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2화 〉16장 - 너희가 원하는 대로
온 대륙을 끔찍한 참상으로 밀어 넣었던 7년간의 대전쟁.
거의 모든 이들이 대륙 전쟁이라 부르는 그 싸움은 모두에게 악몽과도 같았다.
다만 몇몇은 죽을 때까지, 그리고 그 자식들까지도 악몽에서 깨어나지 못 하는 반면.
또 다른 몇몇은 그냥 잠깐 꾸었다가 다시금 단잠에 빠질 수 있는 그런 짧은 꿈에 불과한 것이기도 했다.
그리고이곳 대륙 아카데미의 거의 모든 생도들은.
인간 측의 평민 생도나 아주 극소수의 이들을 빼고는 전자가 아닌 후자.
대륙 전쟁이라는 악몽을 아주 잠깐 겪었다가 곧 벗어난 이들이라고 할 수 있었다.
모두가 제 가문의 귀하디귀한 자식, 그리고 사회적으로 대우를 받는 귀족들.
당연히 대륙 전쟁의 시기에 딱히 힘들다고 할 수 있는 일을 겪지 않았다.
배를 곯지도 않았고 바로 눈앞까지 밀려든 적을 피해 도망친 경우도 없다.
전장에서 나는 시체 썩는 냄새와 비릿한 피 냄새 한 번 맡아본 적 역시 없다.
그저 어릴 적 그런 큰 싸움이 있었고 그 불길을 잠시 피해 우리들은 여기로 잠깐 있는 거란다, 식의 이야기를 들었던 것이 전부.
그리고, 당연하게도 제 앞에서 살아있는 존재의 피가 힘차게 울컥대는 장면 역시.
이곳의 생도들에게는 처음 겪는 일이라고 말할 수 있었다.
“우우웁! 우우우우!!”
투툭! 투두둑!!-
조금 전까지 열심히 나불거리던 기사는 제 입을 부여잡은 채 바닥에 쓰러졌다.
손으로 틀어막은 그의 입에서는 뭔가가 줄줄 흘러나와 땅을 적시고 있는 중.
점성이 있고 색깔이 아주 붉으며 묘하게 비릿한 냄새가 나는 그것.
생도들은 곧 저 인간 기사가 많은 양의 피를 흘리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조금 전까지 멀쩡하기 그지없던 이가 갑자기 각혈을 할 리는 없다.
마나 회로가 손상되어서 신체에 극심한 피해를 준다면 또 모를까 저 남자가 조금 전까지 마법을 쓰려고 마력을 가속시키지도 않았다.
신체에 뭔가 강력한 충격이 전해져서 내장이 진탕이 된 것도 아니다.
그렇다면 저 인간이 개처럼 엎드려서 바들바들 떨며 피를 쏟아내는 이유는 아마도.
방금 전 그의 입을 벌리고 뭔가를 붙잡았던 클라우스이지 않을까 싶다.
“거 사람은 혓바닥 때문에 죽는다고 하던데 생도들에게 좋은 예를 보여주어서 참으로 고마워, 기사 나리. 그래도 기사로서 교훈을 남겨주었으니 크게 걱정하지는 마.”
제 손에 들려있던, 피에 젖은 뭔가를 아무렇게나 내던지는 클라우스.
피와 타액이 잔뜩 묻어있는 그것이 원래 입 안에 있어야 할 신체의 일부.
즉 저 기사의 혀라는 것을 깨달은 생도들은 대경실색을 하고 말았다.
“크, 클라우스 교수! 이, 이게 도대체 무슨 짓인겐가! 아무리, 아무리 이 자가 오만방자했다지만 그래도 귀족 가문의 기사인데 혀를 뽑아내다니 그건 그 자들을 너무 과하게 자극하는….”
“강의의 연장이라고 생각해주시면 될 것 같습니다, 총장님.”
“무, 무슨 말인가? 강의의 연장이라니?”
루스칼 총장의 반문에 클라우스는 미소를 지으면서 피로 흥건한 손을 옆으로 내밀었다.
그러자 미리 대기하고 있던 카엘라가 또 어디서 용케 물을 구해서는 클라우스의 손을 깨끗하게 씻겨낸 후 가지고 다니던 손수건으로 열심히 닦아낸다.
“생도 여러분. 이번 학기를 마치기에 앞서 여러분들을 가르치는 입장인 교수로서 한 가지 더 알려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인간이든, 요정이든, 수인이든, 그리고 마족이든 상관없습니다. 혀를 놀릴 때에는 그 혀가 붙잡혀서 뽑혀나갈 수도 있음을 각오해야 하는 겁니다. 그리고 무례를 범하면 그에 상응하는 대가를 치르게 되는 법입니다. 평민이든, 귀족이든 상관없어요. 상대방이 나보다 괴물이라면 조용히 눈치만 좀 보다가 알아서 눈 깔면 된답니다.”
“우으으! 끄우으으으!!”
