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4화 〉16장 - 너희가 원하는 대로
“….”
툭툭, 툭툭툭-.
짙은남색의 머리를 가진 중년 남성이 초조하게 뭔가를 기다리고 있다.
원래라면 소식이 전해져도 몇 개는 족히 전해졌을 시간이 지났다.
한데 어찌 된 것인지 자신한테 명줄이 꽉 잡혀있는 자들이 아카데미로 떠난 후 단 한 번의 소식조차 전하고 있지 않는 중이었다.
뭔가 잘못되었다는 생각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간다.
가장 먼저 떠오른 가능성은 역시나 자신을 배신하고 등을 돌린 것.
충성심으로 묶인 관계가 아니라 그저 약점을 쥔 자와 잡힌 자의 관계였을 뿐이다.
때문에 그들이 이를 악물고 배신을 할 가능성은 얼마든지 있다.
그러나 그걸 예상치 못 한 자신도 아니고, 때문에 그자들의 치명적인약점을 쥐고 있다.
배신을 한다고 해도 아마 나중에 가면 땅을 치고 후회할 놈들이 태반이 넘는다.
무엇보다 그들 사이에 충성심이 높은 이들을 몰래 숨겨두었으니 배신할 낌새가 보인다면 자신에게 미리 알린다거나 자신 선에서 하나 둘씩 처리하고 돌아올 것이었다.
‘그런데 아무도 돌아오지 않고, 소식 하나 전해지지 않는다. 그렇다는 건….’
배신자고 충성심 높은 자고 상관없이 모두 한꺼번에 붙잡혔다, 혹은 살해당했다.
남자는 그렇게 생각하면서 쯧, 하고 혀를 찼다.
비록정보 수집이나 잠입, 미행 등과 같은 은밀한 일들이 주목적이라고 하지만.
그래도 기본적인 실력들은 전부 가지고 있는 자들인데도 도망을 치는 놈 하나 없이 전부 당했다는 건 자신이 미처 예상하지 못 한 뭔가가 있다는 소리였다.
‘율리아, 그 년이 무슨 수를 쓴 건가?’
이전에 들어온 소식들에 의하면 클라우스, 그 남부의 악마와 묘하게 가까운 사이라고 했다.
경우에 따라서는 단순히 교수와 생도의 사이가 아니라 그 이상으로 발전할 수도 있다고 했고.
하지만 그 이후 소식이 끊어진 터라 이쪽에서는 간간히 전해지는 반 마왕파 귀족들의 이야기들을 합해서 정보를 모으는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애당초 귀족 자제들은 항산 자신의 이야기가 주된 것이 되니 율리아나 클라우스에 대해서 뭔가 필요한 정보를 적을 리가 없다.
결국 필요한 것은 자신이 심어둔 정보원들의 소식인데 그게 어느 순간 완전히 막혀버렸다.
‘빌어먹을, 빌어먹을.’
제 뜻대로 일이 풀리지 않자 남자는 손톱을 잘근잘근 물어뜯기 시작했다.
아주 어릴 적부터 나이 지긋한 지금에 이르기까지 버리려고 해도 버릴 수가 없었던, 일이 자신의 생각대로 풀리지 않으면 그 초조함에 보이고 마는 그만의 습관이었다.
전대 마왕, 자신의 형을 권력에서 완벽하게 배제하고서 동부의 귀족들을 하나씩 하나씩 자신에게로 끌어들여서 휘하에 두었다.
여전히 멍청한 몇몇 충성파들이 마왕성에 남아있다고 하지만 극소수라고 해도 무방했다.
스스로를 ‘왕’ 이라고 칭하지는않고 있으나 제 곁의 수하들도, 귀족들도, 그리고 자신조차도 본인을 마왕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중이었다.
이후 현 마왕 율리아를 계속해서 몰아붙여서 결국 대륙 아카데미로 수하 하나 없이 가게 만들었고 그녀가 그곳에서 멍청한 생각을 품는 사이 충성파를 계속 압박하여 그쪽이 먼저 자신을 치도록 만들려고 했었다.
모든 것이 자신에게 유리하지만 딱 하나, 그 하나가 아직 부족하기에 계속 율리아와 그 남은 세력들을 견제하면서 되도록 몸을 숙이고 있는 것이었다.
자신에게 불리한 그 부분은 ‘대의명분’ 이라 불리는 양날의 검.
제대로 날을 세워서 휘두른다면 그보다 날카로운 것은 없으나 만에 하나 잘못 휘두른다면 그대로 자신을 벨 수도 있는 것이었다.
현 상황에서 자신이 먼저 움직이면 감히 왕위를 찬탈하려는 자로 몰릴 수도 있다.
제 조카가 그것조차 생각하지 못 할 정도로 어리석은 여인은 결코 아니다.
그런 부분을 피하기 위해서 계속 자극은 하되 함부로 움직이지 않았던 것이었다.
‘여태까지는 좋았다. 아주 좋았는데, 문제될 것이 없었는데. 중립을 유지하고 있던 귀족들이 갑자기 흔들리면서 뭔가가 아주 묘하게 돌아가고 있어.’
