우스의 저런 반응을 보아 하니 네가 그런 짓을 해야 했던 이유라던가. 아니면 내게 해를 가하고도 저 남자에게서 살아남은 이유가 있겠지. 그에 대한 부분을 네 입으로 직접 말해라. 내가 직접 듣고 판단할 테니까.”
덜덜 몸을 떨면서도 리르는 율리아의 명령을 충실하게 따랐다.
자신이 그림자가 된 이유, 그리고 명령을 받고 율리아를 제압한 일, 그러다가 클라우스에게 걸려서는 역으로 자신과 관련된 모든 정보를 전부 실토하게 된 부분까지.
물론 그 과정에서 클라우스가 어떤 방식으로 정보를 캐냈는지는 말하지 않았다.
그 부분에 대해서 언급을 절대 할 수 없도록 클라우스가 최면을걸어두었으니까.
아무튼 정리하자면 강제적으로 그림자로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는 것.
그리고 율리아에게 어떻게든 용서 받기 위해서 여태 비밀리에 갖가지 일을 했다는 것.
이 정도로 리르의 말을 요약할 수 있었다.
“…흠.”
아카데미로 재차 들어오려던 다른 그림자들을 전부 해치운 게 자신이라는 말을 들었을 때.
율리아는 슬쩍 고개를돌려서 클라우스를 잠시 쳐다보았다.
이 여자가 한 말이 진짜냐는 질문이었고 그에 클라우스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리르가 율리아의 숙부를 배신하고 이쪽으로 들어온 순간부터 율리아의 비밀 경호나 다른 그림자들을 쳐내는 것, 그리고 일부러 정보를 조금씩 보내면서 율리아의 숙부 측이 이상 징후를 최대한 늦게 알아채게 하는 부분까지 전부 리르가 해냈다는 것에 대한 확인이었다.
클라우스의 인정까지 확인한 율리아는 아주 조금은 고민을 하게 되었다.
리르가 행한 일들을 살펴보자면 꽤나 잘 수행해냈다는 것, 그 부분은 인정한다.
하지만 그런 임무를 할 수 있는 자야 동부 어딘가에 또 있을 것이다.
반대로 자신을 기습하여 그 역겨운 인간 귀족들 앞에 내던진 것은 만 번 죽여 마땅한 일이다.
솔직히 지금도 당장 저 여자의 사지를 잘라내고 그 몸뚱이는 소와 돼지, 말들의 발 사이에서 이리 뒹굴고 저리 뒹굴게 해서 아주 비참하게 죽이고 싶었다.
‘하지만… 그걸 모를 리가 없잖아, 저 남자가. 클라우스는 분명 내가 그렇게 생각할 걸 전부 다 알고 있음에도 굳이 저 리르라는 여자를 내 앞에 내놓은 거라고.’
가만히 생각하던 율리아는 다시 한 번 리르를 살펴보았다.
아직까지도 저 마족 여인에 대한 적의는 다 거두어지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가 마음을 바꿔먹고 자신의 밑으로 들어오기를 바란다면.
그 증거로 자신을 몰래 경호하고 또 다른 그림자들을 해치웠으며 전사장이 어떤 경로로 어떻게 정보를 흘리는지도 전부 알려주기까지 했다면.
그리고 클라우스가 은근히 저 리르라는 그림자 소속 일원을 이용하려고한다면.
충분히 그 부분에 대해서 고민을 해볼 이유는 충분하다고 할 수 있었다.
“네가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잘 알고 있겠지, 리르.”
“그, 그렇습니다. 마왕 전하.”
“아니. 잘 알지 못 하는 게 분명해. 네가 어떤 공을 세우고, 어떤 사죄를 하던 결국 네가 나를 해하려고 했다는 것은 달라지지 않아. 자의였든 강제였든 너는 내게 있어서 영원히 죄인인 것이다. 그것도 당장 씹어 먹어도 모자를 정도로 역겨운 그런 죄인 말이다.”
아아. 율리아의 말에 리르는 그렇게 탄식을 흘렸다.
클라우스의 말대로 정말 열심히 해왔는데 마왕은 용서를 해줄 생각이 없는 듯 했다.
솔직히 정말로 마왕이 용서를 할 것이라고는 자신도 크게 기대하지 않았다.
다만, 다만 클라우스가 아주 조금이라도 나서서 자신을 변호해주지 않을까 했는데.
아무래도 그 역시 자신보다는 저 여인을 훨씬 더 중하게 여기는 것 같았다.
그러면 나는 이제 어떻게 되는 것일까.
클라우스는 마왕의 신하이니 그녀가 죽이라고 명령한다면 분명 그리 할 것이다.
그리고 감히 마왕을 위험에 빠트린 대가는 결코 잔잔한 죽음이 되지 않을 게 확실하다.
클라우스가 자신에게 보여주었던 그 참혹한 최후만큼, 아니 그 이상으로 끔찍한 죽음.
오직 그것만이 제 앞길에 펼쳐질 것이라고 리르는 생각했다.
“리르. 나는 너를 용서할 수 없다. 알고 있겠지?”
“네, 네… 마왕 전하….”
“하지만, 이해는 할 수 있다. 네가 왜 그렇게 행동해야만 했는지, 그 상황에서 네게 딱히 선택권은 없었다는 바로 그 부분을 이해할 수는 있다는 소리야.”
그렇게 말한 율리아가 손짓으로 리르를 가까이 불렀다.
마왕의 반응에 다급하게 무릎걸음으로 바로 앞까지 다가가는 리르.