“아! 그리고 또 온갖 이상한 소문이 돌 것 같아서 확실하게 해두겠습니다. 내가 이렇게까지 행동하는 건 그 누구도 아닌 바로 왕국의 귀족들 덕분입니다. 있는 충성심 없는 충성심 다 바닥나게 해주어서 참으로 고맙다고 전하고 싶군요. 덕분에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훌훌 다 털어두고 떠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우으으! 우우우!!”
“왕국의 귀족들보다 차라리 동부의… 아, 거참 이 개새끼놈. 더럽게도 징징대네.”
조금 날이 서있기는 해도 최소한의 선만큼은 지키던 클라우스다.
귀족 생도들이 대놓고 적의를 보일 때도 그는 그들에게 존대를 유지했고 적개심이 폴폴 흘러나오는 말들을 한 적도 없다.
전쟁 영웅이라 해서 우락부락하거나 앞뒤 잴 것 없이 돌진하는 그런 무장 스타일이 아니구나, 라는 생각을 생도들의 눈과 머리에 아주 확실하게 박아두었다.
클라우스는 대륙 아카데미에서 철저하게 자신을 낮추면서 생도들에게 정적인 부분만 보였다.
하지만 지금 그는 여태까지 너희가 알고 있던 ‘클라우스’ 라는 남자의 모습은 전부 거짓이었다는 듯, 귀족들이 기어코 나를 괴물로 만들어 이렇게까지 변하게 했다는 듯.
그렇게 살의와 적개심이 활활 불타오르는 모습으로 기사의 머리를 지그시 밟고서 그 앞에 쪼그려 앉고 있는 모습에 생도들은 화들짝 놀라고 말았다.
한편 클라우스는 기사의 뒤통수를 연신 꾹꾹 밟아주다가 그의 머리채를 붙잡았다.
여전히 입을 가린 채 괴상한 소리를 내면서 피를 줄줄 흘리고 있는 기사.
그 꼴사나운 모습을 미소를 지으면서 바라보던 클라우스는 한기가 느껴지는 목소리로 말했다.
“이런 말이 있어. 개새끼가 사람이랑 같이 지내다 보면 자신도 사람인줄 알고 까분다고. 그렇게 까불다가 제대로 걸려서 맞아 뒈지는 거라고.”
“우우읍… 우으으….”
“귀족 회의에서 날 잡아 오라고 시켰으면 그것만 하면 되는 거고, 내가 안 가겠다 하면 알겠습니다, 하고 돌아가면 될 것이지 왜 말이나 전하는 개새끼 주제에 생각을 하려 하고 대들려고 하며 네가 뭐라도 되는 것처럼 까부는 거냐. 그잘나신 귀족들 옆에서 기사라고 어깨에 힘 좀 주고 으스대니 네가 대귀족 가문의 수장이라도 된 것 같았나?”
“우으, 우으으!”
“내 앞에서 큰소리를 치고 싶으면 최소한 키엔마이어 후작 정도는 데리고 와야지. 아, 그 녀석은 절대 그럴 남자가 아니니까… 그래, 요제프 대공. 그 너구리같은 늙은이가 직접 와야 나와 수준이 그나마 맞는다고 할 수 있겠어. 너 같은 개새끼가 아니라.”
툭툭-.
손으로 기사의 머리통을 가볍게 몇 번 쳐준 클라우스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고는 바닥에 나뒹구는 자신의 훈장, 그리고 기사의 혀를 가리키면서 말을 잇는다.
“챙겨서 가라. 그리고 가서 확실하게 전해. 이게 너희가 원하던 바로 그 상황이라고. 네놈들이 그렇게나 바라던 대로 되었으니 서로 손 잡고 춤이나 추라고. 그리고… 언젠가 직접 거기까지 쳐들어가줄 테니 기다릴 놈은 기다려도 좋다고 말이야.”
원래는 혓바닥을 통째로 뽑아낼 생각이었다.
하지만 그리 하면 정말 사람이 죽을 수도 있으니 적당한 선에서 마법으로 대충 칼질을 해주고는 바로 혀를 뽑아내듯 잘라낸 클라우스였다.
“우으으…. 우으으….”
“질질 짜지 마라. 혀 좀 잘렸다고 안 죽어. 멀쩡히 잘만 산다.”
어떻게 아느냐고? 제 스스로 혀를 깨물어서 자결이라도 해보겠다는 짓을 클라우스 본인이 못 해도 다섯 번 이상은 했었던 경험이 있으니까.
한 번은 피만 좀 많이 났고 나머지 경우에서는 혀가 통째로 잘려서 피가 철철 흐르기는 했으나 과다출혈로 죽지도 않았고 쇼크사 한다거나 기도가 막혀서 죽지도 않았다.
그냥 더럽게 아프고, 그 이후로 말을 하는 게 힘들다는 것이 전부라고 할까.
“아. 말은 잘 못 하겠구나. 걱정 마라. 손목은 멀쩡하니까 써서 전달하면 되겠네.”
