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8화 〉16장 - 너희가 원하는 대로
“….”
마왕성의 시종장을 맡고 있는 칼라굴은, 어두컴컴한 방 안에서 오직 촛불에 의지해 뭔가를 열심히 확인하는 중이었다.
마침내 모든 내용을 다 파악한 그는 지체 없이 그 종이를 촛불에 던져서는 흔적도 없이 전부 다 태워버렸다.
“뭐라고 적혀있었나요.”
칼라굴의 맞은편에 앉아서 상당히 초조한 반응을 보이는 여인은, 재무관 메이로어.
일전에 헤에타리에게 신변의 위협을 느꼈던 그녀는 이후로 업무상의 이유를 들어 전사장과의 만남을 최대한 피하면서 몰래 시종장과만 만나고 있는 중이었다.
칼라굴은 그런 메이로어를 잠시 바라보다가 한숨을 내뱉고는 방금 태웠던 서신을 보낸 이.
이곳 마왕성의 주인이자 동부 마족들의 군주인 여인의 말을 전했다.
“전사장 헤에타리 쪽을계속 주시하되 절대 드러내지 말라고 하시는군요.”
“…혹시 저희들의말을 믿지 못 하시어 그런 식으로 시간을 끄시는 건….”
“그건 아닐 겁니다. 제가 아는 마왕 전하는, 그런 생각을 가지셨다면 쓸데없는 의심을 하지 말고 흔들리지 말라, 이런 식으로 분명하게 뜻을 전달하셨을 겁니다.”
“허면 마왕 전하께서는 전사장을 확실하게 의심하고 있다는 건가요?”
“그렇습니다, 메이로어 재무관님. 지금 마왕 전하께서는 전사장을 의심하고 계십니다.”
확실을 가지고서 그렇게 말하는 칼라굴이었다.
덕분에 메이로어는 안도의 한숨을 내뱉을 수 있었다.
아무리 자신들이 강력하게 주장을 해도 율리아의 입장에서 보자면 그저 말 뿐인 이유만으로 자신의 남은 사람들 중에서 가장 믿을 수 있는 이중 하나를 쳐내야 하는 것에 불과했다.
그렇지 않아도 마왕의 곁에 남은 이가 거의 없는 상황에서 전사장이라는 마족은 무력 부분에 있어서는 마왕의 거의 유일한 카드라고 할 수 있기까지 했다.
해서 메이로어는 아직 많이 부족해 보이는 마왕이 결단을 내리지 못 하고 우물쭈물할 것이라고 예상을 했었다.
그런데 칼라굴의 반응을 보아하니 아무래도 그게 아닌 모양이었다.
마왕가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는 시종장과 재무관, 그 둘이 공통된 의견을 내놓는다면 필시 그에 합당한 이유가 있을 것이라고 율리아가 서신에 적어 보냈단다.
더해서 자신이 돌아가기 전까지 더 정확한 증거를 모아서는 비밀리에 전사장을 한 번에 쳐낼 계획까지 세우라는 것이 바로 자신들의 주군, 마왕의 대답이었다.
“일단 우리들이 모은 증거는, 그의 아내가 비정기적으로 모반을 계획하는 귀족들의 부인들과 만남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 전부였죠. 재무관님.”
“그마저도 의심을 하지 않았다면 미처 신경 쓰지 못 했을 부분이었죠. 하지만 시종장님, 그것 가지고는 너무 부실해요. 뭔가가 더 필요한데….”
“너무 초조하게 생각할 필요 없습니다. 전하께서 돌아오시기 전에 무엇이라도 하나 더 건진다면 그것으로도 충분하게 여기실 것입니다.”
“희망적으로 본다면 그렇게 생각할 수 있겠죠. 하지만 저는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밖에 없어요. 만약 이렇다 할 증거를 더는 찾지 못 하다면 마왕 전하께서도 조금은 망설이실 수 있어요. 마음이란 것은 참을 쉽게도 기울고 또 흔들리는 법이니까요.”