뜨득, 뜨드득-.
손톱을 물어뜯으면서 남자는 계속 생각에 잠겼다.
중립파 귀족들이 분열되면서 그들을 흡수해야 한다는 성화에 결국 넘어가고 말았다.
그런 와중에 중립파 귀족의 영지를 제 휘하 귀족이 흡수한 일이 있었는데 그 부분에서 바로 기다렸다는 듯이 율리아와 충성파들이 딴지를 걸고 넘어졌다.
본디 귀족들의 영지는 모두가 마왕이 하사한 것인데 그 영지를 흡수하는 과정에서 어찌 보고 한 장 올리지않는 것이냐고, 형식적이라고는 하나 바로 그것으로 신하의 예를 보이는 것인데 어찌 그것마저 생략할 수 있냐고 말이다.
이미 반 마왕파는 율리아를 마왕으로 인정하지 않는다.
그들에게 있어서 마왕은 오직 하나, 바로 자신을 가리킬 뿐이다.
허나 명분에서 혹여나 약점을 잡히지 않기 위해서 서로가 조심했다.
어차피 이렇게 침묵하고만 있어도 시간은 자신들의 편이고, 마왕과 그녀에게 충성하는 무리들은 하루하루가 초조함으로 가득할 테니까 말이다.
그런데 얼마 전, 갑작스레 중립파의 실세 중 하나인 엘세 가문의 페르디난트가 뜬금없이 자신은 이제부터 마왕에게 충성을 다하겠다면서 포문을 열었다.
직후 중립파는 순식간에 분열되어서는 누구는 반 마왕파로, 또 누구는 충성파 쪽으로 합류하면서 일대 파란을 예고하였다.
덕분에 혼란스러워진 정국이었는데 거기에 영지전에 관련해서 율리아가 직접 마왕의 전언으로 상당히 불쾌하다고 말까지 하니 제 밑의 귀족들이 가지는 불만이 점점 더 커지는 건 당연한 결과였다.
이대로 싸운다면 충성파보다 몇 배는 강력한 자신들이 훨씬 더 유리한데.
어차피 이길 수밖에 없는 싸움인데 뭘 그리 겁을 먹고 자꾸만 뒤로 빠지냐고.
왜 우리들의 주군은 당당하게 앞으로 나서지를 않는 것이냐고.
그들의 불만이 하루가 갈수록 높아지고 또 높아졌다.
‘멍청한 것들! 높은 곳에 있는 자의 생각이 있는 법이건만.’
감히 마왕의 자리에 다다른 자신 앞에서 목소리를 높이는 것이 상당히 아니꼬웠다.
하지만 또 다르게 생각해보면, 그들의 말에 틀린 것이 없기도 했다.
어차피 자신들은 지금의 마왕을 몰아내고 새로운 왕을 세우려고 하는 세력이다.
무슨 수를 쓰든, 하다못해 왕이 자신들을 공격하여 어쩔 수 없이 방어 목적으로 나섰다고 해도 결국 왕을 바꾼다는 그 부분만큼은 어찌할 수 없는 것이다.
언제까지고 명분 때문에 이렇게 맥 빠지게 기다리고만 있을 수는 없다.
움직여야만 한다, 어차피 제 조카 측에서 먼저 도발을 감행했으니 외부적으로는 몰라도 내부적으로의 결속만큼은 확실하게 해둘 수 있다.
한 가지 마음에 걸리는 게 있다면 상황을 정확하게 모른다는 것.
아카데미에서 분명 무슨 일들이 벌어지고 있는데 보낸 놈들이 죄다 소식이 끊어져서는 단 하나의 정보조차 돌아오는 게 없다는 부분이었다.
“들어가겠습니다, 주군.”
이때 마족 하나가 조심스레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선다.
그는 예의 바르게 인사를 해 보이고는 자신이 찾아온 용건을 말했다.
“방금 전 새 소식이 도착했습니다.”
“역시나, 그림자들로부터 온 것은 아니겠지.”
“그렇습니다. 저희 밑에 있는 한 귀족 가문의 자제가. 아카데미에 생도로 있던 이가 보낸 편지인데 급히 주군께서 보셔야 할 내용이 있다면서 이리 보내왔습니다.”
남자가 손을 내밀자 편지를 조심스레 그 위에 올려둔다.
그것을 펼쳐 안에 쓰여 있는 내용들을 확인하던 남자는, 곧 ‘으응?’ 하고 탄식을 내뱉더니 이게 도대체 무슨 소리냐는 표정으로 다시금내용들을 샅샅이 읽기 시작했다.
“이게, 이게 도대체 무슨….”
“주군? 왜 그러십니까? 주군?”
“이, 이 편지 말이야. 언제 온 거지? 그리고 언제 날아와서 얼마나 걸려서 온 거냐?!”