그리 말을 마친 클라우스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러자 여태껏 상황을 지켜보고 있던 율리아가 슬그머니 옆으로 다가온다.
“괜한 자비에요. 저였다면 혀가 아니라 목을 뽑았을 거예요.”
“개새끼가 무슨 잘못이 있겠습니까. 그냥 개를 개같이 키운 주인이 잘못이죠. 나중에 만나서 뽑아주면 될 것 같지 않습니까? 그보다 이제 다 알려졌는데 하대해도 될 것 같은데요.”
“아직 대륙 아카데미에요. 기말시험도 끝났고 얼마 가지 않아 방학이라고 하지만어찌 되었든 이 안에서는 저는 생도고 클라우스, 당신은 교수이니까 이러는 게 맞아요.”
율리아의 대답에 클라우스는 마음대로 하라는 듯 미소를 지었다.
주변의 생도들이, 그리고 기사 휘하의 병사들이 자신을 어떤 눈길로 쳐다보든.
이제는 다 상관없는 일이라고 생각하는 게 그대로 느껴지고 있었다.
그러는 사이 전투 마법 강의를 맡던 생도들 앞으로 다가가는 클라우스.
당연하게도 몇몇 생도들, 특히 인간 귀족 생도들의 안색이 눈에 띄게 좋지 않다.
잔뜩 긴장해서는 얼굴에 핏기마저 싹 사라진 것이 보기 꽤나 안쓰러울 정도였다.
“갑작스럽게 웬 개새끼가 한 마리 들어와서 좋던 분위기 다 깨버렸네요. 아무쪼록 이번 한 학기 동안 고생 많았습니다, 여러분. 부디 여러분들의 마법 실력이 이전과 비교했을 때 성장하는 부분이 있었기를 바라겠습니다. 성장했다면, 그건 여러분들의 노력이 빛을 발한 것이고 만약 성장하지 못 했다면 내 탓으로 돌리세요. 그게 차라리 나을 겁니다.”
원래라면 그냥 웃자고 한 농담으로 들릴 말들이었다.
헌데 그 말을 인간의 혀를 뽑아내고서 하고 있으니 ‘내 탓으로 돌릴 자신이 있으면 어디 한 번 해봐라.’ 따위의 말로 들릴 정도였다.
“그러면 먼저 가보겠습니다. 다들 나중에 또 보기를 바라죠.”
몸을 돌린 클라우스는 미련 없이 발걸음을 옮겼다.
완전히 넋이 나간 루스칼 총장, 수군거리는 생도들, 그리고 여전히 입을 막은 채 어쩔 줄 몰라 하는 기사를 두고서 제 방으로 이동했다.
“…이제 진짜 시작이군요.”
조용히 클라우스의 뒤를 따르던 율리아가 슬그머니 입을 연다.
어쭙잖은 핑계를 이유 삼아 클라우스를 체포하여 그를 꺾고, 더 나아가 대륙 전쟁 참전자들의 기를 꺾어두려고 했던 귀족들은 제대로 뒤통수를 맞은 격이 되었다.
당장 클라우스가 정말 배신을 했다면서 좋아할 수도 있겠지만 여전히 그에게 호의적인 자들, 그리고 대륙 전쟁의 참전자들이 가만히 있을 리가 없다.
오히려 너희 귀족들 때문에 그 클라우스마저 결국 견디지 못 하고 서부를 떠났다고.
너희들이 왕국과 서부를 망가트리고 있는 주범이라고 외칠 수도 있는 일이었다.
“내부의 일을 살피기 위해서는 외부가 조용해야죠. 귀족 떨거지들이 국경 인근을 자꾸찌른다면 상당히 피곤할 거예요. 양면 전선은 절대 피해야 할 일입니다.”
“동의해요. 저도 혹 숙부와 대치하는 사이 서부가 움직이면 어쩌나 걱정했었으니까요.”
율리아의 말에 미소를 지으면서 클라우스는 자신의 방으로 들어갔다.
“오셨습니까, 클라우스님.”
안에 있던 플랑슈가 인사를 하자마자 그녀에게 제 겉옷을 내민다.
그리고는 두 눈을 깜빡이며 어찌 하느냐는 무언의 질문에 답했다.
“버려. 세탁하지 말고 내다 버려라, 플랑슈.”
“…알겠습니다, 클라우스님.”
그의 겉옷에 묻은 피와 타액을 알아차린 것일까.
멀쩡한 옷을 버리라는 클라우스의 명령에 망설임 없이 바로 대답하는 플랑슈였다.
제 자리에 앉은 클라우스는 두 눈을 감고, 가벼운 한숨을 흘렸다.
이제야 비로소 그 쓰레기 더미에서 탈출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제, 약속된 기회와 성공의 땅인 동부로 향할 수 있게 되었다.
‘가자, 엘도라도가 바로 눈앞이다. 가즈아!!’
고귀한 전쟁 영웅은 사라지고, 비로소 욕망 가득한 남자의 본심이 제자리를 찾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