그리고는 부디 살려달라는 듯 그 앞에 납작 엎드려서는 율리아의 다음 말을 기다린다.
“더 큰 공을 세우고, 더 많은 고생을 하고, 더 충직한 마음을 보여. 그러면, 용서하지는 않아도 넘어가줄 수는 있다. 리르.”
“마, 마왕 전하.”
“굳이 너를 이용한 이유가 있겠지. 나의 가장 믿음직스러운 남자가 너라는 마족을 통해 내게 배신자의 정체를 알려준 이유가 분명 있을 거야. 난 클라우스를 믿는다. 해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너 또한 한 번 정도는 믿어보려고 한다.”
리르는 율리아의 말에 안도의 한숨을 내뱉으며 더욱 깊숙이 머리를 조아렸다.
용서는 할 수 없으나 이해는 할 수 있다는, 그래서 한 번 정도는 지켜보자는 마왕의 말.
그게 지옥에서 천국으로 향하는 것과 다를 게 하나도 없었다.
“클라우스.”
“네, 율리아.”
“정말로 이 여자가 더는 내게 해를 끼치지 않는다고 확신하나요?”
“그렇습니다.”
“만에 하나 이 여자가 삼중 첩자로 활약하려고 하는 거라면 어쩌려는 거죠?”
“그에 대한 모든 책임은 내가 지도록 하죠. 원하신다면 목숨이라도….”
“목숨까지 걸 필요도 없어요. 어차피 내가 무너지면 당신도 끝이니까. 왕국까지 박차고 나온 상황에서 더는 고를 수 있는 선택지도 없잖아요?”
그러자 클라우스는 미소를 짓고서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율리아의 말대로 지금 상황에서 클라우스가 택할 수 있는 선택지는 율리아가 유일했다.
바보 천치가 아닌 이상 믿을 수 있다 확신도 못 하는 이를 기용하지는 않을 것이었다.
“리르.”
“네, 네!마왕 전하!”
“한동안은 메이드 플랑슈 밑의 메이드로서 외부에 드러나지 않도록 조용히 지내. 네가 배신을 했다는 것을 숙부가, 그 남자가 안다면 네 여동생에게 좋지 않은 상황이 벌어질 거다.”
“아….”
“여태까지의 네가 활약한 모든 것들은 내가 네 말을 듣고 또 기회를 주는 것으로 모두 사라졌다. 이제 그보다 더 노력하고 고생해서 네 충성심을 증명해야 할 거다. 처음이자 마지막 기회야. 조금이라도 의심스러운 부분이 생긴다면, 난 반드시 네년을 죽일 것이다. 손수 찢어 죽여주겠다는 말이야. 이해했나?”
싸늘한 마왕의 협박에 리르가 정신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일단 이 정도면 되었다는 듯, 율리아는 더 볼일이 없다며 이만 꺼지라 말했다.
리르는 그 말에 안도의 한숨을 내뱉고는 허리를 숙인 채 뒤로 물러나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갑자기 자신을 부르는 율리아의 부름에 움찔 몸을 떨고는 자리에 멈춰 선다.
“리르.”
“네! 마왕 전하. 호, 혹시 다른 분부가….”
“…일단은, 고생했어.”
“에, 예?”
“마왕 전하의 말씀을 듣지 못 한 거냐, 리르. 고생했다고 치하를 하시는데 바로 받지는 못 할망정 그렇게 멍청한 반응이나 보이고 있다니.”
클라우스의 나직한 어조에 리르가 아! 하고 탄식을 내뱉더니 급히 아무 것도 아니라며.
오히려 앞으로 더욱 더 노력하겠다고 외치면서 다시금 머리를 조아린다.
그 모습을 바라보면서 율리아는 정말로 가보라고 말했다.
“시, 실례하겠습니다.”
마침내 리르가 물러난 후 율리아는 한숨을 내뱉었다.
처음에는 그냥 죽여 버리고 싶다는 생각만 들었는데, 어느 순간 다른 생각이 들었다.
이왕 이렇게 된 거, 저 여자를 조금 더 알뜰하게 사용하는 게 더 좋지 않을까.
사적인 감정은 최대한죽이고 지금은 조금이라고 이득이 되는 부분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
“고마워요, 율리아. 한 번은 넘어가줘서.”
“…몰라요. 시끄러워.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나한테 그 어떤 언질도 없이 어떻게 나를 돼지 새끼들한테 던져주었던 년을 데리고 있을 수가 있어? 이건 경우가 지나치잖아.”
“미안해요. 하지만 내 곁에 그나마 쓸 만한 이가 당시에는 리르 하나가 전부여서요. 거기에 그림자들의 정보도 다 알고 있고, 거기에 마왕성의 배신자에 대해서도 대충 알고 있어서 말이에요. 죽여 없애기에는 조금 아까웠다고 해두죠.”
클라우스의 말에 율리아는 한숨으로 그 부분에 대해 수긍하고 말았다.
정말로 그녀가 그림자들을 막아내고 또 헤에타리의 배신을 알려준 것이라면.
죄가 크지만 그만큼 공도 크다고 할 수 있는 수준이었다.
“리르에 대한 부분은 나중에 또 차차 고민하도록 해요. 지금은 다른 부분이 문제이지 않습니까? 율리아.”
“…그러네요. 부디 카엘라가 잘 해주어야 할 텐데.”
“잘 해낼 겁니다. 원래 무리의 새로운 서열을 잡는 건 수인들 특기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