“자세히는 알 수 없습니다만… 가장 빠른 편으로 보냈다고 해도 어쩔 수 없이 몇 번의 손을 거치는 지라 못 해도 나흘에서 닷새 정도는 흘렀을 것입니다. 그래도 제가 알기로는 가장 빠르게 도착해서 또 가장 빠르게 주군께 닿은 편지인데….”
“이, 이이잇!!”
콰지직!!-
사납게 편지를 구긴 남자는 이를 악물면서 인상을 구겼다.
그리고는 그걸 사납게 앞으로 내던지고서는 제 얼굴을 감싸 쥐면서 깊은 한숨을 내뱉는다.
그런 제 주인의 모습을 바라보던 마족은 조심스레 편지를 펼쳐서는 내용을 확인한다.
“…어, 어어?”
반응은, 그의 주인이라는 남자와 별 다를 것이 없었다.
편지를 살핀 마족은 두 눈을 껌뻑이다가 저도 모르게 제 주인을 바라본다.
지금 자신이 본 게 정말이냐고 묻듯이, 이게 진짜냐고 확인하듯이 말이다.
“이, 이게 말이 되는 것입니까? 아니, 왜 남부의 악마 놈이 율리아 아그네사를 따르는 겁니까. 자신을 찾아온 귀족 기사의 혀까지 뽑아버릴 정도면 정말 마음을 먹었다는 것인데. 대륙 전쟁에서 그리도 흉악한 모습을 보이던 클라우스라는 인간 놈이 어찌 하여….”
“이래서 동부를 난장판으로 만들고 더는 그림자를 빼낼 여력이 없게 만들었군.”
남자는 그렇게 중얼거리면서 한 방 먹었다는 듯 중얼거렸다.
중립파의 분열과 그로 인한 충성파와 반 마왕파의 극심한 대립.
때문에 자신은 당연히 제 휘하의 그림자들을 소집하여 동부 전역에 뿌려야만 했다.
그로 인해 아카데미에 더 보낼 수 있는 인원이 더는 없는 상황이었던 것이다.
그렇지 않아도 율리아 쪽에만 세 팀을 넘게 붙여서 너무 과하게 인원을 붙인 게 아닐까 생각도 했었을 정도로 그림자는 남아도는 전력이 아니었다.
정보 수집도 하고 은밀하게 잠입도 하고 미행도 하면서 일정 수준 이상의 실력을 갖춘 이들, 거기에 딱히 이름도 알려지지 않은 자들을 모으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이었던가.
하나 하나가 없어서 아쉬운 판국에 그들 모두를 정리하고 정보의 공백이 생긴 틈을 타서 일을 벌인 것이었다.
‘이 편지가 가문의 품을 떠나 내게로까지 오는 동안 이미 율리아는 그 인간을 데리고서 국경을 넘었을 것이다. 이걸 쓴 시기가 아카데미의 방학 바로 전이었다는 것을 생각하면 그러고도 남아. 이걸 위해서 내 눈과 귀를 전부 잘라두었구나. 도대체 어떻게 알아차렸는지 모르겠지만 분명 뭔가 수를 써두었어!’
의자의 팔걸이를 내려치면서 남자는 이를 악물었다.
잔잔하게 흘러가던 동부의 정세가 갑자기 급히 돌아갈 때부터 뭔가 이상하다 싶었다.
격변은 자신에게도 유리할 수 있지만, 반대로 율리아에게도 유리할 수 있다.
잔잔한 정세가 차라리 나았는데, 그렇게 해서 조금씩 제 사랑스러운 조카를 완전히 가라앉게 만들어서 그대로 빠져죽던가 아니면 이 손을 붙잡고 살던가 강요할 수 있었는데.
이리 비바람이 불고 풍랑이 들이닥치면 뭐가 뭔지 하나도 알 수가 없다.
‘무엇보다 가장 큰 문제는… 도대체 왜 남부의 악마가 동부로 오느냐는 것이다.’
자신도 대륙 전쟁에 참전해서 클라우스에 대해서 잘 알고 있다.
그 어떤 회유나 협박에도 굴하지 않았고 왕국과 귀족들의 쌀쌀맞은 태도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남부를 사수하던 인물이 바로 그 빌어먹을 인간이다.
충성심 하나만큼은 정말 대단하다고, 덤으로 능력도 역겨울 정도로 대단하다고 여겼는데.
갑자기 그 남자가 왕국을 버리고 율리아를 따르겠다는 것은 서부가 아니라 동부마저 크게 요동칠 수 있음이었다.
‘불길하다. 아니… 이건 불길한 정도가 아니야.’
섬뜩하다, 등골이 싸늘해지고 식은땀이흐를 정도로 섬뜩하다.
율리아의 숙부 ‘아우펜 아그리시오’ 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리고, 그에게 이제야 겨우 그 소식이 전해졌을 때에는.
“어떤가요, 클라우스. 동부의 모습은 당신이 생각하던 것과 다른가요?”
“그럴 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는데 아니네요. 왕국과 똑같아요.”
이미 율리아와 클라우스가 방학을 맞이해 국경을 넘어 동부에 들어선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