메이로어의 말은 자칫 마왕에 대한 우려를 품은, 상당히 불충한 말로 들릴 수도 있다.
시종장 칼라굴은 그 부분을 눈치 채고 주의를 주려고 했으나 재무관의 말에 틀린 부분이 하나도 없었기에 결국 침묵을 지키고 말았다.
정말 율리아가 돌아오기 전까지 결정적인 증거를 단 하나도 찾지 못 한다면.
설사 그녀가 돌아온다고 해도 딱히 더 뭔가를 얻을 수 있는 것도 아니라면.
결국에는 다시금 전사장을 한 번 더 믿어보는 선에서 의심을 거둘 수밖에 없을 것이다.
더해서, 만약 그가 배신자가 아니라면 역으로 자신과 메이로어의 위치가 모호해지기도 한다.
이래저래 칼라굴과 메이로어로서는 상당히 머리가 아픈 상태라고 할 수 있었다.
‘그나마 마왕 전하께서 단호한 어조로 은밀하게 계속 조사를 하라고 하셨으니 조금은 안심이 된다만 어찌 될 지는 아무도 모르니까 최선을 다해야만 한다.’
이미 자신과 그 곁의 신하들은 마왕에게, 율리아에게 너무나 많은 실망을 안겨주었다.
더는 물러설 것도 없고, 실수를 해도 넘어갈 수 있는 여유도 없다.
한 발자국 떼는 것이곧 낭떠러지로 떨어지는 것과 같아질 수도 있는 상황이다.
한 발, 한 발 신중히, 그리고 정확하게, 그러면서도 분명하게 내딛어야만 한다.
“그런데, 저… 시종장님.”
“네, 재무관님. 말씀하세요.”
“요즘 들어서 이상한 소문이 돌아서요. 아직 공식적으로 확인된 것도 없고 그냥 그저 그런 말장난에 불과할 확률이 아주 높은데… 마왕 전하께서 그 ‘남부의 악마’ 와 상당히 가까우신 것 같다고 하던데.”
메이로어의 질문에 칼라굴은 아아, 그 부분 말입니까. 라고 중얼거렸다.
확실히 그 소문은 자신도 얼핏 듣기는 했다.
대륙 아카데미에서 마족 생도들이 무도회를 열었는데, 거기에서 마왕의 손을 잡고서 파트너로서 춤을 춘 이가 같은 마족도 아니고 그렇다고 해서 다른 생도들도 아닌.
아카데미에서 교수직을 맡고 있다는 남부의 악마, 클라우스였다는 것이었다.
처음에는 그게 도대체 무슨 말도 안 되는 헛소리인가 싶었다.
클라우스라는 남자가 누구인가, 그 길고 길었던 대륙 전쟁에서 한 번을 패하지 않은 남자.
정예 마족 병사들을 상대로 매번 말도 안 되는 승리를 거둔 인간이다.
7년이 넘는 시간을 마족과 싸웠고 그 마족들에게 부하들을 잃은 사령관이다.
그런데 그 마족에게 적의를 품어도 모자랄 이가 갑자기 마왕과 묘한 분위기를 낸다?
아무리 시간이 지났다고 해도 그 긴 세월 혈전을 벌인 기억은 쉬이 사라질 게 아니었다.
해서 칼라굴은 처음에는 말도 안 되는 헛소문, 그냥 율리아와 클라우스가 서로 입을 맞추고서 대륙 아카데미에서의 화합이라는 부분을 강조하기 위해서 벌인 연극이라고 생각했다.
마족의 왕과 인간 측의 전쟁 영웅이 손을 잡고 춤을추면서 평화로운 분위기를 낸다.
그보다 서부와 동부의 화해 및 화합을 의미하는 것은 없을 거라고 여겼으니까.
‘그런데 그게 아니었단 말인가? 정말로 마왕 전하께서 그 인간을 밑에 두셨다고?’
이게 정말이라면 말도안 되는 일을 그녀가, 자신의 군주가 해낸 것이다.
7년의 전쟁 동안 과연 마족들이 그를 회유하려 들지 않았을까?
당연히 했다, 그가 제 능력을 처음 보인 전장에서부터 귀족들에 의해 일시적으로 모든 군권을 잃고 쫓겨났을 때조차 몰래 사람을 보내서 배신을 당했는데 무슨 충성이냐며 이제라도 자신들과 함께 하자고 온갖 설득과 회유를 했었다.
그럴 때마다 클라우스는 단호하게 거절했다.
자신을 매번 이용만 해먹고 내쫓다가 위급해지면 다시 부르는 귀족들이 득실거리는 왕국을 지키겠다면서 기어코 그곳에 남았던 남자에 대한 이야기는 아직도 마족 생환병들 사이에서 거의 전설처럼 치부되고 있는 이야기다.
헌데 그 남자를 도대체 무슨 수를 써서 설득했는지는 몰라도, 결국 밑에 두었다?
이것 하나만으로도 ‘현 마왕은 아무런 능력이 없다.’ 라는 주장이 완전히 뒤집히는 것이었다.
상대는 베테랑 중의 베테랑이라는 마족 실력자들조차 인정한 인간이다.
그가 아무런 이유도 없이 설마 율리아를 따르겠다고 할 리는 없다.
‘혹 마왕 전하께서 여인의 몸이라는 걸 은근히 주장하는 자가 있다면….’
그럴 가능성이 얼마든지 있다, 하지만 그리 말하면 그동안 대륙 전쟁에서의패배에 클라우스라는 인간 남자가 결정적인 공헌을 했다는 여태까지의 발표에 상당한 문제가 생긴다.
고작 여색에 넘어가서 헤벌쭉하는 이에게 7년 동안 깨졌다는 소리가 되지 않는가!
7년 동안 남부 방어선을 돌파한 건 딱 한 번, 그것도 클라우스가 없을때였다.
그 외의 모든 시기, 모든 장소에서 패배한 마족은 클라우스를 높게 띄워야만 했다.
그래야 자신들의 패배도 어느 정도 받아들여지고 또 동정을 살 것이니까 말이다.
해서 그런 주장을 펴면 자칫 내부에서의 적을 만들 수도 있다.
당장 마왕에게 반기를 드는 귀족들 중에서조차 남부의 악마는 대단한 인간이었다, 하고 대놓고 말하는 이가 있을 정도이니 말 다 한 셈.
“솔직히 요즘 마왕 전하의 행보가 너무 예상외에요. 그 극심하던 자금난을 어떻게 한 번에 해결하신 것 하며 남부의 악마를 휘하에 끌어들이셨다는 소문까지. 이전에는 전혀 볼 수 없었던 거잖아요, 시종장님.”
“…재무관님은 모르시겠지만 마왕 전하께서는 선대마왕들처럼 아주 영특하신 분이었습니다. 다만 너무 강력한 상대가 벼르고 있는지라 그걸 애써 숨기셨던 것뿐이지요.”
“이제는 아니라는 건가요?”
“아마도… 그런 게 아닐까 생각합니다.”
당장 이전과 비교하면 오고 가는 서신의 횟수도 크게 늘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혹 간악한 무리들에게 서신을 빼앗길까 최대한 조심하고 또 조심해서 전달했고 그래서 시간과 노력이 몇 배로 더 들었는데.
갑자기 정체불명의 세력들이 율리아의 서신을 가져왔다고 하면서 찾아오고,또 앞으로는 자신들을 통해 서신을 전달하면 될 것이라고 말하기까지 했다.
정확한 건 알 수 없으나 음지에서 활동하는 이들의 기운이 풍겨졌다.
설마 마왕 전하께서 그런 음험한 자들과도 손을 잡은 건가, 하고 안타까웠지만.
곧 칼라굴은 현 상황이 가히 최악이라도 해도 무방하다는 것을 깨닫고는 그런 생각을 접었다.
지금은 음지의 존재들이든, 혹은 남부의 악마든 손을 잡을 수 있으면 다 잡아야만 했다.
“어렵네요. 저는 마왕 전하를 뵙게 된 것이 얼마 되지 않아서.”
“뛰어나신 분입니다. 어쩌면 그 남부의 악마도 그 부분을 바로 알아차리고서는 스스로를 굽혀새로운 주인으로 모시고자 한 것일 수도 있지요.”
“정말 그랬으면 좋겠어요. 전사장까지 배신했다면 더는 남은 무장이 없거든요.”
“아마 지금도 마왕 전하께서는 앞으로의 행보에 대해 고민하시느라 바쁘실 겁니다.”
칼라굴은 그렇게 말하면서 창 밖 너머 저물어가는 저녁노을을 바라보았다.
아마 자신의 마왕도 이렇게 노을을 바라보면서 앞일을 생각하지 않을까 했다.
* * * * * * * * * *
한편, 율리아는 제 시종장의 예상대로 다음 일들에 대해서 고심 중이긴 했다.
다만 칼라굴이 상상하던 것처럼, 의자에 앉아 노을을 바라보는 건 아니었다.
참방, 참방-.
따뜻한 물이 가득 담긴 욕조에 몸을 담그고 있는 율리아.
그녀 혼자만 있는 게 아니었다. 그 뒤에는 클라우스가 율리아를 껴안은 채 그녀의 목과 볼에 사랑스럽다는 듯 키스를 해주고 있는 중이었다.
“그러면 동부로 향하자마자 바로 회전을 벌일 생각인가요?”
“아마 그럴 겁니다. 이 상태라면 저쪽에서 분명 먼저 반기를 들 거예요. 여태까지는 최대한 명분에서 지고 넘어가지 않기 위해서. 그리고 어차피 급한 건 마왕 쪽이지 자신들이 아니라고 생각했기에 여유롭게 행동했다지만 이제는 아닌 거죠. 갑자기 마왕가가 자금난을 이겨낸 것처럼 활발하게 돌아가기 시작했고 더해서 중립파였던 귀족들도 속속 합류하고 마왕이 영지전에서의 결과에 대해 딴지를 걸고, 거기에 내가 당신에게 귀의했다는 소문까지 돈다면….”
“아무리 숙부라고 해도 더는 기다릴 수가 없겠군요.”
“상황이 율리아, 당신에게 더 유리하게 흘러가기 전에 그 흐름을 끊고 승부를 보려고 할 겁니다. 이건 내가 확실하게 장담하죠.”
“…내가 혹 해야 할 것이, 도와야 할 거라도 있을까요?”
“당연히 있죠.”
클라우스의 대답에 율리아가 그게 뭐냐는 시선으로 그를 쳐다본다.
그러자 마왕을 껴안은 클라우스는 슬그머니 손을 뻗어서는 그녀의 가슴을 부드럽게 주물러주면서 귓가에 나긋한 어조로 속삭인다.
“이전의 당신보다 월등하게, 아니 이전의 당신과는 비교도 안 되게 강해지는 것이죠. 나중에 당신이 직접 보여줘야 해요. 내가 왜 당신을 따르게 되었는지. 그걸 보여주지 않으면 나도, 당신도 상당히 피곤한 일에 휩싸일 거랍니다.”
그러자 율리아는 입꼬리를 올리면서 미소를 지었다.
당연한 소리를 한다는 듯, 당신이 그렇게 말하지 않아도 지금보다 훨씬 더 강해질 거라는 듯.
율리아는 두고 보라는 것처럼 와락, 하고 달려들어서는 남자의 입술을 빼앗았다.